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본관 평산(平山)[1]. 자 입지(立之). 시호 충장(忠壯). 여진족 토벌로 용맹을 떨친 맹장이지만 임진왜란 때 탄금대 전투에서 패전하고 자결한 것으로 잘 알려진 무장이다.
2 북방의 맹장
율보리와 니탕개가 많은 무리를 이끌고 와서 재차 방원보를 포위하였는데, 최호가 조방장 이발(李) 등과 함께 성에 올라 힘껏 싸웠고 우후 장의현(張義賢)과 판관 윤담(尹湛) 등이 종성부(鍾城府)에서 와서 구원하여 안팎으로 합세하여 성문을 열고 나와 크게 공격하니, 적이 마침내 패하여 물러갔다. 이때에 정예로운 장졸(將卒)들이 변방 진에 많이 모였는데 신입을 대장으로 받들기를 희망했으나, 조정에서 미처 발탁하여 등용하지 못하였다. - 선조수정실록 16년, 5월 1일 기사.
신립의 리즈 시절
1567년(선조 즉위년) 무과에 급제한 이래 여러 무관직을 거쳤다. 신립의 최대활약은 1583년 온성 부사 때 북쪽 변경에 침입해온 여진족 니탕개를 격파하는 등 야인 토벌에서 큰 두각을 나타냈다. 또한 1587년 흥양에 왜구가 침입하자 우방어사가 되어 군사를 인솔, 토벌에 나섰다가 이미 왜구가 철수했으므로 돌아오던 중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는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탄핵되기는 했지만 여진족 토벌에서 워낙 용명을 쌓았던지라 당시 이일과 함께 당대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칭송받던 인물이었다. 특히 기병을 잘 다룬다는 평가를 받았다. 곧 함남절도사에 다시 등용되었으나 졸병을 참살한 죄로 파직, 중추부동지사의 한직으로 전임되었다.[2]
다른 건 몰라도 싸움 실력 하나는 당대 최강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포위된 상태에서 화살 한 발로 적장을 사살해 적들이 물러가게 했다." "혼자서 수십명을 쳐죽였다." "신립의 용맹이 무서워서 감히 적들에게 항복하지 못했다." 등의 서술로 신립의 용맹을 칭찬하고 있으며 제승방략에 기록된 니탕개의 난 토벌 기록을 보면 백마를 탄 적장을 일격에 쏘아죽여 적을 물러가게 한거나(경원진 전투) 아군을 포위한 여진기병 1만 명에게 돌격해 적장을 사살하고 퇴각하는 적 수십명을 쏘아죽이는(훈융진 전투) 무시무시한 무용을 볼 수 있다.
기록대로라면 고려에는 소드마스터 척준경, 여말선초에 구국 만렙장수 이성계가 있었다면, 선조때는 보우마스터 신립이 있었다!!
임진왜란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역사에서 이순신이 아니라 신립이 조선 중기의 명장이 되었을 것이다.
3 임진왜란
신립의 명성이 처박히게 된 흑역사
북방의 명장 남방의 막장
그러나 이러한 무용 이외에 종합적으로 평가했을때 신립이 과연 명장으로 칭송받기에 적절한 인물인지에 대해서 의구심이 드는 기록도 있다. 쉽게 말하면 "신립 거품론".
특히 왜란 발발 10개월 전의 기록이 흥미롭다. 1591년 7월 비변사에서 국방에 관한 논의가 있었고, 비변사에서는 "왜적은 수전에는 능하지만 육지에서는 민활하지 못하다. 그러니 육지 방비에 주력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신립은 한술 더 떠 "왜적들은 수전에 강하고 육전에 약하니 아예 수군을 폐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충무공 이순신이 "바다로 침입하는 왜적을 저지하는데는 수전이 제일이므로, 수군을 폐해서는 안됩니다"라고 극력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개전 이후 수군의 역할을 감안하면 신립의 이 말로 인하여 자칫 나라가 진짜로 망할 뻔 했다. 이순신 덕분에 일본군의 전략 자체가 와해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물론 비변사와 신립이 이런 주장을 한 배경에는 을묘왜변의 경험이 있었다. 을묘왜변에서 왜군은 바다에서는 맹선을 주력 전선으로 삼은 조선 수군을 농락했지만 정작 육지에 상륙하자마자 화살 세례에 전멸했다. 판옥선은 이때의 경험으로 인해 개발, 배치된 것이다. 그래서 당시까지 조선에서는 일본군은 수전에 강하고 육전에 약하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조선이 생각하던 일본군은 왜구였다는 걸 생각해보자.
