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

태봉의 역대 국왕
신라 51대 진성여왕1대 궁예고려 태조 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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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성에 위치한 칠장사란 절에 그려진 궁예 벽화다.
묘호없음
시호없음
연호무태(武泰: 904년~905년)
성책(聖冊: 905년~911년)[1]
수덕만세(水德萬歲: 911년~914년)[2]
정개(政開: 914년~918년)[3]
(金)[4] / (弓)[5]
궁예 / 예(裔)
불명
법명선종(善宗)
생몰년도음력857년(?) 혹은 869년(?)[6] 5월 5일 ~ 918년 6월 14일[7]
양력
재위기간음력901년 ~ 918년 6월 14일(18년)
양력901년 ~ 918년 7월 24일

1 개요

후삼국시대의 군웅, 고려의 전신이 되는 나라 후고구려.

세달사(世達寺) 출신의 떠돌이 에서 시작해서 점차 세력을 키워 한반도중부를 모두 장악했지만 지나치게 독선적인 정치철학에 염증을 느낀 호족들이 옹립한 왕건쿠데타로 축출되고 비참한 최후를 맞기까지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애꾸눈의 이미지와 미륵을 자칭한 종교적인 이미지 등 여러 가지가 겹쳐서 어딘지 수수께끼 같은 부분도 제법 보여주는 인물. 한국사에서 그 유형을 특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특이한 삶을 살다간 군주이기도 하다. 외국에서 비슷한 유형을 찾자면 중국 역사의 장각이나 홍수전 같은 종교민란의 지도자들이 대체로 이런 스타일이었다. 다만 궁예나 홍수전처럼 종교장, 더 나아가 (자칭)신과 왕을 동일시하며 신정일치 왕국을 시도한 사례는 역시 찾기 힘든 유형이다. 우스갯소리로 지존의 자리로 올라간 중2병(...)이라는 말도 있다.

2 출생과 성장

기록에 의하면, 그는 신라왕자 출신이다. 아버지는 47대 헌안왕이나 48대 경문왕이라고 한다. 태어날 때 집 위로 흰 빛이 하늘에 뻗치는 등 불길한 징조가 있어 높은 곳에서 던져 죽이려는 것을 유모가 가까스로 받아 구출했다고 한다. 또 이때 실수로 유모가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고 한다. 유모가 어린 궁예를 품에 안고 담을 넘다 넘어지면서 눈을 찔렀다는 전승도 있다.

궁예가 헌안왕이나 경문왕의 서자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도 많다. 일단 신무왕이나 문성왕아들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은 순천 김씨, 광산 이씨의 족보에 나와있는 내용이다. 물론 족보라는 것은 조상에 대한 과장된 전승과 황당무계한 전설까지 그대로 싣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그 사료적 가치를 거의 인정하지 않긴 하지만, 고려시대 이후 일반적으로 악인으로 규정되었던 궁예를 일부러 자신들 가문의 조상으로 내세울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최소한 이들 가문이 궁예의 후손일 가능성은 상당히 클 것이라고 보아 궁예를 주로 연구한 여러 학자들 중 하나인 이재범 교수는 이 기록에 어느 정도의 신빙성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신라 왕실과의 직접적 혈연관계를 부인하는 주장들도 많다. 예를 들면 임용한은 아예 대놓고 궁예의 출생 이야기는 전형적인 술자리 허풍의 구조를 갖고있다고 비하할 정도. 대표적으로 여자 한명이 눈이 찔려서 마구 우는 아이를 데리고 몰래 도망치는게 가능했겠냐는 것. 뿐만 아니라 당시 신라에는 그렇게 높은 건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이고 있다.

다만 이것은 임용한의 오류다. 유명한 황룡사 9층탑을 비롯하여 후기 신라에는 2층 이상의 고층 탑루들이 있었음이 여러 문헌 및 발굴자료에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경주 월성과 같이 언덕 위에 지어져 높이가 뻥튀기된 건물도 많다. 다만 임용한이 이 주장을 펼쳤을 당시에는 대규모 불사 등 일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낮은 편이었다는 주장이 정설로서 받아들여졌으니 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버려졌다가 구출되는 과정 자체가 지나치게 인위적인 것도 여전히 약점으로 남는다. 임용한도 궁예가 진골 방계나 어쩌면 진짜 신라 왕자일 가능성 자체는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궁예가 버려지는 과정만은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8]

일단 궁예가 적어도 신라의 지배층 출신이라는 설은 부정하기 쉽지 않고, 궁예시대 당시부터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현대에서도 딱히 이를 부정할 근거는 많지 않고, 그저 아마추어인 역덕후나 그런 설을 제기할 뿐이다. 적어도 신라 말기에는 왕을 둘러싸고 바람 잘 날이 없었으므로, 왕자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왕이 될 수 있었던 신라 지배층 출신일 가능성이 많다. 가령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면서 신라의 왕자라고 굳이 사칭할 필요는 없었다. 신라 북부의 호족들이 대부분 고구려계였고, 이들은 신라가 흔들리자 가장 먼저 고구려 부흥의 기치를 내세웠는데, 이들을 아우르기 위해 사칭을 했다면 차라리 고구려 왕족의 유민이라고 사칭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9] 다만 현실적으로는 이미 먼 옛날인 고구려보다 생존해있는 신라 왕실의 권위가 더 컸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10]

