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決戦じゅってんはちけっせん
목차
1 개요
1994년 10월 8일,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주니치 드래곤즈의 시즌 최종전을 일컫는 말. 시즌 최종전에 리그 1위가 달린 전무후무한 경기로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경기로 꼽히곤 한다.[2]
2 10.8 결전의 배경
1994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는 그 어느해보다 치열한 혼전 양상을 보였다. 시즌 초반에는 요미우리가 선두를 질주하고 있었으나 8월 25일부터 9월 3일까지 8연패하는 바람에 일찌감치 우승을 확정지으려던 구상이 흐트러졌다.
반면 주니치 드래곤즈는 타카기 모리미치 감독이 1993년 시즌에 2위를 차지했고 1994년에도 A클래스를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승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시즌 종료후 타카기 감독을 경질하려 했다. 구단 프런트의 이런 기류가 감독과 선수들에게도 감지되었고 선수들은 감독님과 마지막 시즌이라면 유종의 미를 거두자라고 결의를 다졌고 이런 탓에 되려 9월 18일부터 10월 2일까지 9연승을 거두며 요미우리를 바짝 뒤쫓았다.
본래대로라면 9월 29일에 마무리 되었을 요미우리와 주니치의 시즌 일정이었지만, 우천취소 경기가 추가일정으로 잡혀 10월 8일에 치뤄지는 것이 확정되었다. 9월 30일 당시 요미우리와 주니치는 66승 59패로 공동 1위를 달리고 있었고 남은 경기는 다섯 경기였다.
이 다섯경기에서 요미우리나 주니치 중 어느 한팀이 더 많은 승리를 거둔다면 리그 1위가 자연히 확정 될 터였다.
3 10월 6일의 상황
10월 6일에 이르러 잔여경기 중 요미우리는 3승, 주니치는 2승 1패의 성적을 거두었다. 10월 6일에 요미우리는 야쿠르트와, 주니치는 한신과 경기를 앞두고 있었는데 요미우리가 이기고 주니치가 지면 센트럴 리그 우승은 요미우리가 확정될 터였다. 그러나...
3.1 주니치 対 한신
경기는 주니치의 홈구장인 나고야 구장에서 열렸고, 당시 주니치의 에이스 투수인 야마모토 마사가 등판했다. 이때 야마모토 마사는 18승을 거둔 상태였는데 19승이 걸린 경기라 본인도 호투했고 타자들도 득점지원을 해주어서 10-2로 대승을 거두었다. 경기가 너무 쉽게 풀려서 주니치 팬들은 이 경기보다도 오히려 도쿄의 요미우리 경기에 관심을 집중했다. 주니치가 일단 이긴 상황이었기 때문에 요미우리의 경기결과에 초점이 맟춰졌다.
3.2 요미우리 対 야쿠르트
요미우리 또한 시즌 우승 확정이 달린 중요한 경기였던 탓에 특급 선발 3인방중 하나인 사이토 마사키가 선발투수로 나섰고, 또 다른 특급 선발 마키하라 히로미를 불펜등판 시키는 초강수까지 두었다. 2:0으로 앞서던 상황이었으나 마키하라가 2실점해 동점을 허용했고 1,2루에 주자를 둔 상황에서 하타 신지가 쓰리런 홈런을 날렸다. 결국 요미우리는 6:2로 역전패했고 요미우리 팬들의 비난을 의식했는지 하타 신지는 이겨서 미안하다라고 해야 했을 정도. 결국 하타 신지의 쓰리런 홈런이 10.8 결전을 이끄는 결정타가 되었다.[3]
4 10월 8일 당일
상황이 이리되자 요미우리와 주니치는 69승 60패로 동률이 되었고, 남은 한 경기에 모든 걸 걸어야 할 판이 되었다. 얄궂게도 마지막 경기는 요미우리와 주니치의 맞대결이었다. 마지막 경기에 리그 1위와 일본시리즈 진출권이 걸린 상황이라 나고야 구장에는 관객들이 미어터졌고 언론들도 누가 최종 승자가 될지 주목했다. 나고야 구장은 이례적으로 오전 11시부터 구장문을 열었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탓에 안전사고를 우려해서 그랬던 것이다.
주니치는 되려 차분하게 최종 경기를 준비했다. 타카기 감독은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하면 된다"라면서 차분한 태도를 보였다. 반면 요미우리는 숙소에서 선수 미팅을 소집하고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은 "반드시 이긴다"라고 구호를 외쳤다. 나가시마 감독이 이런 적은 이때가 거의 유일했다고 한다. 또한 시즌 중에 요미우리가 주니치의 예상 선발 투수인 유리의 에이스 이마나카 신지를 유일하게 공략했던 경기의 비디오를 반복 시청하면서 이마나카 타도를 부르짖었다. 이마나카 신지는 1994년에 요미우리를 상대로 5승 2패 1세이브 2.45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던 상황이었고 이전에는 요미우리 전 11연승을 기록하는 등 교진 킬러로 교진팬들에게는 악명이 높았던 선수였다.
4.1 경기 진행
언론의 예상대로 주니치는 요미우리 킬러 이마나카 신지를, 요미우리는 특급선발 3인방 중 한 명인 마키하라 히로미를 선발로 내세웠다.
2회초에 요미우리는 오치아이 히로미츠가 솔로홈런을 뽑아내는 등 2점을 먼저 뽑았지만, 이후 2회말에 주니치가 4타자 연속 안타에 외야수 실책이 겹치면서 2점을 따라붙어 2:2를 만들었다. 이렇게 되자 나가시마 감독은 마키하라를 강판하고 10월 6일에 선발로 등판했던 사이토 마사키를 올렸다. 사이토는 무사 주자 1,2루라는 위기상황을 맞았으나 투수 이마나카가 번트를 실패해 투수땅볼로 아웃되고 나카무라가 주루사를 당하면서 주니치의 좋은 찬스가 날아갔다.
