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

이 문서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문서에서 생긴 의견 충돌로 이 문서의 토론방에서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문서의 수정을 원하는 사용자는 이 토론 에서 의견을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문서에서 토론하고 있는 부분을 토론 합의 없이 수정 시 문서 훼손으로 간주되어 차단될 수 있습니다.



1 조선의 붕당

qndekd.jpg
조선의 붕당 계보도
나뉜 것은 다시 하나로
분구필합 합구필분(分久必合 合久必分)

정여립의 난 이후에는 호남사람들을 제거하고 영남과 기호사림끼리 피투성이의 지역싸움을 했는데, 작고한 본인들의 뜻에 반하여 전자는 주로 이퇴계를, 후자는 주로 이율곡을 추앙하면서 서로 상대방의 추앙인물을 헐뜯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옥중서신 中[1][2]

다음은 대표적인 붕당 일람. 흔히 사색 당파라고도 불리는데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을 가리킨다.


1.1 개요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조선판 정당정치, 조선판 여당과 야당
:

붕당이라고 하면 조선시대 중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정치 형태로 말 그대로 당을 나누어 정치를 함을 이른다. 일제강점기 이후 일제 식민사관(당파성론)으로 인해 붕당정치의 의미가 퇴색되어 단지 무의미한 당쟁에 불과하다고 깎아 내린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만, 그렇다고 붕당을 비판, 비난한다고 전부 식민사관으로 싸잡는 것도 옳지 못하다. 붕당정치가 조선사회를 유지하는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조선사회에 끼친 폐단들도 적지 않았으며, 붕당정치로 인한 실책의 대한 책임도 크며, 조선시대에서도 폐단에 대한 지적도 많았고, 정약용이나 이익, 이중환 등 실학자들이 붕당에 대해 크게 비판한 사례들도 있으며, 붕당정치에 대해서 지나치게 좋은 평가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1.1.1 붕당의 기본 원리

  • 붕당은 정파적, 학파적 성격에 의해 당을 나누는 것을 가장 기본으로 하고 있다. 당시 정치인들은 대부분 성리학도들이었는데 위 학파 계보에서 볼 수 있다시피 배운 선생들이 각각 달라 그들이 아는 것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르다 보니 당이 나눠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들은 성리학의 위대한 스승들(이이,이황,성혼,조식,서경덕 등등)아래에서 수학하며 그들이 배운 이상을 조선 정치에 반영하였다.[3]
  • 붕당은 공론(쉽게 말하면 여론)을 가장 중시한다. 조선의 중앙정치에서 단연 돋보인 이들은 바로 공론이 정치에 반영되도록 목숨을 다했던 언관직(사헌부,사간원,홍문관원)들 이었다. 이들은 그들이 가진 간쟁,봉박,서경권을 가지고 중앙에서 처리되는 모든 정치적 사안들에 목소리를 낼 수 있었는데 이들은 청요직으로써 주로 젊은 관원들로 뽑혔다. 어린 놈들이 겁도 없이 젊은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윗분들 무서워하지 않고 잘못된 일이면 한결같이 궁앞에 모여 소를 올리고 격론을 벌였다. 이들이 윗분들을 무서워 하지 않고 격론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는 바로 이들을 등용하는 관직이 바로 이조(인사부)의 하위직인 이조전랑(언관들과 같이 젊고 핫한 관료들이었다)에게 맡겨져 있었기 때문이다(또한 이조전랑은 후임자를 추천하여 다음 전랑을 선택함).[4] .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막강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산림(지방에 자리잡고 있는 학문적 스승들)들과 지방 유생들의 여론은 새로이 정계에 진출하는 젊은이들을 통해서나 격문과 상소를 통해 정치에 반영되었다.
  • 붕당은 공존의 미학을 지킨다. 아무리 학파적, 정파적 성격이 다르더라도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힘의 균형을 유지하여 지속적으로 깨끗한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우리 선조들은 이를 알고 있었고 공존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대표적으로 율곡이 공존에 힘을 크게 썼다) 하지만, 이 점은 가장 모순되고 괴리적인 면이 크며, 이에 대해서는 후술 될 모순과 반론이 많다.
탕수육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1.2 배경 - 사림의 성장과 집권

시작 자체는 성종 이후,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면서다. 그런데 붕당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건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 이후 훈구파가 몰락, 사림파가 득세한 뒤에 내부 분열이 일어나면서부터다. 그러니까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사화)이 아니라 사림파 내부의 정치투쟁을 가리키는 용어가 붕당이다.[5]

사림의 시작은 조선 초,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유학자를 중심으로 향촌사회에서 학문에 임했던 집단에서 시작된다. 말 그대로 야(野)당. 고려의 삼은이라 불리는 길재의 학풍을 이어 받았으며 성종시기 성종이 훈구파(당시 여당)를 견제할 목적[6]으로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을 등용하면서 사림파가 형성된다. 이들은 성종의 승하 이후 네차례의 훈구파의 사화를 받으며 탄압받다가 중종이 즉위하자 잠깐 조광조가 그 기틀을 잡아 중흥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조광조가 너무 나서댄 탓에(…) 숙청된 후, 선조 때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정권을 잡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정권을 차지하자 이조전랑 문제[7]동인서인으로 나뉘어지게 되면서 본격적인 붕당이 이루어지게 된다.[8] 동인은 기존 훈구파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던 반면 서인은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9]

사실 김효원-심의겸의 대립으로 붕당이 본격화되기 전에도 한차례의 위기가 있었으니 노당-소당의 분쟁이었다. 노당은 영의정 이준경을 중심으로 하는 원로 사림들의 세력으로 중종때부터 이어져오던 권신 집권기 와중에도 조정에 남았지만 권신에게 굴복하진 않고 소신을 지킨 이들이었고 소당은 조식, 서경덕, 이황을 비롯하여 재야에 내려가 학문을 닦은 처사들을 추종하는 젊은 사림들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이들의 수장은 기대승이었다. 이황을 비롯한 재야 사림들이 선조가 즉위한 후에도 벼슬에 그다지 뜻을 두지 않자 기대승을 비롯한 소당의 인물들은 이게 다 이준경 때문이다!를 외치면서 윤원형 밑에서 해먹은 영감들은 물러가라!라고 주장했다. 이준경은 격노했고 소당을 소기묘라고 부르면서 기묘사화 때 조광조가 설치다가 작살난 것을 보고도 정신을 못차렸다고 맹비난했다. 이때의 분쟁은 이준경이 구 윤원형 세력이 기묘사화 때의 일을 한번 재현해보자고 접근한 것을 물리치면서 선을 지킨 덕에 유혈사태로 격화되진 않았고 노당의 수장 이준경이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소당의 수장 기대승도 낙향했다가 46세를 일기로 사망하는 바람에 일단락되었다. 더우기 노당은 수장인 이준경을 잃고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이준경의 뒤를 이어 수장 노릇을 할법한 원로 사림 유희춘, 백인걸, 노수신 등이 소당을 지지했고 사림의 분열은 이렇게 봉합되었으나 김효원-심의겸의 문제를 놓고 끝내 다시 분열하고 만다.


