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 |||||
하인리히 2세 | ← | 콘라트 2세 | → | 하인리히 3세 |
990~1039
재위 : 1027~1039(황제, 이탈리아 왕)
콘라트 2세는 재위 동안에 신성 로마 제국이 독자 생존이 가능한 국가임을 입증했다. 제국의 생존은 더 이상 귀족들과 군주들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의 아버지인 슈파이어의 하인리히 백작은 오토 1세의 딸인 리트가르데의 손자였다. 이런 혈통이었음에도 사람들이 젊은 나이에 죽음으로써 고아가 된 콘라트는 귀족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으며 보름스의 주교인 부트하르트 밑에서 자랐다. 그는 신중하다고 평판이 났고 박탈에 대한 생각이 확고했다. 1016년에 그는 미망인이 된 공작부인인 슈바벤의 기셀라와 결혼했다. 양쪽 다 카를 대제로부터 내려온 혈통을 주장했고 그래서 관계가 멀어졌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첫 딸 마틸다는 나중에 프랑스 왕 앙리 1세의 첫 부인이 된다.
엄격한 교회의 법학자들은 이 결혼을 반대했고, 황제 하인리히 2세는 콘라트에게 잠시 망명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두 사람은 나중에 화해했고, 1024년 하인리히 2세가 사망하자 콘라트는 제후들이 라인 강 주변과 오펜하임 마을 맞은편에 있는 캄바에서 왕위 선출 회의를 가지기 전에 후보자로 떠올랐다. 그는 1024년 9월 마인츠에서 왕으로 선출되어 왕관을 받게 되었다. 이제 작센 왕조의 왕통이 끊겼다는 것이 확실해졌고 모든 유럽은 하인리히 2세의 시대에 부적절한 결례를 범했던 선제후들이 책략을 꾸밀 것이라고 추측했다. 같은 해에 콘라트 2세는 슈파이어 대성당의 건설을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주교들은 1025년 6월 콘스탄츠에 있는 콘라트 2세의 궁정에서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속세 제후들은 대신 아키텐의 빌헬름 5세를 왕으로 내세웠다. 1026년 콘라트는 아리베르토 대주교가 있는 밀라노를 방문하여 그에게 이탈리아의 왕관을 받았다. 그리고 콘라트 2세가 로마에 도착해 도시들의 반발을 극복한 다음에 1027년에는 교황 요하네스 19세가 그를 1027년 부활절에 황제로 선출했다.
그는 작센에서 전통적이고 대중적인 법령을 정식으로 확정했으며 롬바르디아를 위한 새로운 헌법을 발행했다. 1028년에 아헨에서 그는 아들 하인리히를 독일 왕으로 선출하고 성유를 발라주었다. 하인리히는 군힐다와 결혼했고 콘라트 2세는 크누트에게 북독일 일부 지방의 통치권을 주었다. 폴란드와의 전쟁(1028~1030)에서는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1031년에 키예프 대공국과 연합하여 폴란드 왕 미에슈코 2세와 아들 볼레슬라우스를 압박했다. 그의 목적은 평화를 이루고 하인리히 2세 때 볼레슬라우스가 정복했던 제국의 영토를 되찾는 것이었다. 미에슈코 2세는 결국 그의 왕 직함을 포기하고 나머지 치세를 폴란드 공작, 콘라트 2세의 봉신이 되어 보내야 했다.
1029년에 바이에른의 국경에서 헝가리의 왕 슈테판 1세와의 좋은 관계를 해치는 충돌이 일어났다. 1년 뒤 콘라트 2세는 헝가리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보내게 된다. 헝가리인들은 초토화 전술을 효과적으로 사용했고 콘라트는 어떻게든 비기기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빈에서 결국 헝가리 군에게 항복하고 만다. 이 때문에 콘라트 2세는 국경의 일부 영토를 헝가리에 양도해야 했다.
1032년에 브루고뉴의 왕 루돌프 3세가 죽었다. 콘라트 2세는 하인리히 2세가 전에 유산을 강탈했던 것을 근거로 왕위를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