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

1 달리는 사람

走者, Runner. 육상 종목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용어. 주로 계주에서 쓰는 말이다. 야구에서 타자가 출루하면 주자가 된다.

관련항목 - 타자, 대주자, 병살, 협공, 도루, 보크, 안타, 볼넷, 번트, 홈스틸, 똥차

2 남송대의 유학자

朱子 주선생[1]
1130년 10월 18일 ~ 1200년.

2.1 소개

본명은 주희(朱熹). 남송의 대유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가 갈리는 인물이다. 자(字)는 원회(元晦), 중회(仲晦)이다. 호(號)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노인(雲谷老人), 창주병수(滄洲病叟), 둔옹(遯翁)[2]등 여러가지가 있다. 남송 휘주(현재의 중국 복건성 우계(尤溪))에서 출생했으며 19세에 진사가 되었다. 사후 영종에게 문공(文公)의 시호가 내려지고 다시 휘국공(徽國公)에 추봉되었다.

공자의 초기 유교는 경험론적 성격을 띠었지만, 이를 변형해 합리론적 성격과 우주론적 이론을 결합시켜 만들어진 학문인 성리학을 탄생시킨 인물[3]이다. 주희는 일생을 바쳐 성리학을 집대성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라는 책이 유행한 적이 있는데 책의 논리는 공자의 초기 유교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닌 '주자가 본 공자', 즉 주자의 개인적인 생각과 철학으로 투영한 공자를 비판하는 것이다.[4]

우리가 보통 삼국지연의를 보며 유비의 촉한(蜀)을 정통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 또한 주자가 주장한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에 근거한 것이다. 이전까지는 진수의 정사 삼국지조위(魏)를 정통으로 보았고, 자치통감에서는 모두 정통으로 보지 않는 무통설이 대세를 이루었으나[5] 주자가 자치통감을 보완한 자치통감강목을 펴내면서 촉한정통론을 주장한 이후 촉한정통론에 무게가 실리게 되었고, 지금의 삼국지연의에서 볼 수 있는 국가상 또한 이때를 기점으로 정립되었다.

사서[6]에 모두 주석을 단 것으로도 유명하다. 우리가 보통 읽고 있는 모든 사서(논어, 맹자, 예기의 일부인 대학, 중용)는 주희가 자신의 해석과 종전의 여러 주석을 모두 모아 정리한 것이다. 대학의 경우는 주석에 그치지 않고 아예 원문에 손을 대서 자구를 수정하고 자신만의 체계로 분장分章했으며, 심지어 소실된 구절이 있다 생각되는 부분에 자신이 글을 지어 넣기도 했다.아니 그 좋은 글들을 왜 당신 마음대로 죽기 하루 전까지 대학 주석을 손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7]

개인의 정치적 운은 불운했다. 특히 불교 측에 공격을 받는 일이 잦았다고.[8] 남송시절에는 탄압을 받기도 했으나 사후에는 그의 사상은 학계에서 주류적 위치를 점했다. 이후 명, 청, 조선, 심지어 에도막부에서도 성리학은 관학의 지위를 얻었다. 그리고 다른 양명학 등이 인기라도 얻은 명, 에도막부와는 달리 조선은 거의 성리학이 지배하다시피 했다. 청나라는 문자의 옥 크리로 시망이었고. 그러나 이후에는 계속 비판을 받다가 문화대혁명 기간 주자의 사상은 사실상 중국 주류 사상에서 깨끗하게 배제되었지만 최근 들어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도올 김용옥은 "유가에서 공자, 맹자까지는 유학이라는 학문 자체로의 훌륭한 가치가 분명히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증자고 주자고 하는 아류들은 별로 난 유학 그 자체로 쳐줄 생각이 안 든다. 대신에 주자학의 조선사회에 대한 영향력은 부정할 수 없다. 논어 등에서 조선 유학은 주자의 주석에만 의존하여 자기 주석을 만들지 않을 정도로 주자학에 절대의존적이었다. 이를 통해 다양한 학문적 논의가 불가능해졌다."라며 주자학은 조선 사회의 도그마 역할, 즉 절대종교적 역할을 했다는 것에 주목했다.쉽게 말해서 조선 유학 연구에서 주자의 해석이 전부, 그것만 무작정 따라보니까 학문이 단순해져서 망했음.. 어제의 논어, 오늘의 논어, 내일의 논어가 있어서 발전해야 되는데, 어제도 주자학, 오늘도 주자학, 내일도 주자학..맨날 똑같애

2.2 성격

송나라 시대 신유학의 집대성자이자, 한 지방의 수령으로서 덕망 있는 인물이기도 했지만, 가끔씩 언행이 좀 답지 않았다고 한다(...). 깐깐한 성격 때문인지 정적이 많았고 특히 자신과 학풍이 다른 당중우와 대립하여 1182년에 6차례에 걸쳐 당중우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탄핵 내용중에 당중우가 기녀 엄예와 놀아나 음행을 일삼았다는 내용도 있는데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엄예를 체포해 1개월 넘게 옥사에 가둔 후 태장과 협곤[9] 등 가혹한 고문을 가하기도 했으나 결국 증거를 얻는데는 실패하고 이 사건은 주희 인생에 두고두고 남는 흑역사가 되어버렸다.

