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 |||||
콘라트 2세 | ← | 하인리히 3세 | → | 하인리히 4세 |
1017~1056
재위 : 1039~1056
하인리히 3세의 첫 가정교사는 아우크스부르크의 주교 브루노였다. 1029년에 브루노가 죽자 프라이징의 주교 앵겔베르트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1033년 16살의 나이에 하인리히는 성년이 되었고 앵겔베르트는 그의 서비스로 보상했다. 1035년 카린시아의 공작 아달베로가 콘라트 2세에 의해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앵겔베르트는 하인리히에게 이 부당함을 거부하고, 왕이 했던 것처럼 하지 않는다면 퇴위를 하지 않고 제후들이 하인리히를 왕으로 선출한다고 설득했다. 그는 아버지가 했던 행동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앵겔베르트와 약속했다. 그리고 콘라트 2세는 하인리히가 태도를 바꿔 많은 시도를 하자 다음에 충격을 받아 실신했다. 회복된 다음에 콘라트는 아들에게 무릎을 꿇고 정밀하게 합의했다. 결국 앵겔베르트는 황제에게 처벌을 받게 되었다.
1036년 하인리히 3세는 크누트 대왕의 손녀 덴마크의 군힐다와 결혼했다. 초기에 콘라트 2세는 크누트와 북독일의 일부 지방을 크누트가 다스리고 그들의 자식들을 결혼시키자고 합의했다. 두 사람은 법정 나이에서 가장 빠를 때에 나이메헨에서 결혼했다. 1038년에 하인리히는 아버지의 원조로 이탈리아로 갔는데 돌아올 때 군힐다가 아드리아 해안에서 죽었다. 1039년에 역시 아버지 콘라트 2세도 사망해 하인리히 3세가 황제가 되었다.
하인리히 3세는 그의 통치 첫 해를 영토 순방으로 보냈다. 그는 상하 로트링겐의 공작인 고셀로에게 존경을 받기 위해 저지대를 방문했다. 쾰른에서는 작센에서 그와 동행했던 대주교 헤르만 2세와 합류했다. 튀링겐에서 마이센 변경백 에케하르트 2세를 만날 때는 군대를 이끌고 갔다. 보헤미아 대사가 인질을 부담해 하인리히 3세를 달랬으며 그는 군대를 해산시킨 뒤에 뒤에 순방을 계속했다. 그는 브루고뉴 대사와 밀라노 대주교 아리베르트에게 인정받은 후에 잉겔하임으로 돌아왔다. 아리베르트와의 평화는 제국의 유일한 상처를 치유해 주었다. 1039년, 영토를 순방하고 있을 때에 카린시아의 공작인 콘라트 2세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가까운 친적인 하인리히가 자동으로 카린시아 공작령을 상속받게 되었다. 하인리히 3세는 이제 바이에른, 슈바벤, 카린시아의 공작이 되었으며 독일, 브루고뉴, 이탈리아의 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