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皇極編. 1790년에 정조의 명으로 조선의 당쟁과 관련된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편년체로 엮은 책. 총 12권 6책.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현재 남아있는 것은 필사본으로 필사자와 필사 연대는 알 수 없다. 책에 있는 정조가 직접 지은 어제서(御製序)에 따르면 정조 14년, 즉 1790년에 최종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어제서문에서 책 이름을 "황극편"이라 한 것은 황극(皇極, 편파가 없는 중정의 길)만이 붕당정쟁을 없앨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밝히면서, 지금까지의 붕당론을 부정하는 파붕당(罷朋黨)론을 폈다. 서문의 글에 따르면 "주자, 율곡의 시대에는 군자의 당과 소인의 당으로 구분될지 몰라도 지금의 붕당(朋黨)은 군자와 소인이 뒤섞여 붕당의 구성 자체가 의미가 없으므로 붕당을 깨서 붕당에 관계없이 군자들을 걸러내어 왕정을 직접 보필하도록 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 더 필요하다"라고 논파하면서 탕평론(蕩平論)을 전개하였다.
내용은 크게 선조 초기, 동서분당을 시작으로 영조 2년, 1726년까지의 당쟁사가 담겨 있는데 제1책은 동서분당을, 제2책은 동서분당에서 남북으로 분당된 것을, 제3책은 서남분당·대소북분당·노소분당을, 제4∼6책은 노소분당을 다루고 있다.
조선시대 당쟁들의 원인과 진행 과정, 결과 등을 알아보기 쉽게 정리한 책으로 어릴 때부터 당쟁으로 인한 파탄을 경험한 정조가 객관적으로 이를 편찬하도록 명하고 서문을 쓰며 관리한 만큼 조선시대 당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황극편 항목을 참조.
3 정조의 황극편서
아, 이 책은 바로 붕당(朋黨)의 분쟁 내용인데, 왜 황극(皇極)으로 명을 했는가? 그것은 황극이라야만이 붕당설을 깨 버릴 수 있기 때문에 그리 명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붕당을 깰 수는 있을까? 옛날의 붕당은 깰 수 없지만 지금의 붕당은 깰 수가 있다. 왜인가? 옛날에는 군자(君子)는 군자끼리 당을 하고 소인(小人)은 소인끼리 당을 했으므로, 붕당을 깨려고 하면 군자는 피해를 당하고 소인은 뜻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양수(歐陽脩)가 붕당론(朋黨論)을 써서 임금으로서 붕당을 싫어하는 이들의 경계를 삼았던 것이고, 범순인(范純仁)의 조정설(調停說)을 주자(朱子)가 비난했으며 또 그래서 그 붕당을 깰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붕당은 군자 소인으로 갈려진 것이 아니라 다만 주장이 서로 다른 것일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쪽에 하나의 시비(是非)가 있는가 하면 이쪽에도 하나의 시비가 있고, 저쪽에 군자도 있고 소인도 있는가 하면 이쪽에도 군자도 있고 소인도 있어서 그 붕당을 깨 버려야만이 군자가 모일 수 있고 소인을 교화시킬 수 있게 되어 있다.선정(先正) 이이(李珥)는 사류(士流)들을 조제(調劑)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삼았고, 선대왕의 50여 년 치적 중에서 제일 큰 것을 치자면 역시 황극을 세우신 것으로, 그것을 깰 수 있다는 것도 역시 이 때문이다. 혹자는 주자와 구양수의 서론(緖論)을 억지로 인용하면서 황극을 세우신 선대왕의 치적에 대해 다소 유감의 뜻을 표시하고 있으나, 그것은 자기의 치우친 사견(私見)에 꽉 막혀 예와 지금을 구별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여름 벌레에게 무슨 얼음 얘기를 할 것인가. 지금의 붕당은 음붕(淫朋)이다. 음붕치고 깨 버리지 못할 음붕이 어디 있겠는가. 성인이 다시 오신다 해도 내 말이 틀렸다고 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 거의 3백여 년이나 되었는데, 그동안 너와 나로 갈리고 앞뒤로 서로 이어져 있었지만, 요는 모두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던 것이 점점 커지고, 사가(私家)에서 시작하여 조정(朝廷)에까지 올라왔으며, 쟁변(爭辯)으로 시작된 것이 점점 시극(猜克)으로 변하여 이제는 지키기를 맹약처럼 하고, 발동을 할 때는 오늬에 올려진 화살 같고, 없는 사실을 있는 것으로 꾸며 활을 겨누는가 하면 상대가 미워 사사건건 흠만 잡아내어 상대를 씨도 없이 말려 버리지 않고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을 형세로 되었다는 것이다. 선대왕께서 그를 걱정하여 황극을 세우시고 사방 모두가 그 극을 기준으로 모이게 하여 은혜 베풀기를 하해(河海)같이 하시고 그들을 진압하기를 태산 교악(泰山喬嶽)같이 하시며, 하늘처럼 덮어 주시고 땅처럼 실어 주시며, 해와 달이 비치듯이 하고 서리와 이슬이 제때에 내리듯이 하여, 조정 신료들을 과극(戈戟) 속에서 구제하여 편안한 가정생활을 누리게 했으니, 아, 그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만약 그 선대왕이 아니었더라면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을 사대부(士大夫)가 과연 몇이나 되었겠는가.