신립은 왜군이 특성상 기병을 동원할 수 없다는 것까진 그런데로 잘 예측했다. 문제는 전국시대를 거치며 단련된 일본군과의 전면전이란 상황을 전혀 상정 못했다는 것이며, 을묘왜변은 알고 있으면서 그에 대한 대책으로 개발된 판옥선의 존재나, 그 가치에 대해서도 무지했다는 점이다.[3] 반면 이순신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으며, 판옥선을 주력 전선으로 둔 조선 수군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았다는 점에서 더더욱 비교된다.
무엇보다 문제는 자만심이었다. 류성룡의 징비록의 기록을 보면, 류성룡이 왜군의 조총에 대해 언급하며 걱정하자 신립이, 조총이라는게 어디 쏘는대로 맞는답니까라며그럼 활은? 거들먹거려 류성룡이 상당히 혀를 차며 패전을 걱정했다는 기록도 나온다.[4]
또한 징비록에 나오는 이런 얘기도 있다. 신립이 왜군 요격을 명받고 파견되기 전, 신립 본인이 직접 모병 콜에 나섰다. 근데 병사가 별로 모이지 않았다. 근데 그때 같이 모병 콜을 외친 류성룡이 있는 곳에는 병사가 바글바글 모였다(...) 이를 본 신립의 표정이 구겨지자 류성룡은 신립을 잘 달래고 병사들로 하여금 신립을 따라가게 했다. 근데 그 병사들의 표정이 가관이었다고 한다. 배한성의 고전열전에선 이 구절을 들어 신립이 백성들에겐 인기가 있었으나 군관들에겐 인기가 없었다는 게 아닌가 하는 해설을 한다.[5]
대장(大將) 신입(申砬)과 이일(李鎰)을 제도(諸道)에 보내어 병비(兵備)를 순시(巡視)하도록 하였다. 이일은 양호(兩湖) 로 가고, 신입은 경기(京畿)와 해서(海西)로 갔다가 한 달 뒤에 돌아왔다. 그러나 순시하며 점검한 것은 궁시(弓矢)와 창도(鎗刀)에 불과할 뿐이었으며 군읍(郡邑)에서도 모두 형식적으로 법을 피하기만 하였다. 신입은 본래 잔포(殘暴)하다고 일컬어졌으므로 수령들이 두려워하여 주민들을 동원하여 길을 닦고 공장(供帳)하는 비용도 대신의 행차와 같이하였다. 당시 조야(朝野)에서는 모두 신입의 용력과 무예를 믿을 만하다고 하였고 신입 자신도 왜노(倭奴)들을 가볍게 여겨 근심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했는데, 조정에서는 그것을 믿었다. - 선조수정실록 임진년 2월 1일 기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삼도순변사로 충주로 출진해 조령의 지세를 보고 지세가 좋지 않다며 왜병을 넓은 들판에 끌어내 기병으로 무찌르려 한다. 그리고 늪지대가 있는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쳐서 탄금대 전투를 벌였다가 패배했으며, 섬멸되자 수십명의 일본군을 죽인 뒤 남한강에 뛰어들어 자결했다고 한다. 왜란초 조선군의 초기 대응은 아직 논쟁적인 부분들이 꽤 많으므로, 자세한 것은 탄금대 전투 항목을 참고하자.
그렇다고 신립을 막장이라 평가하는건 당대 상황을 제대로 보지 않은 평가다. 아무리 소규모 전투라고 해도 제대로 못 싸운 장수가 있고 잘 싸운 장수가 있다. 더구나 건국이래 최대 규모로 벌어진 여진족 반란인 니탕개의 난은 결코 작은 전투도 아니었으며, 당시 신립이 보여준 용맹과 공적은 분명 뛰어났다. 그 당시까지는 조선에서 손꼽히는 공적과 실력을 보여준 장수였던 것만은 분명했다는 것이다. 물론 전혀 다른 상대, 국가간 대규모 전면전인 임진왜란 때는 처참한 패배를 당했지만 말이다.