자신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신라 왕의 초상화를 로 베었다는 일화를 비롯해서 신라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궁예는 신라의 지배층에 상당한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 이는 궁예 자신이 당시 지배층과 모종의 악연이 있으며, 지배층에서 밀려난 것에 대한 원한으로 해석될 수 있다.

게다가 궁예가 자기 출신을 사칭했다면 궁예가 쫓겨난 뒤 고려의 궁예 격하 과정에서 출신을 속였다는 언급이 있었을 텐데 그런 흔적이 없다. 궁예 말기를 보면 연산군 저리가라 할 정도로 완전히 사이코패스 패륜아인데, 고려의 사서들은 변태적이고 엽기적인 궁예의 행각을 자세히 묘사하면서도, 정작 고대사회에서 중요시되는 출신을 가지고 궁예를 까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고대에서 혈통은 정통성의 상징이었으며, 가문이나 혈통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들은 항상 정적들에 의해 공격받았다. 가령 조선시대에 집필된 고려사에서 고려왕조가 어긋났다는 것(=그러므로 그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떠도는 소문을 정설로 채택해 우왕을 신돈의 아들이라고 기술하거나 혹은 사기에서 진시황을 여불위의 아들로 묘사, 그리고 조조를 비난하면서 조조가 내시의 후예라던지, 거지[11]의 아들이라고 폄하되고 있다. 만약 궁예가 신라왕족을 사칭했다거나 혹은 그의 출신에 대한 의혹이 떠도는 소문 정도로라도 존재했다면 고려의 사서에는 당연히 언급되었을 것이다.

허나 고려 왕조로서는 궁예가 신라 무슨 왕 아들이니 하는 말이 의심스럽다고 해도 굳이 부정할 필요까진 없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런 설은 궁예가 신라 왕자 출신으로 신라를 핍박한 불효불충한 인물이므로 벌을 받는 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왕건역성혁명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사론이 그런 논지로 쓰여 있다.

학자 중 일부는 궁예가 왕족의 후손이 아니라 권력 투쟁에서 몰락한 진골 귀족의 후손이 아닐까라고 추측한다. 만약 그렇다면 궁예가 신라에 대해서 증오심을 품은 이유도 그 때문으로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통일신라 말기에는 신라 왕족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는데 무열왕의 후손으로 원성왕과의 왕위 다툼에서 밀린 다음 명주로 밀려나 '명주군왕'을 칭했다는 김주원, 김주원의 아들로 '장안국'을 세웠다가 몰락한 김헌창, 김헌창의 아들로 역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김범문 등의 사례가 있다.

다른 방면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 궁예의 이야기와 유사한 스토리는 여러 문화권에서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페르시아키루스 대왕의 유년기 이야기, 그리스 신화오이디푸스 왕이나 트로이 왕자 파리스, 로마 신화로물루스레무스 등등이 그러하다. 이에 대해 고전학자 데이비드 아셔리는 이러한 유형의 이야기를 비정상적인 권력 승계, 찬탈, 왕조 교체 등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고전적 포맷으로 해석한다. 궁예 이야기도 실제 모티브가 된 사건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정치적 목적으로 살을 붙여서 만들어냈을 가능성도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궁예는 어릴 적에 성격이 괄괄하여 늘 말썽을 피우며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유모가 출생의 비밀을 털어놓자 궁예가 뉘우치고 출가해 세달사(世達寺)란 절에 들어가 이 되었다는 것. 궁예는 법명을 자칭[12] 선종(善宗)이라고 하고 장성할 때까지 세달사에서 지냈다.

궁예는 이곳에서도 신체를 단련하는데 힘을 썼다고 하며 특히 궁술에 능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삼국사기》에 없는 그냥 민간 설화 내지는 후대 작가의 창작이다. 물론 대하 드라마 태조왕건 등에서 후삼국시대의 혼란으로 세상이 워낙 흉흉한 시기라 산속에 사는 스님들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무술을 갈고 닦았다는 식으로 그리는 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이기는 하다. 실제로 해인사 묘길상탑기에는 도적의 침입에 맞서다 많은 승려들이 죽었다는 언급이 있고, 고려 시대까지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이나 을 관리하는 사찰의 경우 아예 성벽을 둘러 요새화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곳이 김제 금산사주변의 사찰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삼국시대 성터.[13]

세달사에서 지내던 중에 하루는 까마귀가 바리대 안에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날아간 일이 있었다. 바리대에 까마귀가 떨어뜨리고 간 것은 점을 칠 때 쓰는 상아로 만든 산가지 였는데 거기에는 (王)자가 새겨져 있었고[14] 궁예는 자신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 될 것을 예감했다고 한다.

