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단순

邯鄲淳[1]
(132 ~ ?)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인물. 자는 자례(子禮)[2].

영천 사람으로 원래 진류 사람이라고도 전해지며, 다른 이름은 축(竺)으로 박학하고 문재가 있으면서 약관의 나이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뜻이 결백하고 행실이 청렴하면서 재주가 민첩하고 창힐편, 이아, 과두문, 대소전, 설문해자, 고금자지 등 학문에 능통했다고 하며, 환제 때 상우의 장을 지내고 있던 도상[3]에게 배웠다. 151년에 조아비를 세울 때 일찍이 위랑에게 조아비[4]를 짓게 했지만 재주가 없다고 사양하자 시험삼아 한단순에게 시켰고 한단순이 붓을 놀려 작품을 이루자 고칠 곳이 없었다고 하며, 이 때부터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탁상 이외에도 조희라는 사람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초평 연간[5]에 전란을 피해 유표를 섬기다가 유표의 뒤를 이은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했고 조조는 그의 이름을 들어본 지라 불러서 서로를 보고 심히 존중했다. 당시에 오관중랑장이 학식이 넓은 사람을 널리 불러들여 그도 한단순의 이름을 오랫동안 들은지라 한단순을 문학관속에 있도록 하고 싶어했으며, 조식도 한단순을 불러들이려고 했다.

조조가 조식을 한단순에게 보냈고 조식은 한단순을 얻자 아주 기뻐해 들어와서 앉게 하고 먼저 더불어 대화하지 않았으며, 당시에 날씨가 무더워 조식이 시종을 불러 물을 가져오게 한 뒤에 스스로 씻은 후에 분을 발랐고 머리와 어깨를 드러내 오금희를 춘 뒤에 도환, 격검 등과 함께 배우, 소설의 수 천 마디를 읊고 끝내고 어떠냐고 물었다. 조식이 다시 옷, 두건을 바꿔 입고 의용을 가지런히 해서 한단순은 조식과 함께 천지개벽의 단서, 만물의 구별 의미, 그 이후 희황 아래 현성, 명신, 열사의 우열 등을 논의했다.

또한 고금의 문장, 부뢰에서부터 당관 정사에서 무엇을 선후로 해야 하는 지에 관한 것, 무력을 사용해 군사를 움직여 기묘한 계책의 형세에 관한 것을 토론했으며, 조식이 주방장에게 음식을 가져오게 했고 좌석이 잠잠해서 짝 할 만한 사람이 없었고 저녁이 되자 한단순이 돌아갈 때 조식의 그 지식과 재능에 관해 감탄하고 칭찬하면서 천인(天人)이라 했다.

조식의 사부가 되었고 세자가 세워지지 않을 때 조조는 조식에게 태자를 물려줄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단순은 조식의 재주를 칭찬했다. 이로 인해 소문이 널리 퍼져 오관중랑장이 기뻐하지 않았고 황초 연간[6]에 박사, 급사중에 임명되었으며, 투호부 천 여언을 지어 바쳤고 조비로부터 그 기술이 훌륭하다고 해 비단 1000필을 받았다.

당나라의 장회관은 두림과 위밀 이래로 고문이 단절되었다가 위나라 초에 나오는 고문은 한단순에게 나왔다고 평가했으며, 채옹이 이사와 조희의 법을 모아 옛날과 지금은 형태를 섞었다고 하면서도 사물에 이치에 정밀하고 치밀한 것은 한단순을 따라갈 수 없다고 했다.

전서는 당대에 제일 잘 썼으며, 예서는 그 당시의 서예가인 양곡에게 버금갔다고 한다. 저서는 소림, 예경, 한시로는 투호부가 있으며, 한단순은 위략이나 후한서 등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양곡이 왕차중[7]의 법을 얻어 위탄이 한단순을 스승으로 삼았으나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했으며, 서진의 장화는 예서를 잘 썼다고 했다. 나라의 원앙은 법도에 마땅해 모남과 둥긂이 이루어졌다고 평가했다.

  1. 성씨는 한단으로 복성이다.
  2. 기록에 따라 자가 다르게 되어있는데, 자례는 한단순이 기록한 조아비에서 나온 것으로 위지 왕찬전은 자숙(子叔), 예문류취는 숙(淑), 태평어람에서는 원숙(元淑)이라고 되었다.
  3. 재물로 사람을 구제한 것으로 유명한 8주의 한 사람이다.
  4. 동한의 효녀인 조아를 기리는 비로 훗날 채옹도 여덞자를 적었는데, 이 비석이 양수와 조조에 대한 일화가 있다.
  5. 190 ~ 193년이다.
  6. 220 ~ 226년이다.
  7. 후한 장제 때 서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