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에른

독일의 주
니더작센슐레스비히-홀슈타인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작센-안할트브란덴부르크
라인란트-팔츠헤센튀링겐
바덴-뷔르템베르크바이에른작센
자를란트
독일의 도시주
베를린브레멘함부르크
사라진 주
쥐트바덴서베를린뷔르템베르크-바덴
뷔트템베르크-호헨촐레른


200px-Flag_of_Bavaria_%28striped%29.svg.png[1][2]200px-Flag_of_Bavaria_%28lozengy%29.svg.png[3] [4]
바이에른 주의 주기(州旗)
250px-Coat_of_arms_of_Bavaria.svg.png250px-Deutschland_Lage_von_Bayern.svg.png
바이에른 주의 문장바이에른 주의 위치
국가독일
시간대(UTC+1/+2)
주도뮌헨

독일의 국호는 독일 및 바이에른 연방공화국이라고 한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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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 뮌헨과 멀리 보이는 알프스. 가까워 보이지만, 뮌헨에서 기차로 1-2시간은 가야 알프스에 다다를 수 있다.

Freistaat Bayern[5], 바이에른 자유주[6]
독일의 주(州). 주도는 뮌헨. 독일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장 넓은 주이다. 하지만 인구는 2위(1250만명)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가 무려 500만명이나 더 많다.

영어로는 바바리아(Bavaria). 참고로 바이에른 사람, 바이에른 방언, '바이에른의' 란 의미의 형용사는 영어로 바바리안(Bavarian)이다.[7] Barbarian(야만인)과 헷갈리지 않도록 발음에 유의하자[8] 바바리아 사람이라고 해서 바바리맨이 아니다

주요 도시로는 뮌헨 외에도 뉘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로텐부르크, 레겐스부르크 등의 도시가 있다.

독일에서 가장 잘 사는 주로 꼽힌다. BMW, 아우디, MAN, 알리안츠, 지멘스, 오스람 등 독일 유수의 기업들의 본사가 뮌헨을 비롯한 바이에른 주 도시들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은 "독일"이라고 하면 레더호젠(Lederhosen: 직역하면 "가죽바지")을 입은 남자들과 디언들(Dirndl)을 입은 여자들이 맥주를 마시며 프레첼(바이에른에서는 브레첸Brezen)을 먹는 모습을 주로 떠올리는데, 사실 이 이미지는 바이에른 주의 이미지에서 따온 것이다. 이 때문에 다른 지역 독일인들은 "그건 독일이 아니다!"라며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이미지를 불식시키려 하지만 이미 너무 강하게 자리 잡은 지라... 바이에른 사람들은 자신들을 독일인이라기보다는 "바이에른 사람"으로 인식하고, 다른 독일인들 역시 바이에른 사람들을 독일인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로 인식한다(오스트리아에 더 가깝다거나...).

남자들이 입은 검은 바지가 레더호젠, 여자들이 입은 옷이 디언들이다.

서쪽에는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서북쪽에 헤센 주, 북쪽에 튀링겐 주, 동북쪽에 작센 주, 동쪽에 체코, 동남쪽과 남쪽에 오스트리아, 서남쪽에 스위스와 접한다. 직접 닿아있진 않지만 리히텐슈타인과도 가까운 편이며, 오스트리아를 통해 알프스 산맥을 넘으면 이탈리아가 나온다.

이 곳과 오스트리아 티롤 주의 경계 부근에 독일판 백두산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고 2962~3m로 백두산보다 더 높은 최고봉 추크슈피체 산이 위치해 있다.[한국어위키백과], [영어위키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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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기원전 바이에른 지방에 처음 정착한 주민들은 켈트족들로 그들은은 기원전 마지막 10년 동안 북쪽의 튜턴족과 남쪽의 로마인들 사이에서 압박을 받았다. 로마 제국은 이 지방을 정복해 남부지역을 라에티아와 노리쿰으로 나누었고, 북쪽 경계를 따라 요새들을 건설해 튜턴족의 남침을 막았다. 아우크스부르크·켐프텐·레겐스부르크·파사우 등의 번영하는 로마 식민지들이 남부에서 생겨났다.

