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구르 제국

몽골의 역사
고대중세근현대
고대 몽골의 역사
몽골 고원
동호
흉노
정령

고차

철륵
선비
유연
돌궐
위구르 제국
거란실위
시베리아의 역사
고대
바이칼 호퉁구스우랄계 제족들흉노훈족
중세
유연돌궐위구르 제국키르기스몽골의 지배킵차크 칸국오고타이 칸국차가타이 칸국원나라
근세
시비리 칸국러시아의 침략
근현대
러시아의 지배
러시아 공화국
러시아 내전시베리아 분리독립극동 공화국
소련
러시아
터키의 역사
돌궐위구르 제국카라한 칸국
위구르 카간국
Uygur Kağanlığı
파일:/20150828 17/wldn1234556 1440737405620OFBez JPEG/300px-Uyghur Khganate Flag.jpg
국기

위구르 제국 전성기
공식명칭回紇[1] → 迴鶻
위치현재의 몽골초원, 내몽고 자치구, 중앙아시아 일대
인구-
수도Ordu-Baliq
정치체제군주정
국가원수大可汗
언어위구르어
종족위구르족, 유고족
종교마니교
존속기간742년 ~ 840년
성립 이전돌궐

1 개요

위구르 칸국 Uyghur Khaganate. 741년, 위구르족이 봉기하여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던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약 1백년 동안 나라와 상호간의 이해에 따라 반목과 친목을 반복하며[2] 당을 대신해 서역경영에 나서 거기에서 얻어지는 부를 바탕으로 820년대 후반 위 지도에 나온 영토 수준으로 크게 팽창해 최대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839년 창신 가한이 내부 권력 다툼 끝에 살해당하면서 혼란에 빠지고, 840년 위구르 제국의 셍귄 퀼뤽 바가의 구원 요청을 빌미로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 키르기스족에게 수도 카라 발가순이 파괴당하며 멸망하고 만다.

2 위구르 제국

700년대 중반 돌궐을 멸망시키며 초원지대의 최대세력으로 떠오른 위구르족이었으나, 당시엔 제국을 칭할만한 기반도 세력도 권위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문에 사방에서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세력들을 격파해나야만 했던 위구르족에게 이런 역학관계를 일거에 뒤바꿀수 있는 사건이 발생하니 그것이 바로 안록산사사명이 일으킨 안사의 난이었다.

안사의 난 초창기부터 안록산측에 붙은 기타 초원세력들을 싸그리 박살내기 위해 반복해서 당에게 구원군 파병 요청 의사를 타진하던 위구르족은[3] 이후 당나라 정부가 수세에 몰리게 되면서 당나라에 지원군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고 당을 도와주었는데 이를 통해 막대한 물자를 획득할 수 있었고, 이렇게 얻은 물자들을 이용해 주변 세력을 포섭하거나 격파하며 세력을 더욱 충실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부터 위구르족은 진정한 제국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게다가 난이 '안록산의 난' 이던 시절에는 아직 당나라의 위세가 살아있던 시절이라 애초에 낙양 등의 거대 도시를 공략한 후 약탈할 계획을 새우고도 당나라 정부의 만류와 그들이 내어주는 물자를 받고 삼가는 모습을 보였으나, 안록산의 난을 겪으며 당의 여력이 완전히 소진된 것을 확인한 '사사명의 난' 시기에 들어서는 당나라 정부의 만류조차 무시하고 함락한 도시들을 대대적으로 약탈해 물자를 획득하기에 이른다. 특히 낙양을 함락한 다음에는 삼일간 대대적인 약탈과 살육을 거행했는데, 신당서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위구르 군을 두려워한 백성들이 목숨만이라도 건지기 위해 낙양 인근의 백당사로 몰려들었으나 이곳을 위구르가 불태워 백당사에서 죽은 자만 1만에 달한다고 한다. [4]

