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 「임성진소왕전(任城陳蕭王傳)」 | ||
조창 | 조식 | 조웅 |
曹植[1]
(192년 ~ 232년)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황족이자 문인. 자는 자건(子建), 시호는 진사왕(陳思王).
조조와 무선황후의 아들, 조비, 조창의 친동생이자 조웅의 친형이다.[2] 아내는 최염의 조카딸인 최씨.
조선시대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조식이 유객환이라는 퍼즐을 만들어서 아내에게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2 생애
2.1 조조 시대에
재기발랄한 성품으로 특히 문재가 유독 뛰어나 아버지 조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의 뛰어난 재주를 아낀 조조가 장자인 조비를 제쳐놓고 그를 후계자로 삼을 것을 고민하였을 정도.
본인도 야심이 없지 않았으나 이를 감지하고 위기의식을 느낀 조비가 나름대로의 공작을 단행하고, 조조에게 밉보인 양수를 스승으로 삼은데다가, 조식 본인도 자유분방한 성품에 술에 취해있는 모습을 자주 보여 구설수에 오르는 등 처신에 문제가 있었다.
결정적으로 조조의 모사인 가후가 후계자 선정에 관한 질문을 조조로부터 받자 한참 뜸을 들이다 "아, 원소와 유표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란 대답을 하는 바람에 장자를 후사로 삼지 않았다가 패가망신한 원소와 유표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교훈을 알아 들은 조조는 결국 조비를 태자로 삼았다.
조비가 태자가 된 이후에도 조식은 제법 지지세력이 남아있었고 조조도 조비를 태자로 삼음과 동시에 조식에게는 식읍 5천호를 더하여 총 1만호의 식읍을 주는 등 총애가 적지 않았으나 술에 취해 천자가 가는 길을 통해 궁문을 열고 나간 사건이 이슈화되면서 대노한 조조에게 문책받는 것을 계기로 점차 조조 총애를 잃었고, 이 무렵 조조가 조식의 세력이 너무 큰 것을 견제해 양수를 죽였기에 조식은 항상 불안한 마음을 품었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219년, 조인이 관우에게 포위당했을때 조조는 조식을 남중랑장, 정로장군 대행으로 임명해 구원군을 지원하라고 불렀으나 이때 조식이 술에 취해 조조의 명령을 받들 수 없었기 때문에 조조의 진노를 사 완전히 총애를 잃고 모든 관직을 박탈당한다. 같은 해에 조조가 죽었음을 감안한다면 사실상 조조가 마지막으로 준 기회를 본인이 걷어차버린 것이다.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위씨춘추에서는 이때 조비가 조식에게 억지로 술을 먹여 조조의 왕명을 받지 못하게 한 것으로 나온다. 위씨춘추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조식은 조비의 음해공작에 희생된 것인데 조조가 앞뒤 사정도 안 살펴보고 그대로 관직에서 내쫓았던 것이나 이미 이전 태자 책봉 무렵 때부터 조식의 음주벽에 대한 비판이 여러차례 나왔던 것을 봤을때 그동안 술 문제로 조조의 속을 썩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듯.
2.2 조비 시대에
한편 조조는 죽기 직전 장안에 주둔하고 있던 차남 조창을 급하게 부르는데, 조창이 도착하기 전에 죽고 만다. 조창을 견제한 조비가 절차를 생략하고 황급히 왕위에 오르는데, 뒤늦게 도착한 조창은 "왕께서 나를 부르신 것은 너를 후계자로 삼기 위함이다."라는 말로 조식을 부추기지만 조식은 원씨 형제의 말로를 직접 지켜보지 않았냐는 말로 조창의 제안을 거부한다.
위왕에 오른 조비는 조식의 측근이었던 정의, 정이 형제를 죽이고 왕의 사자를 대하는 태도가 무례하다는 이유로 조식까지 죽이려 하지만 조식이 이른바 칠보시(七步詩)를 지어 위기를 모면했다.
세설신어에서는 이 칠보시를 완성한 조식에 대해 세간에서 그를 수놓은 호랑이라고 품평했다고 한다.
이후 조비의 집요한 견제를 받으며 여러차례 봉지를 옮기며 불우하게 사는데, 조비에게 자신을 등용해줄 것을 요청한 글이 남아 있다. 그러나 조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조식은 이 글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무력하게 늙어가는 자신을 한탄했는데, 내용이 매우 불쌍하다.