5세기에 로마인들은 거듭되는 게르만족의 침공에 압도되었다. 결국 이곳에 동쪽과 북쪽으로부터 게르만족이 들어와 남아 있던 켈트족·로마인들과 뒤섞여 정착했다. 오늘날 지명의 어원이 된 부족은 바바리아족으로, 그들은 488~520년 사이에 남부에 정착, 555경~788년 프랑크족의 아길롤핑 공작가의 통치를 받았다. 그사이인 7~8세기에 이곳은 성 보니파티우스, 성 코르비니언, 성 엠머람, 성 루퍼트 등과 같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수도사들에 의해 그리스도교화되었다.

그러다가 788년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는 아길롤핑가의 마지막 공작인 타실로 3세를 폐위시키고 바이에른 공작령을 합병시켰다. 이후 817년 카롤링거 제국의 분할 후 바이에른 공작령은 경건왕 루트비히의 차지가 되었고, 이어 그의 아들로 동프랑크의 왕위에 오른 게르만 왕 루트비히의 소유령이 되면서 이후 독일 역사에 귀속되게 된다. 바이에른은 10세기에 공작령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이후 1180년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황제가 팔츠 백작이었던 비텔스바흐 가문(Wittelsbach)의 오토에게 바이에른 지역을 증여하여,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오토 1세(황제와 동명이인!)로 비텔스바흐 왕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현재의 바이에른 남동부 지방만을 비텔스바흐가가 소유했고, 나머지는 수많은 제국도시, 수도원 보유지, 기타 가문 소유지들로 조각나 있었다. 14~15세기에 비텔스바흐가 공작들의 세력은 계속되는 집안 싸움으로 약화되었고, 중간에 루트비히 4세가 등장해 이 지역을 통합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선제후직을 그대로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에게 양도해야 했으며, 그의 사망으로 인해 영토 역시 아들들에 의해 분할되어 14세기 말에는 비텔스바흐가의 여러 분가가 바이에른을 3개의 공작령으로 분할했다.

그러다가 1506년 바이에른-뮌헨의 현명공 알베르트 4세가 장자 상속 원칙을 세움으로써 영토의 통합이 시작되었다. 또한 알베르트는 뮌헨을 그의 공작령 수도로 삼았다. 1545년 알베르트의 아들 빌헬름 4세는 마침내 이곳을 하나의 공작령으로 재통합할 수 있었다. 빌헬름 4세는 종교개혁을 반대했고, 그의 후계자인 알베르트 5세 밑에서 바이에른은 엄격한 로마 가톨릭령이 되었다. 30년 전쟁막시밀리안 1세합스부르크가의 편에서 싸웠고, 그의 지도력으로 영토가 넓어지고 그 자신은 선제후가 되는 특권을 얻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들어와 바이에른은 스페인오스트리아왕위 계승 전쟁들로 인해 줄곧 유린되었다. 1777년 바이에른의 지배권은 분가였던 팔츠의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에게 넘어갔다. 이렇게 해서 바이에른과 팔츠는 통합되었다. 바이에른 계승전쟁(1778~79)에서 프로이센프리드리히 대왕은 바이에른의 대부분 지방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며 합병하려는 오스트리아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1790년대에 바이에른은 프랑스 혁명에 맞서 제1·2차 반프랑스 연합에 가담했으나 1796년엔 프랑스 혁명군, 1799년에는 오스트리아, 다시 1800년에는 프랑스에 잇따라 점령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다음해에 바이에른은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어 오스트리아를 희생시키며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고, 1805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에 따라 거의 현재의 경계대로 영토를 얻었다. 이 조약은 바이에른 공작령을 바이에른 왕국으로 격상시켰고, 통치자인 선제후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는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가 되었다. 그러나 바이에른은 나폴레옹 전쟁 후기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직전에 나폴레옹을 버렸고, 1815년에는 나폴레옹에 대항해 신성 동맹에 가담했다.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진영을 바꿈으로써 바이에른은 빈 회의(1814~15) 후에도 이미 취득한 영토의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되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이어 3번째로 큰 독일 연방 내 국가가 되었다.