1.3 분열과 분파

선조 치세 전반기에는 동인이 득세[10]하였고, 임란 직전 당시 득세하던 동인은 남인북인으로 나뉜다.[11] 임진왜란 기간중에는 류성룡을 필두로 하는 남인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임란 종결을 전후로 북인세력들이 남인들을 탄핵하고 득세하였으며, 이후 선조의 후사를 두고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으로 나뉘게 된다.

광해군이 등극한 전후로는 사색당파 모두가 참여하는 연립내각이 형성되었지만[12] 몇번의 대대적인 옥사 끝에 대북세력들이 득세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대북세력들은 완전히 축출된다. 소북세력들은 살아남았으나 광해군 치세때 이미 독립 당파로써의 힘은 상실했고 여타 당파로 흡수되었다. 여기까지가 붕당정치의 제1기로 붕당 정치의 틀이 마련되는 시기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미 북인은 사라졌다.

인조반정으로 서인들이 집권하게 되지만, 남인을 함께 기용하였으며[13] 서로 공존하는 정치를 하였다. 애초에 을 거치면서 서로 싸울 시간도 별로 없었다. 그리고 북벌의 시대가 온 효종시기에는 서인이 남인을 억압하는 양상을 보였으나[14] 예송논쟁 이후 남인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이 시기가 붕당정치사의 제2기이다. 이 시기 붕당의 양상은 서인과 남인간의 대립 양상을 띄게 되었지만 비교적 안정적인 구도가 형성되었다. 실제로 이 시기를 붕당정치의 이상이 그나마 잘 지켜진 시기로 평가된다. 이 때는 세력 다툼에서 밀려난 파벌의 경우도 유배나 낙향 정도였고 사약이 내려가는 사사는 정말 드문 경우였다.

이후 숙종시기 남인이 서인을 축출하면서 득세하게 되지만 이도 얼마 안 갔다. 이후 숙종의 환국정치를 거치면서 붕당은 낙향, 파직, 좌천 정도가 아니라 위리안치, 사사, 연좌제가 넘쳐나는 피비린내나는 정면승부의 시대로 나아가게 된다[15][16]. 숙종 말기 집권당이었던 서인은 경신환국 이후 송시열이 자신을 도운 김석주를 비롯한 척신들을 옹호하자 이에 실망한 젊은 사림들이 송시열과 그를 추종하는 기성세력에게 반기를 들면서 노,소론으로 분당된다. 그리고 노,소론 대립이 격화됨과 동시에 다수당이 소론에서 노론으로 바뀌는 사건이 터지니 남인정권이 들어서는 와중에 송시열을 비롯한 거물들이 대거 죽임을 당하자 많은 젊은 소론들이 대남인 강경파인 노론으로 전향한 것이다. 소론은 권좌는 지켰지만 경종을 싫어한 숙종이 병신처분으로 소론을 날리면서 노론이 집권한다. 이후 경종이 대리청정 문제로 함정을 파서 영조를 지지한 노론의 수뇌부를 대거 숙청하고 다시 삼수의 옥이 터져 이들을 대거 죽이면서 소론이 잠시 득세하는 듯 했으나 경종이 덜컥 죽어버리는 바람에 즉위한 영조에 의해 영조 즉위에 많은 공을 세운 노론이 제1정당이 된다. 이 시기가 붕당정치사의 제3기이다. 이 때에는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발생한 사회의 변동과 그로 인한 과거시험의 남발로 인해서 관료예비군이 넘쳐흐르던 시대였다. 때문에 정권에서 밀려난 학파의 경우는 지방 영향력까지 상실하며 그야말로 쪽박차는 상태가 되어서 밀려난 세력에게는 유배 정도가 아니라 집단으로 사약을 내려서 씨를 말리려고 하고 왕이 중재해도 의리상 상대 당파들과는 한 하늘 안에 살 수 없다고 배수진을 치고 악착같이 싸우는 시대가 벌어진다. 그리고 밀려난 당파들도 이게 다 왕이 찬탈자라 그렇다! 라고 죽기 살기로 반역을 일으키고 대놓고 왕을 모욕하는 등 테러행위를 저질러 스스로의 목숨을 재촉한다.