그 후로도 안사의 난을 겪으며 여력이 소진된 당나라를 위협하고 북방을 자주 침범하여 당나라로부터 막대한 공물을 뜯어내고, 국경에 정기시장을 열어 품질이 떨어지는 말들을 자신들이 정한 고가의 가격에 가져갈 것을 강요하며 막대한 이익을 취한다. 특히 당나라 공주와 결혼하여 당의 황제와 위구르 제국의 가한이 형제가 됐다고 주장하며 당시 당나라 황자인 옹왕이 보는 앞에서 당나라 사신더러 춤을 춰 보라고 협박하고, 사신이 거부하자 가한이 직접 매질을 해 사신을 죽여버릴 정도로 당나라를 업신여기고 무시했다.[5]

이 때의 위구르 제국을 가리켜 당나라 사서에서는 "그들은 검소하고 상하가 사치를 모르며 서로 굳게 단결하여 의심이 없으니, 그 힘이 가히 무적이다."라고 탄식할 정도였다.

장안을 점령했을 당시, 그곳에 머무르고 있던 마니교와 접촉하여 마니교 사제와 신도들을 몽골 초원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마니교를 상당히 우대하여, 781년 아예 국교로 반포하고 위구르 귀족들은 육식을 금하는 마니교의 법에 따라, 초원에 밭을 만들고 채소를 길러 먹기도 했으며 후기에는 아예 카라 발가순이라는 도시를 신축하고 살기도 했다.[6]

하지만 지나친 억압은 곧 당나라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고, 어느 정도 세력을 회복한 당나라가 국경수비를 강화하며 시장 폐지, 국경 봉쇄 등의 강경책으로 대응하자 곧 심각한 물자부족과 내부반란에 시달리게 된다.

이것이 위구르 제국에게 심각한 문제가 된 것은, 안사의 난 이전까지 조금 강력한 유목민족 수준에 불과했던 그들이 안사의 난을 통해 당으로 부터 얻은 막대한 물자(주로 비단)을 마니교도나 소그드 상인을 통해 서역으로 보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교역 이익을 바탕으로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위구르 제국 입장에서 당나라에서 유입되는 물자는 그들이 초원의 패권을 잡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재원이며, 단순히 당나라를 공격해 봐야 필요한 물자를 얻을 수 없으면 말짱 꽝이라는 것.[7]

결국 당나라로 부터 물자 유입이 끊긴 위구르 제국은 초원에서의 패권을 유지할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주변 세력들을 족치기 시작하는데, 자잘한 세력들을 족쳐봐야 당나라만큼 막대한 물자를 제공할 수 있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고, 위구르 제국의 막대한 요구에 견디다 못한 온갖 세력의 반발을 경험해야만 했다.[8] 특히나 강하게 반발했던 세력이 훗날 위구르 제국을 멸망시키는 키르기스족. 이와 같은 사태를 통해 백날 위협만 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독으로 돌아옴을 깨달은 위구르 제국은 그간의 강압적 자세를 버리고 당시 군사력이 필요했던 당나라에게 군사력을 제공하며 자신들에게 꼭 필요한 당의 비단을 얻는 상부상조 전략으로 전환하게 되고, 이후 당과 위구르 제국은 종종 반목하면서도 기본적으로 협력관계에 접어들게 된다.

이후 과거 위구르 제국을 마구 비난하던 당나라가 위구르 제국에 대해 "위구르는 나라에 어려움을 구해준 공이 있고, 일찍이 조금의 땅도 침탈하지 않았는데, 어찌 후하지 않겠는가?"라는 말을 할 정도로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개선됐으며, 위구르 제국 역시 제국이 부를 획득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서역 경영의 라이벌인 토번이 당을 공격할 기미를 보이자 당에게 군사지원을 약속하고 실제로 움직였을 정도였다.

이런 당과의 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토번과 충돌하던 당이 최종적으로 서역경영을 포기하던 8세기 말-9세기 초엽 무렵 위구르 제국은 이전까지 당이 운용하고 있던 서역영토를 인수하며 더욱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고,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토번을 견제한 당이 토번이 장악한 영토를 피해 협력관계에 있는 위구르 제국이 장악한 영토만을 이용해 서역 교역에 나서려는 시도를 하자 최대의 번영기를 누리게 된다. 당나라와의 친선관계를 통해 얻은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주변 세력들을 포섭한 위구르 제국은 결국 짧으나마 지긋지긋할 정도로 충돌하던 키르기스족마저 완전히 제압하는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토번에게 군사적으로 패하기도 하나, 당과의 협력관계를 통해 확보한 교역루트에서 나오는 막대한 이익을 바탕으로 더한 번영을 누린다. 결국 당과의 협력정책은 라이벌 토번을 고립시키고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된 신의 한 수였던 것.[9]