신립은 직책상 판옥선이나 수군을 접할 기회가 없었을 뿐더러 판옥선은 개발 이후 벌인 왜군과의 교전에서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서 수군을 지휘해본 경험이 부족한 신립은 판옥선이 어느 정도의 성능을 갖추고 있는지 파악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신립은 어디까지나 육군을 대표하는 입장일 수 밖에 없었는데 하필 가장 근래의 대 일본 전쟁 경험마저 을묘왜변이었으니 신립 입장에서는 최선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판옥선이 왜선보다 우위에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연안용 노선이다. 제대로 쓰기 위해선 세심한 사전정찰, 철저한 훈련과 통솔을 통한 협업, 자연환경(조류, 바람)에 대한 고려, 지휘관의 전투의지등이 모두 결합되어야 했다. 이순신 이전에는 이걸 다 만족시키는 지휘관이 없었다. 이순신이 당대 장수들중에서 특출나게 수전 지휘를 잘 한 것이지, 신립이 막장이었던게 아니다.
4 가족
선조의 서자들 중 하나인 신성군의 장인으로, 선조와는 사돈지간이 된다. 게다가 임란 전까지만 해도 죽은 공빈 김씨의 아들인 광해군과 터울(3살)이 적고, 어머니 인빈 김씨 역시 총애를 받았던 신성군은 그야말로 차기 세자로 점쳐지고 있었다. 차기 국구였다는 이야기.[6]
행주 대첩을 승리로 이끈 권율의 사위이자 오성 이항복과는 동서지간이라는 말이 있으나 이는 야사의 잘못된 기록이다. 이항복 항목 참조.
신립의 아들이 바로 인조반정의 공신 중 한 명인 신경진이다. 재미있게도 탄금대에서 같이 죽은 부장 김여물의 아들이 바로 인조반정의 주모자인 김류다. 이 두 집안은 대를 이어 생사를 같이 한 셈으로 탄금대에서는 신립이 대장, 김여물이 부장이었지만 인조반정 때는 김류가 주모자 역이었고 신경진은 행동 대장역이었다.[7] 이 아들 덕에 신립도 덤으로 영의정 평양부원군에 봉해졌다. # 여담으로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급서한 해공 신익희에게는 13대조가 된다.
또한 탄금대에서 전사할 때, 외조카도 참전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외조카가 전황이 불리한 것을 알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주하려고 하자, 신립은 외조카의 머리칼을 붙잡고 "네가 어찌 살려고 하느냐"고 갈구며 함께 빠져 죽었다고 한다. 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 4월 14일 계묘 16번째 기사외삼촌 물귀신 쩌네요
5 평가
"신립은 시정의 건달 수백 명[8]을 거느리고 행장(行長,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의 10만 대군을 막다가 단번에 여지없이 패하여 나라가 뒤집어졌었다." - 사돈인 선조 본인의 평가(...) 선조수정실록 34년 2월 1일(경오일) 기사 [9]
당대는 물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외척 버프에 쌈질은 좀 했을지 모르겠지만 기병 대장이나 하면 족했던 임진왜란 최고의 범장"이라기엔 원균이 있지 않나?이라는 평가와 "실수가 죽음으로 이어진 비운의 명장"이란 평가가 엇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료는 "난폭하고 아랫사람을 함부로 다룬 신립"과 "정말이지 무예가 뛰어난 신립"을 함께 증언하고 있다.[10]
분명 신립이 충주로 내려가던 시기엔 소문이 도성에 좌르르 퍼져 대신들의 가솔이 다 짐싸들고 도망가려던 분위기였다. 그 점에서 전선에 나선 것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다. 많은 비용을 들여가며 전쟁을 대비하긴 했지만 니탕개의 난과 비슷한 조금 큰 왜구의 준동 정도로 생각하고 대비했던 당시 조선은 머릿수는 많지만 기강과 훈련도가 현격하게 떨어지는 군사들을 데리고 있다 완전히 생소한 전략전술을 가지고 온 왜군에게 뜻밖의 기습을 당해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전면 패주하는 상황이었다. 모인 병력도 모두 흩어져 버린 상황에서 농민들을 끌어모아 고육계까지 써가며 어떻게든 싸우려 했고 패전해서는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 확실히 부족한 면이 있었고 패전의 책임은 져야겠지만 애시당초 제대로 싸운 적도 없고 자국 민간인 학살까지 저지른 똥별들하고 비교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평가이다.
