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사마씨의 왕조 서진(西晉)
중국의 역사 中國史 | ||||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 | 기원전 206 ~ 907년 | |||
907년 ~ 1644년 | 1616년 ~ 현재 |
중국의 역사 기원전 206 ~ 907년 | ||||
기원전 206 ~ 220 | 한(漢) | |||
초한전쟁(楚漢戰爭) 전한(前漢) | ||||
신(新) | ||||
현한(玄漢) | ||||
후한(後漢) | ||||
220 ~ 265 | 삼국(三國) | 위(魏) | 촉한(蜀漢) | 오(吳) |
265 ~ 436 | 진(晉) | 서진(西晉) | ||
동진(東晉) |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 |||
439 ~ 589 | 남북조(南北朝) | 송(宋) | 북위(北魏) | |
제(齊) | ||||
양(梁) 한(漢) 후량(後梁) | 서위(西魏) | 동위(東魏) | ||
진(陳) | 북주(北周) | 북제(北齊) | ||
581 ~ 619 | 수(隋) | |||
618 ~ 907 | 당(唐) 무주(武周) |
만주의 역사 | |||
고대 | 중세 | 근세 | 근현대 |
연(燕) | 고조선 | 동호 | 예맥 | 숙신 / 퉁구스 | |
진(秦) | |||||
전한 | 흉노 | ||||
후한 | 선비 | 고구려 | 부여 | 읍루 | |
조위 | |||||
서진 | |||||
전연 | |||||
전진 | 물길 | ||||
후연 | |||||
북연 | 두막루 | ||||
북위(북조) | 거란 | 실위 | 말갈 | ||
동위 | |||||
북제 | |||||
북주 | |||||
수(隋) |
중국의 역사 | ||||
위진남북조시대 | ||||
삼국시대 | → | 서진 | → | 오호십육국 |
동진 |
265~316, 4대 51년.
1.1 개요
국호는 진(晉). 통칭 서진. 간혹 북진(北晉), 사마진(司馬晉)이라고도 한다. 수도는 낙양(265)→업(304)→낙양(304)→장안(304)→낙양(305)→장안(311).
사마의의 후손들이 삼국을 통일한 중국의 고대 국가. 그러나 이윽고 막장 드라마를 찍으면서 30년 만에 망해버렸다. 이후 화북에는 오호십육국시대라는 헬게이트가 열리고, 진나라는 강남에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간다. 그리고 통일을 했다지만 위와 같은 난리통에 끝내 하나마나였고 이는 수나라가 통일한 589년에서야 끝나나 싶더니 다시 혼란기가 왔다가 당이 집권하고 나서야 진정된다.
1.2 역사
진나라의 전체 존속기간은 265~419년이다. 이 가운데 수도가 화북에 있었던 316년까지의 기간을 서진, 수도가 강남에 있었던 317년부터의 기간을 동진이라고 나누어 부른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국가의 성격 변화에 따른 편의상의 구분이며, 두 나라는 본래 하나의 왕조다.[1] 연속성의 단적인 예로 동진의 명제가 서진의 개창자인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가 거듭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이야기를 듣고는 부끄러워한 일이 있었다.
연표 보면 알겠지만 통일기간 30여 년에 평화롭던 시절은 고작 10여 년 밖에 안된다(...).
249년 | 고평릉 사변 |
263년 | 사마소가 진공으로 책봉 |
263년 | 촉한 정벌 |
264년 | 사마소가 진왕으로 책봉 |
265년 | 사마염이 황제로 즉위 |
279-280년 | 독발수기능 격파, 손오 정벌 |
291년 | 가남풍의 쿠데타 |
300-307년 | 팔왕의 난 |
307-311년 | 영가의 난 |
316년 | 장안의 임시정부 함락 |
317년 | 건강에서 사마예 즉위 → 동진 |
1.2.1 진나라의 시초, 위나라의 권신
- 249~265년 : 고평릉 사변
처음 조조의 후계자 경쟁에서 조비를 지지함으로써 친위 세력으로 입지를 다진 사마의는 이후 제갈량의 4차, 5차 북벌을 막아내면서 일약 군부의 중역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사마의는 이러한 군부 내의 입지를 바탕으로 조비와 그 아들인 조예가 죽은 뒤, 나이 어린 조방을 끼고 실권자로 군림하던 조상을 쿠데타로 축출하고 자신이 위나라의 실권자로 군림했다. 과거 조조가 헌제를 앞에 두고 권력을 휘두르던 것과 거의 같은 상황에 단지 황제가 조씨가 된 것이다. 이때가 249년, 사마의의 나이 71세였다.
