하서회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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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西回鶻

"감주 회골이 때때로 중국과 교통을 하며 대대로 중국을 장인의 나라로 여기니 조정에서 매번 조서를 내려 줄 때 역시 늘 사위의 나라라고 불렀다."

-『구오대사 회골전』

1 개요

키르기스에 의해 위구르 제국이 멸망한 뒤 흩어진 위구르족의 한 갈래가 하서 회랑 일대에 웅거하여 나라를 건국했다.

2 역사

감주회골(甘州回鶻)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840년, 키르기스의 침입으로 위구르 제국이 붕괴되자 위구르족은 서진 또는 남진했다. 847년, 그 중 한 갈래가 감주(甘州)에 정착해 하서회골의 근간을 뿌리내렸다. 처음에 하서회골은 토번에 예속되어 있다가 귀의군절도사 장의조(張義朝)가 토번세력을 몰아내자 하서회골은 당나라에 복속되었다. 그런데, 당나라가 농민반란으로 변경을 관리할 여력이 떨어진 틈을 타 하서회골은 당나라와 관계를 단절하였다. 하서회골은 지금의 간쑤성 일대를 장악하고 동서교역로를 확보했다. 905년, 둔황을 중심으로 한 '서한의 금산 제국(西漢之金山帝國)'이 건국되었다. 이 국가가 타 위구르족을 복속시키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자 911년, 하서회골은 군사를 이끌고 둔황을 공격해 항서를 받아냈다. 이로써 하서회골은 서역의 독립국가로 발전해 나아갔다. 당이 멸망하고 오대십국 시대가 들어선 후에도 하서회골은 중국왕조와 상호협력 관계를 유지했고[1], 중앙아시아 나아가 서아시아까지 무역을 주도했다.

10세기 요나라가 서쪽으로 친정하면서 하서회골은 요나라에 복속되었다. 이후 11세기 하서회골은 탕구트족과 여러차례 교전하다가 끝내 하서회골은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
  1. 주로 무역을 통하여 관계를 유지했다. 특이하게 하서회골은 중국에 조공을 보낼때마다 옥이 빠지지 않았는데, 후주 세종은 회골이 옥을 보낼때마다 조공을 받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