결론을 종합하면 당대 조선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임진왜란 때는 200년간 쌓여온 조선군의 모순에 짓눌리고 본인도 능력에 한계를 보여 패한 장군. 즉, 임진왜란 당대의 명장이라 평했던 조선의 자만심을 이일과 더불어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인물.
5.1 대중문화 속의 신립
신립에 대한 전설도 있다. 신립이 무과를 보기위해 한양으로 가고 있는 중 어느 산속에서 길을 잃었다가 큰 기와집을 발견하고 들어갔는데 아름다운 처녀가 혼자 우는 것을 보고 사연을 물어보니 본래 이 집은 수십명의 가족들과 하인들이 사는 집이었으나 어느날 요괴가 나타나 주기적으로 사람들을 잡아먹었고 그 탓에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요괴의 손에 목숨을 잃었으며 오늘 밤 요괴가 자신을 잡아먹기 위해 온다는 것을 알고 슬퍼서 운다고 하였다. 이에 분노한 신립은 처녀를 안심시키고 병풍 뒤에 숨어 요괴가 나타나자 바로 칼로 요괴의 목을 쳐 처녀를 구하고 처녀의 복수를 갚아주었다. 이에 처녀가 감사해 하면서 자신을 아내로 맞이해 달라고 하였으나 신립은 거절하였고 신립이 떠나자 그 처녀는 신립을 크게 부른 뒤 신립이 보는 앞에서 자살하였다. 그 후 시간이 흘러 조선의 대표적인 장군이 된 신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을 격퇴하기위해 군을 이동하는 중 꿈 속에서 죽은 처녀가 나타나 (혹은 처녀의 유품인 방울에서) 탄금대에 진을 치면 크게 이길 것이라고 알려주었고 신립은 그 말에 따라 탄금대에 진을 치고 적을 맞이하였으나 크게 패하였고, 신립은 자신에게 한을 품고 죽은 여인의 말을 믿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며 자살하였다고 한다. 얀데레 결과적으로 은혜를 원수로. 비슷한 전설이 남송의 장수 악비에게도 있는 걸 보면 민담계에서 당시 유행하던 레퍼토리인 것으로 보인다.
거상에서 등장. 기마궁수가 전직한다. 일격필살을 가지고 있지만 이건 대인 기술인데다 맘대로 발동되는 것도 아니고 특수기술이란게 불을 끄는 소화술인데, 예전에는 바닥에 붙은 불에 데미지 판정이 있었지만 패치로 데미지 판정이 삭제되어 정말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잉여기술이 되었다.(…) 빠른 렙업은 가능할 턱이 없고 보통 쩔로 키우고 시호충장으로 전직한다.
거상 전장수를 통틀어 공중 범위 공격이 수월하게 가능한 유일한 장수였지만, 패치로 공중 공격이 가능한 장수가 늘어나 유일한 장수 위치에서 벗어났다. 제대로 투자만 해준다면 흉수에 뒤지지 않는 성능이라 자주 쓰이는 편.
템세팅을 잘맞쳐주면 오히려 1차장수에서 날아다닌다. 일격필살이 팍팍 터지는게 일품. 하지만 그정도 템을 다른 캐릭한테 맞춰주면 물론 더 세다.(…)
처음 나왔을땐 공중 몬스터에게 접근하면 자동으로 발사되는 공중탄이란 기술이 있어서 한라산 정상과 이시즈치산 최하층에서 용을 잡는데 주로 쓰였다. 40대 후반의 레어활을 들어서 말을 타는 장수가 기공신포와 일격필살도 같이 써서 전문성과 다양함을 동시에 가졌던 장수가 어쩌다 이리 된건지...
소설에서 가장 중립적인 시각에서 나오는 작품은 김성한의 소설 7년전쟁과 이번영의 왜란 소설 징비록. 비록 소설이지만 여기서는 조령을 버린 이유에 대해, 탄금대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에 평지에 진을 쳤는데 이날 밤 다수의 병사들이 사라지자 평지에서도 이 정도인데 조령에 진을 쳤다면 더욱 많은 병사들이 도망갔을 것이라며 결국은 평지에서 적을 맞기로 결정했다는 묘사가 나온다.