그러다가 2년 만에 고령으로 사마의가 죽자, 이번에는 그 뒤를 이어받은 장남 사마사와 차남 사마소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사마사와 사마소는 이미 실권이 사라진 위나라 황제 조방과 조모를 각기 폐위시키고, 또한 이에 반발하여 오나라 전선에서 잇달아 일어난 관구검, 문흠, 제갈탄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조정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굳혀나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진(晉)의 공작까지 오른 사마소는 이윽고 촉한 정벌에 착수하여 263년에 촉한을 멸망시켰다. 이 공으로 이듬해 사마소는 다시 왕으로 진봉받아 자그마치 20개 군을 거느렸으니, 아직 제국은 아니었지만 실질적으로 진나라는 이렇게 시작한 셈이다. 하지만 정작 사마소는 중풍으로 이듬해에 죽고, 이러한 건국의 기반은 고스란히 아들 사마염에게로 이어졌다. 이렇게 사마염 이전에 나라의 기틀이 다 잡혔고 사마염은 그걸 받아먹은 것이 대부분이라, 사마염은 사마의와 사마사 그리고 사마소를 고조, 세종, 태조로 추존하고 자신은 실제 초대 황제임에도 세조 묘호를 받았다. 대체로 태조 묘호는 추존왕이 아니라 실제 1대 황제가 받는 경우가 많은데 특이한 사례. 그런데 당장 서진의 전신이나 마찬가지인 조위도 위왕으로 사망한 조조가 태조를 받았다.
그러나 이렇게 자리를 잡은 진나라는 1명의 황제를 내치고, 1명의 황제를 죽이며 여기에 황제 시해를 실행자인 성제 형제에게만 덮어씌우는 등 건국 과정이 너무나도 탈법적, 부도덕 그 자체였던지라 사마씨의 정통성은 아주 취약했다. 여기서 조조와 사마의 이하 그 자손들의 군주로서의 책임감을 비교할 수 있다. 조조나 사마의는 최소한 자기가 시키거나 자기 책임아래 난 일은 스스로 책임을 졌다.
어쨌든 뒷날 동진의 명제는 조상들의 건국 과정을 듣고 부끄러운 나머지 버로우를 탔고, 후조의 석륵은 "나는 조맹덕이나 사마중달과 같은 도적질은 안 하겠다."라고도 했다.
이런 문제로 서진 정권은 구품중정제로 자리 잡은 귀족들의 지지에 기댔고, 이는 서진이 고작 건국 50여 년 만에 몰락하는 한 단초였다.
1.2.2 통일 제국의 개창
- 265~280년 : 삼국통일
사마소의 뒤를 이어 진왕이 된 사마염은 진왕이 되자마자 곧장 찬탈이나 다름없는 선양을 통해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그 방법이 또한 위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흥기한 과정과 비슷해서, 과연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 조조도 근본적으로는 한실의 권위를 이용해서 세력을 구축한 뒤, 후한의 근왕 세력을 주륙하고 위왕에 올라 찬탈의 모든 준비를 끝내놓아 조비가 안정적으로 선양받게한 인물이지만, 조조는 찬탈의 준비작업이라도 망가진 중국대륙을 어느 만큼 수습했고 나름대로 가문빨이 있었지만 그래도 자체적으로 성장했지 남의 세력을 완전히 날로 먹진 않았다.
전신이었던 위나라는 황족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고 철저히 배제시켰다가, 근왕 세력을 숙청하고 중앙 군권이 사마씨에 넘어가면서 한순간에 권력을 잃었는데, 사마염은 그런 위나라의 쇠망 과정을 막으러 황족들의 권력을 상대적으로 강화시켰다. 황족들을 각 지방의 왕으로 분봉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군권까지 쥐어주었는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마염의 숙부 사마주(伷)와 사마량(亮)으로, 이 두 사람은 각기 동관왕(東莞王)과 부풍왕(扶風王)으로 책봉되어 오나라와 선비족을 상대로 전선에 나갔다.
여기에서도 보이듯, 당시 진나라의 주요 적국은 강남의 오나라와 농서의 선비족이었다. 이에 농서의 선비족을 관리하기 위해 따로 진주(秦州)를 설치하고 현지 출신인 호열을 자사로 앉혔지만, 터질 반란은 터지기 마련인지라 끝내 270년에 선비족의 독발수기능이 들고 일어나 호열과 견홍을 죽이고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선비족은 서량을 마음껏 유린했고, 사태를 수습하라고 보내려던 가충은 적절하게 자기 딸을 태자비로 삼는 꼼수를 부려서 부임도 안 했다.
한편 당시 오나라에는 손호가 황제였는데, 이 인간이 또 폭군이라 무리하게 무창으로 천도했다가 재정만 악화시키고 돌아오거나, 신하를 그 자리에서 죽여서 호랑이 밥으로 뒷산에 던져주고, 또 궁녀를 5천이나 뽑아내는 등 여러 막장행각을 일삼았다. 안으로만 이러는 게 아니라 밖으로도 이러니 문제였다. 사마염이 즉위하자마자 이를 깔보고 평화조약을 폐기하며, 예언만 믿고 무리하게 북벌을 추진하다가 그만 폭설에 갇혀서 얼어죽을 뻔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부풍왕 사마준이 선비족의 우두머리인 독발수기능을 밀어내는데 성공하고 진나라에는 양호, 오나라에는 육항이라는 두 명장이 있어서 서로 대치하며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라이벌 사이에 싹튼 기묘한 우정은 덤 그러다가 274년에 육항이 죽자 양호는 장화, 왕준, 두예와 함께 오나라 정벌을 극력 주장하기 시작했지만, 이에 맞서. 가충, 풍담, 순욱 일파는 선비족이 먼저라면서 씹었다. 이에 양호는 결국 오나라 정벌을 보지 못하고 사망한다.
