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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인 걸작선집/신라의 달밤> 앨범 커버
玄仁, 1919년 12월 14일 출생 ~ 2002년 4월 13일 사망
1 개요
대한민국 최초의 대중가수.
해방과 더불어 가요계에 선풍을 일으킨[1] 가수. 본명은 현동주이다. 당시의 대중가수들 중, 가장 학력이 높은데 도쿄 음악학교 (현 도쿄 예술대학) 성악과 출신이다. 특유의 떠는 창법으로 인기를 끌었다. 당시에는 정말 획기적인 창법이었다.
2 생애
1919년에 부산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2] 1938년 경성 제2고보를 졸업하고, 1942년에는 도쿄 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했다. 일제의 강제징용이 시작되자 중국 상하이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악단 '신태양'을 조직해서 활동한다. 해방 이후, 귀국하여 악단을 다시 조직하여 극장 무대에서 연주하며 다닌다. 그후 당시의 유명한 작곡가인 박시춘이 찾아와서 자신의 곡을 불러달라고 한다.
현인은 "성악도가 유행가 따위를 부를 수는 없다"며 거절했지만, 박시춘이 거듭 권유하자 며칠 생각해본다고 하고, 집에서 며칠 동안 고민 한 뒤, 결국 대중가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박시춘은 현인에게 곡을 주었고, 이 곡이 바로 신라의 달밤이다. 이 곡은 발표 당시에 정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현인을 가요계의 정상에 등극하게 했다. 이후 현인은 <비 나리는 고모령>, <고향만리> 등을 연달아 히트시킨다. 한국전쟁 당시의 피난민들의 슬픈 정서를 잘 보여주는 <굳세어라 금순아>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들으며 울기도 했다. 시대를 대변하는 듯한 가수라고 말할 수 있겠다. 1974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로 이민가서 '가스라이트'라는 레스토랑을 운영했지만, 한국에서의 무대가 그리워서 1981년에 귀국한다. 1991년에는 <노래하는 나그네>, <길> 등의 신곡을 발표한다. 1998년까지는 KBS 가요무대와 악극 등에 출연하여 왕성한 활동을 했었지만, 지병인 당뇨병의 악화로 2002년 4월 13일 별세하였다. 향년 84세.
3 히트곡
4 트리비아
이 분을 존경하는 중학생이 안녕하세요에 나온 적이 있다. 어느 정도냐면 현인의 노래를 거의 완벽하게 모창해내고, 말하는 것도 노인처럼 말하고(...) 옷도 노인 스타일로 입고 다녔다(...) 영국의 제이크 버그를 생각하면 될 듯.- ↑ 1960년에 현인씨가 TV에 나와 <신라의 달밤>을 부를 때, 앞부분에서 아나운서(?)가 소개해주던 멘트
- ↑ 아버지는 영국 스탠다드 석유회사를 다녔고, 어머니는 신여성이었다. 덕분에 현인씨는 대학교까지 졸업할 수 있었고, 풍족하게 살수 있었다.
- ↑ 고모역 항목에 이 노래의 유래가 소개되어 있다.
- ↑ 눈보라가 휘날리는~으로 시작하는 노래.부산 영도대교 도개가 시작될 때 흘러나온다. 곡의 내용은 흥남 철수와 관련이 있다.
- ↑ 1930년대와 1940년대 상하이에서 활동하였던 중국 여가수 공추하(龔秋霞)의 몽중인(夢中人) 이라는 노래를 번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