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평책

1 개요

蕩平策

조선 영조 말기, 붕당 간의 다툼을 완화시키기 위해 등장한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정책.불편(inconvenient)하고 부당(unfair)한 정책이 아니다

탕평이라는 말은 ≪서경≫ 홍범조의 '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치우침이 없으면 왕도가 탕탕하고 평평하다)라는 구절에서 유래하며, 탕평책이라는 말은 숙종 시기 박세채가 언급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중기인 선조, 광해군 시기에 정계에 진출한 사림은 동인서인으로 나뉘어졌고, 동인남인북인으로 나뉘어졌다. 조선 후기엔 서인은 노론소론으로 나뉘어졌으며, 정조 초기에는 시파와 벽파[1]로 나뉘어졌다. 이를 사색 당파라고 한다.

2 배경

숙종이 환국을 통해서 왕권을 키웠지만 무리한 환국의 대가로 나라가 엉망이 돼 가고 있었다. 우선 사대부들이 목숨이 걸린 문제가 되자 기존의 원칙이나 규범 따위는 개나 주고 개싸움이 되면서 정치가 개판이 되었다. 아무리 왕권이 강해도 밑에서 일하는 건 신하인데 신하들끼리 붕당으로 상대방을 죽이는데 혈안이 된 상태니 정책을 하려고 해도 주요 부서가 공회전이 되고 주요 의제를 제대로 다루기 어렵게 되었다.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당쟁이 격화되니 왕이 임명권을 행사하려고 해도 붕당을 고려해서 해야 하고 당이 다르다는 이유로 임명에 반대하거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서 왕의 인사권이 제한되었다. 잦은 환국으로 사대부 계층이 대거 죽어나간대다가 역적으로 낙인 찍히면서 국가의 인재풀 자체가 박살나면서 최종적으로 노론이라는 서인의 일파가 권력을 잡았다. 하지만 너무 죽어나간데다가 거대 야당인 남인을 손수 박살내면서 서인을 대체하거나 견제할 수 없었고, 노소 양론으로 통한 환국을 하려고 해도 힘의 균형이 깨진 상황이었다. 전국에서 모아야 할 인재가 일부 세력으로 축소되자 왕의 권력은 제한되었다. 그렇다고 숙종이 기존 양반 계층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피를 수혈해서 친위 세력을 구축한 것도 아니었고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 시킨 것도 아니였다. 하다 못해서 왕실 인사를 기용해서 왕실이 공백을 메우게 한 것도 아니였다.

이런 소수 사대부의 권력 점유는 왕권마저 위협했는데 노론과 소론은 숙종에게는 개기지 못했지만 후계 문제는 자기들 목숨이 걸린 일이라고 보고 소론은 세자(경종), 노론은 연잉군(영조)을 밀어주었다. 삼국시대나 고려 초기 같은 호족 연합 국가에서나 왕이 신하들 눈치 보면서 후계자를 선정하지 중앙 집권 국가인 조선에서 신하들이 왕을 고르는 택군 현상은 역모나 다름없었다. 왜 역모나고 의문이 들면 유산 상속자를 제 3자가 마음대로 정하는데 그 이유로 유산 처리를 자기 유리하게 하려고 한다는 것이니 그냥 도둑놈. 노론이 숙종과 영합해서 세자 경종에게 대리청정 권하고 은근슬적 세자에서 몰아내려고 하는 것도 문제였다. 아무리 왕의 뜻이라지만 일국의 후계 구도와 상속의 법도를 흔들 수 있는 문제였다. 당연히 신하들은 목숨걸고 반대해야 마땅했다. 태종 때 양녕대군을 폐세자하고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하려고 했을 때도 반대에 직면했다. 태종이 왕권이 약했던 것도 아니였고 두 대군은 중전 소생의 동복형제였고 양녕대군이 세자로써 자질이 부족하다는 게 명확했고 충녕대군의 자질이 월등히 뛰어남에도 적장자 상속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반대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노론은 비록 폐비 되었지만 전 중전 장희빈의 친아들이자 현 중전의 양아들인 세자를 폐위하고 후궁 소생인 연잉군을 후계자로 세우는데 적극적이었다. 왕실이 당쟁에 휘둘리기 시작했다는 징후였다.