3 미륵정토를 꿈꾸다

신라 말기에 각지에서 군벌이 일어나자 궁예는 세달사에서 나와 죽주(안성)에서 한창 세력을 날리던 기훤의 휘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기훤은 궁예의 재능과 인물됨을 잘 알아주지 않았고 궁예는 더이상 그의 휘하에 있어봤자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후 궁예는 함께 기훤의 밑에서 활동하던 청길, 원회, 신훤 등과 기훤을 떠나 북원(지금의 강원도 원주시)에서 위세를 떨치던 양길에게 갔다. 다만 사극 태조 왕건에서는 원회와 신훤이 주도하여 폭압적인 행태를 일삼던 기훤을 제거하고 궁예를 새 우두머리로 추대하나 세력에 한계를 느끼고 그 세력 그대로 더 큰 세력이었던 양길의 부장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나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사졸과 함께 고생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라고 하고 있다. 궁예가 어떻게 민심을 얻었는지를 짐작할수 있는 대목으로 귀족들의 수탈에 질려있던 백성들에게 공평무사한 궁예의 행보는 당연히 환영을 받았을 것이다.

양길의 부하가 되어 여러 성을 정복한 궁예는 견훤후백제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도 자립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하여 894년에 명주를 점령했다.

당시 명주의 성주는 김순식으로 신라의 진골 귀족이었다. 게다가 그는 태백산맥 동쪽, 오늘날로 치면 영동 지역에서 엄청난 세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나중에 왕건에게 항복했을때 왕건이 대광 벼슬을 주고 자신의 성씨까지 하사해서 왕순식이 된것을 보면...아무리 궁예의 군대가 강했다고 해도 김순식을 무력으로만 제압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문에 일각에선 김순식이 기득권을 보장받는 대신 명주를 궁예에게 바쳤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실제로 김순식은 왕건의 역성혁명 이후에도 10년 넘게 왕건을 반대하며 항복하려들지 않았다는 점으로 미루어본다면 김순식과 궁예의 관계가 상당히 밀접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또한 이것은 궁예가 신라 지배층이라는 것을 당시에도 널리 인정받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만약에 궁예의 출신이 의심받고 있었다면 진짜 진골인 김순식이 궁예에게 고분고분 입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후 장군을 자칭하며 양길로부터 독립된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나서 899년에는 본격적으로 양길과 대립하기 시작하더니 비뇌성 전투에서 양길군을 완전히 격파하고 소백산맥 이북의 영역을 거의 장악했다.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15]라 하고 지금의 개성시에 해당하는 송악을 수도로 삼았다. 궁예가 고려라는 국호를 쓴 것은 송악과 인근의 패서지역 고구려호족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측면이 강했던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고구려계 호족들의 수장이라고 할수있는 왕건은 이 시절 승승장구해 나갔다.

그런데 904년, 궁예는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 고치고 철원에 도읍을 삼았다. 때문에 왕건과 그 부하들이 눈치우다 빡쳐서 쿠데타을 일으켰다는 개드립도 존재한다.

왜 궁예가 3년 만에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와 연호를 고쳤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나 대체적으로는 왕건을 위시한 고구려계 호족들의 세력이 궁예의 왕권에 장애요소가 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마진이란 이름 자체가 불교용어 마하진단(摩荷震檀)[16]의 준말, 혹은 마한, 진한을 의미하는데, 어떤 뜻이 되든 고구려의 이미지만으로는 삼국통일이 어렵다는 시각 하에서 내려진 결정이란 것이다.

실제로 궁예는 901년에 보였던 친고구려적 성향을 철원에 천도하고 나서는 버렸다. 신라의 오소경중 하나인 청주 주민들을 철원으로 이주시키고 아지태를 위시한 백제계 호족인 청주 세력들을 적극 등용한 것 등은 궁예가 고구려계 호족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행해진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출생 탓인지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며, 강렬한 적개심을 드러냈다고 하지만, 내심 속으론 신라계를 포함한 여러 계통의 세력들을 이용해 고구려계를 견제할 정도로 냉철한 정치적 계산을 하는 인물이었던 듯하다.

