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전쟁의 철수작전
그날 아침의 배는 6시 15분에 닿았다. 눈바람을 무릅쓰고 얼음판 위에서 밤을 새운 군중들은 배가 부두에 와닿는 것을 보자 갑자기 이성을 잃은 것처럼 와~ 하고 소리를 지르며 곤두박질을 하듯이 부두 위로 쏟아져 나갔다. (중략) 부두 위는 삽시간에 수라장이 됐다. 공포가 발사되고 호각이 깨어지고 동아줄이 쳐지고 해서 일단 혼란이 멎었으나 그와 동시에 이번에는 또 그 속에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 쌀자루를 떨어뜨린 남편, 옷보퉁이가 바뀐 딸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서로 부르고, 찾고, 꾸짖는 소리로 부두가 떠내려 가려는 듯했다. 그들은 모두 이 배를 타지 못하면 그대로 죽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김동리의 소설 <흥남 철수> 중에서 인용) |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한국전쟁 최고의 기적
'평양 철수, 1.4 후퇴'와 더불어 한국전쟁의 수많은 이산가족들을 만든 철수 사건.
장진호 전투와 더불어 유명한 철수작전.
장진호 전투 이후 중공군에 의해 북한의 임시 수도였던 강계 공략이 실패하고 또한 전세가 불리해지자 UN군 사령부는 1950년 12월 8일 흥남 철수 지시를 내렸다. [1] 12월 15일 미군 1해병사단을 시작으로 흥남으로 집결, 해상을 통해 부산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이것이 1.4 후퇴의 시작이었다.
육로로 철수하지 못하고 흥남을 통해 해로로 철수해야 했던 이유는 이미 그 당시에 중공군이 원산을 점령하여 퇴로가 끊겼기 때문이다. 즉, 배로 철수하는 것 빼고는 함경도 등지에 위치한 병력과 피난민이 남쪽으로 내려갈 방법은 없었다. A구역부터 F구역까지 방어선을 설정하고, 동해에 위치한 미 해군의 함포사격의 도움을 받으며 UN군과 한국군은 철수를 준비한다.
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내려가겠다고 흥남부두에 모여든다. 그러나 미군 지휘부는 피난민을 데려가는 것을 꺼렸다. 피난민을 태우느라 시간을 지체할수록 미군의 희생이 늘어나는데다 병력과 장비, 물자를 싣는 데만도 수송선이 넉넉하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피난민 사이에 스파이가 침투하여 파괴공작을 하게 되면 큰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군 지휘관들이 "피난민을 버리고 가느니 차라리 우리가 걸어서 후퇴하겠다!!"며 극력 반발했고, 미 10군단 사령관 알몬드 장군의 고문이었던 현봉학 박사, 김백일 장군 등이 끈질기게 요청을 하자 마침내 "병력과 장비를 싣고 남는 자리가 있으면" 피난민을 태우기로 동의한다. 그 결과 약 10만 명의 피난민이 흥남 부두에서 배를 타고 남으로 피난을 올 수 있었다. 이 중 유명한 것이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철수작전.