279년에 때마침 마륭이 독발수기능을 참살하자 진나라는 280년에 가충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사마주, 왕혼, 두예, 왕준 등으로 대대적인 오나라 침공을 개시했다. 한 갈래는 서주에서 건업을 직격하고, 한 갈래는 형주로 밀고 들어가고, 다른 한 갈래는 익주에서 장강을 따라 내려간 결과, 마침내 진나라는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을 완수했다.
1.2.3 답이 없는 서진의 사회상
- 280~290년 : 정신을 천국에 고이 모셔놓고 통치를 시작.
이렇게 해서 사마염의 진나라는 천하통일을 달성하고 삼국시대의 최종 승자에 올랐지만 위나라의 많이 썩은 데다 문제가 많은 기반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아 딱히 왕조 초기의 진취적인 분위기는 없었고, 초장부터 아주 철저하게 썩었다.
사마염은 처음에는 간관(諫官)을 설치하고 비판을 관대하게 받아들이며, 태의사마 정거가 바친 꿩의 머리털만 모아서 만든 옷인 치두구(雉頭裘)를 그 자리에서 불태워버리거나, 오나라 전선을 지키던 석포가 반란을 꾀한다는 소문이 돌자 체포령을 내렸다가 석포가 알아서 자진 출두해오자 오히려 최고위관인 사도로 임명하는 등 나름대로 개념인이었다.
그러나 천하를 발 밑에 둔 뒤에는 바로 우주선을 타고 안드로메다 은하 쓰레기장에 개념을 버리고 통치를 시작했으니 나라 망치기 대회를 폈다. 오나라의 손호가 모아들인 5천 궁녀를 그대로 흡수해서 1만 궁녀를 현실에 실현하는 현실판 하렘물짓을 하는가 하면, 이 많은 궁녀 가운데 오늘밤은 누굴 골라잡을 지 몰라서 양이 끄는 수레에 타고 양 가는 대로 로또를 돌린 이야기도 유명하다. 게다가 이건 삼천궁녀처럼 과장한 야사가 아니라, 엄연히 정사에 나오는 기록이니 흠많무. 이 때문에 궁녀들은 양을 유인하러 양들이 좋아하는 댓잎과 소금물을 문간에 깔아놓았다고. 또 관리 선발에서 "사치가 심한 건 좋은 것이지만, 술병은 평생 못 고친다."는 망언도 했다.
황제부터가 이 모양이니 나라 꼴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당장 문벌귀족들의 사치와 축재, 권력형 부정부패로 나라 말아먹기 선수권 대회(...)를 시작했다. 승상 하증은 하루에 1만 전이라는 거금을 들여서 진수성찬을 차려도 먹을 게 없다며 징징거렸고, 사마염의 사위 왕제는 사람 젖으로 키운 돼지 고기를 사마염에게 대접하는가 하면 낙양 한복판에 말 기르는 사육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시대 사치의 끝판왕은 역시 왕개와 석숭의 돈지랄 레이스. 왕개는 왕원희의 동생으로 사마염의 외삼촌이고, 석숭은 위에서 이야기한 석포의 막내아들인데, 왕개가 엿기름으로 솥을 닦으면 석숭은 밀랍을 땔감으로 쓰고, 왕개가 명주로 40리에 장막을 치면 석숭은 비단으로 50리에 장막을 치고, 석숭이 집을 산초로 칠하면 왕개는 집을 주사로 칠했다. 왕개가 조금밀린다 싶자 사마염은 외삼촌을 위해 2자(60cm)가 넘는 귀한 산호수를 하사했고 이걸 석숭집에 들고가서 자랑하자 석숭이 황제의 하사품을 쇠몽둥이로 개박살을 내버리고, 이에 왕개가 따지자 사과한답시고 창고에서 3~4자(90~120cm) 정도되는 산호수를 7개 정도 꺼내와서 하나 가져가라고 하였다.
이처럼 나라 꼴이 거시기하던 거시적인 원인으로는 우선 황제의 권위가 귀족 사회에서 초월적인 위상을 차지하지 못했던 점을 꼽을 수 있다. 사마씨 일족이 위나라 말에 나름대로 절대적 지위를 구축했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귀족 사회의 일원으로서 나온 지위였다. 한나라와 위나라의 시조 유방과 조조가 극적인 자수성가를 이루어낸 데 반해, 사마씨는 오히려 전통적 귀족 사회의 일원이라는 위치가 발목을 잡았다.