사대부 내에서도 비록 소수지만 이런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멈추자는 흐름은 있었다. 이미 숙종 때 환국이 격화되려는 시기에도 나름 중재를 시도하고자 한 사람들이 있었고 후에 당쟁이 심해서 다른 당과 말도 안 섞는 상황에서도 당파를 초월해서 교류하고 최소한 정책 문제에 있어서 협력하고자 한 사람들이 있었다. 대다수는 조상과 일가가 당한 일에 대한 원한 때문에라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런 온건파는 탕평파로 이어졌다. 사실 자기 수신을 강조하고 왕도 정치를 표방하는 유학, 성리학 전반을 통틀어서 상대방을 역적으로 죽이기 위해서 모략을 짜는 것 자체가 이미 군자가 할 짓이 아니였다. 거기다 붕당이 거듭하면서 그 규모가 작아지면서 일가 내에서도 당이 갈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같은 제사를 모시는 사람끼리도 당쟁으로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정치적 회의가 생겼고 이런 상황을 끝내자는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었다.

3 숙종 시기

조선 후기인 숙종 시기에는 수많은 환국처분으로 인해 붕당 간의 당쟁이 격화되었다. 숙종 시기 내내 남인이 잡았던 정권이 서인에게로, 서인이 잡았던 정권이 남인에게로 가는 양상이 반복되었고, 이러한 양상은 숙종과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 시기까지 이어진다. 숙종 또한 이러한 문제점을 알고 있었고, 탕평에 대한 생각이 있었지만 숙종의 탕평은 단지 구호에 불과할 뿐이었다.

4 경종 시기

경종 때는 경종 본인의 몸도 아프고 권위도 약했고 정권을 잡은 노론이 공공연히 경종을 무시하고 깔아뭉개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탕평책을 펼칠 수 없었다. 뚜렷하게 탕평책을 하고자 하는 의지나 행적도 없었는데, 경종 때 노론은 칼만 안 들었지 역적질 하고 다니는 상황이었고 소론은 경종에게 의지하면서 겨우 버티는 상황이었다. 탕평책을 하면 노론이 정권을 잡은 상황에서 소론에게 순순히 지분을 넘겨줄리도 없었고 소론에게 노론과 싸우지 말라고 하는 건 소론이나 자신이나 그냥 정치 포기하겠다는거나 진배없었다. 경종은 우선 왕실마저 위협하는 노론을 꺾어야 했고 붕당간 중재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하지만 경종은 후에 탕평책을 위해서 중요한 결정을 한다. 우선 신축환국에서 노론에서 소론으로 정권을 바꿀 떄 노론을 죽이지 않았다. 노론이 한 짓거리를 보면 죽일 이유는 넘쳐났지만 그냥 소론으로 정권 교체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후 묵호룡의 고변으로 인한 삼수의 옥에서 경종에 대한 암살 시도가 명백했지만 경종의 식사에 독을 탄 김씨 궁인을 찾자는 걸 김씨 성을 가진 궁인이 너무 많다면서 찾는 걸 거부해서 역적 수괴로 몰린 세제 영조를 간접적으로 보호했다. 그리고 이 때 죽은 노론은 100명도 안 되었다.

노론은 후계자 선정, 대리청정으로 약점이 있었지만 경종은 굳이 그 약점을 파고들지 않고 정권 교체로 만족했고 이후 소론 강경파와 손 잡고 노론을 숙청했지만 경종에 대한 암살 시도가 영조가 공개적으로 인정할 만큼 분명했기 때문에 명분상 매우 충분했으며, 그 이전 반역 사건과 비교했을 때 딱히 더 노론을 핍박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노론 전체가 다 멸문당해도 할말 없는 죄였지만 오히려 사건을 적당히 덮어두었다.

경종은 소론과 노론의 정권 교체는 피를 흘리지 않았고 아무리 영조를 위해서라지만 왕을 죽이려 했다는 죄가 명확한 상황에서 노론을 숙청했다. 경종이 그냥 숙종처럼 정권 교체를 빌미로 죽였다면 노론이 소론을 다 죽이겠다고 덤벼도 영조도 딱히 막을 명분이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영조도 인정한 만큼 역모가 있었으니 소론도 나름 이유가 있었고 노론도 죄가 있는지라 어느 정도는 타협을 이루게 된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아버지 숙종 때보다는 완화되었고 최소한 환국의 이유나 죽이는데 있어서 논리도 있고 근거도 명확했기 때문에 나중에 소론이 정치적 부담이 덜했다.