이러한 붕당의 흐름을 잘 알고 있던 영조는 집권 초기 노론의 세력의 주도 시기를 지난 이후에는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들을 중심으로 하여 여기에 정권에서 밀려나 있던 남인 세력 일부를 더한 탕평파를 구성해서 그 탕평파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에 들어간다. 이른바 완론탕평이다. 하지만 이는 영조의 왕권강화 시도 정도로 탕평파는 또 하나의 붕당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을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주도세력이 되지도 못했다. 민진원, 정호, 유척기같은 노론의 강경파는 이런 분위기에 호응하는 시늉도 하지 않았고 김일경을 비롯한 남인 강경파과 소론 준론은 아예 영조를 찬탈자로 지목하고 계속하여 반역하여 준론과 남인 강경파들은 아예 멸족되고 남은 소론 완론들과 남인 온건파들도 영조 31년 이후에는 입지가 너무 좁아져서 주도권을 노론에게 내주는 정도를 점어 아예 조정에서 거의 퇴출당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론이 영조의 왕권을 능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조의 왕권에게 짓눌려서 거의 장난감 취급을 받고 있던 터였다. 노론이 소론, 남인을 마구 폄하하다가 분노한 영조에게 걸려서 다시는 붕당 안하게도 싹싹 빌며 울고불고 난리친 사건이 여럿 된다. 하지만 의리니 토적을 외치는 강경한 노론 명문가에게 질려버린 영조는 당파의 의리보단 왕의 말이나 잘 듣는 척신 홍봉한과 그의 아우 홍인한이 주축이 된 풍산 홍씨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노론계 외척들을 대거 끌어들이게 되어 영조 후반에는 당파의 의미 자체가 사라지고 척신 정치가 강하게 자리잡는다. 영조 말년에는 이러한 척신 정치를 혐오한 척신인(...) 정순왕후 김씨의 친정인 경주 김씨김종수, 심환지 등의 청명당이 힘을 합쳐 홍봉한에 맞서게 된다. 그런데 한가지 변수가 터지니 사도세자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흔히들 사도세자의 처분 문제를 두고 벽파, 시파 등으로 갈라지고 당파들이 싸움을 벌였다고 묘사되어 있지만 이미 그 당시에는 당파 라는 개념 자체 희미해지고 있었고 벽파니 시파니 분류된 것은 정조 때의 일이다. 주로 시파가 사도세자에 동정적이고 벽파가 사도세자를 죽였다고 하지만 영조 때는 벽파와 시파 구분 자체가 없었고 홍봉한의 탕평당과 척신 정권에 김종수, 심환지 등이 주축이 된 청명당이 서서히 반발하고 경주 김씨 일문이 홍봉한에 맞서면서 그들과 손을 잡는 모습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임오화변은 영조의 의지였지 노론은 별 잘못이랄게 없다. 그때 정권을 차지하고 있었다는게 죄라면 죄일 뿐이지. 자세한 것은 사도세자 항목 참조. 정조가 벽파와 대결했다는 증거로 이조판서를 지낸 홍인한은 영조가 나이를 이유로 세손인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고 한 것에 대해서 '세손은 노론 소론을 알 필요도 없고, 이조판서와 병조판서에 누가 좋은지도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더욱 알 필요가 없다'는 삼불필지설을 내세웠다는 것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애초에 조선시대에 세자가 정치에 관여한다는 것은 별로 좋은 모양새가 아니었고 세자는 침선의 문제만을 살피면 되지 괜히 정치를 알려 들었다가는 오히려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위험해지기 십상이었다. 이 발언 자체는 그다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그때는 벽파 시파 구분이 없었다.

오히려 뒤에 밝혀지지만 정조의 정치적 성향은 오히려 벽파의 그것에 가까웠고 홍인한 등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별 책임이 없었다. 정작 후에 강경 벽파로 분류되는 김귀주와 그의 아비 김한구, 사촌 김관주 및 경주 김씨와 정순왕후 김씨 파는 정조를 크게 지지했고 김귀주 등은 번번이 상소를 올려 세손을 지원사격했으며 정순왕후 김씨는 영조에게 세손의 승계가 당연하지 않냐고 정조를 대리청정 등을 종용하는 발언을 하곤 했다.

정조는 즉위 이후 홍국영을 친위세력으로 해서 척신 정치의 상징이자 자신의 대리청정을 방해한 홍인한, 화완옹주, 정후겸을 제거했고[17] 사도세자의 복수로 죽은 김상로홍계희, 문성국의 벼슬을 추탈하고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를 폐서인하는 수준으로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시파 정권을 열었다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흔치않게도 소론 벽파인 서명선, 노론 벽파의 거두인 김종수와 심환지 등을 중용하였다. 그리고 당시는 홍봉한의 척신 정치에 대한 반동으로 벽파가 상당수였다. 애당초 벽파라는 것이 사도세자 죽어라! 가 아닌 우린 척신이나 역적인 소론, 남인 애들하곤 못놀겠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벽파가 사도세자 추숭에 반대한 것도 사도세자가 미워서가 아니라 사도세자의 신원은 당시 조정을 장악하던 노론의 잘못으로 귀결될 문제고 세자가 죽음까지 당했으니 노론은 반역자가 되어 일망타진 당할 처지가 된다. 실제로 체제공은 이걸 실현시켜 남인의 복귀를 꾀했다. 그러니 노론 벽파가 여기에 반대할 수 밖에.

정조는 이어 새로운 척신이 되어가는 홍국영도 제거하면서 척신 정치를 완전히 청산하고 정민시와 소론, 남인, 규장각 출신 소장파가 주축이 된 시파도 대거 끌어들여 오히려 붕당정치를 다시 열었다. 정조의 경우는 영조와는 달리 붕당의 시시비리를 가린다는 이유로 소론과 노론의 과격파들과 역시 남인들을 중심으로 한 준론탕평에 들어갔다[18]. 이후 신해통공천주교 문제, 문체반정운동 등을 통해 정조는 나름의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

이 시기가 탕평정치기로 붕당정치사의 제4기이자 사실상 마지막 시기이다. 이에 대해서는 표면적으로는 붕당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지만 사실상 영조와 정조의 왕권강화책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하지만 정조가 끝내 종기로 인하여 세상을 떠나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수렴청정을 맡은 정순왕후 김씨와, 그녀를 지지하는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지만, 불과 4년 뒤 정순왕후 김씨가 죽고 순조의 장인이 된 노론 시파인 안동 김씨 김조순이 집권[19]하면서 완전히 시파가 득세하게 된다. 이것으로 실질적으로 붕당의 역사가 끝나고,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1.4 붕당 옹호론

붕당이 이렇듯 국내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이건 조선 말기의 혼란과 양반층의 입장에 서서 역사를 남길 전승자가 한국 역사계에서 전무했던 탓도 존재한다. 한국 역사에서 일제강점기한국전쟁을 거치며 사회의 고위층에 해당하는 양반계층은 거의 몰살하다시피 했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선비적 덕목과 그들의 예, 문화는 거의가 자의와 타의에 의해 소실되었다.[20] 붕당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이러한 '수혜 계층의 해체'에서 비롯되는 면도 존재한다.