그러므로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위나라처럼 강력한 법치로 귀족들을 통제 해야겠지만, 사마염이 법치의 각박함을 내세우며 유교적인 예치로 돌아갈 것을 표방한 진나라는 그런 거 없었다. 하다 못해 사마염 본인이 초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모범을 보였다면 그나마 나았을 것을 통일 직후 황제부터 썩어 들어가니 이 상황에서 자체적으로 군왕의 위엄을 내세울 무언가가 없었고 귀족의 지지에 의존해야 했다.
이러니 자연스레 황제가 귀족들의 눈치를 봤다. 당장 서진시대에 구품관인법이 귀족들이 고위관직을 대대손손 해먹는 제도로 완전히 바뀌었다. 위에 언급된 대로 왕제가 '사람 젖을 먹여서 키운 돼지고기'를 대접하자 사마염은 몹시 불쾌해했지만 내색도 못하고 자리를 피해버렸다. 석숭이 쇠몽둥이로 사마염의 하사품인 산호수를 깨부셔도 별 말 하지못했다.(...) 주원장이었으면 석숭의 9족을 멸했을 텐데 석숭의 9족만 죽으면 다행이지 천자의 하사품을 간수하지 못한 왕개도(...) 결국 뭐 석숭의 9족은 몰라도 3족은 망했으니까 뭐(...)
게다가 서진시대 유교사상의 행보는 한밤중에 길 잃은 어린아이와 같았다. 왕망의 한실 찬탈 이후 유교는 사회와 교감하기보다는 제 자신 속으로 깊이 침잠하며 형식화와 의례화의 길을 걸었다. 삼국시대에 이르러선 조조와 사마의 같은 권신들이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면서 공융, 예형 같은 유학자들이 탄압받아 죽어나가고 특히 혜강은 어처구니없게도 불효죄로 처형 당하면서[2] 현실과 학문의 괴리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이는 유학자의 현실도피를 더욱 악화했다.
그나마 삼국시대 유학자 중의 마융, 정현, 노식 등의 학풍이 남았으면 나았으련만, 이 당시 유학의 대표자들은 몸은 숲 속으로 정신은 유교를 곡해하며 도가를 즐기는 축이거나, 아니면 약쟁이 하안, 왕필, 하후현과 같은 귀족 도련님들의 정말 세련한 현학이었다. 현학 항목에도 나왔지만 이들의 현학은 유교이되 유교가 아닌 터라 높은 성취를 이룬 하안이나 왕필 같은 사람들이야 호학과 중용과 간지 펄펄 등을 동시에 조화시켰을지 모르겠지만 현실과 유리하긴 매한가지에, 이만한 경지에 이르지 못할 얼치기들은 뭣도 모르고 허무주의, 중2병, 과시욕, 신비주의로 흘러가기 딱 좋았다.
결국 이 둘의 시너지 효과가 난 결과, 후한의 청의(淸議)를 이어받아 불의한 정권에 대한 저항의식을 소극적이더라도 가졌으며, 유학 이외에 다른 방향에 대한 생각도 할 수 있도록 하고, 탐욕과 권력욕을 경계하던 초기의 청담사상은 그 의미를 상실하고 권력가의 취미활동 겸 헛소리 경연대회인 공담(空談)으로 전락하여 위진남북조시대가 종결될 때까지 해악을 끼치게 된다. 여기에 환각제까지 유행하여 멍멍이판이 된 건 덤.
(그래도 여기까진 크게 나쁘진 않았다.)
1.2.4 현실에 구현된 막장 드라마
- 290~307년 : 팔왕의 난
천하통일 뒤 정확히 10년 만에 사마염이 죽자, 그 뒤를 이어서 사마충이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사마충은 생전 지금으로보면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한다. 사마염도 살아생전 이를 걱정했지만 그래도 사마충의 아들인 사마휼이 총명하니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서 장남인 사마충으로 밀고 나갔고, 그 대신 작은아버지인 사마량, 장인어른인 양준(楊駿), 개국공신인 위관(衛瓘)에게 사마충의 보좌를 부탁했다.
하지만 양준은 황족으로 군권을 잡던 사마량을 경계해서 쓰러진 사마염이 애타게 찾는데도 사마량을 예주로 발령내서 쫓아내다시피 보내버렸고, 이에 남은 위관은 알아서 버로우를 타버렸다. 이로써 외척인 양준 일파가 조정의 권세를 틀어쥐고 전횡을 일삼았는데, 이때 이들이 쥔 권력을 매의 눈으로 노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황후 가남풍이었다.