논적인 심학파(心學派)의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1139 ~ 1193)이 사망하자, 그를 조문하고 나와서는 제자들 앞에서 소리 죽여 이렇게 말한 일도 있다.

"하늘이 고자(告子)를 죽였구나!"[10][11]

2.3 명언

공부에 대한 명언도 많이 했다.

精神一到 何事不成(정신일도 하사불성) - 정신을 하나로 모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없다.

少年易老 學難成(소년이로 학난성) -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

요즘은 보기 힘들지만 옛날에는 수험생 책상에 자주 붙여놓기도 했다.[12] 권학문참조.

2.4 대중매체에서

파일:Attachment/주자/주희.png
징기스칸 4 일러스트

KOEI 게임 징기스칸 원조비사,징기스칸 4에도 나온다. 징기스칸4에서는 시나리오 1에서 남송 장수로 나온다. 대유학자 답게 무력(23)은 당연히 안습이고 지모(53)도 낮지만 정치는 94/100로 최고 수준이다.

3 활자의 종류 鑄字

금속제 활자. 또는 그것을 만드는 작업을 가리키는 용어다.
  1. 실제로 해석하면 '주 선생'이라는 뜻이긴 하다.
  2. 돈옹으로도 읽는다. 遯자는 강희자전, 설문해자 등에 '둔'과 '돈'의 발음 모두를 갖고 있고, 주역전의대전에 의하면 둘 모두 '은둔'의 의미가 있다. 여기서 왜 주역전의대전이 전거가 되는고 하니, 주역의 33번째 괘 이름인데 그 자체가 은둔의 의미를 갖는다. '遯翁'이란 말은 역시 '은둔한 노인'이라는 뜻이다. 김장생, 김집 부자가 강학하던 곳에 세워진 돈암서원 또한 같은 의미이다.
  3. 그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이라고도 불리운다. 다만, 발원지 중국에서는 정주학程朱學이라는 용어를 즐겨 쓴다. 주희의 철학에 큰 영향을 준, 북송대北宋代의 유학자인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를 주희와 아울러 이르는 것.
  4. 애초에 공자의 초기 유교와 주자의 유교를 구분하지 못한 작가의 안습함도 있다. 공자의 굴욕사례. 부관참시
  5. 동진 시대의 습착치가 한진춘추를 저술하면서 촉한정통론을 내세운 사례가 있긴 하다.
  6. 역사서가 아니고 사서삼경의 사서다.
  7. 대학 주석은 특히 주자 학설의 근본 얼개이자 정수라 할 수 있다.
  8. 사실 주희 철학의 근본은 불교와 도가의 비판이다. 그러나 정작 주자학을 비롯한 신유교는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理)를 본질적 근원을 뜻하는 것으로 쓴 것도 본래는 화엄학 쪽에서 쓰던 표현 중 하나였다.
  9. 나무 막대기 세 개를 평행하게 줄로 이은 후 이 사이에 죄인의 발목을 넣고 조르는 고문으로 바로 이 고문 방식이 훗날 조선에 유입되어 주리틀기로 변모한다.
  10. 고자는 맹자의 논적으로, 성무선악설을 주장한 그분이 맞으시다. 그럼 본인은 맹자급이라는 건가 맹자:?????
  11. 《주자어류(朱子語類)》의 한 대목인데, 이 충격적인 한 마디 이후로 어떤 부연설명도 없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는 해석하기 나름. 《맹자》에서 맹자는 고자와 키배를 벌이면서 "천하 사람들을 선동하여 인의(仁義)를 깨부수는 것은 바로 선생의 말씀일 것이외다!"하고 고자를 폭풍디스하기도 했지만, "고자께서는 일찍이 나보다 먼저 부동심(不動心)의 경지에 이르셨다"하며 그를 인정하기도 했다. 즉, 주자는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던 일생일대의 라이벌의 죽음을 허탈한 마음으로 한탄한 것일 수도 있고, 자기 학설에 딴죽 걸던 이단 녀석이 드디어 죽었음을 매우 졸렬한 언사로 고소해한 것일 수도(...) 있다. 어찌됐든 고인드립이다
  12. 그러나 이것은 주자가 한 말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일본의 모 교수가 이를 논증하였다고 하는데, 그 자세한 바를 아시는 분은 추가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