막시밀리안의 계속된 치세중 1818~19년에는 바이에른 최초의 헌법의회가 발족했다. 막시밀리안의 아들인 루트비히 1세 아래에서 지방자치제와 다른 개혁들이 취해졌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여류 모험가롤라 몬테즈와 열애에 빠져 왕위를 지킬 수 없게 되자 루트비히는 결국 1848년 퇴위했다. 1850년 루트비히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막시밀리안 2세작센·하노버·뷔르템베르크 등과 동맹을 맺었다. 이들의 목적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대항하는 제3세력으로서 독일 내에 중간 크기의 나라들을 건설하는 것이었고, 바이에른은 이들 가운데 가장 큰 나라였다. 바이에른은 그후 프로이센에 반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지지했다. 남독일연방...

막시밀리안의 후계자인 루트비히 2세는 바이에른을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독일령으로 합치자는 프로이센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제안을 거절하고, 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보오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 그러나 프로이센 측의 조속한 승리와 바이에른에 대한 그들의 온건한 정책으로 바이에른은 1870년 보불전쟁 때에는 프로이센 편이 되었으며, 그후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의 주도하에 독일 제국을 수립할 때 도움을 주었다.

1871년 바이에른 왕국독일 제국에 가맹했으며 제정된 독일 헌법하에서 바이에른은 독일 제국의 다른 어떤 구성국보다도 큰 독자성을 얻었다. 외교활동, 군사행정, 우편·전신 업무, 철도 등에서 자치권을 보유했으며 제국내에서 프로이센에 이어 제2위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루트비히 2세는 정신불안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했고, 특히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건설하는 것과 같은 그의 과도한 건설사업들은 바이에른의 국고를 바닥냈다. 1886년 루트비히 2세는 정신이상자로 공포되었고, 왕위는 그의 동생인 오토에게 넘어갔지만 오토 역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오토의 삼촌 루이트폴트가 같은 해에 섭정이 되었고, 1912년 루이트폴트가 죽자 그의 아들 루트비히 3세가 왕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 독립 사회주의자인 쿠르트 아이스너가 비텔스바흐 왕조를 무너뜨리고 바이에른을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하지만 1919년 아이스너암살되었고, 잇따른 혼란 속에서 혁명위원회들이 '적색 테러'를 자행하고 단명한 소비에트 공화국을 구성했다. 이 공화국은 1919년 5월 독일의 육군부대들과 민방위대들이 뮌헨을 탈환하고, 공산주의자들에게 마찬가지로 무자비한 '백색 테러'를 가하면서 끝장이 났다. 1919년 8월에 통과된 새로운 바이에른 헌법에 따라 바이에른은 전후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자유주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바이에른의 정국은 여전히 혼란한 상태였고, 1920, 1921년에는 우익 쿠데타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운동이 뮌헨에서 시작되었고, 아돌프 히틀러뮌헨의 맥주홀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실패하였다.

이후 1933년 나치당이 권력을 잡자 독일의 모든 주들 가운데서 가장 보수적이던 바이에른은 나치즘의 요새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뉘른베르크. 가톨릭이 나치에 긍정적이지 않았으나 히틀러에게 가톨릭이 협력했다고 하면 백발백중 바이에른(...)[9] 그런 주제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당시 독일의 다른 주들에 비해 연합국의 폭격을 많이 받지않았다(...)[10] 전후 바이에른은 미국 점령지역의 일부가 되었고, 프랑스 점령지역인 팔츠는 분리되어 새로 창설된 라인란트팔츠 주에 편입되었다. 1948년의 서독 기본법에 따라 바이에른은 독일연방공화국의 한 주가 되었다.

설명했듯이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바이에른 영토는 팔츠 지방(현재 라인란트팔츠州 남부)도 포함하고 있었다. 1920년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월경지인 코부르크 지역을 흡수하였다.


3 특색

텔레비전에서 독일 국가(國歌)보다 바이에른 주가(州歌)를 먼저 연주할 정도로 지역색이 강하다.

독일에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다.[11] 2차대전 이후 중도우파 성향인 바이에른 지역 정당 기독교사회연합(기사당, Christlich-Soziale Union)이 단 한차례 주지사를 사민당에 내준 것을 제외하고 모두 선거에 승리했다. 기사련(CSU)는 오직 바이에른에만 존재하는 지역정당으로, 바이에른 이외 지역에서는 기독교민주연합(CDU)과 협력하고 있다. 기민련(CDU)은 바이에른주의 지역적 특수성을 인정해서 따로 후보를 내지 않고, 기사련을 지지한다. 연방 의회에선 두 당이 연대하여 '기민-기사 연합'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한다.