우선 가남풍은 양준을 꼬드겨서 형주의 군권을 잡고 있던 초왕(楚王) 사마위(瑋)와 양주의 군권을 잡고 있던 회남왕(淮南王) 사마윤(允)을 불러들인 뒤, 순식간에 양준을 반역자로 선포하고 사마위와 사마윤으로 양준과 양씨 일족들을 싹 쓸어버렸다. 그리고 남은 두 고명대신인 사마량과 위관이 정권을 넘겨받자, 다시 사마위를 꼬드겨서 이들마저 제거한 뒤 그 죄를 물어서 사마위까지 토사구팽해버렸다. 과연 계획대로. 며느리의 반란
이렇게 조정의 권세를 한 손에 틀어쥔 가남풍은 그래도 장화와 같은 인재를 중용하면서 십여 년 동안이나 정사를 그럭저럭 꾸려나갔다. 오히려 평화로운 시대가 유지되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는 모양.[3]
어쨌든 전란의 시대가 끝났으니 호족들의 사치와 병크에도 고생은 적었을 것이다. 삼국시대의 인구는 세 나라를 더해도 777만명 정도인데, 서진 대에 이르러 갑자기 인구가 1600만명으로 불어나는 것은 난세 동안 호적에 안 잡히던 백성들이 통일 뒤 나타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참고로 고대의 호구(戶口)라는 것은 戶의 경우 '집'을 의미하며, 口는 개별적인 인구를 말한다. 사료에 따라 戶만 기록된 경우도 있고, 호구가 기록된 경우도 있다. 보통 이들 口를 신분별로 나누는 것은 시대마다 다양한 용어를 사용해서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전한 시대에는 일단 대남(大男), 소남(小男), 대녀(大女), 소녀(小女)등으로 구분한 것이 보인다[4] 이처럼 진한 시대에 이미 이들에 대해 성별, 연령에 따른 상세한 인구 파악이 이루어졌으며, 지금도 간간히 목간 자료로 출토되고 있다. 물론 완벽한 파악은 한없이 멀었지만...
즉 이 시대에 인구 폭증은 이러한 조사가 훨씬 원활해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 다만 전쟁이나 혼란으로 인한 인구 감소는 문명 시작 이전의 장기 빙하기와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전근대에는 큰 의미가 없는 것이, 그럭저럭 호구 파악이 잘 되던 청나라 시기를 보면 19세기의 혼란기에 중국의 인구는 감소하기는 커녕 오히려 너무 증가해서 문제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태평성대였는가 하면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당시 중국은 소빙기에 들어선 기후인지라 황하와 장강이 말라붙을 만큼(!) 극심한 가뭄과 한파에 시달리고 있었다.[5] 이런 마당에 왕융 같은 귀족들은 제 잇속부터 챙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고 있고, 실권자인 황후는 밤마다 애들과 놀아나면서 검열삭제를 벌이는데다, 황제라는 작자는 '곡식이 없으면 고기죽을 먹어'라는 지적장애에 걸맞는 소리나 하고 있으니.
끝내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이러한 현실 속에서 팔왕의 난이라는 초특급 병크가 터지게 된다. 본래 사마충의 태자 사마휼은 가남풍이 아니라 후궁 사구(謝玖)의 소생이었는데, 가남풍은 의붓아들이 황제를 하면 자신의 정권이 무너질 것을 염려한 나머지 사마휼을 모살했다. 그 방법이란 사마휼에게 술을 잔뜩 먹이고 '폐하께선 이제 물러나십시오. 안 가시겠다면 제가 보내드리지요.'라는 글을 베껴쓰게 한 것. 이 일로 사마휼이 유폐되자 태의령 정거[6]를 보내 독살하려고 했는데, 사마휼이 약을 거부하자 약방망이로 때려 죽였다.(...)
이것이 301년, 마침 때를 노리던 조왕(趙王) 사마륜(倫)은 이때다 하고 사촌인 제왕(齊王) 사마경(冏)과 함께 낙양으로 진군해서 가남풍 일파를 몰살시킨 뒤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사실 사마륜도 부하 손수(孫秀)의 꼭두각시였을 뿐이었다니 또 모순이다.
여기서 끝났다면 또 모르겠지만, 태자는 이미 죽은 판이고 분수를 모르는 사마륜은 사마충을 태상황으로 밀어낸 뒤 기어코 자신이 황제로 올랐다가, 사마경을 필두로 한 나머지 황족들에게 몰려서 3개월 만에 죽었다. 그 뒤로는 황족들 가운데 한 놈이 나대면 나머지가 족치는 무한루프 상태로 돌입해서 서로 치고박다가, 사마충이 죽은 뒤[7] 동해왕(東海王) 사마월(越)이 사마치(熾)를 황제로 옹립하면서 팔왕의 난은 가까스로 끝난다.
1.2.5 영가의 난과 화북 상실
그러나 내전을 틈타 자립한 이민족이 이미 진나라 내부에 일대 세력을 이룬 상태였다. 특히 조조가 병주에 정착시켰던 흉노가 가장 큰 문제였는데, 이들은 팔왕의 난 막바지에 성도왕(成都王) 사마영(潁)과 결탁해서 선비족을 끌어들인 사마월과 맞서다가, 이내 사마영이 사마월에게 패사하자 흉노족을 끌어모아서 한(漢)[8]을 세우고, 그의 아들 유총이 남하하면서 그 부하들(석륵, 왕미, 유요 등)이 화북 각지를 휩쓸고 다니기 시작했다.