또한, 붕당은 어쩌다가 나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상(정확히는 학파)에 따라 나뉘어졌다는 것도 중요하다. 성리학은 학문을 실천하는 것을 중시하는 사상[21]이고, 따라서 사상에 따라 정치적 입장도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두고 한국적 정당제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붕당의 부정적인 면만 강조하여 "조선민족의 타율성과 정체성"의 근거로 삼기로 했다. 이런 인식은 현재 한국인에게도 스며들어 한국인 스스로도 "한국인은 단결을 못한다", "한국인은 누구 잘되는 걸 보지 못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22] 그 이후 대한민국에 들어와서도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정당정치를 부정적으로 보고 전체주의를 신봉하는 군사독재자들에 의해 붕당=나쁜것이라는 등식으로 가르쳐지기도 했으나, 현재 학계의 주류는 붕당의 장단점을 모두 찾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은둔의 나라 한국'의 저자 그리피스는 이면에서 정치공작이 벌어지는 유럽 정치에 비하면 조선의 당쟁은 나름의 규칙과 도덕성이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출처])

다만 여기에서 그리피스의 조선에 대한 기록은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중 임진왜란 부분만큼이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일단 이 사람은 단 한번도 조선에 직접 와 본 적이 없다. 그야말로 카더라 통신만 가지고만 책을 집필했다는 것으로, 이 때문에 어이없는 소문들을 그대로 써놓은 적도 있다. 대표적으로 고려장 이야기가 이 사람 책에서 나왔다. 또한 서양 학자들에는 다른 지역의 문명을 '빗대어서' 자국을 비판하는 경향이 전통적으로 존재했다. 말하자면 "(흔히 야만인이라고 여겨지는) 동양인들도 이렇게 나름대로 훌륭한 제도나 도덕성을 갖추고 있는데, (문명인이고 훌륭한) 우리 나라는 아직도 이런 문제점이 있다니, 이런건 타산지석 삼아서 고쳐야 한다."는 논조이다. 이러한 논조는 고대 로마 제국 시절 타키투스게르마니아에서도 나오는 유서깊은 것인데, 자국 비판을 위해서 타 문명의 '도덕성'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객관성을 상실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런 류의 주장은 어느 정도 걸러 들어야 한다. 또한 애초에 이러한 서양 학자들의 시각에는 '서양 사회가 더 우수하다, 문명화되었다, 진화되었다.'라는 시각이 들어있었다.[23] 이는 제국주의에서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그리피스 자체의 공신력은 둘째 치고 비슷한 근세의 유럽 왕정 국가들의 경우는 프롱드, 영국 내전, 천날만날 일어나는 지방 귀족 세력의 사주를 받은 민란, 암살, 그나마 좀 양지에서 벌어지는 경우인 결투등, 베네치아 공화국 같이 일찍 과두 정치가 자리 잡은 예외적인 경우들을 제외하면 지배 계급간의 분쟁 방식이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통제 된 문투가 아니라 폭력, 그것도 조정이란 공식적인 국가 기관을 통해 어쨋든 법적인 절차를 깔고 사약을 내리는 것도 아닌, 법외에서 집행되는 사적 폭력을 기본으로 깔고 들어갔다는 걸 생각하면 역사학적으로도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평가라 할 수 있다. 그나마 이괄의 난 같은 조선 내부의 내전이라 부를 만한 정치 투쟁은 비슷한 시기의 십만, 백만 단위로 희생자를 수십년에 걸쳐 쌓은 위그노 전쟁이나 영국의 삼왕국 전쟁, 등 성리학권 외부 근세 국가의 내부 정쟁에 비하면 훨씬 더 빨리 진압 되고 안정화 된 편에 속한다. 이 또한 '저런건 종교 전쟁이니 예외로 쳐야 하지 않냐'라는 반론을 할 수 있으나, 구교와 신교의 유혈낭자한 대립도 큰 무리 없이 지배 계급의 합의와 법적 절차를 통해 해소한 폴란드-리투아니아 등의 경우를 보면 종교 자체보다 봉건 귀족제와 근대 중앙 집권 국가의 과도기에 있었던 근세 유럽 왕정 국가들 정치 체계의 구조적인 문제를 통해 그 정도 스케일로 발전한 것이라 볼 수 있다[24].

숙종, 영조, 정조조에 신하들이 놀고 있지는 않았다. 도리어 지속적인 당면과제를 위한 인구조사[25]나 수효과 토론에 바빴다. (이점에서 노론 = 대지주, 기득권 = 대동법 반대, 소론, 남인 = 중소지주, 비기득권 = 대동법 찬성 => 실학으로의 진행이란 식의 구도는 무리한 분석이다.) 흥선대원군과 같은 개혁이 뒤늦게 구현된 것은 민란이라는 실제적 위협과 강력한 지도력 발휘가 가능했던 세도정치였기에 가능했던 거지, 이전의 군주들이 수십년을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조선사회 자체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체재였기 때문에(지배층의 청렴과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고 작은정부를 추구하는 구조였다) 붕당과 권력다툼의 목적이 '권력획득'자체에 있지 '권력을 휘둘러 이득을 본다'는 개념은 아니었다. 조선의 정치체재가 무너지는 건 권력을 사용하여 사복을 채우기 시작한 세도정치 시기부터이지[26], 오히려 붕당 시대에는 왜란 / 호란 이후 국가 재건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조선 붕당정치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으로 연구한 학자는 이시이 도시오(石井壽夫), 안확, 이태진 등이 있다.


1.5 붕당 비판론

1_197.jpg

조선왕조실록에 정통하다는 박시백 화백의 붕당에 대한 인식. 짤방은 붕당이 그나마 가장 멀쩡하게 돌아가던 선조 재위기임에 유념하자. 붕당의 상태가 가장 양호하던 시절조차 시작부터 건강하지 않았다. 현실에 대한 진단이나 방도를 둘러싼 논쟁이 아니라 스승, 지역, 친소관계에 따른 분열이요 대립이었다.고 날선 자세로 평가하고 있다.