바이에른 전체를 놓고 보자면 그렇다는거지, 세부적인 지역구로 들어가면 대도시권인 뮌헨이나 뉘른베르크 등은 사민당 지지율이 훨씬 높다. 독일이라도 우촌좌도에서 벗어나는게 아니므로.. 뮌헨이나 뉘른베르크 시장도 사민당 소속이 꾸준히 당선되고 있다.

다른 독일 지방에도 각 지역 언어가 존재하듯이, 바이에른에는 "바이에리쉬" 혹은 "바이리쉬"[12]라는 지역 언어가 따로 존재하는데, 다른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은 바이에리쉬를 알아 듣지 못해 별도의 사전을 구매하기도 한다. 바이에른 사람들에게 바이에리쉬를 "사투리(Dialekt)"라고 하면 기분 나빠하며 "지역 언어(local language)"라고 강변한다. 그게 그거 같지만, 자존심의 문제인 듯.


바이리쉬 사용지역[13]은 바이에른 대부분 지역과(프랑켄 지역 제외) 작센 주 남부 극히 일부 지역, 오스트리아 대부분 지역, 스위스 동부 일부 지역, 이탈리아 쥐트티롤 지역, 그리고 독일계 주민이 모여 사는 헝가리 외덴부르크(헝가리어로는 쇼프론)과 체코 뵈머발트(체코어로 슈마바) 지역에 분포해있다.

바이리쉬-독일어 사전. "바이리쉬"의 표기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바이에른 사람들은 스스로를 독일인이라기보다는 바이에른 사람으로 여기고, 다른 지역 독일인들 역시 바이에른 사람들을 독일인이 아닌 누군가(...)로 인식한다.

독일에서 가톨릭 인구가 가장 많은 곳으로[14] 前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여기에서 태어났다. 그렇지만 개신교 교회도 [소수 존재한다.]

독일 내에서도 그렇지만 유럽내에서도 손꼽히게 잘사는 지역이기도 하다.그러니까 저렇게 계속 남과 다르다고 지역색 표출하는 걸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잘사는 지역은 아니고, 2차세계 대전 후 독일이 분할되면서 동독에 있던 기업들이 주로 바이에른으로 이전했기 때문에 발생한 이니셔티브다. 뮌헨 같은 대도시 빼면 2차세계대전 전까지 독일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 중 하나 였고, 괜히 나치의 열렬한 지지 지역이 됐던게 아니다. 실례로 1980년대까진 북부주들에서 벌어들인 세금으로 바이에른을 먹여살렸다가 1990년대 넘어가면서 역전되는 상황이 일어났는데, 그걸 가지고 현세대 바이에른 주민들 중 자기들이 북독일, 지금은 구동독을 먹여살린다고 서스럼없이 주장하고 다니는 자들이 있다.. 독일에서 전후부터 2010년대까지 한번도 재정적으로 적자가 없던 주는 헤센과 바덴-뷔르템베르크, 함부르크 뿐인데 정작 그 3개 주들에서 바이에른처럼 말하고 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바이에른의 졸른호펜(Solnhofen) 지역은 쥐라기의 동물 화석으로 유명하며 그 유명한 아르카이옵테릭스콤프소그나투스의 첫 화석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게다가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화석들은 보존률이 뛰어나서 왠만한 연조직(깃털이나 날개막 등)이 화석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또한 천사백만년전에 운석이 충돌해 생긴 지금 24km짜리 크레이터, 리스(Ries)분지도 바이에른 지역에 있으며 그 분지 한가운데에 위치한 중세도시 뇌르틀링겐에 리스 분지 박물관이 소재해있다. 방문하면 NASA가 기증한 월석도 구경할 수 있다.

3.1 프랑켄 지역과의 지역감정

프랑켄 지역은 바이에른 북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프랭키쉬(Fränkisch)라는 별도의 지역언어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바이에른과는 매우 다른 지역색을 가지고 있다. 프랑켄 지방 대부분은 바이에른 주에 속하기는 하지만 바덴-뷔르템베르크헤센, 튀링엔 등 인접 주에도 걸쳐있다.