더욱이 팔왕의 난을 거치면서 서진의 지방 통치는 사실상 와해했기에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원래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지방 호족들은 군사와 행정의 여러 직책을 겸임함으로써 독자적인 군벌 세력이 있었다. 그런데 중국을 통일한 사마염은 다시 군사와 행정을 분리시키는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여서 지방의 군대를 대부분 해산시켰고, 대신 왕으로 분봉한 황족들에게 군사권을 쥐어주어서 이를 보완시키려 했지만 이것들이 지들끼리 치고받다가 공중분해했으니.(...)
때문에 실권자인 동해왕 사마월은 중요 거점에 친족들을 보내서 거점을 장악시키는 등 고군분투했지만, 애당초 이러한 자의적인 인사는 황권에의 도전으로 해석할 소지가 컸다. 실제로 자신을 향한 참소가 빗발치자 사마월은 그만 분사했으며, 뒤이어 실권을 잡은 왕연(王衍)이 사마월의 장례를 치른답시고 황제를 버리고 피난가다가 죄다 석륵에게 잡혀서 삭 죽어버렸다.
이때 왕연과 동행하던 낙양의 주둔군이 다수 죽었기에, 석륵 등은 이 기회를 틈타 낙양까지 쳐서 함락시켰다. 선발대인 호연안(呼延安)이 배를 모두 불태워버리는 바람에 황제 사마치는 달아나지도 못하고 그대로 포로로 잡혔다. 이것이 바로 영가의 난. 포로가 된 사마치는 2년 뒤에 유총에게 불려와서 노예 복장을 하고 술을 따르다가 그 모습을 본 옛 진나라의 신하들이 통곡하는 바람에 위험인물로 간주, 살해되었다.
이에 관중에서 장안을 수복하고 태자로 추대받아 진나라 임시정부를 이끌던 사마업(業)이 사마치의 부고를 접하고 자신이 황제에 올랐다. 하지만 이 또한 각지에 흩어진 군벌들의 지원을 못 받아 2년 만에 장안이 포위되자 농성 끝에 항복했고, 역시 이듬해에 유총에게 불려와 술을 따르다가 그 모습을 본 옛 신하들이 통곡하는 바람에 또 죽는다. 이로써 화북의 진나라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완전히 사라졌다. 아니 그러니까 왜 자꾸 티내고 울어서(...)
다만 강남에서 호족들을 규합하던 사마예가 사마업이 죽은 이듬해인 317년에 그의 부고를 듣고 황제로 즉위하여 진나라의 명맥을 이어나가는데, 이 나라를 동진이라고 부르며, 이후 백여 년 동안 이민족 왕조가 화북에서 조지고 부시고 갈아엎으며 깽판을 치는 사이 강남에서 한족 왕조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동진은 서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는 재정신을 차려서 100년 이상 존속했다.
1.3 평가
파일:Attachment/end-musktree.jpg |
고우영 삼국지 엔딩 |
삼국지연의로 널리 아는 삼국시대를 통일한 최후의 승자인 데다가, 제갈량의 라이벌격으로 추켜세워져 유명한 사마의의 후손들이 세운 왕조인데도 취급이 묘하게 안습하다. 연의 기반 창작물에서는 워낙 후반에 등장하다 보니 듣보잡 취급도 받거니와, 일부에서는 삼국통일을 가로채서 거저 먹었다고 보기도 하는 모양. 하기사 삼국지의 영웅들의 노력을 다 죽 쒀서 개 준 꼴로 만들어버린 셈이니, 삼국지 팬 입장에서 달갑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삼국통일 뒤 세 나라의 온갖 나쁜 점(위나라의 비정통성, 촉나라의 암군, 오나라의 미약한 왕권[9], 삼국 공통으로 쩔어주는 간신들 등)만을 그대로 물려받아 팔왕의 난, 영가의 난에 모래성처럼 흔들렸다. 원체 삼국통일의 위업보다는 그 막장성으로 더욱 주목받는 왕조기도 하고(...)
그러나, 이러한 시점만으로 서진에서 이어지는 남조 전체를 폄하할 수는 없다. 오호가 세운 국가들은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 상태로 막장 서진보다 국력/국민 총화/체제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꽤 성공한 케이스인 전진과 북위만을 부각하는 행태는, 전진과 동시기의 동진이 끝내 북방 야만족에게 망하지 않고 백 년 이상 사직을 지켜냈으며, 일방적인 열위에만 있지 않았고 몇 차례 큰 공세를 퍼부은 것은 싹 잊고 취사선택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뒷날 동진을 찬탈한 유송이 자신들의 성이 유씨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촉한의 후계자 운운 하기도 했으나,나라 이름이나 한으로 바꾸지 유송이 북위에 대해 정통임을 과시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서진-동진-유송으로 내려오는 정통 중국 왕조 계승성 덕택이다. 남조는 양나라 이전에도 여전히 북방 오호들의 불안정한 국가들보다는 안정되어 있었는데 이는 이미 서진의 기반을 계승한 동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남조 정권의 정통성은 오호나 북위나 가끔 부정했지, 역사를 좀 아는 사람들 같으면 여전히 남조를 더 전통 중국에 더 가깝게 본다. 서구 학계에선 전반적으로 남조를 동양판 비잔티움 제국으로 보는데 이는 일본인 연구자들도 인정하는 사항이다.