너는 미국을 욕하길 좋아하지만, 그 때 흥남 부두에 있던 피난민들 거지반을 구했던 건 미군이었다. 국군 헌병들이 악다구니치면서 배에 오르려는 피난민들 머리를 두들겨서 물에 떨어뜨릴 때 말린 것도 미군[2]이었고, 포탄이 부두 근처까지 떨어지는데도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고 끝까지 남았던 배도 미군 수송선이었어. 내가 탄 배도 미군 배였는데 미군 장교가 쏼라쏼라 악을 쓰니까 배에 있던 사람 중에 영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좋아서 펄쩍 뛰더라. 뭐라고 했느냐니까 "배가 뒤집히더라도 일단 실어!" 뭐 그런 얘기였다는군. 출처 - 피난민의 증언 딴지ㅇ개인블로그에 실린 내용이며 원 출처를 찾을 수 없음. 찾으면 추가바람. |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는 건조된 지 5년 정도 된 7,600t급 빅토리급 수송선으로, 철수작전 가장 마지막에 남은 상선들 중 하나였다. 이 배는 일본을 출발할 때 항공유를 잔뜩 싣고 왔는데, 흥남에 짐을 내릴 수 없자 부산으로 갔다가 배가 부족한 바람에 짐을 덜 내린 채 12월 21일에 다시 흥남으로 온 상태였다. 메레디스 빅토리호의 화물이 무엇인지를 안 다른 배들은 절대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꼭 피난민을 태워야 할 의무는 없었다. 적재한 화물의 위험성 등을 강조하여 그냥 가버려도 상관없었으나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라루 선장[3]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태울 수 있는 만큼 피난민을 태우기 시작했다. 배에는 아직 300t의 항공유가 실려 있었으나[4] 1만 4천여명의 피난민과 경호를 위한 17명의 한국군 헌병이 탑승한 뒤 12월 23일에 흥남을 떠날 수 있었다. 이들은 아무 일 없이 24일에 무사히 부산항에 도착했으나, 부산에는 이미 100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이 몰려 있었기 때문에 행선지를 거제도로 변경했고, 26일이 되어서야 뭍에 내릴 수 있었다. 3일간에 걸친 이들의 항해 결과 메레디스 빅토리 호는 "단일 선박으로 가장 큰 규모의 구조 작전을 수행한 배(the greatest rescue operation ever by a single ship)"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으며, 이 비좁은 배에서 5명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도 했다.[5]
거제 포로수용소에 흥남 철수작전기념비가 있으니 보자. 10만의 목숨을 구한 6명의 영웅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 철수작전이었으나, 193척의 선박을 동원한 미군과 한국군은 거의 피해없이 철수하는데 성공했으며, 여기에 10만명의 피난민까지 함께 구해내는 기적을 일구어냈다. 게다가 작전이 종료되어 마지막 배가 흥남을 떠난 날짜는 놀랍게도 12월 24일, 즉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10군단이 미처 배에 다 싣지 못하고 항구에 남겨둔 여러 물자는 중공군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 12월 24일 14시 36분에 마지막 배가 흥남을 벗어나는 순간 흥남 부두의 항구 시설과 함께 모두 폭파되었으며 군인들과 피난민들은 그 폭파의 현장을 보면서 흥남을 떠났다. 그리고 12월 25일 아침 중공군 27사단이 흥남을 점령했다. 단 하루 차이로 철수에 성공한 것이었다.
또한 미 10군단은 철수동안 어떠한 공격도 받지 않고 부산항까지 도착하는 기적을 경험했다...고 하는데. 북한군의 해군은 장식이고, 제공권은 공군 최강국 미군이 꽉잡고 있었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철수선단을 공격할 수단은 소련 해군의 잠수함 뿐인데, 이는 곧 소련과 미국의 전면전을 의미한다. 하지만 흥남 앞바다에 수많은 기뢰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기뢰에 걸려 터지지 않고 내려온 것도 어찌 보면 기적이라고 할 것이다.
이 작전의 결과, 최종적으로 철수한 인원과 물자는 다음과 같다. 흥남 철수는 됭케르크의 경우처럼 몸만 빠져나온 철수는 아니었다.
한국군과 유엔군을 합쳐 병력 105,000명
북한 피난민 98,100명
각종 차량 17,500대
각종 물자 350,000톤
그야말로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던 작전이다. 하지만 배를 타는 과정에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이산가족이 된 사례가 많으며, 이 중 다수는 피난을 온 이후 영원히 만나지 못했다. 이때 이산가족이 된 피난민들이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곳이 당시 부산의 랜드마크였던 영도대교이었는데, 그래서 흥남 철수 이후로 굉장히 오랫동안 영도대교 주변이 북적거렸다고 한다.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가요는 이 작전 당시의 처량함을 잘 나타내주는 노래이다.
그런데 국가보훈처에서 2005년 발행한 '6.25 전쟁 미군 참전사'에서 배에 탑승한 피난민들의 숫자는 10만여명, 그리고 타지 못한 피난민들의 숫자 역시 그와 비슷했다고 나와있다. 다른 여러 자료에서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철수했다고 나오는 것과는 상반되는 내용인데, 그 이유는 피난민의 종류가 2가지였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미 해병대에서 대표적인 전투로 손꼽는 장진호 전투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자세하게 살펴보면 방어진 구성시 방어진 안에 있었으며, 얼마 뒤 배속된 한국 경찰의 조사를 받아 신원이 확실한 피난민은 철수시에도 미군이나 국군과 같이 행군하며, 차량에 탑승하기도 하는 등 최대한 편의를 봐주었다.