  • 붕당은 시간이 흐를수록 집단사고진영논리에 찌들어갔다. 그 예시가 바로 서로 상대를 소인당이라 비하하고 자기네 당을 군자당이라고 미화자화지찬한 바가 있다. 게다가, 당내 의견에만 휘둘리고, 창의적인 의견은 신변 안전 문제로 나오지 못했다. 율곡 이이 또한 어느 붕당이든 군자든 소인이든 누구나 섞여있기 마련이거늘, 상대 당의 군자까지 싸잡아 소인으로 비하하는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비판했지만, 이로 인해 색깔론 시비로 이이는 공격당했고 자신이 서인임을 밝힐 수 밖에 없었으며, 결국 정계에서 물러났어야 했다.
  • 과대해석이나 확대해석이 심했고, 작은 비판, 오래전 글을 꼬투리 잡아 침소봉대하여 역모로 몰아 수 없는 피란을 가져왔다. 정여립기축옥사, 계축옥사, 예송 논쟁이 그 예시이다. 어찌되었든간, 극단적인건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험한 행위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극단성 때문에 괜히 숙종환국이나 영조정조탕평책이 나온게 아니다. 하지만 소위 탕평책도 내용적으로 보면 결국 노론일당정치에 가까웠고, 왕권강화에만 매몰되어 견제와 균형을 상실한다. 숙경영정 4대나 군주의 카리스마로 때웠지 나이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일순간에 조선은 시궁창에 쳐박히고 만다.
  • 붕당이 지역감정을 키웠다. 서인은 경기-충청도 기반이고, 영남은 남인과 가까웠는데, 효종 때는 경상도 서인 유생들이 율곡을 옹호하는 글을 올렸다가 남인 유생들이 집으로 쳐들어와서 집을 부수고 고향에서 쫓아내버리는 일도 있었다.
  • 붕당은 세습되었다. 성리학적인 사회였던지라 아버지가 서인이면, 아들도 서인이듯 붕당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고를수가 없었다. 이중환택리지에서 어느 가문이 어느 당이나 어느 파로 찍히면, 초야로 정치를 피하려 해도, 중도적인 입장에서 행동하려 해도 반대 당의 린치를 피할수 없다고 비판했다.
  • 붕당 정치는 폐쇄성을 가져왔다. 힘이 강한 붕당에 속하지 않으면, 버림받을 수 밖에 없었다. 정약용정조에게 올린 상소에서 신분, 지역 뿐만 아니라, 붕당과 어떤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인재들을 8할, 9할을 버린다고 비판했다. 이익은 '붕당론'을 통해 당쟁의 원인은 붕당들 끼리 관직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라고 크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학창시절, 붕당의 양성기지배럭 서원에 속하지 않으면, 관직에 나가기 힘들 정도 였으며, 세금 착취와 병역 기피 등 서원의 폐단도 심했다. 흥선대원군이 괜히 서원을 밀어버린것이 아니다.

붕당정치가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던건 사실이므로 붕당정치를 비판한다고 무조건 식민사관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졸렬한 짓이다. 조선시대 당대에도 붕당에 대한 비판에 끊임없이 제기 되었으며 정약용, 이익 등의 실학자들도 붕당에 학을 뗄 정도였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 신채호박은식을 비롯한 민족주의 사학자들도 붕당정치를 결코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흑역사 취급하며 날카롭게 비판을 하였다. 사실 식민사관의 진짜 문제는 단순히 붕당정치를 비판한 것을 넘어 당쟁을 일으키는 것을 우리의 고유한 민족성으로 몰아세우는데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민족 고유의 당파성을 지녀 단군이래로 끊임없이 당쟁을 일삼았다는 것이 식민사관의 진짜 의도다.

붕당은 처음에는 어느 한 세력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함이었으나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질되었다. 결국 반대를 위한 반대가 주를 이루게 되었고 이로 인해 결국 정치적 후진성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한 가문이 정권을 잡고 독재를 펼치는 세도정치 시기에 비하랴.

옹호론에서 예로 든 그리피스라는 인물은 조선을 '세계에서 유일한 은둔의 나라'로 싸잡으면서 선입견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다분히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에 치중해 조선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결여되었다는 비판을 많이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게다가 위의 그리피스가 봤던 대로 당쟁이 신사적인 규칙 아래에 있었을 때는 숙종때의 기사환국갑술환국 이전까지다. 그 전까지는 당쟁이란 이념과 논리에 의해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논박하여 정권을 유지하거나 획득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당쟁에서 패해 정권을 잃으면 그저 야인 생활만 했을뿐 물리적인 탄압은 받지 않았으나, 기사환국(인현왕후의 폐위)와 갑술환국(인현왕후의 복위)에 관련된 당쟁에서는 정권을 잃은 당파의 수장에게는 사약이 내려졌고, 상대당에 대한 철저한 보복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숙종 말부터 당쟁은 생사를 건 투쟁이 된다.[27]

게다가 반대당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이 없었던 적은 1차 예송논쟁 단 한번 뿐이었고[28] 애초에 붕당의 스타트를 끊은 선조 때부터 시작해서 상대당에 대한 직접적 탄압이 일어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선조대에 벌어진 4대사화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가져온 기축옥사. 이 밖에도 광해군때의 북인에 '의한' 숙청,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북인에 '대한' 역숙청,[29] 효종대에 벌어진 김자점을 중심으로 한 서인의 한 분파인 낙당에 대한 숙청[30] 등 그야말로 글을 앞세운 피로써 피를 씻는 역사가 바로 붕당이었다.[31]

특히 붕당은 서구의 그것과 비교해 명확한 한계가 있는데, 바로 소속원의 출신 성분과 선출 방식이 엄격하게 제한된 그들만의 리그로서 끝내 의회주의로 발전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다.[32] 즉, 붕당 내에는 민중이 섞이기도 힘들었거니와 민중의 의사를 대변해 줄 대표자조차 없었다.[33]단 여기서 꼽씹어볼 것은 양반은 기본적으로 시험으로 정계에 진출했고 원칙적으로는 평민도 참여가 가능했다. <과거 출세에 사다리>에서는 급제자의 3할이 평민이라는 연구성과도 있다. 무엇보다 유럽은 과거제에서 영감을 받아 임용시험을 고안했다! 또 과열양상은 사실일지라도 그것이 특수성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른나라들 특히 유럽에 정치상에 대한 보충이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19세기 이전까지 동양이 서양보다 못하다고 할순없다.

게다가 붕당 간 갈등이 치열해지면서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유일한 직책인 왕의 권한도 강해지는 건 당연한 처사였다. 광해군처럼 지나치게 특정인에게 권력을 몰아 주는 식의 실수만 하지 않으면 붕당들은 유일한 조정자인 왕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가 붕당들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간 환국정치였다. 또한 붕당정치에서의 논쟁 결과가 제도적인 변화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서인과 남인 등이 신권과 왕권의 관계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옹호론에서 흔히 지적하는 내용이지만, 그것이 어떤 구체적인 제도의 변화로 이어진 바는 전혀 없고 사실상 추상적-관념적인 측면에서의 차이에 불과하였다. 예컨대 붕당 옹호론에서 흔히 서인들의 가치관이 대동법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하려 하지만, 정작 대동법을 처음으로 정책적으로 시행한 이원익은 남인이었다. 남인의 가치관으로도 대동법을 건의하고 시행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붕당 정치에서 중요한 문제들이 실제 조선 후기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는 점도 있다. 왕위의 정통성과 같은 것은 '당시로서는' 가벼운 사안은 아니었겠지만,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그들에게만' 중요한 성리학적 문제 이외의 사회적인 문제는 당쟁의 핵심이 된 적이 없다. 붕당정치가 합리적인 정치적 토론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려면 붕당정치를 통해서 당시 사회의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이 도출되었어야 하지만, 붕당정치에서의 논점들을 보면 붕당정치가 그러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논의에 방해가 되면 되었지 도움이 되었다고 볼 만한 부분은 찾아보기 어렵다.