이우혁의 소설 왜란종결자에서는 역대급의 상향을 받고 출현한다. 탄금대에서 전사하는건 역사와 같지만, 그곳을 전장으로 택한건 "이건 다 마수들 잘못입니다. 마계를 탓하세요"로 나왔다. 원래 왜란을 조선의 승리로 이끌 사람, 즉 왜란종결자는 신립이었으나 마수들의 농간으로 전장을 탄금대로 정한 것으로 나왔다. 여기서 신립이 사망하자, 대타로 왜란종결자가 된 사람이 바로 이순신. 즉 설정상 신립은 이순신급 활약을 했어야 했다.(...) 그야말로 역대급의 떡상향.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조금 어리석은 맹장으로 나온다. 용장보다는 지장에 어울릴 듯한 배우가 나와서 기병우월론을 설파하다가 논에 말이 처박히는 바람에 전멸... 어차피 조연이라서 비중은 별로 없다. 소 요시토시가 조령이 텅 비었다는 보고를 듣고 그런 천혜의 요새를 버릴 바보 멍청이가 어디있단 말이냐라고 말한 후 바로 장면이 바뀌어 신립이 조령은 버린다라고 말하는 것이 나름 백미다(...). 조선군 다 죽게 생겼다, 이놈아! 조령을 버리는 것에 반대하는 부장에게 명령 불복종으로 곤장을 때리곤 밤에 그를 불러내 위에 나온 낮은 훈련도 때문에 조령을 선택하긴 곤란했다는 변명을 한다. 마지막에 자살하는 장면은 굉장히 비장미가 넘치게 다루어졌다는게 위안(....). 참고로 배우는 차기환.
조선왕조 5백년에서는 연극배우 김영인씨가 열연했다.[11] 실록의 기록에 충실한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휘하 장졸들을 손수 찔러죽이는 역으로 나온다. 여기서는 문경새재에서 장졸들이 도망가는 바람에 배수진을 친 것으로 나오고 제작비의 문제인지 탄금대 전투는 나레이션과 함께 스스로 배를 찔러 사망하는 장면만으로 처리되었다.
징비록에서는 사극 한정 사망전대 배우(…) 김형일이 맡았다.[12] 임란 전, 대마도로부터 바쳐진 조총의 위력을 조선 조정에서 테스트 하던 자리에서, 조총 재발사를 준비하는 동안 화살 세 대를 쏘아 보임으로써, '조총은 연사력이 떨어지므로 순간이 급한 전장에서는 활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왕을 안심시킨다. 곁에 있던 류성룡이 '허나 그 살상력이 활에 비할 바가 아니므로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반론을 제기하자,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되겠지만 지레 겁먹어서도 안 된다'며 재반박. 실제 징비록의 '조총이 어디 쏘는 대로 맞는답니까' 기록을 나름대로 현실성 있게 해석한 대목인 듯. 캡처 포스팅 그러나 바로 다음 장면에서 가토 기요마사의 지휘 하에 3단 연사를 훈련 중인 아시가루들이 나온다.(…) 1열이 발포하는 동안 2, 3열은 화약 넣고 총알 재는 재사격 준비 동작을 하게 함으로써 연사력을 크게 높인 것. 이후로는 죽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정당성만 자상하게 설명하는 설명충으로 전락한다.(...) 배우 버프다. 신립이 이렇게 진중할 리 없어.
정작 원균명장설 등 오류가 넘치는 불멸의 이순신은 신립의 최후만은 사실에 가깝게 그려냈고, 같은 방송사에서 10년 뒤에 만든 징비록은 징비록에서 묘사하는 신립과는 일억만년 동떨어진 작가만의 신립을 그려내었다.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 수 있나.(...) 뭐긴 뭐야 작가가 자기 읽고 싶은 것만 읽어서 그렇지.
- ↑ 고려 개국 공신인 신숭겸이 시조인 가문. 즉 신립은 신숭겸의 후손이다.
- ↑ 이것은 졸개가 보장을 상대로 하극상을 일으켜 신립이 처형한 것이다. 하지만 신립이 조정에 보고를 올리자마자 그 날로 사간원에서 선참후계, "전시가 아닌데 보고도 하지 않고 먼저 참형하였다"고 세 차례씩이나 태클을 거는 바람에 파직되었다.