4 몰락의 징후들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다. 속설에 따르면 오행설에 근거한 것으로 금생수(金生水)의 원리로 금의 기운으로 일어난 신라의 금덕을 이기겠다는 의도에서였다.[17] 914년에는 연호를 다시 정개(政開)로 고쳤다. 고려사에 의하면 집권 후반기에는 스스로를 미륵이라 자칭했으며, 사왕진안관심법(觀心法)으로 사람의 마음을 뚫어본다고 주장하고 법봉(法棒)을 사용하여 신하들을 때려 죽이는 등 광기를 일으켰다고 기록되어 있다.구스타프? 그러나 이 역시 궁예가 자신을 부처에 비유하는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을 미륵으로 칭한 것은 신라후기 혼란한 시대에 백성들에게 널리 퍼져있던 미륵신앙을 활용해 자신을 민중들에게 구세주로 각인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관심법은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는 방책이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궁예의 왕권강화책은 지나친 나머지 부작용을 일으켰다. 미륵신앙을 활용해 자신의 왕권을 높이려는 생각은 미륵신앙의 본산이라 할 수 있던 법상종과 갈등을 일으켰다. 법상종이란 종파가 미륵불을 주불로 삼는 종파다. 그런데 스스로를 미륵이라고 부르는 위인이 그런 법상종과 갈라진다는 것은 고깃집 사장이 축산물 도매 시장과 척을 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장사 망했네 결국 궁예의 미륵신앙 정치화에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법상종의 거두 석총을 처형하는 사태로 나타나고 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궁예가 20권의 불경을 손수 집필했는데 이게 요망스러운 불쏘시개여서 이 강설을 듣던 석총이 이런 해괴한 이야기로는 남을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하자 그 자리에서 석총이가 마군이야 마군이가 쓰였어!!! 하며 대놓고 욕을먹고 철퇴를 맞고 끔살당했다고 한다. 궁예가 썼다는 경전의 내용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그 내용이 어쨌건 대놓고 경전을 제멋대로 찬술한 것은 불교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행위다. 일부 문학작품에서는 미륵불이 속임수를 사용한 석가불에 의해 밀려나 세상이 혼탁해졌다는 내용의 무가인 창세가를 궁예의 불경의 내용으로 넣기도 하나, 어디까지나 문학적 상상력일 뿐 근거는 없다. 게다가 승려를 무참히 살해했으니, 당시 불교계에서는 승려와 신도를 불문하고 충격과 공포를 받았을 것임이 분명하고 미륵신앙을 마음대로 이용하려는 행태는 불교 교단의 반발을 샀을 것이다.

또한 궁예는 관심법을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한 듯하다. 궁예는 점점 정적들에게 무자비해졌으며 자신의 왕권강화책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던 왕비 강비를 잔인하게 죽이고 이를 말리던 아들 청광과 신광까지도 죽이고 만다. 고려사는 이를 궁예의 광기로 규정했지만 아마도 궁예는 패서 고구려계 호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강비가 자신의 아들들을 앞세워서 궁예를 무력화시키려는 시도를 할 것을 우려했던게 아닌가 싶다. 실제로 강비의 죽음에서 궁예가 노린 것은 왕건이라는 지적도 있다. 폭정을 멈추라고 간하는 강비에게 네가 다른 남자와 간통했다라고 누명을 씌워 죽인 것은 패서계 호족들을 대변하는 강비가 패서계 호족들의 대표격인 왕건과 정세를 논했거나 긴밀한 연락을 주고 받은 것을 암시한게 아니냐는 것이다.

강비의 죽음 이후 패서의 고구려계 호족들은 궁예가 자신들을 제거할까 두려워한 것 같다. 이들의 우려는 그간 왕건만은 건드리지 않았던 궁예가 왕건마저도 반역을 했다며 죽이려드는 사건을 통해 현실화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수도를 철원으로 정한 것은 그다지 좋지 않은 정책이었다. 철원이 비록 풍요로운 평야 지대이지만 철원 자체의 생산력만으로 수도의 경제를 유지하는 것엔 한계가 있었고 마땅히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편리하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당시의 철원은 이러한 교통이 불편한 곳이었다.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데다 수운 교통이 발달한 당시, 한탄강을 이용한 수운이 원활하지 않은 철원은 사람의 이동이나 물자 이동이나 꽝인 곳이었다. 이 때문에 수도의 쌀값은 크게 치솟았고 백성들의 반감은 계속 커지게 되었다. 한탄강은 기암괴석과 절벽이 많아 래프팅이라면 몰라도 무거운 화물을 실은 큰 배는 못 다닌다. 진지하게 보자면 육로교통수단이 발달한 현대의 시각에서 철원은 지리적으로는 상당히 괜찮은 땅이다. 들이 넓고, 서울경기에서 함경도로 향하는 도로ᆞ철도교통의 요충지인 덕분이다. 그래서 조선~일제시대(일제강점기)~6.25동란 직전까지 철원은 강원도에서 손에 꼽히는 큰 고을이었다. 일제시대 강원도청을 철원으로 옮기려고 까지 했을 정도. 강원도청이전 소식은 도청소재지 지위를 잃을것을 우려한 춘천지역 자본가들을 자극하여 경춘선 철도부설을 서두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지금 철원지역 교통이 불편한 건 순전히 휴전선이 철원 가운데를 관통해서 몰락했기 때문.

