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레이쇼 게이츠

Horatio Lloyd Gates
(1729-1806.04.10)

1 개요

미국장군. 미국 독립전쟁에서 한때 영웅에서 원쑤로 전락한 인물. 혹자는 미국판 원균이라 카더라.

2 생애

본래 영국 본토 출신으로 프랜치-인디언 전쟁에 참전한 이후에 1772년 웨스트 버지니아로 이주했다.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군경험이 있는 모든 장교들이 식민지군의 장군으로 임명된 가운데 게이츠도 식민지군의 장군으로 독립전쟁에 참전했다.

2.1 새러토가의(의문스런) 영웅

게이츠의 명성을 드날리게 된것은 새러토가 전투로 이때 게이츠는 뉴욕주 올버니 근처의 새러토가에서 버고인이 지휘하던 영국군을 격파해 항복을 받아냈다. 이 당시에 식민지군 총사령관이던 조지 워싱턴은 패전을 거듭해 대륙회의내에서 워싱턴에 대한 불신이 높아진 상황이었던지라 대륙의회에서는 자연스럽게 워싱턴의 대안으로 게이츠를 밀게 되었다. 대륙회의에서는 게이츠를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해 워싱턴 흔들기에 나섰다.

그러나 게이츠가 새러토가에서 거둔 대승의 이면에는 남의 공적을 가로챘다라는 소문이 뒤따랐다. 이 소문은 사실이었다라는게 문제였다. 실제로 새러토가 전투 당시 게이츠는 군대의 출정을 결사반대했으나 베네딕트 아놀드가 게이츠의 반대를 거부하고 출전해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아놀드는 다리에 총상을 입을 정도로 전투를 치러 승리했으나 게이츠가 아놀드의 공적을 가로채버렸던것. 아놀드로선 억울할 일이었으나 딱히 방법이 없었다.

2.2 턱없는 야망

어쨌든 남의 공적을 가로채서 영웅이 된 게이츠는 턱없는 야심에 부풀기 시작했다. 게이츠는 워싱턴을 밀어내고 자신이 식민지군 총사령관이 되기를 원했고 독립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신생국가 미국의 국가 지도자가 되는것을 꿈꾸었다. 당연히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주역이 국가 지도자가 되는건 정해진 수순이었다지만 게이츠에겐 야심만 있고 그걸 실천할 능력이 없었다라는게 문제였다.

워싱턴의 패배로 필라델피아가 영국의 수중에 넘어가고 독립전쟁은 좌초위기에 몰리자 대륙회의내에서는 뜬금없이 일본을 캐나다를 공격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게이츠가 앞장서서 이런 주장을 펼쳤는데 사실 이런 주장을 한 이면에는 워싱턴을 끌어내리려는 뒷공작이 숨어있었다. 이에 게이츠는 콘웨이를 포섭해 그를 총사령관으로 앞세워 캐나다 침공을 추진하려 했다.(콘웨이 음모)[1]

워싱턴은 이런 게이츠의 음모를 간파하고 자신의 편에 서있던 라파예트 후작을 캐나다 침공군의 총사령관으로 밀었다. 하지만 애당초 캐나다 침공군의 수준도 오합지졸이나 다름이 없어서 라파예트는 원정계획 파기를 주장했고 대륙회의는 라파예트를 워싱턴이 있던 포지계곡으로 되돌려보냈다. 그리고 게이츠의 사주를 받은 콘웨이가 사임하겠다고 협박하자 그걸 대륙회의는 그대로 받아들여버려서 뻘줌해진 콘웨이는 프랑스로 돌아갈수밖에 없었다. 게이츠도 콘웨이 음모에 연루된것이 드러나 군사위원회 위원장직을 사임하고 북부군 사령관으로 돌아갔다.

2.3 망했어요

1780년, 독립전쟁이 지지부진해지자 영국은 눈을 남쪽으로 돌려 남부공략에 나섰다. 결국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부유한 경제 중심지인 찰스턴이 함락당하고 식민지군의 남부군은 궤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부유한 남부를 잃을수는 없는 상황이었던지라 새로운 사령관을 파견해 남부군을 복구하고 영국군을 막아내는것이 급선무였다. 워싱턴은 자신의 유능한 부관인 나다나엘 그린을 대륙회의에 추천했으나 약을 잘못먹은 대륙회의는...

게이츠를 남부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워싱턴은 게이츠의 임명에 결사반대했지만 대륙회의는 임명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게이츠는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인 야심만 많고 능력은 없는 모습을 제대로 과시했다. 당시 남부군의 정규병력은 영국군에 패하고 열악한 환경으로 폭동 직전까지 내몰린 상황이었다. 그러나 게이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영국군 사령관 헨리 클린턴의 뻘짓[2] 으로 남부는 독립파와 영국 지지파의 민병대들이 진흙탕 싸움을 벌이던 중이었다. 정규군의 사기가 땅바닥을 뚫을 기세라 게이츠는...