하지만, 방어진 바깥에 있으며, 중공군이나 북한군과 접촉이 가능한 피난민의 경우에는 방어진 구성시에는 방어진 내부로 출입을 금지시켰으며, 철수시에도 반드시 철수하는 군대 후미에서 일정거리 이상 접근하는 것을 금했다.
이것만 본다면 매우 비정한 행위라고 볼 수 있지만, 아래와 같은 이유로 인해 어쩔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 피난민의 신원을 검증하기 어려웠다. 확실한 신원 검증의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외모만으로 그 사람의 국적, 소속을 파악할 수 없다 것은 기본적인 상식이다. 이는 훗날 베트남 전쟁에서도 미군과 한국군을 괴롭히는 주된 요인이 되었다. 일단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매우 힘들어지니..
- 피난민으로 가장하고 방어진 내부에 들어와서 파괴활동이나 사격관측을 하는 스파이 행위가 한국전쟁 중에는 매번 있는 일이었다. 이미 개전 초기부터 이런 것 때문에 진지 내부에서 저격을 받거나, 적의 포탄이 정확하게 탄약고를 명중시킨다든지, 야전병원이 습격당하는 일이 잦았던 UN군의 입장에서는 신원이 보장되지 않은 피난민은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6]
이런 이유로 인해 흥남 교두보가 형성되기 전에 교두보 내부로 들어온 피난민들은 최대한 구출하였으나, 교두보 형성시 바깥에 있던 피난민들은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스파이 침투시 철수중 교두보의 붕괴로 대량피해가 발생할 것을 우려한 UN군이 애당초 교두보에 진입하는 것을 막았다. 게다가 흥남 교두보의 경계선에서는 육해공의 전 화력을 기울인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으므로, 들여보내고 싶어도 못 들여보내는 이유도 있었다. 당장 아수라장의 격전이 벌어지는데, 피난민이라고 주장하는 정체불명의 사람들을 전선 내부로 들여보내면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결국, 이런 이유가 겹쳐서 흥남 교두보 내부에 있던 피난민들은 대부분 구출되었으나, 외부에 있던 피난민들은 교두보 외부에 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다. 국가보훈처의 해당 서적에서 언급한 피난민은 교두보 내부와 외부를 다 합쳐서 센 개략적인 숫자일 것이다. 그리고 이 때 흥남 철수에 합류하지 못하고 남은 피난민들은 후에 탈출한 피난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향에 돌아가도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탄압을 받고 행방불명 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2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흥남 철수
2.1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
(1988년에 촬영한 현인의 라이브 무대)
현인이 부른 가요로, 1953년 대구의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발매되었다. 흥남에서 여동생 금순이와 헤어지고 혼자 부산으로 피난 온 실향민이 여동생을 그리면서 통일이 될 때까지 굳세게 살아달라고 바라는 내용의 가사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철의 장막 모진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의 너와 난데 변함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남북통일[7] 그날이 되면 손을 잡고 울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춰보자 (강사랑 작사 / 박시춘 작곡) |
국민가요급의 큰 인기를 끌었고, 이후 이 노래를 다시 부른 트로트 가수도 대단히 많다. 1962년에 이 가사의 내용을 토대로 동명의 영화도 제작되었다. 이후 같은 제목의 영화나 드라마가 등장했지만, 가사 내용과는 관계없이 제목만 빌려왔다.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현대적 감각으로 리메이크한 곡이 삽입곡으로 들어가 있다.
2.2 김동리의 소설 흥남철수
흥남 철수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소설로, 전쟁이라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 인간애가 어떻게 생기는지 보여주고 있다.