붕당정치의 옹호자들이 흔히 드는 사례가 대동법 등이 붕당정치의 틀 안에서 논의되었다는 것인데, 그런 일은 없었다. 대동법이 붕당정치의 틀에서 논의되었다고 하려면 각 붕당이 대동법 실시 여부나 방법 등에 대해서 서로 다른 당론을 가지고 논쟁을 벌여서 이것이 각 붕당간의 발전적 경쟁으로 이어졌어야 하지만, 실제 대동법 논의 과정을 보면 이원익은 남인이고 김육은 서인인 등 대동법의 옹호자들은 딱히 붕당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며, 대동법의 실시여부나 그 결과가 붕당 간의 경쟁에 영향을 준 흔적도 없다. 즉 붕당들은 상복 입는 문제를 놓고 싸웠지 대동법 시행 문제를 놓고 싸우지는 않았다. 단지 대동법의 옹호자들이 이 붕당 저 붕당에 속해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대동법이 붕당정치의 틀 안에서 논의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붕당정치 이전에 현대의 정당정치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지를 의심스럽게 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당대의 대책들에 대해서 땜질처방이 아니냐, 너무 지지부진했던건 아니냐는 비판을 받는데, 이는 당대 위정자들이 붕당정치에서 백성보다는 자신의 스승과 몸담은 학파를 더 우선시했기 때문에(물론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들의 백성시민들을 빙자한 립서비스는 여전하다)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1.6 실학과의 연계성

붕당에서의 주요한 논쟁대상을 단순한 사상대립만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대표적으로 북학파를 보면, 중상주의라든지, 과학기술 발달이라든지, 현대에 와서도 주요한 논의대상중 하나인 측면이 있다.
그런데 유념해야 할 것은 북학파라든지 중농학파니 하는 실학 계열의 인물은 당시 붕당정치판에서는 그야말로 왕따나 다름없었다. 대부분의 실학자들은 요즘에야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지 살아 생전에는 듣보잡 재야학자에 불과했다.

성호 이익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 바 있다.
붕당은 싸움에서 생기고, 그 싸움은 이해관계에서 생긴다. 이해가 절실할수록 당파는 심해지고, 이해가 오래될수록 당파는 굳어진다. …이제 열 사람이 모두 굶주리다가 한 사발 밥을 함께 먹게 되었다고 하자. 그릇을 채 비우기도 전에 싸움이 일어난다. 말이 불손하다고 꾸짖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말이 불손하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는다. 다른 날에… 태도가 공손치 못하다고 꾸짖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싸움이 태도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는다. 다른 날에는… 밥 먹는 동작에 방해를 받는 자가 부르짖고 여럿이 이에 응하여 화답한다. 시작은 대수롭지 않으나 끝은 크게 된다. 그 말할 때에 입에 거품을 물고 노하여 눈을 부릅뜨니, 어찌 그다지도 과격한가. …이로 보면 싸움이 밥 때문이지, 말이나 태도나 동작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해(利害)의 연원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는 그 그릇됨을 장차 구할 수가 없는 법이다.
('붕당론', 《성호집》 권25, 잡저)[#]

1.7 결론

붕당은 크게 동인과 서인을 시작으로 나뉘어 다시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숙종때에 환국을 치르고 노론의 일당전제가 시작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바로 탕평책이었다. 탕평책으로 힘의 균형을 점차 되찾기 시작하고 영조때에 이르러 장헌세자(사도세자) 처단문제로 인해 정치인들 사이에서 사도를 죽이자는 강경파와 죽이지 말자는 온건파로 나뉘게 되고 정조때에 이들은 벽파(주로 강경노론)와 시파(온건노론,남인,소론)로 나뉘어 조선의 정치를 주도한다. 그러나 정조가 붕어(왕의 죽음)하고 붕당간의 공존이 완전히 깨지고 이제는 특정 정당을 떠나 일정 가문이 정치를 주도하는 세도정치로 넘어가게 된다. 이건 숙종 때부터 누적된 문제로 붕당을 제어하기 위해 걸핏하면 붕당을 박살내면서 외척에게 권력을 몰아주기 시작한 게 발단이었다.[34] 정조가 살아있을 때 까진 그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그나마 제어가 가능했지만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35] 외척을 중심으로 하는 세도정치로 귀결되며, 문제가 시작된다.


2 중국의 붕당

한국에서 붕당 하면 흔히 위 조선시대 것을 떠올리지만, 사실 붕당정치의 원조는 중국이다. 중국의 붕당은 위진남북조 귀족가문의 후예와 과거로 등용된 신진세력과의 마찰과정에서 생겨났고 이과정에서 발생한 40년간의 당쟁을 우이당쟁이라고 부른다. 여담으로 이 붕쟁은 당시 황제가 두 당파를 모두 탄압하면서 종결되었다.

특히 송나라명나라 때 붕당의 성행과 갈등이 극에 달했는데, 송의 구법당과 신법당, 명의 동림당과 엄당이 벌인 갈등은 제국을 뒤흔들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붕당의 폐해를 경계했던 명나라의 법전 '대명률' 간당조(奸黨條)에서는 "만약 조정의 관원들이 붕당을 지어 국가의 정치를 문란하게 한다면 모두 참수시키고, 처자는 노비로 삼으며, 재산은 관청에서 몰수한다"고까지 명시했다. (조선의 경우도 대명률이 원칙이었으나, 사림파가 득세하는 과정에서 교묘하게 관원 대신 사림이 붕당의 주체가 된다는 식으로 어물쩍 넘어갔으며, 사실 우리가 흔히 아는 것과는 다르게 공식적으로는 붕당이라고도 칭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경계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말기엔 결국 국정의 문란함과 더불어 붕당 갈등(엄당 vs 동림당)까지 성행하면서 망조가 들고 말았다. 환관의 파워가 막강한 명에서 이런 붕당 갈등의 격화는 곧 기회나 다름없었다. 조선의 붕당 정치가 환국으로 인해 망조가 들며 세도정치라는 결말로 귀결된 것처럼, 명의 붕당 정치도 최후의 승자는 어느 당도 아닌 환관이었다. 위충현 항목 참조.