민병대를 너무 믿어버렸다.

게이츠의 남부군에 합류한 독립파 민병대들은 영국 지지파 민병대와 개싸움을 벌이다가 왔으니 당연히 사기는 높았다. 그러나 이들은 정규군과 싸워본 경험은 전혀 없었다는게 문제였다.

1780년 8월 16일, 게이츠가 지휘하는 남부군과 독립파 민병대 3700여명은 영국군 남부방면 사령관으로 부임해 연승중이던 콘월리스의 2100여명의 병사와 캠든이라는 곳에서 맟부딫쳤다.(캠든 전투) 이때 게이츠는 아주 치명적인 전략적 실수를 저지르는데...

경험없는 민병대를 선두에 앞세웠다.

게이츠는 단순하게 사기가 충천한 독립파 민병대들을 앞세워서 영국군의 전열을 흐트러트린 후에 정규병사들이 영국군을 격파한다는 전략을 세웠지만... 독립파 민병대들은 영국 지지파 민병대들을 고문하고 보복할줄만 알았지 영국군 같은 정규군을 맞닥뜨리자 싸우기는 커녕 모두 도망쳤다. 당시 전투에 참전한 영국병사들은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 "우리가 소리만 질렀더니 저놈들이 냅다 튀었다."라고 회고할 정도.

민병대들이 전열이 무너지고 도망치자 사기가 바닥을 뚫을 기세였던 정규군 병사들도 제대로 싸우기는 커녕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리고 게이츠는...

말을 타고 열심히 북으로 도망쳤다.

얼마나 빨리 말을 몰았던지 단 며칠만에 300km가 넘는 거리를 주파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아마도 게이츠가 공황상태에 빠져서 그렇게 걸음아 날살려라라고 도망쳤다고 보는데 결국 게이츠는 새러토가의 영웅에서 겁쟁이로 한순간에 추락했다. 게이츠의 소식을 들은 어떤 사람은 "그 영감이 그 나이에 그렇게 말을 빨리 몰다니 대단하다"라고 비꼬았을 정도.

결국 게이츠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그에게 패전 책임을 추궁했으나 게이츠는 적반하장으로 자신의 책임을 끝까지 부인했다. 결국 그는 이후 야전사령관으로는 다시는 복귀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만 뉴잉글랜드에 그의 지지자들이 좀 있던 터라 그들의 노력으로 1782년 뉴버그로 가서 워싱턴의 참모로 일할수는 있게 되었다. 이듬해인 1783년에 일어난 소위 뉴버그 음모에 게이츠가 관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게이츠의 부관이었던 존 암스트롱 소령은 게이츠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연락하고 있었고, 역시 게이츼 부하였던 월터 스튜어트 대령은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과격선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게이츠가 이때도 음모에 관여했을거라고 보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2.4 말년

독립전쟁이 끝난후 게이츠는 퇴역하여 웨스트 버지니아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에 전쟁당시의 전쟁위원회 멤버들을 규합해 버지니아 신시내티 협회를 조직해 정치적 재기를 모색했지만 하도 저지른짓이 커서...

한편으로 존 애덤스와 절친한 사이었는데 애덤스의 권유에 따라 게이츠도 자신의 소유지를 팔고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이후 맨하탄섬의 작은 농원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친구였던 존 애덤스가 대선에 출마했을때는 어찌된 영문인지 애덤스의 라이벌인 토마스 제퍼슨을 지지해서 애덤스와의 오랜 우정은 끝장나버렸다. 뉴욕의 사교계에 출입하면서 한때 뉴욕주 의회 1기 의원을 지내기도 했다가 1806년 4월 10일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윌가의 트리니티교회 묘지에 매장되었지만 오늘날에 그의 묘의 정확한 위치는 불명인 상황이다.
  1. 사실 여기에는 워싱턴을 시기했던 존 애덤스와 그의 형 샘 애덤스가 핵심이라는 이야기도 많다. 존 애덤스가 친구인 게이츠를 밀어서 워싱턴을 실각시키려고 했고, 이걸 위해서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인물이 토마스 콘웨이라는 것.
  2. 포고문을 발표해서 국왕님하에게 충성 안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인다라고 협박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독립전쟁을 강건너 불구경하던 남부 사람들은 독립파와 영국 지지파로 갈려서 서로의 농장과 집으로 쳐들어가 약탈하고 보복하는 난장판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