5 최후

정개 5년인 918년. 제설하다 친 장병들에 의해 왕건을 옹립하려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쿠데타는 패서 고구려계 호족들이 궁예에게 당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고 볼 수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궁예는 변장을 하고 부양 산골현으로 도망치다가 배가 고파 보리이삭을 먹던 중, 서리에폭정에 분노한 그 지역 백성에게 발각되어 맞아 죽었다고 한다. 궁예는 여러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동쪽으로 도망쳤는데, 양길군에서 독립한 궁예의 첫번째 기반 지역이기도 했던 명주(강원도 영동 지역)의 지배자 김순식은 왕건이 즉위한 이후에도 수년간 왕건을 적대할 만큼 중견 세력+궁예파였기 때문에 궁예가 도주ᆞ합류에 성공했다면 왕건은 상당히 어려워졌을 것이다.

그해 6월 을묘에 기병 장군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이 비밀히 짜고 밤중에 태조의 저택으로 가서 그를 왕으로 추대할 뜻을 함께 말하였다.

태조는 굳이 거절하여 허락하지 않았으나 부인 유씨가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입히니 여러 장수들이 옹위하고 나오면서 사람을 놓아 말을 달리며 외치기를 “왕공이 벌써 의기(義旗)를 들었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분주히 달려와서 함께 참가한 자들이 이루 헤일 수가 없었고 먼저 궁문으로 와서 북을 치고 떠들면서 기다리는 자도 만여 명이나 되었다.
궁예가 이 소문을 듣고 깜짝 놀래어 말하기를 “왕공이 벌써 승리를 얻었으니 내 일은 다 글렀다.”하고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리하여 그는 변복을 하고 북문으로부터 도망쳐 나가니 궁녀들이 궁 안을 깨끗이 하고 태조를 맞아들였다.
궁예는 산골로 도망하였으나 이틀 밤을 지난 후에는 배가 몹시 고파서 보리 이삭을 잘라 훔쳐 먹었다. 그 후 곧 부양(斧壤-강원도 평강) 백성에게 살해되었다.
- 고려사

궁예의 최후에 대해선 분분한데 <광산이씨소고>에 따르면 궁예왕은 측근 몇 사람을 거느리고 현 평강(平康) 방면으로 도주 중 수풀 속에 숨은 백성들의 죽창에 찔려 삼방(三防)땅에 이르러 말 위에서 분사하였으나 생시처럼 꼿꼿히 앉아 있었다 한다. 왕건이 달려와 조문하나 유해는 움직이지 않으므로 모든 사람이 겁내어 부득이 직립한 채로 입관케하여 석축으로 수십 길이나 높다란 분묘를 만들어 왕의 예에 따라 정중히 장례를 지냈다고 하며 오래도록 연 1회 향사를 올렸다고 전한다.

철원 일대 민간에 전해오는 전설에 따르면 궁예왕은 쫓기어 삼방골짜기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한 스님 만나 "혹시 용잠호장(龍潛虎藏)할 만한 곳이 없겠느냐?"고 물었으나, 스님이 말하기를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는 이런 협곡에 들어와 살아남겠다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하자 궁예는 "드디어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 높은 곳에서 의연하게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궁예 세력이 간단히 붕괴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철원지방에서는 궁예가 강을 건나 도망갈 때 한탄했다면서 한탄강이란 이름이 붙었다거나 궁예가 군대를 이끌고 왕건의 군대와 대결하거나 산에 은거해서 싸웠다거나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길안내까지 해줬다는 민간전설도 있다. 실제로 궁예 사후 청주에서 잇달아 반왕건 반란이 일어났고, 열렬한 궁예 지지자였던 명주의 김순식은 4년이 넘도록 왕건에게 항복하지 않았을 정도였던 걸로 볼때[18] 왕건의 쿠데타는 전체적인 지지를 받은게 아닌 것이 분명해 보인다. 웬지 항우의 최후와 비슷하다

6 평가와 후일담

물론 잘못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궁예는 상당히 능력있는 정치가였던 것만큼은 틀림이 없다. 또한 일개 떠돌이 이었던 신분에 출발해서 양길의 휘하에 들어갈 적에는 이미 그의 심복이 되어 장수로 이름을 떨쳤던 것을 보면 군사적인 재능과 통솔력, 카리스마 또한 남달랐던 것 같다. 대개 성공한 반란 이후에는, 으레 구지배체제에 대한 격하와 깎아내림이 뒤따르지만 왕건이 등극한 이후 10여년이 지나도록 궁예는 "대왕 전주(大王 前主)"라고 일컬어지며 선각사 대사비에 기록되었는데 이는 궁예를 추종한 잔존세력의 비중이 왕건의 고려 정권 핵심부에서도 마냥 무시할 수 없을 크기였다는 의미. 내용이 얼마나 헛소리였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경전 수십 권을 손수 쓰고 직접 공공연히 강설했다고 하니까, 적어도 그럴듯한 글을 한문으로 쓸 수 있을 정도의 필력은 물론 불교 관련 지식도 나름대로 깊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궁예의 몰락은 너무 성급하게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것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왕건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왕비 수십명으로 대표되는 회유책을 쓴 것과 대비된다. 하지만 그 회유책이 왕건 사후에 불러온 다툼을 생각한다면...하지만 임용한처럼 궁예의 능력과 그릇은 딱 도적 두목 수준밖에 되지 않았고 일국의 왕이 될 그릇은 아니라고 비판하는 학자들도 있다.