이렇듯 820년대 말-830년대 초엽 소례 가한 시기 위구르 제국의 세력은 절정에 달하나, 그 뒤를 이은 창신 가한이 839년 내부 권력 투쟁 끝에 사망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상층부의 내분으로 크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역병이 번져 가축들이 몰살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위구르 제국의 역량은 크게 저하됐고, 이런 국면속에서 840년 내부 권력 다툼에서 밀린 셍귄 퀼뤽 바가가 남시베리아 예니세이 강에 자리를 잡고 있는 키르기스족에게 도움을 요청한다.[10] 셍귄 퀼뤽 바가의 구원 요청을 받은 키르기스족은 지금까지 자신들을 짓누르기 위해 노력하던 위구르 제국을 결정적으로 붕괴시킬 기회가 왔음을 깨닫고 무려 10만의 대병력을 동원해 위구르 제국의 수도 카라 발가순이 철저히 파괴했고, 어떻게든 후퇴한 군소세력들이 존재하긴 했으나 제국으로서의 위구르는 이 일을 기점으로 멸망. 군소세력들 또한 이런저런 세력에 치이며 흡수당하거나 신장으로 향했던 세력처럼 아예 현지화[11]해버려 별다른 두각을 보이진 못한다.

3 역대 카간

대수카간의 호칭이름재위기간
1대쿠틀룩 빌게 퀼 카간쿠틀룩 보일라(Qutlugh boyla)742 ~ 747
2대카를륵 카간바얀 초르(Bayan chor)747 ~ 759
3대뵈귀 카간이르킨 뵈귀(Irkin bögü)759 ~ 780
4대알프 쿠틀룩 빌게 카간톤바가 타르칸(Ton bagha tarqan)780 ~ 789
5대텡그리데 볼미쉬 퀼뤽 빌게 카간탈라스(Talas)789 ~ 790
6대??790. 3 ~ 4
7대쿠틀룩 빌게 카간아 초르(A chor)790 ~ 795
8대텡그리데 울룩 볼미쉬 알프 퀼뤽 빌게 카간쿠틀룩(Qutlugh)795 ~ 805
9대텡그리데 알프 퀼뤽 빌게 카간퀼뤽 빌게(Külüg bilge)805 ~ 808
10대텡그리데 쿠트 볼미쉬 알프 빌게 카간?808 ~ 821
11대텡그리데 울룩 볼미쉬 알프 퀴췰뤽 빌게 카간?821 ~ 824
12대아이 텡그리데 쿠트 볼미쉬 알프 빌게 카간카사르 테긴(Qasar tegin)824 ~ 833
13대아이 텡그리데 쿠트 볼미쉬 알프 퀴췰뤽 빌게 카간퀼테긴(Kül tegin)833 ~ 839
14대?카사르 테긴
(Qasar tegin)/합삽특근(廅馺特勤)
839 ~ 840

4 제국의 멸망 이후

여담으로 위구르 제국이 멸망하고, 키르기스족이 이들의 빈자리를 대신하는데 실패하고 자신들의 근거지로 돌아가버리면서 북방의 초원지대는 권력의 공백지대로 남게되고,[12] 이 공백상태를 틈타 초원지대에 자리를 잡아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수렵민족 세력이 바로 요나라이다.

13세기 칭기즈 칸몽골 제국이 흥기하자 유능한 상인세력으로 변해있던 위구르족들은 자진 투항하여 몽골 제국을 이끄는 브레인 역할을 한다.

원래 위구르족들은 불교마니교를 믿었으나, 13세기 이후 서서히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지금 신강성에 사는 위구르족들은 거의 모두가 무슬림이다.

