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각

申恪

?~1592

본관은 평산(平山)

임진왜란 당시 조선무관.

왜란이 터지자 신각은 부원수 자격으로 도원수 김명원과 함께 한강 방어 임무를 맡았으나 중과부적에 사기도 땅에 떨어져 있어 방어전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도원수 김명원은 군을 물려서 재정비하려 했으나 도원수가 군을 물리려는 시도를 한 것만으로도 군이 와해되어 버렸다. 한강 사수가 실패로 돌아가자 신각은 최대한 병력을 수습해 양주로 후퇴한 뒤 유도대장 이양원, 함경도병마절도사 이혼과 합류했다.

그리고 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일대인 해유령 근처에서 왜군 소부대를 기습해 70명을 참하여 임진왜란 조선군 최초의 승리기록을 세운다. 규모가 작아 무시되는 경향이 있지만 귀중한 승리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 파천 과정에서 온 혼란으로 김명원과 신각은 그만 연락이 두절되어 김명원은 조정에 이양원을 따른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쳤다.고 장계를 올린다. 그리고 선조바보같이 이를 그대로 믿어버려서 선전관을 보내 신각을 죽이게 한다. 그리고 잠시 후 해유령 전투의 승전보가 올라오자 그제서야 선조가 다시 선전관을 보내 신각을 죽이지 말 것을 명령하였으나 이미 신각은 처형된 뒤였다. 일개 군수도 아니고 부원수급 고위 무장의 처형이란 점에선 상당히 성급하게 진행된 감이 있었다. 이는 개전초의 조정분위기도 강하게 작용했다. 예상못한 대규모 침공으로 개전이전 온건한 입장에 있는 신하들이 발언권을 잃고 전면패주로 인해 일선 장수들에 대한 강경론이 제기된 시점인데 운 나쁘게도 제대로 걸려버렸다.

하여간 정말로 억울하게 죽은 인물. 그가 왜란 이전 조헌의 말을 듣고 황해도 일대의 방비를 어느 정도 해 놓은 덕택에 훗날 황해도 연안성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이정암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물리칠 수 있었다.

본디 유순한 성격으로 남을 모함하거나 해코지하는 일이 없었던 김명원은, 고의는 아니었다지만 멀쩡한 장군을 죽게 만든데 책임을 느꼈는지, 정유년에 선조가 작정하고 이순신을 쳐내려 했을때는 끝까지 동조하지 않았고 이순신의 구명과 재기용에 힘썼다.

김성한의 소설 7년전쟁 2권 마지막챕터 '비극의 장군 신각'에 등장하는데 억울한 죽음이후 선전관이 도착하자 신각의 부하들이 조정에서는 무슨일을 이런식으로 처리하냐며 어이없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