그러나 그 인습이 아주 고질화되었기에 감화하는 속도 또한 더뎌서 처음에는 덕으로 대했다가 되지 않아 예로 인도하고, 예로 인도해도 되지 않는 자는 형정(刑政)을 총동원하여 깊게 감화를 시키도록 지속적으로 추진한 끝에 50년이 걸려서야 비로소 대성(大成)을 보았을 정도로 그만큼 어려웠던 것이다. 고령(高齡)의 나이에도 권태로운 기색이 없이 늘 이를 생각하며 간곡한 독려와 훈계를 늦추지 않으셨던 그 고충, 그 혈성(血誠)은 나 소자는 물론 당시 조정 신료들도 다 함께 보고 들으며 감탄해 마지않았던 일이다.
《서경》에 이르기를, “내가 짓던 농사를 어찌 감히 끝마치지 아니하리오.” 하였고, 또 “전대(前代)에 문덕(文德)이 있던 분들이 하시던 일을 어찌 마무리하지 않을까 보냐.” 하였듯이, 선왕의 빛나신 가르침에 따라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든 신하들을 협화(協和)시키는 일은 당연히 이 소자의 책임이다. 그러나 조정 신료들로서도 역시 함께 조심하고 노력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지금 상처는 겨우 아물었으나 저명한 재위자도 많지 않은데, 만약에 또 그사이에 파란이 일게 된다면 그 불행이 어떻겠는가. 옛날에도 물론 우승유(牛僧孺)ㆍ이종민(李宗閔)의 당 또는 삭당(朔黨)ㆍ촉당(蜀黨) 같은 것들이 있기는 있었지만, 그것이 갈라지고 또 갈라져 한집에서 싸움질이 나고, 같은 길도 달리 가면서 가정이 산산조각이 나고, 친구가 원수로 변하기로는 우리나라 같은 경우가 없었다. 우리나라가 한쪽에 있어 사람들도 기운을 치우치게 타고나서 그러는 것일까. 슬픈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 생각지 않은 탓일 것이다. 설사 사소한 혐의가 있고, 눈 흘길 감정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가정 파탄의 원인이 되고, 국가에 나쁜 영향을 주는 원인이 되는 것이 무섭지 않다는 말인가. 자기 마음을 공평히 하고 사리를 잘 살펴 잘못이 자기에게 있으면 자책을 하고, 상대에게 있을 때는 용서를 하여 서로서로 훈계하고 타이르면서 자기 위치에서 자기 도리를 다하면 그것이 바로 황극의 도인데, 붕당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나도 누차에 걸쳐 그 점을 경고했건만 말만 많이 했지 듣는 이는 깜깜하고 마음만 타지 효과는 없으니 나 혼자서 어찌하겠는가. 아, 성스러운 선대왕으로서도 유구한 세월이 걸리지 않고서는 금방 그것을 사그라지게 못하셨는데, 하물며 나 같은 소자야 어찌 감히 쉽게 말할 수 있으며 그렇다고 또 노력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나로서는 오직 그동안의 공로를 헛되이 말고 우리 세신(世臣)들과 함께 대화합을 유지하면서 선왕의 빛나는 업적을 뒤따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라는 뜻으로 이 《황극편》 서를 쓰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