3 일본의 붕당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이루었다는 일본이지만, 사실 근대화 과정에서도 얼마 가지 않아 근대화를 처음 견인했던 번병들 사이에 당파 싸움이 발생했던 바 있다. 초슈 번이 주도권을 독점하기 시작하자 사쓰마 번이 대규모로 무력충돌을 일으키기도 했고 똑같이 당파 싸움을 벌인 도사 번은 아예 근대화 공로를 일부 부정 당하고 일본 현지 역사서에서도 잘 가르치지 않게 됐다. (...) 사실 무력충돌 규모는 전자가 더 심했으나 사쓰마 번은 사이고 다카모리라는 거물의 비중이 너무 커서 도사 번처럼 대우하진 못 했던 거 같다. 사카모토 료마는?


4 관련 항목

  1. 나름대로 역사를 알 만큼 안다는 전직 대통령조차 붕당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이니, 세인들의 관점은 말할 필요가 없다. 왜 틀렸는지를 설명하자면 영남과 호남은 당파로 따지면 동인계로 모두 한편이었고 정여립의 난에는 최영경을 비롯한 영남 유림들도 많이 희생되었다. 하지만 이 설명이 틀린것과 별개로 저 설명을 한 사람을 꼭 비판할 만한것도 아닌 것이 붕당정치에 대해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학자를 넘어 대중들에게 전달된 것은 2000년대 이후나 되어서의 일이었다. 교육과정으로는 7차 이후. 사실 대부분의 한국사 재평가 작업이 2000년대 이후에 이루어진 일이며, 90년대까지만 해도 잘못 알려진 내용들이 교양 역사서부터 학습만화에까지 그대로 실려있었다. 지금처럼 위키질로 간단히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닌 것. 다만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 얻기 쉽고 연구도 많이 이루어진건 좋긴 한데 이상한 쪽으로 파고드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는게 문제이긴 하다(...) 환빠라던지 일간베xx라던지
  2. 과거에는 붕당정치는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절대다수의 인식이었고 그렇게 가르치고 배워왔다(이건 일제강점기의 식민사관 중 당파론의 영향을 받음). 그리 아주 오래 전 얘기도 아니고 1990년대까지만 해도 그랬다. 게다가 한국의 극심한 지역감정을 붕당과 연관시키거나 심지어 삼국시대와 연관시키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함석헌 선생도 그런 글을 오래 전에 썼었다. 그것은 딱히 그 시대 사람들이 무식해서라기보다는 그만큼 역사학의 연구와 대중적 전달, 그리고 공식교육과정에서의 가르침이 부실했던 것. 인터넷도 없어서 전공자가 아니라면 교과서나 몇몇 책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너무 정보가 많아서 이상한걸 믿어서 문제지만.
  3. 당시 학문적 베이스를 가지고 이런 정치를 한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무이하다!
  4. 이 때문에 붕당들이 이조전랑직을 놓고 싸우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5. 경종 때의 신임사화(신임옥사)의 경우 "사화"라고 부르지만 그 내용은 환국에 더 가깝다. 뭐 그렇게 따지면 을사사화도 "사화"라고 보긴 어렵지만 말이다. 항목 참조.
  6. 훈구파가 유자광과 한치임 일파로 나뉘어 있을 때, 새로운 세력을 키워서 나머지 둘을 잡으려는 의도였다. 붕당을 나쁘게 보는 사람들은 성종이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퍼먹고 놀기만 하는 싸움더디게 발전하는 싸움 둘 중 어느 게 나은지는 뻔하다. 그냥 안 싸우고 빠르게 발전할 순 없나?
  7. '이조전랑'은 정랑(正郎 정5품)과 좌랑(佐郎 정6품)을 일컫는 말로 관(官)의 인사권을 담당하는 이조 내에서도 핵심에 속하는 실권직(이조판서나 참판 등은 이조전랑이 올린 결정사항을 결재나 하는 정도)이었기에 자연히 이를 어느 파벌이 차지하는가에 따라 세력 균형이 송두리째 바뀔 수도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수 있는 막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천대법(薦代法)이라고 부른다.
  8. 참고로 '동인'과 '서인'이라는 이름은 동인이 옹호한 김효원의 집이 건천동(현 충무로 일대)에, 서인이 옹호한 심의겸의 집이 정동에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했다. 재밌게도 건천동과 정동은 청계천 남쪽에 육조거리-숭례문 구간을 기준으로 경복궁을 바라보며 각각 동쪽, 서쪽에 있다.
  9. 온건한 입장의 이유는 우선 대상이 된 훈구파가 사림에 우호적인 면도 있었던 세력이었던 점, 그리고 이황과 조식 등 기존의 거목들이 존재하던 동인과는 달리 서인의 주류학설인 주기론의 최초 주장자인 서경덕은 서인에서도 받아들이지 못한 조선 유학계의 이단아라서 결국 중심이 될 이율곡이나 정철 등이 성장할 때까지는 배후 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초기의 서인들은 보다 좌충우돌하게 된다.
  10. 초기 동인 우위 →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인한 동인의 타격 → 정철의 처벌에 따른 서인 몰락 등의 전개가 있었다. 다음 각주 참고.
  11. 계기는 정철에 대한 처벌문제.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크게 당한 북인은 강경파, 피해가 적었던 남인은 온건파에 있었다. 애초에 북인은 남명 조식, 남인은 퇴계 이황으로 비교적 신진세력이라 이이 이상가는 학맥이 없었던 서인에 비해서 내부의 차이도 뚜렷했던 것이 이른 분당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12. 남인(이원익), 서인(이항복), 남인(이덕형)이 삼정승 직을 맡았다.
  13. 서인세력들이 집권하였다고는 하나 서인들은 이당시 정치적으로 유력하고 신뢰감있는 인물이 없었다. 때문에 남인의 협조 없이는 조정의 무게감 자체가 극히 떨어질 지경이었다. 대표적으로 이원익을 정승자리에 올린 것이 이를 대표한다.
  14. 역사비평 편집위원회,'논쟁으로 읽는 한국사1',역사비평사,2009,p275-276
  15. 이것은 숙종의 왕권 강화책이기도 했다. 애초에 붕당이 제대로 불 붙은 이유가 선조의 왕권 강화 노력도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위험한 불장난에 가까웠다.
