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4년 무주(현재의 광주광역시)에서 출생해 15살 나이에 가지산 보림사에서 보조선사의 제자로 출가했다. 이후 구례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보조선사의 제자로 지내다가 보조선사가 세상을 떠난뒤 당나라로 유학해 불법을 배우고 귀국하여 강진 월출산 무위사의 주지가 되었다.
어떤 계기인지는 정확하게는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왕건과 교류했고 이후 왕건의 군대에서 군법사를 맡을 만큼 왕건과 긴밀한 관계였던것 같다. 그러다가 917년 궁예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한다. 궁예가 왜 형미를 처형했는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왕건과의 관계를 감안해 본다면 왕건을 견제하기 위함이거나 혹은 형미가 궁예의 미륵불 신앙을 반박한 탓이 아닌가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 의문을 풀어주는것이 바로 형미가 주지승으로 있던 무위사에 있는 선각대사비 인데, 선각대사비에 의하면 형미는 궁예가 912년에 나주를 평정할때 무위사를 방문해서 만났고 궁예의 권유로 함께 철원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미륵불 신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던 궁예가 형미를 철원으로 데리고 간것은 당시 호족세력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선종 불교를 포용하려는 의도였다는 분석이 있다.
그러나 917년에 형미는 처형되는데, 이때 궁예가 처형의 이유로 내세운것이 대사가 누군가의 편을 들었다라는것. 이는 형미가 왕건과 가까워졌고 이를 안좋게 본 궁예가 결국 처형이라는 극단적인 카드를 꺼낸것이라 볼수 있다. 학자들은 단순히 미륵불 신앙 때문이 아니라 결국 정치적 갈등으로 인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어쨌든 고려가 건국된후에 태조가 그를 왕사로 추존했고 선각이란 시호를 하사했으며 편광이라는 탑을 세워 그를 기리게 했다고 한다.
태조 왕건에서도 출연한다. 배우는 용의 눈물에서 무학을 맡았던 박병호. 후삼국시대의 4대 고승중 한명으로[1] 궁예가 강비와 두 아들을 처형하고 그 시체를 산에 내다 버리자, 자신이 문도를 이끌고 산에가서 강비와 궁예의 두 아들의 시신을 수습한뒤 공개적으로 상여를 이끌고 장례식을 거행해 궁예에 대한 백성들이 반감을 폭발시키는데 공헌한걸로 나온다. 종간이 그를 회유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역사대로 처형되어 궁예 몰락의 결정타로 묘사되어 역사보다 비중이 높아졌다. 하지만 선각대사비의 내용으로 보면 태조 왕건에서 묘사된 형미는 역사적 사실과는 많이 달라진 셈이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