재미있게도, 궁예의 시대에는 자칭 미륵이었던 것이 어느 새인가 진짜 미륵으로 둔갑하여 고려 시대부터 지금까지 마을신앙으로 자리잡았다. 드디어 인정받았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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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경기도 안성의 궁예미륵. *

또한 순천 김씨와 광산 이씨는 가문의 시조가 궁예의 후손이라고 족보에 기록하고 있다. 다만 순천 김씨에서는 궁예가 신라 왕실 족보를 끌어쓴게 와전되었을뿐 궁예와 순천 김씨와는 관계가 없다고 한다. 실제로 시조 김총과 궁예와의 관계에서 석연치 않은 부분이 몇군데 있기도 하고. 특히 순천 김씨는 그 유명한 김종서를 배출한 가문이다. 한 가지 더 아이러니한건 김종서와 광산 이씨의 이선제는 고려사 편찬에 일익을 담당한 사람들이다. 이게 사실이면 두 사람은 조상을 비하하는 사서 편찬에 관여한 셈. 이는 궁예가 어찌 되었든 신라의 왕족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신라 왕실과 집안의 혈통을 연관짓기 위함일 가능성도 있다.

철원 지방에는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처음 옮겼을 때 눈에 보이는 돌마다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것을 보고 왕조의 몰락을 직감했다는 설화[19]가 있다. 현무암 지대인 철원의 자연지리적 특징과 태봉의 역사가 결합된 설화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해당 지역에서는 종종 "곰보돌"로 부르는 모양.

이 외에도 어떤 사건에 대한 근거없는 추측행위를 두고 궁예질이라는 표현이 온라인 상에서 쓰이고 있다.

7 폭군인가에 대한 논란

당시 궁예의 폭정 증거는 아래와 같다.

  1. 부인 강씨와 두 아들 살해
  2. 당시 불교 고승들을 살해하고 자체적 불경 제작
  3. 자신이 제작한 불경을 비판한 불교 세력 숙청 (석총, 형미)
  4. 호족과 공신세력 숙청
  5. 사치와 낭비로 민심이반
  6. 신라계 차별[20]
  7. 미륵신앙을 이용한 사이비 교주 등이다.
  8. 기침을 한 죄로 신하를 숙청
  9. 시베리아보다 추운 철원에다 수도를 정한 점.[21]

그러나 최근에서는 역사가 승자입장에서 기록된다는 것을 보면 마냥 폭군은 아니라는 주장도 나온다. 궁예가 부인 강씨과 그 두 아들을 살해한것은 당시 호족 중에서 궁예의 중앙집권에 가장 반대하는 세력이 강씨의 친정세력이었고 게다가 궁예만 이런것도 아니고 전세계적으로 당장 이 게임만 해봐도 알 수 있듯이꽤 흔한 일이었다. 또한 이들은 궁예와 강씨의 두 아들을 내세워 순군부를 설치, 호족들의 군권을 약화하려던 궁예의 왕권강화에 저항했다는 역사학자들간의 주장이 있었고 불교 고승들 숙청과 해괴망즉한 불경제작도 당시 귀족중심의 불교에 익숙한 불교계에 민중중심의 불교를 전파하려는 갈등으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더구나 궁예의 호족과 공신 숙청은 다른 왕조에서도 보는 왕권강화의 일환이었으면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뒤 광종이 등극하여 개혁할때까지 고려왕실과 조정이 호족과 외척, 공신들로 인한 심각한 혼란에 종묘사직이 위협받을 정도로 강했던 호족과 공신문제를 진정시키기 까지 많은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오히려 궁예의 공신숙청과 미륵불 자처 행동은 당시 민중이 백성들 삶을 외면한 기득권층과 종교계에 대한 궁예의 개혁정치 일환으로 볼수있다. 물론 우리가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이 아닌만큼 그 당시의 상황에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어렵다.