역사적으로 프랑켄은 본래 바이에른의 일부가 아니었다가 나폴레옹 전쟁 이후 나폴레옹에 협력한 바이에른 공국이 나폴레옹으로부터 프랑켄 지방을 할양 받으면서 바이에른 왕국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그 이후 바이에른 내 2등 지역처럼 취급 받으면서 지금까지도 지역감정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현재 바이에른은 독일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으로 꼽히는데, 프랑켄은 그 혜택을 그만큼 보지 못했다는 데에 대한 감정도 있다. 결정적으로 이 지역은 바이에른이 그렇게도 증오하는 구 프로이센 왕가의 근거지이다.

이 때문에 뉘른베르크를 포함한 프랑켄 지방의 도시들로 가면 하늘색과 하얀색의 바이에른 주 색깔은 거의 보이지 않고, 빨간색과 하얀색의 프랑켄 지방 색깔을 훨씬 많이 볼 수 있다.


3.2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와의 지역감정

같은 남부인 바덴-뷔르템베르크와 지역감정이 있다.지역감정의 이유가 정치적인 문제와 연관되어있는 한국과는 다르게 종교적인 문제. 바이에른은 종교개혁시기에도 개신교도들을 탄압하며 가톨릭을 유지한 골수 가톨릭 제후가 지배한 지역이였고[15], 지역도시 잉골슈타트는 예수회와 반 종교개혁의 독일내 최대거점이라 불렸을정도로 가톨릭색채가 강한 지역이다.[16] 그에 반해 뷔르템베르크 지역은 종교개혁 초기부터 일찌감치 개종하여 신교도 루터파의 남독일 최대의 거점이였으며,제후역시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 카를 5세의 대리인 로마왕 페르디난트 1세에 저항하다가 털려서 영지가 몰수 되었다가 헤센 방백의 도움으로 다시 찾는등 16세기부터 20세기 초 독일제국 해체의 순간까지 루터파를 완강히 신봉한 신교도 제후였으며,[17]신성로마제국 해체 이후엔 작센과 함께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 제후도 동시에 왕 작위를 받았을 정도로 남독일에선 수위를 다투는 큰 세력들이였다.이런 문제로 양 지역은 지금도 라이벌적인 감정과 함께 종교분포도등에서 꽤나 차이를 보인다. 뮌헨과 슈투트가르트는 양 지방의 대표도시임과 동시에 남독일 최대의 공업도시들이기도 하며 독일 세계유수의 자동차제조기업인 BMW가 뮌헨에 본사를 두고있는 반면, 역시 세계에서 수위를 다투는 자동차 기업인 벤츠는 슈투트가르트에 본사를 두고있다.

두 지역 사이에 알고이라는 지역이 있는데, 두 주에 치여 놀림감이 되는 곳. 정작 거기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고이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지역에는 바트 뵈리스호펜이라는 온천마을이 존재하는데 최근 한국에서도 물 끼얹어서 치료한다는(...) 크나이프식 치료법이라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3.3 프로이센에 대한 지역감정

과거부터 대대로 바이에른은 프로이센에 라이벌 의식과 지역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현재까지도 그 후신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베를린[18], 거기에다 한자동맹 자유시인 함부르크브레멘에까지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19]

바이에른은 본래 프로이센과 동등한 왕국이었으나, 1870년 독일 통일 과정에서 철저히 프로이센이 중심이 되고, 바이에른은 완전히 소외되었다. 통일 이전 바이에른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과 함께 독일에서 가장 큰 연방국 중 하나였으며, 통일된 지역에서는 프로이센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왕국이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이끈 프로이센 주도 하에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새 독일 제국에서의 주도권은 프로이센, 함부르크브레멘 등 구 북독일 연방 세력, 거기서도 특히 인구, 면적과 경제규모에서 우월한 프로이센이 잡게 되었다. 새 독일 제국의 황제, 수상, 국기 등을 비롯한 여러 국가 제도들이 프로이센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국 내에서 두 번째로 큰 왕국이었던 바이에른은 독일 통일 과정에서 프로이센과 대립각을 세웠기 때문에[20] 오히려 패전국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