유목민족이긴 하지만,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고 이후에도 세력을 크게 넓히지 못해서 국내에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하다못해 위구르족에 관한 개설서도 채 4권도 안 될 정도로 안습. [13] 그나마 국내에서는 정재훈 교수가 '위구르 유목제국사(744~ 840)' 이라는 이름으로 단행본을 내긴 했다. 문제는 이게 학술책이라는거지

여말선초 시기 문신으로 활동했던 설장수가 위구르족 출신 귀화인의 후손이라고 한다.

5 관련 항목

  1. 구당서에는 회흘이지만 신당서에는 회골(回鶻)이라고 표기되는데 그 이유는 781년 국명을 바꾸었기 때문. 그 뜻은 송골매라는 뜻이다.
  2. 과거 버전에선 당나라가 위구르 제국의 빵셔틀이라고 설명했으나, 어느 정도 국력을 회복한 당나라가 조공을 끊자 위구르 제국 상층부에서 정변이 일어나 그간의 특권을 포기하고 당나라에게 숙이고 들어오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당과 위구르의 관계는 어느 한 쪽이 상대방을 완전히 제압하는데 실패해 당이 공물을 바치면 위구르가 군사력을 제공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로의 안정을 다지는 공생관계에 가까웠다.
  3. 특히 안사의 난 발발 직전 안록산의 휘하에 편입된 돌궐족의 잔당이 위구르족의 위기감을 자극했다. 까딱하다간 돌궐을 격파하고 어렵게 이룩한 초원지방의 패권을 다시 빼앗길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시달린 것이다.
  4. 그리고 이 사건의 여파로 이후 당과 위구르가 상호협력 관계에 가까워져 토번이나 기타 유목민족 세력과 맞서기 위해 수차례 손발을 맞췄음에도 불구하고, 당은 자국내에서의 군사활동에서 만큼은 위구르의 힘을 빌리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5. 이 일을 직접 목격한 옹왕은 나중에 황제(당덕종)가 되어서, 위구르를 극렬히 증오하여 그들과의 동맹 맺기를 거부하다가 재상의 간절한 조언으로 겨우 위구르와 동맹을 맺었다.
  6. 다만 위구르 제국 내부의 도시들은 마니교의 영향이라기 보단, 동서 교역의 거점인 카라반사라이의 성격이 더 강했다.
  7. 실제로 당시 위구르 족은 계속 공격 vs 공격해 봐야 지금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로 나뉘었다. 이후 벌어진 내전에서 이긴 쪽은 후자였고, 이후 전개자체도 후자가 옳았음이 증명된다.
  8. 아예 위구르 제국의 적인 당이나 토번으로 귀순하는 세력들 마저 나왔다.
  9. 이렇게 보면 굉장히 화기애애한 분위로 보일 수도 있어 조금 첨부하자면, 이 중간중간 두 나라 사이의 마찰은 결코 적지 않았다. 당에서 유입되는 물자의 중요도가 워낙 높았기에 대놓고 위협을 가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가한의 성향에 따라 위구르 제국은 토번과 싸우는 짬짬이 진격로를 당나라에게 위협이 되는 방향으로 잡는 다던가 토번과 당나라가 뭐빠지게 격돌하는 동안 비어있는 당나라령 서역영토 일부를 집어삼킨다던가 하는 일을 벌였다. 그럼 당나라는 곧장 엿이나 먹으라는 식으로 위구르 제국으로 들어가는 물자공급을 끊어버리거나 도움 요청을 무시하는 일들이 상당히 자주 일어났다. 따라서 상대의 무력과 경제력을 반드시 필요로 하던 양 국가 모두 나라가 기우뚱 거리는 아찔한 경험을 하게 된다.
  10. 사실 위 지도에 표시된 위구르 제국의 영역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키리기스족은 아주 짧은 기간을 제외하곤 계속해서 위구르 제국과 충돌하는 관계였다. 따라서 위구르 제국의 지도자들은 키리기스족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한 원정을 반복했다.
  11. 어떻게 현지화되었는지 자세한 설명 추가바람.
  12. 당시 기승을 부렸던 역병이 주원인으로 꼽힌다.
  13. 하기야 4권정도면 많은셈이다. 다른 유목민족이나 동북아 삼국을 제외한 개설서가 그리 많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