다만 위와 같은 주장은 어디까지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상을 넘어서기는 어렵다. 궁예의 불경제작에서 인정되는 사실은, 어디까지나 궁예가 불경을 만들었다는 것 뿐이다. 그 내용이 정말 민중들에게 희망을 설법하고 기득권층에게 일갈하는 간지폭풍의 내용일지, 아니면 궁예 자신을 미륵불로 신격화하기 위한 헛소리로 가득찬 불쏘시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또한 궁예가 강빈과 두 아들을 살해한 목적이 왕권강화를 위해서였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궁예는 공포정치를 펼쳤으며 그 과정에서 관심법을 이용한 자의적인 법집행과 공포정치로 패서호족들을 통제하는데 실패했다. 궁예가 도주할 때 우호적인 설화가 많이 남은 것도 사실이지만 이것도 철원의 지정학적 위치와 관계가 있다. 위에서 지적했듯 한탄강 수운에 의한 물자 공급이 어려운 철원에서는 쌀값이 급등했는데, 그렇다면 철원에 쌀을 공급했던 철원 근교의 지주나 농민들은 상당한 이익을 보았을 것이며 이들은 궁예에게 호의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사료들을 종합하여 보면 궁예가 말 그대로 광기에 물든 폭군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자신의 권력을 위해 미륵신앙을 이용하여 공포정치를 펴다가 실패한 지도자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8 창작물에서의 궁예

8.1 태조 왕건

궁예(태조 왕건) 문서를 참조.

8.2 영화

워낙 옛날 일이라 잘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궁예가 등장하는 영화는 종종 있었다. 궁예가 등장하는 최초의 영상물은 1959년에 제작된 영화 <왕자 미륵>으로, 신라 말기에 궁예가 어지러운 난세를 평정하고 태봉을 건국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당대의 스타였던 방수일과 도금봉이 주연을 맡았다. 다만 작중에서는 궁예라는 이름 대신에 '미륵'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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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미륵불레이
1970년작인 영화 <태조 왕건>에서도 등장하는데, 작중에서는 간신배 및 간신배와 간통을 하던 왕비의 꾀임에 놀아나다가 살해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작중에서 주인공인 왕건은 궁예를 죽인 간신배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조정을 장악하고 고려를 건국한다.

8.3 천년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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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커스텀 플레이시 고려군. 고려 미션에서는 역사대로 왕건의 반란 뒤 죽는다. 미륵염화술이라는 사이오닉 스톰 비슷한 불기술을 날린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8.4 태조 왕건 : 제국의 아침

미션모드에서 왕건이 독립하면서 3파전 구도로 흘러가다 왕건, 견훤을 제압하고 삼국을 통일한다.

8.5 기타 소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목대왕[22]의 철퇴'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썼다고 한다. 여기서는 자주적인 일목대왕과 부패한 권신들간의 대립을 다루었다는데 보신 분 있으면 추가바람.

김성한소설 '왕건'에서는 천하의 개쌍놈으로 나온다. 여기서는 왕비 강씨를 그냥 죽이지 않고 달군 쇠로 강비의 검열삭제를 찔러 입으로 나오게 한다. 인간 꼬치 하지만 이게 원래 궁예의 모습은 아니고, 궁예가 사냥을 하다 머리에 큰 부상을 입은 후 인간이 달라졌다는 식으로 묘사되며, 운게른? 이는 태조 왕건에서 이 내용을 차용해 궁예가 머리를 다친 까닭을 암살시도로 바꿨다.

머리를 다친 뒤에도 가끔 제정신이 돌아오면 사리에 맞게 판단한다. 머리를 다치기 전의 궁예는 난세를 평정할 자질이 있는 비범한 영웅의 모습을 충분히 보여준다. 작중에서 왕건의 생각을 빌려 궁예가 사람과 전쟁 모두를 다룰 줄 아는 군주였고, 그가 죽은 후 사람을 다루는 재능은 자신(왕건)이, 전쟁을 다루는 재능은 견훤이 각각 가져갔다고 하여 사실상 궁예를 후삼국기 최고의 인걸로 묘사했다. 참고로 여기에서 강비는 왕건의 어린시절 첫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던 사이지만 정략결혼으로 궁예에게 간 것으로 나온다. 역시 태조 왕건에서도 보이는 장면. 다만 드라마상에서는 민간 전승에서 빌려온 설정이라고 나온다. 강비가 죽기 전에는 비록 사랑하는 이를 뺏은 사람일지언정 알고 그런 것도 아니고 난세를 헤칠 영웅이었기에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서 충성을 다했지만, 강비의 죽음 뒤로 궁예에게 회의를 품고 끝내 역성혁명을 일으킨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마의태자[23]'에서는 주인공으로 나온다. 기존의 인식과 달리 용감하고 정의로우며 카리스마 있는 영웅이지만, 자신과 시대의 한계를 못 이겨 몰락해가는 비운의 인물이다.