역사적으로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왕가는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황실보다 유서깊다고 여겨서 바이에른 사람들은 이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센한자동맹 자유시가 개신교인 반면 바이에른은 가톨릭 국가였고, 독일 제국에서 호엔촐레른 황실이 전국을 개신교 지역으로 만들려는 작업에 착수하며 가톨릭 지역을 압박한 것도 그 반감에 더 불을 지피기는 했지만. (다만 이 사안은 호엔촐레른 황실이 딱히 바이에른만 압박한 것은 아니어서, 프로이센 내부에서도 가톨릭이 무시못할 지분을 차지하던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오버슐레지엔, 베스트프로이센, 포젠 등의 가톨릭 세력도 처지가 별다를 바 없기는 했다.)

심지어 1차대전에 대해서도 "프로이센이 멋대로 일으킨 전쟁에 바이에른이 이끌려갔다."고 여길 정도였으며, 이는 프로이센의 중심지 베를린에서 유지되는 중앙 정부에 대한 반발심으로 이어졌다.

프로이센에 대항하여 좌익을 선택했고, 바이에른 레테 공화국이 세워지게 된다. 하지만 좌익 정부가 무너지고 좌익 세력이 소탕되자, 이번에는 우익을 지원하여 나치가 급성장 하는 토양이 돼버리기도 했다.[21]

상대적으로 내륙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베를린[22]이나 함부르크보다도 연합국의 폭격을 덜 맞아 그만큼 전쟁의 피해가 타 지역보다 덜했다. 전후복구 역시 전쟁 피해를 직접적으로 본 영국이 점령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소련이 점령한-그리고 반은 동독이 가져가고 반은 동독에 포위되어 고립된-베를린보다는 쇼미더머니를 쳐가며 전쟁물자를 지원하고도 여력이 충분한 미국이 점령한 바이에른 쪽이 전후복구도 훨씬 수월하고 빨랐다. 여기에 더해 베를린에서는 지멘스알리안츠의 본사가 바이에른으로 이전되고, 작센에서는 아우디 본사가 이전되며 바이에른은 어부지리를 누렸다.

즉 현재 바이에른이 누리고 있는 발전과 독일 내의 위상의 상당수는 적대시하던 프로이센 지역의 동독 편입에 힘입은 결과라고 할수 있다.

한편 2차대전 이후 서독에서 바이에른과 대비되는 북부지역 '대표'이미지를 니더작센이 갖게 되었는데(산악지역과 대비되는 평지와 바닷가, 가톨릭과 대비되는 개신교 이미지 등) 실제로도 볼크스바겐의 본사가 하노버 근교인 볼프스부르크에 자리잡고 있다. 즉 동서독 분단 이후의 남북 지역감정 구도는 바이에른 VS 니더작센 이미지로 재편되었으며 흥미롭게도 사투리 역시 바이에른 사투리와 머나먼 동방에서까지 지역드립으로 유명해진[23] 동프리슬란트 사투리[24]가 자주 비교당하곤 한다.


