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유령 전투

해유령 전투
날짜
1592년 음력 5월 16일
장소
조선 경기도 양주 해유령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조선 왕국쇼쿠호 일본
지휘관신각
이양원
이혼
이시언
불명
병력불명60여명
피해 규모불명불명
결과
조선 관군의 첫 승리.

1 개요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음력 5월 16일에 해유령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이자, 조선군의 첫 승전이다.

2 배경

4월 28일 신립이 탄금대에서 참패하면서 왜군의 한양 진군을 저지할 수단이 사라졌다. 한양에 남은 군사는 4천 5백(실록)에서 7천(징비록)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정예들이 모두 신립휘하로 차출되어 갔다 전사해 질적으로나 사기로보다 도저히 제대로 된 방어전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에 조정은 4월 30일 새벽 파천을 단행했고 도원수 김명원과 부원수 신각, 유도대장 이양원을 남겨 한강 방어선을 담당케 했다. 왜군과 숫적, 질적 차이가 너무 심하고 제대로 지휘권을 행사할 입장도 되지못해[1] 방어가 어렵다 여긴 김명원은 군을 물리려 했는데 사기가 심각하게 저하되어 있던 병사들은 지휘부가 퇴각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마자 붕괴했다.

조정은 5월 3일 개성을 떠나 평양으로 향하며 김명원에게 임진강에 방어선을 치고 적을 막게 했다. 헌데.... 임진강에 도착한 김명원은 자신과 합류해야할 부원수가 보이지 않음을 알아챈다.

3 진행

김명원과 합류하지 않은 신각은 유도대장 이양원과 함께 양주의 산 속으로 들어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전열을 정비하다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혼이 이끄는 군사들과 합류해 반격을 기도했다.

5월 16일 신각은 한양에서 나와 흩어져서 민가를 노략질하던 소수의 왜군을 복병으로 격파, 60여 명을 죽였다.

개전이래 최초의 승리였다. 허나 문제가 있었으니 편제상 당연히 합류해야할 도원수와 따로 움직이면서도 신각, 이혼, 이양원 중 누구도 장계를 올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2] [3]

4 결과

장계 한장 없이 어디서 뭘 하는지 알길이 없는 부원수를 두고 김명원은 여태껏 많은 장수들이 그랬듯 적전도주한 것으로 판단하고 조정에 이양원을 따른다는 핑계로 도망갔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를 받은 비변사는 우의정 유홍이 주도하여 신각의 참형을 건의했고, 선조는 허락한다. 신각이 어디 군수나 병사도 아니고 부원수라는걸 감안하면 성급한 감이 없잖은 결정이였는데 개전 직후 온건한 성향인 류성룡이 탄핵당하고 강경파 신료들이 득세한 영향으로 보인다.

그런데 신각을 참하라는 명을 받은 선전관이 떠난 후 승전보가 도착했다. 조정에는 급히 사람을 보내 사형 집행을 멈추려 했지만 도착했을땐 이미 신각의 목이 떨어진 다음이었다. 억울하게 죽은데다 90살 노모까지 봉양하고 있어 신각의 죽음을 들은 사람치고 원통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본디 유순한 성격으로 남을 모함하거나 해코지하는 일이 없었던 김명원은 고의는 아니었다지만 멀쩡한 장군을 죽게만든데 책임을 느꼈는지 정유년 선조가 작정하고 이순신을 쳐내려 했을때는 끝까지 동조하지 않았고 이순신의 구명과 재기용에 힘썼다.

5 창작물에서

징비록(드라마) 18화에서 등장한다. 양주에 주둔하던 신각이 척후를 통해 일본군이 왔다는 보고를 듣자 매복하기로 하였고 풀숲에서 선조의 다음 도피처를 살피러 척후를 나간 소규모의 가토군 소속 일본군이 지나는 곳을 매복했다가 신각이 일본군 전방에 나서는 것을 시작으로 병사들이 좌우에서 나와 일본군을 덮쳐서 모두 몰살한다.영상보기

  1. 이양원은 전직 우의정인데 김명원은 이때까지 판서직 역임한게 다였으니 명령계통이 제대로 발휘될리가 앖었다.
  2. 이일이 상주, 탄금대에서 연패하는 와중에도 장계를 꾸준히 올렸다는걸 고려하면 명백히 이들의 실책이었다.
  3. 아예 연락이 끊긴 상태는 아니었다. 기재사초에서는 김명원이 이미 양주에 있는 이양원과 신각의 소재와 병력을 파악했으며 힘을 합쳐 한강을 수복하겠다는 장계를 보낸것으로 보고를 정정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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