2.3 조예 시대에
조예 시절 사마의가 오군을 내륙으로 유인하여 섬멸한다는 전략을 수립하자 사마의에게 편지를 보내 이 전략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사마의 본인이 직접 당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조휴가 석정에서 참패한 것을 봤을때 일리없는 단견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조휴가 패하면서 조식의 선견지명이 드러나게 되었고, 조식은 조휴의 참패 이후 조예에게 상소를 보내 자신을 기용해달라며 어필했는데, 이런 과정을 보면 조식은 실세에서 밀려난 후에도 나름대로 여러 루트를 통해 정치,군사상의 주요 동향을 열심히 파악하며 정세를 분석하던 것으로 보인다. 일개 병졸로 종군하더라도 공을 세울 자신이 있으니 한번만 기회를 달라며 절절히 구걸하지만 조예도 끝내 조식을 기용하지 않았기에 신세를 한탄하며 지내다가 232년에 41세의 나이로 죽는다.
3 평가
213년 조식은 조조의 고향인 초현 주민들의 궁핍해진 생활과 황폐한 도시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의 부(=귀사부)를 지어 발표한 적이 있는데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 당시 조조는 초현을 대규모 군사기지화한 상태였고[3], 그 규모상 1,2년의 수탈로 완성될 정도의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조식이 묘사했던 것처럼 초현의 지역사회는 박살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조식이 이 귀사부를 발표한 것과 같은 해에 조비는 초현의 아름다운 경치를 찬미하는 임와부라는 부를 지어 발표했다는 것. 시적인 영감을 어디서 얻느냐는 예술적 관점의 차이도 있겠지만, 한없이 막장스러운 인간성의 조비가 비판을 받는 최근 추세에 더해 조식은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자체부터 조비와 극명히 달랐다는 점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다만 이 문제가 잘 부각되지 않은 이유는 초현의 군사기지는 무슨 동탁마냥 개인의 사치향락을 위해 만들어진 요새가 아니라 1240년 홍수로 매몰되기 이전까지 군사용으로 계속 유용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조조 생전에 이 일대는 거대한 군사요새였던 셈인데 지배자 개인의 안락함을 위해 축조한 동탁의 미오성과 달리 어디까지나 군사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시절에 요새를 건설한 것으로 국가안보를 위한 행위에 수 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었다고 해도 대놓고 비판하기엔 무리가 있었다는 것. 거기에 후대에까지 거의 천년이 넘게 군사기지로서 효용을 발휘하고 있었다면 이는 이 지역의 군사기지를 세워 천년동안이나 효율적으로 사용할수 있게 한 조조의 치적이기도 한 셈이다. 그렇기에 조식의 이 문학작품은 조식의 인격을 보여주는 용도로 볼 수 있긴 해도 그 이상으로 해석하는건 또 곤란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조조가 조식을 총애한 것이 단순히 재능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 사례라고는 할 수 있을것인데, 이 외에도 조식은 조비 시절 자신의 봉국 내 영지를 지역 농민들에게 나눠주고 같이 농사를 지으면서 백성들의 토지가 부족해 필요한 만큼 수확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표를 올려 농부들에게 땅을 하사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고, 조예가 봉국의 장정들을 마구잡이로 차출해가자 이를 반대하는 표를 짓기도 했다. 이 모두가 가뜩이나 위태로운 입지가 더욱 좁아질 것을 감수하고 벌인 일이라, 기본적으로 아랫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으며 매사 안하무인으로 방자하고 치졸했던 조비와는 인격 자체부터가 달랐다는 것. 조조 사후 조창의 부추김을 단칼에 거절한 것도 조식이 이토록 상식적인 인물이었기에 가능했다는 주장이다.
쩌리로 밀려난 이후에도 네임벨류 자체는 워낙 거물급이었기에 행보를 쉽게 예상하기 어렵지만 하안을 필두로 조비, 조예 시대에 핍박받던 인물들이 7년 뒤인 239년, 조예 사후의 격변을 틈타 정권을 잡고 사마의와 대립각을 세웠던 것을 봤을때 41세라는 이른 나이의 죽음은 너무 빠른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4 문학적 재능
앞서 말한 대로 시문에 굉장히 빼어났기 때문에 그의 시는 후세의 문인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주었는데, 삼국시대의 건안칠자와 더불어 삼조(三曹, 조조, 조비, 조식)로서 문학의 귀재로 불렸을 정도이다. 남북조시대 종영이란 사람은 전대의 문장가들의 시를 집대성해 평가한 책인 시품에서 조식의 문학적 재능을 건안칠자 중 최고로 꼽았으며, 역시 남북조시대의 빼어난 문인인 사령운은 조식을 문장에 대한 천하의 재능이 1말이라면 그 중 8두를 조식이 차지한다고까지 높게 평가했다. 이렇듯 후에 두보가 등장하기 전까지 중국의 시성으로 불렸다.
이런 그의 재능은 삼국지연의를 읽은 독자라면 한번쯤은 보게되는 칠보시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남긴 문장들은 그의 문집인 조자건집에 전한다.[4]
연의에 나오는 동작대의 건립을 기념하여 지은 "동작대부"는 엉뚱하게도 제갈량에 의해 주유를 열받게 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 실제의 동작대는 적벽대전 이후에 건립.