태조 왕건 스타크버전에서는 질럿으로 등장한다.
  1. 국호가 마진이었을 때 사용하였다.
  2.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으로 바꾸면서 사용하였다.
  3. 국호가 태봉이었을 때 사용하였다. 참고로 후백제견훤이 사용한 연호 정개는 한자가 다르다.
  4. 신라 왕족 출신이 맞는 경우. 이 당시에 궁예에게 성과 이름을 붙여 김궁예로 불렸는지 그냥 궁예로 불렸는지는 불명. 그러나 김예로 불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5. 궁예가 신라 왕족 출신이 아니고, 왕건견훤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성씨 사용이 일반적이지 않음을 고려하여 이름이 그냥 궁예라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6. 고려사에 의하면 상인 왕창근이 궁예에게 거울을 바쳤는데, 거울에 글자가 새겨졌는데, 이를 고경참문으로 부른다. 그 내용은 이 사유(四維)는 반드시 축(丑)을 멸망하게 만들고, 바다를 건너서 온 유(酉)에게 항복하게 될 것이다.(此四維定滅丑 越海來降須待酉)라고 적혀 있어서, 궁예가 축(丑)년생으로 추정된다.
  7. 음력 6월 14일에 쿠데타가 일어난 뒤 도망가다 죽었다.
  8. 그리고 유의해야 할 것이, 임용한은 전쟁사 전공이지 고려사 전공이 아니라는 점. 물론 비전공자라고 반드시 전공자보다 못하리라는 법은 없지만, 서로 다른 주장을 할 경우 전공자의 말이 보다 권위를 갖는 것이 사실이다.
  9. 위서 환단고기에서는 고구려 왕족 출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연하지만 근거는 없다.
  10. 백제 부흥을 주장한 견훤도 신라 왕의 자손임을 사칭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적어도 견훤이 사서에서 직접 자신이 신라와 관련된 무엇의 후손이라고 주장한 적은 없다. 그나마도 현재 전하지 않는 사서인 이제가기에 따르면 신라 외척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을 뿐이다.
  11. 진림의 격문에서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거지였다고 묘사된다.
  12. 누구한테 받은 게 아니다. 《삼국사기》 궁예전 원문에 自號善宗이라고 되어 있다.
  13. 전 세계적으로도 모히칸 머리에 가죽자켓을 입은 쟈코들이 들끓는 북두신권의 세상(...)이 돌아오면 종교인이라도 무장을 하고 자위수단을 마련하는 현상은 흔하다. 대표적으로 중국 소림사가 있으며, 조폭간의 항쟁 수준으로 무장했던 일본 전국시대의 승려들 같은 경우도 있고, 마자르족이나 바이킹과 같은 이민족의 침공과 군웅할거로 어지럽던 중세 유럽 초기의 경우를 봐도 외딴 수도원들은 어지간한 요새 저리가라 할정도로 튼튼히 지어져 위기시 방어거점으로 사용할수 있게 설계 되었고, 수도승들도 철퇴로 남의 골통을 잘만 까부수고 다녔다(...) 교황이 제발 수도승들은 무기 좀 내려놓으라고 여러번 칙령을 발표해도 현지가 너무 험악하다보니 이빨도 안들어갔을 정도(...)
  14. 산가지 4개를 떨어트려 그것이 王자를 그렸다거나, 왕 자가 씌어진 자갈을 떨어뜨렸다는 버전도 있다.
  15. 후고구려라는 명칭은 먼저의 고려김부식이 살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궁예가 살던 당시에는 쓰이지 않았다.
  16. 풀이하면 대동방국 혹은 마하를 큰나라로 진단을 동방으로 해석해 동방의 큰 나라라는 의미가 있다. 다만 태조 왕건에서 채택한 설이지만 정설은 아니다.
  17. 여기에 더하여 만세는 황제에게 부르는거니 은근 자주성도 내세우고 있다.
  18. 왕건에 맞서 수차례 거병하려고 했지만 아버지의 설득으로 인해 결국 무력충돌 없이 귀순 후 왕씨 성을 하사받고 왕순식이 되었다. 922년에 귀부했고, 이후 일리천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19. 정확히는 백성들이 물러나라고 난리치자 "한탄강가의 돌에 좀이 슬기 전까지는 물러날 수 없다!"라고 일갈했다. 그런데 다음날 득달같이 한탄강 주변에 가 봤더니 진짜로 돌에 좀이 슬어 있었고, 이것을 궁예에게 보여주며 물러나라고 하자 궁예가 "내 운수가 다했구나"라며 탄식했다는 얘기.
  20. 특히 후삼국시대를 소재로 한 대하드라마인 태조왕건에서 궁예가 신라를 멸도(滅都)로 지칭하고 신라 출신에 대해서 멸도(滅都)의 쓰레기라고 경멸하며 심지어 투항한 신라인들을 죽이라는 명령까지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 멸도 운운은 삼국사기에 다 있는 내용이다.
  21. 종종 군대개그 소재로 쓰이는 소재.
  22. 말 그대로 외눈(一目)대왕.
  23. 제목과 달리 마의태자는 소설의 후반부에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얽혀 잠깐만 나오고, 실제 주인공은 궁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