3회초, 요미우리는 생전 번트라곤 대본 적이 없던 마쓰이 히데키가 희생번트를 성공시키고[4] 오치아이가 또다시 적시타를 날리면서 다시 3:2로 앞서나갔다. 4회에는 무라타 신이치와 헨리 코토의 홈런으로 두점을 추가해 5:2로 석점차까지 벌려놓았다.
5회초에는 마쓰이가 솔로홈런을 치면서 점수는 6:2까지 벌어졌다. 6회말에 주니치가 히코노 토시카츠의 적시타로 한점을 따라붙으면서 6:3이 되었다. 7회말에 요미우리는 특급 선발 3인방 중 마지막인 쿠와타 마스미를 등판시켰고 주니치는 8회말에 선두타자 타츠나미 카즈요시가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내야안타를 만들어 출루했다.[5] 이후 주자 한명이 더 출루했다. 홈런이 나온다면 극적인 동점도 가능한 상황이었으나 결국 득점을 추가하는데는 실패했다.
9회초에 요미우리는 선두타자 카와이 마사히로가 백스크린을 맟추는 타구를 날렸지만 이 타구는 홈런으로 인정되지 않고 3루타로 판정되었다. 나가시마 감독은 맹렬히 항의했지만 득점은 실패했다. 이후 9회말 주니치의 코모리 테츠야가 2아웃 상황에서 삼진을 당해 경기는 6:3으로 요미우리의 승리로 돌아갔다.
4.2 승패의 요인
승패를 가른 요인에 대해 나가시마 감독과 타카기 감독의 마운드 운용이 승패를 갈랐다는 지적이 있다. 나가시마 감독은 요미우리의 특급선발 원투쓰리펀치 사이토 마사키, 마키하라 히로미, 쿠와타 마스미를 모두 투입했다. 반면 타카기 감독은 이마나카 신지를 강판시킨 이후에 에이스인 야마모토 마사히로를 투입하지 않았는데 이게 패인이라는 지적이 많다.
하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선수들의 심리상태였다는게 지배적이다. 주니치 선수들은 타카기 감독의 생각대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실제 경기에서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경기를 지켜보던 하라 타츠노리는 이건 평소의 주니치가 아니다라고 지적했고 실제 주니치 선수들은 실책을 남발했다. 반면 요미우리는 강자의 자리를 지키겠다는 자존심에 선발 3인방을 모두 투입하고 마쓰이가 번트를 대는등 비장한 각오로 임했고 결국 우승을 확정지었다고 볼수 있다.
4.3 후일담
당시 이 경기는 전 일본의 화제가 되었고 후지TV를 통해 생중계되었다. 당시 일본의 시청률 집계기관인 비디오 리서치가 시청률을 집계한 결과 1977년 시청률 집계 이후 역대 일본 프로야구 시청률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토요일 오후 6시 30분 부터 3시간 남짓 생중계한 결과 무려 도쿄 기준[6]최고67% 평균 48.8%를 보였다. [7][8]
주니치는 비록 패하기는 했으나 타카기 감독을 경질하려던 기존의 방침을 변경해 타카기 감독의 유임을 결정했다. 그러나 타카기는 다음 해 5위로 팀을 꼬라박는 바람에 결국 경질당했다(...) 그 뒤엔 1986~1991년 감독을 맡았던 호시노 센이치가 재부임했다. 명승부의 보상은 해임 1년 유임이었다(...)
묘하게도 주니치는 구단 역사에서 10.8 결전을 구단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 요미우리는 구단 역사에서 의도적으로 10.8 결전의 언급을 회피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다만 2008년에 요미우리가 앞서나가던 한신을 끌어내리고 리그 1위를 탈환할때 10.8결전이 회고되기는 했다.
2010년 NPB가 프로야구 선수, 코칭스탭 등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10.8 결전이 최고의 명승부 1위에 올랐다.
재미있게도 1973년에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데 요미우리와 한신이 불과 반경기 차이로 우승을 다투게 되어 시즌 최종전으로 리그 우승을 결정짓게 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때 나가시마 시게오는 선수로서 요미우리에 있었지만 부상으로 한신과의 시즌 최종전에는 출장하지 못했다. 타카기 모리미치는 주니치의 현역 선수로 있었는데 우승을 노리던 한신을 끌어내리는 결정타를 날리는 역할을 했다.
- 관련항목: 2011 MLB 와일드카드 레이스, 10.19
- ↑ 패배한 팀의 흑역사가 아니다!
- ↑ 그런 만큼 역대 일본 프로야구 중계 사상 TV 시청률 또한 1위를 기록했다. 아래 후일담 참조.
- ↑ 아이러니하게도 하타 신지는 2012년 시즌부터 요미우리의 배터리 코치가 되었다.
- ↑ 요미우리 시절 통틀어 마쓰이가 희생번트를 대본적은 이 때를 포함에 단 두 번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 ↑ 대신 타츠나미는 어깨부상으로 교체되었다.
- ↑ 이게 일본 측에서 공식적으로 집계하는 시청률이다.전국 범위가 아니다.
- ↑ 밤 9시 경기 종료 직후 나가시마 감독을 헹가레 치던 장면에서 67%까지 치솟았다고 한다.참고로 그 해 방영한 연말연시 최고 인기 프로이자 연례행사인 NHK 홍백가합전은 51.5%를 기록했다고.
- ↑ 후지TV는 이 경기를 중계하려고 당시 한창 인기리에 방영중이던 유유백서를 한주 결방시키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물론 야구중계를 위해 애니메이션을 방송을 잠깐 뒤로 늦추거나 결방하는 일은 지금도 종종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