제갈량이 조식과 키배를 뜬 적이 있기는 하다. 조식이 광무제의 사적을 예로 들며 광무제의 운태 28장은 한 고조 유방의 한신, 팽월, 영포, 소하, 장량 같은 인물에 미치지 못한다는 논설을 폈는데, 제갈량이 거기에 반박하여 주장하기를, "한고조는 재능에 부족함이 있어 신하들이 스스로 활약할 여지가 있었으나, 광무제는 너무 뛰어나서 운태 28장이 드러나지 않은 것 뿐이다."라고 한 것이다.
위왕의 잘 나가던 왕자였던 시절 시는 부어라 마셔라 술 마시고 노래하고 내가 세상 평정하리 식의 호방한 시가 많지만 떨거지가 된 이후에는 처량한 기색이 묻어나온다. 황도에서 벗어나 촌구석을 전전하다 보니 백성들의 비참한 실상을 알게 되고 그를 슬퍼하며 읊은 노래도 제법 된다.
그가 자신에게 형수가 되는 조비의 아내인 문소황후를 남몰래 연모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의 걸작 낙신부는 낙수의 신 복비[5]와 조우하여 그녀의 미모를 읊은 시인데, 혹자들이 평하길 이 시의 복비가 바로 문소황후라고 한다. 다만 사료 상의 근거는 불분명하고, 그저 후세인들의 찌라시일지도. 다만 만화 창천항로에서는 해당 내용이 묘사되어있다.
조식은 조비와 조예에게 핍박 받던 시기에 지은 야전황작행(野田黃雀行)가 유명하다. 야전황작행이란 '들판의 참새'라는 뜻으로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高樹多悲風(고수다비풍) : 높은 나무에 슬픈 바람 자주 일고 海水揚其波(해수양기파) : 바닷물은 그 물결 드높아라 利劍不在掌(리검불재장) : 날카로운 칼 내 손에 없으니 結友何須多(결우하수다) : 친구인들 어찌 반드시 많으리오 不見籬間雀(불견리간작) : 보지 못했는가, 울타리의 참새들 見鷂自投羅(견요자투라) : 새매 보고 스스로 그물에 걸리는 것을 羅家得雀喜(라가득작희) : 그물 친 사람 새 얻고 좋아하나 少年見雀悲(소년견작비) : 소년은 새보고 슬퍼하나니 拔劍捎羅網(발검소라망) : 칼을 뽑아 그물을 끊어주니 黃雀得飛飛(황작득비비) : 참새는 자유로이 훨훨 날아간다 飛飛摩蒼天(비비마창천) : 훨훨 푸른 하늘에 닿아 來下謝少年(래하사소년) : 내려와 소년에게 감사하는구나 |
5 미디어 믹스
- 조식(삼국지)/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 ↑ 현재는 이 조식(曹植)과 조선시대의 조식(曺植)이 성씨의 획 수를 구분해서(曹와 曺 - 세로획 개수가 다름) 표기되고 있으나 사실 옛 문헌을 보면 에는 曹와 曺는 같은 글자의 이체자라 통용되는 걸 볼 수 있다. 오늘날 曺씨로 알려진 수많은 인물들이 조선시대 문헌에 曹로 적혀 있거나 반대로 중국의 曹씨들이 중국 옛 문헌에 曺로 돼 있는 일이 허다했다. 과거에는 같은 한자에 모양이 다른 여러 이체자가 통용이 됐고 지금보다 그런 글자들의 사용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상 중국 삼국시대의 조식과 조선시대의 조식은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오늘날 한국에서는 曺-한국의 성씨에 사용, 曹-중국의 성씨 또는 기타 어휘에 사용한다는 표기 원칙이 세워졌으니 적어도 한국어에서 한자를 표기할 때는 여기에 따라 구분을 지어주는 게 좋긴 하다. 참고로 현재의 중국어와 일본어에서는 曺 자가 사용 가능한 한자로 채택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조씨들도 전부 曹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 ↑ 이복형인 조앙, 조삭까지 따지면 다섯째 아들이다.
- ↑ 동서 8km 규모의 거대한 지하땅굴이 발굴되었고, 발견된 것 외에 매몰된 부분이 더 있어 최대 12km 규모로 보는 주장도 있다. 이 땅굴은 군사용으로 송대까지 쓰이다 홍수로 매몰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땅굴과 약간의 건물터 뿐이지만, 그 규모에 걸맞는 성벽과 군사 주둔지, 도로 등의 부대시설을 감안하면 조조 생전엔 어마어마한 규모의 성채였을 것.
- ↑ 참고로 한국에도 번역된 책이다.
- ↑ 하백의 아내이지만 예와 바람이 나서 하백이 예와 싸우다 한쪽 눈을 잃게 만들었다. 아름답지만 방탕한 이미지가 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