5 영조 시기

경종이 재위 4년만에 붕어하자 연잉군이었던 영조가 즉위했고, 신축환국으로 인해 실각한 노론은 다시 정권을 잡게 되는데 영조의 환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조의 즉위 직후, 경종이 노론의 실각과 소론의 집권을 위해 일으켰던 임인옥사의 책임을 물으면서 사건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국문을 통해 신임옥사의 고변자인 목호룡, 노론사대신을 몰아낸 김일경을 처형했다. 또한 노론사대신을 신원하고 정호, 민진원과 같은 노론 대신을 삼정승에 제수했으며, 소론파 대신인 조태구최석항의 관작을 추탈하고 소론파 대신이자 좌의정인 유봉휘를 유배했다. 또한 삼수의 옥을 번안했다. 이를 을사처분이라고 한다.[2]

이와 같은 영조의 결정이 있었지만 노론 강경파는 만족하지 않았고, 소론의 생존자들을 처형하길 연일 주청했다. 그러나 노론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소론 탕평파 대신들을 기용하고, 파직되거나 처형된 소론파 신하를 복직시키고 신원하는 등 소론의 편을 들어주었다.

영조는 노론을 견제하기 위하고 탕평이라는 정책의 실현을 위해 정미환국이라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소론 탕평파인 소론 완론이 집권하자 소론 강경파인 소론 준론이 격분하여 일을 벌이는데, 이것이 이인좌가 일으킨 난이다. 이로 인해 소론이 크게 타격을 입고, 노론이 재집권하게 된다.

이와 같은 양상이 반복되자,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영조는 탕평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729년, 영조는 기유처분 이후 노, 소론을 막론하고 고루 등용하는 정책을 편다..

영조는 일찍이 왕권 강화를 위해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등용하는 완론 탕평을 천명했는데, 송인명, 박사수, 조현명, 조문명과 같은 소론 완론 인사들을 중심으로 전개해 나갔다. 성균관에는 이러한 자시의 탕평에 대한 의지를 피력하기 위해 탕평비를 세웠다.

탕평비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周而不比

신의가 있고 아첨하지 않는 것은

乃君子之公心
군자의 마음이요

比而不周
아첨하고 신의가 없음은

寔小人之私意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내용은 예기에서 따왔다고 한다.
영조: 네놈들이 죽어라 싸워봐야 내가 왕이야 그만 싸워 ㅅㅂㄻ
이렇게 영조는 200년 뒤에 반도에서 개최될 國K-1을 멋지게 예측하였다.

먼저 영조가 처음 생각했던 탕평책은 쌍거호대이다. 노, 소론의 융화를 권면하고, 이에 순응하지 않으면 축출하는 방식이다. 노론의 영수인 민진원과 소론의 영수 이광좌를 불러 화합을 도모하고, 이에 순응하지 않는 이병태, 유최기 등을 파직하였다. 그러나 점점 유재시용의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유재시용이란 탕평파 인재를 등용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화합조성의 기운에도 불구하고 시파와 벽파가 나뉘어졌다. 그의 탕평은 거의 실패한 듯 보였다.

한편, 이 탕평 때문에 의외의 부작용이 생기기도 했는데, 자세한 것은 유소(상소) 참조.

6 정조 시기

영조의 완론 탕평과 달리 정조는 준론 탕평을 지향했다. 이는 당파의 시비를 가리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는데, 영조시대에는 시비를 가리지 않고 탕평을 쓴 결과 탕평당이라는게 생겨 왕의 비호아래 별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1. 영조 말기에도 존재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또한 붕당으로서의 시파와 벽파라고 하면 노론 시파와 노론 벽파를 일컫는다.
  2. 을사처분 당시에 제주도로 귀양을 간 윤지는 약 20년 후에 노론을 몰아내고자 어떠한 사건을 일으키는데, 그것이 바로 나주괘서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