4 주요도시

5 관련 항목

  1. 산마리노의 국기 바이에른 주의 기(Flag). 위의 흰색이 잘 안 보이겠지만 위쪽이 흰색, 아래쪽이 하늘색인 2색기이며, 흰색부분과 하늘색부분의 넓이와 폭이 같다.
  2. 영어 위키백과의 [관련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다.
  3. 이것도 바이에른 주의 기인데, 교대로 빛깔을 바꾸어 놓은 마름모꼴 연속 무늬의(lozengy) 기이다. 바이에른에서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는 간간이 구름 낀 푸른 하늘을 형상화한 것이다.
  4. 독일의 축구 팀 바이에른 뮌헨의 마크에 들어있는 그 무늬가 맞다
  5. 표준 발음대로라면 바이언(Bay+ern/|baiɐn/)이나, 현지에선 바이에른이라 발음한다.
  6. 사실상 독일 유일의 자유주이다. 바이에른을 지역기반으로 하는 CSU와 바이에른 주 정부는 독일의 분할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독일 기본법(헌법)의 조인을 거부했고, 서독 유일의 자유주로 남았다. 그러나 이는 단지 명목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 권한에서 다른 주와 큰 차이가 있지는 않다. 동독과의 통일 이후 작센주와 튀링엔주도 스스로를 자유주로 선언했다.
  7. 독일의 프리미엄 자동차 BMW도 Bavarian Motor Works, 독일어로는 Bayerische Motoren Werke다.
  8. 진지하게 얘기하자면 들어서 헷갈릴 일은 없다. 야만인을 발음할 땐 r이 살아서 나오고 v 와 b가 전혀 다른 소리이므로
  9. 다만 이건 일부의 이야기고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부모 등 일반 평신도들은 그닥 호의적이지 않았다.
  10. 나치당의 지지도가 상당히 낮았던 프로이센 주는 전후 폴란드에게 절반 가까이 뜯긴 반면 바이에른은 미군이 진주해서 그런지 땅 한 뼘도 할양되지 않았다! 그리고 수도 베를린이 두동강이 난데다 공산주의 동독 영토인 브란덴부르크 주가 둘러싼 바람에 수도 기능이 반 고자가 되어서 여러 대기업 본사들이 바이에른으로 이전해 전후 큰 경제적 발전을 이룬다. 이런xxx 그래도 전후 오데르-나이세 강 동쪽 프로이센 난민들이 바이에른으로 대부분 흘러들어서 바이에른도 꽤나 고생했다 카더라 뭐 옛날에 폴란드에게 프로이센이 뜯은 땅이 엄청 많아서 저리뜯을 구실이 생겨 저렇게 된 것이지만.
  11. 독일의 경상도. 주도인 뮌헨대구광역시와 자매도시이다!
  12. 표기가 다양하다. Bayerisch, Bairisch, Bayrisch 등으로 표기 된다. 바이리쉬로는 Boarisch라고 적는듯
  13. 여기선 Boarisch라고 적고 있다.
  14. 독일은 전체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의 인구수가 비슷하다. 그러나 지역별로 비율의 편차가 크며, 남부는 신성로마제국부터 이어오는 골수 가톨릭 선호 지역이다. 반면 북부는 개신교의 발상지이기에 개신교 선호가 강세다.
  15. 신앙심이 따로 깊었다기보다 비텔스바흐 가문의 상속문제를 황제가 바이에른계를 지지했고 바이에른 공작이 신교도로 넘어가는걸 방지하려 신성로마제국 선제후 직위이기도한 쾰른,트리어 대주교의 자리 중 하나는 비텔스바하 가문에게서 무조건 한자리를 영구히 보장한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16. 예수회가 종교재판 마녀사냥을 남독일에서 주도했는데 그 타겟은 루터파와 칼뱅파 재세례파였다.
  17. 지금은 뷔르템베르크 왕가의 직계는 단절되였으며,왕의 칭호는 방계에게로 넘어갔는데 이 방계는 가톨릭교도이다
  18. 현재 독일에 남아있는 프로이센 지역 중 바이에른과 경제 및 인구규모로 대항할만한 곳들이다.
  19. 그래서 축구경기에서도 바이에른 뮌헨-브레멘과 뮌헨-함부르크 경기에서 라이벌의식이 드러난다. 하지만 현실은 브레멘과 함부르크가 불쌍할 정도로 털린다.
  20. 오스트리아를 지지했으며, 보오전쟁에서도 오스트리아 측 연합군으로 참전했다.
  21. 다만 나치가 대두되기 이전인 1928년 총선처럼 사회민주당이 진출하는 경우도 있었고, 대개 지역정당 바이에른 인민당(보통 바이에른 기독교 사회연합(CSU)의 전신으로 여겨진다.)이 바이에른 지역의 제국의회 의석과 바이에른 주지사 자리(폰 카르 장군이 잠시 집권한 1920~1921, 1923~1924의 기간을 빼면 좌익 정권 붕괴 이후, 나치 집권 이전)는 죄다 바이에른 인민당이 장악하기도 해서... 그리고 프로이센 또한 나치로부터 자유로운 건 아니라서 나치당 집권 당시 나치 지지율이 가장 높았던 곳이 동프로이센과 브란덴부르크를 위시로 한 프로이센 일대였다.
  22. 둘 다 프로이센 지역이다.
  23. 실제로 동서독 통일 이전 오씨(Ossi)란 단어는 본래 동프리슬란트 사람들은 뜻하던 단어였다.
  24. 저지독일어의 한 갈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