  16. 일부에서는 편당적 인사조치로 강한 붕당을 견제하여 붕당의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숙종의 환국정치 역시 탕평책의 일환으로 보기도 한다. 탕탕평평하게 사약크리
  17. 사실 그마저도 홍인한을 제외하면 정조의 즉위 반대에 미온적인 편이었다. 애초에 임금이 후계자로 밀어주는 사람을 강력히 반대한다는 것이 감히 생각키 어려운 일이었기도 하지만...
  18. 여기에는 온건론자들인 영조시기의 탕평파의 상당수가 결국 시파에 들어갔던 것도 이유가 되었다.
  19. 엄밀하게 따지자면 김조순은 정조의 친위세력으로 김조순 시기를 세도정치로 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존재한다는 평도 있다. 실제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본격화되는 것은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의 시대부터이다.
  20. 타의야 당연히 일본군의 문화탄압은 물론 소위 '개화파'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데, "(일본과 협력중인) 조정에 반항하는 것은 불충이요, 명분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는 고루한 논리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탓이 크다. 그래서 의병 활동을 보면 양반들이 이끄는 의병들은 거창하게 시작해서 시시하게 끝난다.
  21. 고려 무렵에는 유학이 단순히 도덕과 이상을 추구했지만, 고려 말부터 점차 실천 위주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를 통해 신진 사대부가 권문세족들을 몰아낸 이후,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하는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실천과 반역은 한 끗 차이라네
  22. 기실 따져보면 말도 안 된다. 일례로 입헌군주국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영국 의회의 양쪽 의원석 앞에는 붉은 선이 그어져 있는데 의원들은 그 붉은 선 밖으로 나가 상대당 의원석 앞으로 가면 안 된다. [위키백과 영국 의회. 찾기 기능을 이용해 'red line'를 찾아보라] 그 이유는 과거 귀족이나 의원들이 칼을 상비하고 다니던 시절 칼부림이 잘 나서 지정된 룰이다(실제 위키백과 당 항목을 보면 각 붉은 선의 거리는 칼 두자루 분량의 거리라 서술이 되어 있다). 길거리에서 결투를 한 것도 아니고 한 국가의 최고 권위 기관인 의회에서 시정잡배도 아닌 의원들이 칼부림을 했다는 소리다! 오히려 칼부림은 안 난 붕당 정쟁이 더 온건해 보일 정도. 어느 나라나 정당과 같이 정치집단의 의견이 갈릴 경우 엄청나게 싸웠다. 단 단결은 그렇다 쳐도 람).
  23. 자신들과 동등한, 혹은 더 발전된 사회라고 생각했으면 본보기로 삼았지 '쟤네는 저거 하는데 왜 우리는 못함?' 식으로 표현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24. 이를 설명하는 학술적 테제가 휴 트레버-로퍼, 존 헉스터블 엘리엇과 그 제자인 제퍼리 파커 등의 역사학자들이 명명한 '조정과 나라의 대립 (court versus the country)' 이론이다. 간단하게 축약하자면 신교냐 구교냐의 문제는 피상적인 문제이고, 종교 갈등의 핵심에는 갈수록 비대해 지고 권력과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늘어나는 왕실 중심의 중앙 권력과, 봉건제로부터 내려오는 특권과 지방 자치를 유지하려는 토착 귀족, 자유 도시, 대학 등의 '주변부' 기관의 충돌이 있었다는 것이다.
  25. 다만, 당시의 인구조사는 그야말로 효율적인 세금징수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26. 어느시기나 어느사회나 권력자의 부정부패는 늘 있는 골칫거리였다. 조선사에 있어 세도정치가 가장 심했기에 구분하는 것 뿐이다.
  27. 사실 기사환국 이전에도 당쟁에 의해 무고한 인물이 희생된 경우도 적지 않다. 수촌 오시수는 그리 당파적인 인물도 아니었고 우의정까지 역임했던 중신이었는데, 원접사로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중 강희제의 그 유명한 "군약신강" 발언을 조정에 올렸다가 송시열을 겨낭한 말이라고 서인들에게 미움을 사, 경신환국 때 억울하게 주살된다.
  28. 예송논쟁의 중심에 있던 인물인 송시열마저 여기에 휩쓸려서 결국 제명에 못살고 사약 원샷(사실 한번에 죽진 않았다. 사약 및 송시열 항목 참고.)하고 죽었다.
  29. 결국 이 과정을 통해 '북인'들은 아주 그냥 역적으로 낙인이 찍혀서 다시는 조정에 등장하지 못했다.
  30. 효종대 서인들은 원두표의 원당, 김자점의 낙당과 산당, 한당이라는 4대분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를 통합한 양반이 바로 송시열.
  31. 그러나 환국에 대한 비판을 모조리 붕당이 다 받는 것은 다소 너무한 감이 있다. 결국 한 붕당이 주장하면 '그걸 듣고서 상대당을 조지는 사람'은 숙종이었다. 실제 정조가 근왕세력을 키우고 중심을 잡아버리자 일시적으로 탕평책이 효과를 보였다(나중에는 오히려 세도정치의 빌미가 되지만). 즉 입헌군주정도 아닌 전제군주정인 조선 사회에서 붕당은 그 자체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32. 현재까지 인류가 만들어낸 정치제도 중 권력자에 대한 견제가 가능하고 일당집권이 불가능한 유일한 정치제도가 의회주의이다. 이것이 단지 서양에서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서구의 전유물이라 헐뜯으며 폄하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33. 고대 로마에도 일반 시민 출신의 대표자인 호민관이 존재했고 프랑스 혁명 직전의 막장 프랑스조차도 구색일지언정 평민을 대변하는 제3신분이 입김을 행사한 것과 비교하면 이는 명약관화하다. 더구나 붕당은 전체적으로 양반 사대부 계층의 테두리 내에 국한하여 다양성도 결여되어 있는데, 이로 인해 불교계라든가 성리학 외의 학파(양명학 등) 멸시는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34. 숙종의 환국 못지 않게 경종, 영조, 정조도 밀어주다 뒷통수치기를 시전하곤 했다. 영조 때 까지 지속된 환국이나, 홍국영을 키우다 내치거나...
  35. 엄밀히 말하면 홍경래의 난 이후로
  36. 붕당 때문에 생겨난 요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