결국 승리한 건 북조 아니냐고 하지만, 남조와는 달리 5호16국들은 서로 간에 체제 계승성도 없고, 호한 상호 간의 불신과 반목에서 비틀거리면서 국가 자체의 생사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던 시기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남조 자체도 서진과 동진에서 이어지는 연속성은 있을망정 큰 변화의 굴곡을 겪긴 했다. 오로지 삼국지연의 독자의 일변도식인 시선만으로 이 중요한 시기를 보는 것은 제대로 된 자세가 아니다.
묘하게 흥미로운 일화가 많다. 나중에 거짓으로 드러난 백제의 삼천궁녀와 프랑스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가 모두 현실 정사로 더 심하게 나왔다. 여기에 국가 막장 테크에 국가 막장의 요소와 원인이라는 내부 분열, 민족과 문화 관리, 수뇌부의 부패와 체제의 붕괴, 자연적 요인, 전쟁과 외침이 모두 복합적으로 나타난 바 있다.
2 매체화
진삼국무쌍6에서 신세력으로 나왔다. 이제 사국무쌍이라 불러야 하느니 개드립이 많았지만 스토리모드를 해보면 그냥 후기 위나라다. 진짜 진나라 소속인 인물도 7 기준으로 사마소, 왕원희, 가충, 문앙 넷 뿐이고 사마염은 엔딩에서 뒷모습만 잠깐 나온다. 삼국지관련 2차 매체들 가운데 삼국지 9 다음으로 제갈량 사후 부분을 가장 비중있게 다룰다는 평가를 받는다.
만화로는 고우영 십팔사략에서 8권에서 오호십육국, 남북조시대를 다루면서 서진의 멸망을 재미있게 묘사했다.물론 그래봐야 막장은 막장이다
2.1 역대 황제
대수 | 재위기간 | 묘호 | 시호 | 성명 | 약력 | 능호 |
추존 | 고조(高祖) | 선황제(宣皇帝) | 사마의(懿) | 사마염의 조부, 건국의 기초를 닦음. 179년 출생, 251년 사망. 73세. | 고원릉(高原陵) | |
추존 | 세종(世宗) | 경황제(景皇帝) | 사마사(師) | 사마염의 백부. 208년 출생, 255년 사망. 48세. | 준평릉(峻平陵) | |
추존 | 태조(太祖) | 문황제(文皇帝) | 사마소(昭) | 사실상 진나라의 초대 군주. 211년 출생, 265년 사망. 55세. | 숭양릉(崇陽陵) | |
1대 | 265-290년 | 세조(世祖) | 무황제(武皇帝) | 사마염(炎) | 진나라의 초대 황제이자 정상적인 권력을 누린 마지막 황제[10] 236년 출생, 290년 사망. 55세. | 준양릉(峻陽陵) |
2대 | 290-306년 | 효혜황제(孝惠皇帝) | 사마충(衷) | 백치 황제, 가남풍의 남편. 263년 출생, 306년 사망. 44세. | 태양릉(太陽陵) | |
임시 | 301-301년 | 조왕(趙王) | 사마륜(倫) | 사마충의 숙조부, 3개월 천하. 301년 사망. | - | |
복위 | 290-306년 | 효혜황제(孝惠皇帝) | 사마충(衷) | 백치 황제, 가남풍의 남편. 263년 출생, 306년 사망. 44세. | 태양릉(太陽陵) | |
3대 | 306-311년 | 효회황제(孝懷皇帝) | 사마치(熾) | 영가의 난이 터짐. 284년 출생, 313년 사망. 30세. | - | |
4대 | 313-316년 | 효민황제(孝愍皇帝) | 사마업(鄴) | 장안의 임시정부에 의해 옹립. 300년 출생, 317년 사망. 18세. | - |
이하는 동진/역대 황제 항목으로.
서진 황실을 더 알아보고자 한다면 서진/계보 문서로.
3 오호십육국의 왕조 서진(西秦)
오호십육국시대 선비족 걸복부(乞伏部)의 걸복국인(乞伏國仁)이 세운 나라이다. 본래 국호는 당연히 그냥 진(秦)이고, 높여 부르면 대진(大秦)이었지만 같은 이름을 가진 왕조가 많아 구분을 위해 서진이라고 부른다. 다만 진이란 국호는 2번째 군주인 걸복건귀(乞伏乾歸) 대부터 실제로 썼다. 진이라는 국호를 쓰기 시작하기 전까지 포함하여 이 정권이 있던 기간은 385~400년과 409~431년이다. 중간의 400~409년에는 후진(後秦)이 복속시켜서 나라가 잠시 사라졌었다.
불안정한 치세로 수도가 자주 바뀌었다. 수도였던 곳은 금성(金城), 용사성(勇士城), 원천서성(苑川西城), 원천(苑川), 담교(譚郊), 정련(定連), 남안(南安) 등이다.