2.3 영화 국제시장
흥남 철수에서 영화가 시작된다. 주인공 윤덕수는 흥남 철수 당시에 아버지 및 여동생과 이별하고, 피난으로 내려온 부산 국제시장에서 수입품 잡화점을 운영하면서 서독에 광부로 파견을 가고,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하는 등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경험하게 된다. 흥남 철수 부분은 영화 전반의 완성도와 비교해 봐도 꽤 잘 만든 편이다. 현봉학 박사가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에게 배에 피난민들을 태워달라고 설득하는 장면에서부터, 마음을 바꾼 알몬드 장군이 레너드 P. 라루 선장이 몇 명이나 더 탈수 있냐고 묻는 장면 등이 나온다. 주인공 가족도 타게 되는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등장, 철수 후 폭파되는 흥남 부두의 상황까지 자세히 나온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물을 타고 배에 오르다가 바다에 떨어지면서 동사해 물 위로 둥둥 떠다닌다든지, 떨어지다가 나룻배에 머리를 박고 사망한다던지, 그물을 타고 힘겹게 올라가는 어린아이 등에 업힌 더 어린아이를 뒤에 올라오던 사람이 그물인 줄 알고 끌어당겨 가해자(?)와 어린아이가 함께 추락한다던지[8], 배에 매달린 고드름이 떨어져 맞는 상당히 잔혹한 장면도 나온다.
다만 역사적인 사실과는 좀 다르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철수 작전의 기함이 아니었고[9], 따라서 현봉학 박사와 알몬드 장군이 타고 있지도 않았으며, 이들이 라루 선장과 직접 대면한 적도 없다. 또한, 작중 묘사와 달리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중간에 피난민을 버리고 가지 않고 일단 근처에 온 사람들은 다 태우고 갔다.
이 이야기는 KBS 스펀지 314회 방송분에 소개되기도 했다.
- ↑ 이전에 12월 4일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 철수를 하고 그 결과 북한군과 중공군이 평양을 재점령했다.
- ↑ 미군이 민간인을 때리려는 국군 헌병을 말린다는 부분이 좀 믿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시 참전한 영국군 측에서도 민간인을 처분하려는 국군을 제지한 기록이 있는 걸 보면(마지막 한 발' 참조)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당시 국군의 상황이 정말 시궁창이었던 것 뿐이다.
- ↑ 이 분은 전쟁 이후 수사(수도자, monk)가 되었으며, 평생동안 흥남 철수와 관련된 말은 일체하지 않았다고 한다. 2001년 사망. 사후에서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참고로 이 분이 지내던 수도원이 2000년경 경영난으로 폐쇄되려던 것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 위치한 성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지원해서 복구했다고 한다. 기사 링크 그도 그럴 법이, 왜관 베네딕토 수도원은 원래 원산 옆에 있는 덕원에 위치했으니까. 이 사연은 공지영 마리아 작가의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의 소재로 쓰이기도 했다.
- ↑ 승선한 피난민들 중 일부가 이 드럼통 위에서 불을 피우는 바람에 승무원들이 식겁하기도 했다. 자칫하면 14,000명이 한 방에 날아가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해난사고가 일어날 뻔 했다.
- ↑ 당시 선원들은 이 아기들을 '김치'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국인 비하 같은 걸로 해석하지 말자.
아는 한국 음식이 김치뿐이라서어쨌거나 그 많은 사람들을 위험을 무릅쓰고 구한 분들이다.) - ↑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수차례 벌어진 이유 중에 하나도 이것이다. 민간인을 가장한 게릴라들의 습격과 파괴행위에 시달리던 미군 병사들이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에서 언어, 인종, 문화가 다른 민간인들과 사소한 의견차이(혹은 오해)가 벌어지면 그냥 쏴버린 것이다. 최근의 이라크 전쟁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마찬가지다.
- ↑ 최초 가사는 북진통일
- ↑ 여기서 그물을 타고 올라가는 어린아이가 주인공인 윤덕수이고, 덕수 등에 업힌 어린아이가 여동생 윤말순이다. 작중에서는 뒤따라 올라오던 사람이 말순이를 일부러 끌어당긴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데, 장면 자체가 피해자의 회상씬인데다가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회상이라고 해도 기껏해야 초1~2 정도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이라면 70줄 들어서까지 기억이 객관적으로 남아있길 바라는 것도 무리다.
- ↑ 기함은 아이오와급 전함 3번함 미주리였다. 흥남 앞바다에서 모든 배가 철수할 때까지 지원 사격을 실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