빠름 빠름 빠름.다만 사헌부의 '신립을 잡아 국문하겠습니다"라는 요청에는 "양대수의 행동이 지나치기는 하나, 사실 수졸의 죄는 당연한 것이다"라며 윤허하지 않았다. - ↑ 혹은 판단 자체를 왜적들이 제대로 된 병사 아닌 일반 왜구 수준으로 오판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왜구들은 제대로 된 지휘체계도 없는 해적집단이나 마찬가지라서 육지에서 정규군에게 철저하게 밟혔지만, 문제는 이때 조선을 쳐들어 온 것은 도요토미 일본의 대정규군이었다는 점이다. 어찌보면 사대주의적 사상으로 인해 일어난 오판.
- ↑ 다만 조선군이 진작부터 알고있던 조총의 위력을 실감하고 중시한건 왜군과 실제 교전해보고 그 운용 방법을 습득하면서다. 마냥 신립이 어리석어서 그런게 아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기본이 되는 중요한 사료이긴 하나 동시에 정치적 사료다. 무엇보다 시점상 정응태 무고사건을 계기로 전쟁중에 류성룡이 책모를 다하지 못했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실각한 후에 나온 사료로, 류성룡 본인의 행적을 강조하고 임란 초기 조선군을 마냥 무기력하게 묘사하는 성향이 강해서 가려들어야 한다.
- ↑ 다만 어디까지나 류성룡 본인이 남긴 기록이라는 것을 참작하자! 신립은 부하들에게 가혹한 편이었으나 용맹도 굉장했기 때문에 좋아하는 장졸들도 많았다. 더구나 탄금대로 신립이 데려간 인원들은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활 잘 쏘는 백성들이었지 장졸은 적었다. 각주 참고.
- ↑ 정철이 이산해의 책략에 걸려들었던 이유도 선조가 신성군을 더 아꼈기 때문도 없지 않다. 물론 임란이 터지고 광해군이 급히 세자로 정해지고, 신성군이 난중 요절하면서 신립가가 외척이 될 일은 물 건너간다.
새옹지마다. 요절 안했으면 광해군 때 옥사에 걸려 멸문을 면치 못했을 듯.신성군이 승계했다면 국구의 행패로 깽판이 벌어졌을 수 있었다. - ↑ 물론 김류는 청요직을 거쳐 반정세력 중 기존 벼슬은 가장 높았지만 인조반정 때 몸을 사려서 거저 일등공신이 된 감이 있고 실질적 주도자는 김류가 아니라 이귀였다.
- ↑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아마도 징비록에서 빌려온)을 그대로 옮기면, 이들은 "도성의 무사(武士)·재관(材官)과 외사(外司)의 서류(庶流)·한량인(閑良人)으로 활을 잘 쏘는 자 수천 명"이었다.
- ↑ 사실 이 기록의 전문은 김성일, 류성룡, 김응남을 싸잡아 가차없이 까버리면서 대신들에게 "니들 또 꿀먹은 벙어리야! 나라 또 말아먹을래!"라고 말했다는 내용이다. #
- ↑ 따지고보면, <선조실록>을 쓴 북인들은 신성군의 장인인 신립에게 우호적인 글을 써 줄 이유가 딱히 없는데, 실록에서 신립의 과거를 더 풍부하게 묘사하는 것이 선조실록이다. 되려 후에 서인들이 집권했을 때 다시 쓰인 <선조수정실록>은 징비록의 기록을 많이 참고해서, 탄금대의 패배에 대해 더 자세히 기록했다. 반면 신립의 최후는 더 장렬히 묘사했고 나쁜 기록들도 많이 빠졌다. 조헌의 상소 가운데도 신립의 행동은 지나치나 용서해야한다는 투의 글이 있다.
- ↑ 이 배우는 무풍지대에서 김두한을 열연한다. 연극계에서는 꽤 유명한데 친분이나 생계의 목적상 영화에서는 항상 깡패나 건달 등의 악역을 맡았다. 내가 고자라니의 김영인 씨와는 동명이인이다.
- ↑ 재미있게도 김형일은 태조 왕건에서 이 신립 장군의 실제 가문 시조인 신숭겸을 맡기도 했다!
- ↑ 90년대 기준으로도 말도 안되는 고증이긴한데 극중에선 질적은 넘어가고 양적으론 어떻게 키워놨다는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