3.1 역대 군주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1대 | 열조(烈祖) | 선열왕(宣烈王) | 걸복국인(乞伏國仁) | 건의(建義) 385 ~ 388 | 385 ~ 388 | - |
2대 | 고조(高祖) | 무원왕(武元王) | 걸복건귀(乞伏乾歸) | 태초(太初) 388 ~ 400 경시(更始) 409 ~ 412 | 388 ~ 400, 409 ~ 412[11] | 원평릉(元平陵) |
3대 | 태조(太祖) | 문소왕(文昭王) | 걸복치반(乞伏熾磐) | 영강(永康) 412 ~ 419 건홍(建弘) 420 ~ 428 | 412 ~ 428 | 무평릉(武平陵) |
4대 | - | 여무왕(厲武王) | 걸복모말(乞伏暮末) | 영홍(永弘) 428 ~ 431 | 428 ~ 431 | - |
- 제1대 걸복국인은 대선우(大單于)를 칭했고, 전진(前秦)이 원천왕(苑川王)에 책봉했다.
- 제2대 걸복건귀는 처음에 대선우와 하남왕(河南王)을 칭했다가, 전진이 양왕(梁王)에 책봉했다. 394년에는 진왕(秦王)을 칭했다. 400~409년 후진에 복속해 나라가 잠시 망하고 걸복건귀는 망명 생활을 했다가, 409년에 나라를 되찾아 다시 진왕을 칭했다.
- 이 정권의 군주는 천왕(天王)이나 황제를 칭한 적이 1번도 없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천자(天子)처럼 행세해서인지 대선우(大單于)[12]의 칭호를 썼고 천자만 쓸 수 있는 묘호와 능호를 썼다.
4 書鎭
문진 참고.
5 인명
- 실존 인물
- 가상 인물
6 일지매의 서진
일지매의 등장 인물로 도성군 사령관을 맡는다. 여자인데도 남자처럼 행동하는 까닭은, 그녀의 어머니가 딸을 낳으면 불이익을 받으니 왕에게 아들이라고 말해서였다. 아버지도 서진이 여자로 행동하면 혼내 주었다고. 풍이가 밤마다 일지매로 활동하다 숲 속에서 반한 상대이자 적수이다. 하지만, 26화에서 둘이 거지를 도와주고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 비슷한 사례로 북송과 남송이 있다. 한나라의 경우 전한과 후한 사이에 신나라가 있었기 때문에 잠깐 끊긴 적이 있지만, 이 쪽은 그런 것도 없다.
- ↑ 다만 혜강의 죽음만큼은 서진 탓은 아닌 게, 위나라에서 사마소의 손에 죽었다.
- ↑ 수년 동안 암군이 즉위해 있는데도 조야가 안정되었으니, 장화 등의 공이었다. 數年之間,雖闇主在上,而朝野安靜,華等之功也。─ 자치통감
- ↑ 호북성 형주시 출토 <이년 서향 호구부>등
- ↑ 유소민(劉昭民), 『기후의 반역』,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 사마염에게 치두구를 바쳤다가 혼쭐난 그 인물 맞다.
어째 싹수가 노랗더라니 - ↑ 동해왕 사마월이 떡을 줬는데 그걸 먹고 앓다가 죽었다는 점에서 독살이 확실하나 증거는 없다.
- ↑ 유연의 유씨는 선조 묵특이 한고조와 화친을 맺을 때 성을 받았기 때문으로, 국호는 이에 근거했다. 유요가 즉위한 뒤에 조(趙)로 개명한다. 이것을 전조라고 부르고, 여기서 분가한 석씨의 조나라를 후조라고 부른다.
- ↑ 사실 이것은 사마씨가 비정상적으로 집권한 것이 컸다. 사마씨는 자신의 권력장악에 방해가 될 것 같으면 황제라도 거리낌없이 폐위시키거나 죽였고 자신에게 걸리적거리는 세력도 과감히 제거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집권과정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호족들이었고 결국 사마씨 세력이 황제가 된 후에는 내내 왕권이 약하고 암군만 나온 원인이 되었다.
- ↑ 사실상 진나라는 사마염 이후로 정상적인 권력을 누린 황제가 없다. 사마충은 가남풍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으며 팔왕의 난에 휩싸여 혼란속에 죽었다. 진회제, 진민제는 영가의 난으로 인해 전조의 포로신세가 되어 비참하게 죽었다. 진원제는 왕돈의 꼭두각시 신세였으며 진명제 때 황제권을 회복한듯 싶었지만 요절하였고 이후 황제들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환온, 환현같은 신하의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하였다. 효무제 때 잠시 황제권을 되찾는 듯 싶었지만 효무제가 어이없게 죽고난 후 진안제와 진공제는 유유의 꼭두각시 신세가 되었고 유유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리고 진나라는 멸망했고 이후 진나라 황족들은 유유에 의해 거의 몰살당한다.
- ↑ 400 ~ 409 사이 후진(後秦)에 복속
- ↑ 선우의 본래 뜻이 천자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