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시노 센이치

1974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상
타카하시 가즈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호시노 센이치
(주니치 드래곤즈)
소토코바 요시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4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세이브
1974년 신설호시노 센이치
(주니치 드래곤즈)
스즈키 타카마사
(주니치 드래곤즈)
주니치 드래곤즈 역대 감독
야마우치 카즈히로
(1984 - 1986)
호시노 센이치
(1987 - 1991)
다카기 모리미치
(1992 - 1995)
호시노 센이치
(1996 - 2001)
야마다 히사시
(2002 - 2003)
한신 타이거스 역대 감독
노무라 카츠야
(1999 - 2001)
호시노 센이치
(2002 - 2003)
오카다 아키노부
(2004 - 2008)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역대 감독
마티 브라운
(2010)
호시노 센이치
(2011 - 2014)
오쿠보 히로모토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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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호시노 센이치 (星野仙一)
생년월일1947년 1월 22일
국적일본
출신지오카야마 현 구라시키 시
포지션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68년 주니치 드래곤즈
드래프트 1순위 지명
소속팀주니치 드래곤즈 (1969~1982)
지도자주니치 드래곤즈 1군 투수코치 (1981~1982)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1987~1991, 1996~2001)
한신 타이거스 감독 (2002~2003)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2011~2014)

1 개요

평생의 숙원을 폐허의 에서 일궈낸 남자
일본의 전 프로야구 선수, 감독. 콩라인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구단 부회장.

2 거인 안티가 되다

오카야마 현립 구라시키 상고 시절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으나 고3때 주고쿠 지역예선 결승전에서 패하는 등 명성에 걸맞지 않게 고시엔 출전 경력은 한번도 없다.고등학교 때부터 콩라인. 고교 졸업 후 메이지 대학에 진학, 1학년 때부터 에이스로 활약하며 호세이대학타부치 코이치, 야마모토 코지, 故 토미타 마사루[1] 트리오 등과 함께 도쿄 6대학 리그의 스타로서 일찌감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번번이 호세이대학의 벽에 가로막혀 대학 시절에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대학을 가도 콩라인. 1968년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이하 거인)이 자신을 1순위로 지명할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으나 자신이 아닌 1950년생인 시마노 오사무(島野修)라는 고교생 투수를 지명하자 이 때부터 거인에 대해 엄청난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다. 교진 지명에서도 콩라인. 드래프트에서는 요미우리가 아닌 주니치 드래곤즈에 지명을 받게 된다. 이후 철저한 '안티 거인' 행보를 하게 된다. 별명은 '열혈남'.

여담으로 호시노 대신 요미우리에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된 시마노는 선수 생활 동안 단 1승만 하는 좋지 않은 성적으로 점점 잊혀지는데...요미우리에서 버림받고, 결국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은퇴를 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반전이 일어나는데, 1981년 구단 마스코트 '브레이비' 의 슈트 액터 역할을 맡아 브레이비 가면을 쓰고 나름 유명 마스코트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 분은 팀이 오릭스에 매각되면서 팀 마스코트가 네피로 바뛴 뒤에도 마스코트 슈트 액터 역할을 계속하며 1998년 리그 최종전까지 꾸준히 마스코트로 활약하며 비공식 연속 경기 출장기록을 세우는 쾌거를 달성한다. 아무리 그래도 146승 투수, 일본대표팀 감독까지 간 사람이 야구선수 입장에서는 더 부러워 보일거다. 이래서 인생은 모르는거다. [2] 그래도 마스코트 연기자로써의 인기와 명성은 굉장했기 때문에, 지금도 다른 구단의 마스코트 연기자들까지 "시마노 씨의 네피처럼 되고 싶다" 라고 할 정도였다.

시마노는 그 후에도 구단 직원으로 일했으나 2004년 병으로 퇴직. 그 뒤 2010년 뇌출혈로 사망하고 말았다.[3]

3 선수로 콩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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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의 호시노. 등번호 20

1974년 선발 투수중무리 투수를 오가며 맹활약, 사와무라상, 센트럴리그 최초의 세이브왕까지 따내면서[4]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10년 연속 센트럴리그 우승 겸 일본시리즈 진출을 저지하고 1954년 이후 주니치의 사상 두번째 일본시리즈 진출을 이끌었다. 공교롭게도 왕정치와 함께 거인군의 ON타선을 이뤘던 나가시마 시게오는 그 해를 끝으로 은퇴하고[5] 감독인 카와카미 테츠하루도 그 해를 끝으로 사임하면서 거인의 V9시대는 성적으로나 인적 구성으로나 완전히 막을 내린다. 그러나 일본시리즈에서는 롯데 오리온즈(現 치바 롯데 마린즈)에게 2승 4패로 패배.[6][7] 하지만 주니치 빠들은 그때까지 경쟁자가 없었던 교진군의 V10을 저지한 이 1974년을 엄청 좋아한다. 주니치의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1974년 다이요 훼일즈와의 시즌 마지막 맞대결에서 이 양반이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은 뒤 모자를 거칠게 벗으며 기뻐하는 모습은 지금도 1년에 최소 한번씩 나고야 지역 민방에서 볼수 있다. 팀이 이겨서 그런지.. 교진군을 발라서 그런지..사실은 둘다.

그 후로도 주니치의 간판 투수로 활약했으나,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전성기 대두와 야마모토 코지: 친구여 그냥 콩라인으로 살게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부활, 야쿠르트 스왈로즈갑툭튀 등등으로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1982년에는 시즌 막판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즈와의 한 경기를 남겨두고 있었는데, 이기면 주니치 드래곤즈가 리그 우승을 하고, 지면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리그 우승을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주니치의 에이스 코마츠 타츠오완봉승으로 활약하여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으나 일본시리즈에서 세이부 라이온즈 에게 2승 4패로 패했고,[8][9][10] 호시노는 그 해를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통산 성적은 146승 121패 34세이브, 평균자책점 3.60, 1225탈삼진.

불과 14시즌(1969~1982)밖에 뛰지 못했고, 시즌 당 평균 승수도 10.6승에 불과하였으나 거인전에서만 무려 35승을 챙겼다.[11] 신인시절에는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렸으나 부상 이후 변화구를 주로 던지며 기교파 투수로 변모했고, 구원투수선발투수를 겸업하며 마구잡이식으로 등판하면서 거둔 성적이라서 드러난 성적에 비해 훨씬 더 팀공헌도는 높았다고 평가된다. 근데 혹사잖아?

4 감독으로 콩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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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86년 시즌 종료 후, 39세의 젊은 나이로 주니치 드래곤즈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이로서 일본프로야구 최초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어난 감독이 되었다.(2번째는 동년 롯데 오리온즈의 감독으로 취임한 아리토 미치요.)

1988년 시즌엔 7월 9일 이후 무려 50승 15패 3무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역전우승을 차지하였으나 또다시 일본시리즈에서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무너졌다.[12] 1991년에 일신상의 사유로 감독직을 사임했고 감독 자리는 선배이자 주니치의 또다른 프랜차이즈 스타인 다카기 모리미치에게 넘긴다.

4년간 해설자 생활을 하다가 1996년 다시 주니치 감독으로 복귀했다. 이 시기에 선동렬, 이종범, 이상훈을 영입하여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널리 이름이 알려진 감독이 되기도 했다. 1999년 또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하나, 일본시리즈에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現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1승 4패로 무너져 또다시 준우승을 차지[13][14] 하였다. 그 후 2001년 성적 부진과 수뇌부와의 불화로 감독직을 야마다 히사시[15]에게 내주고 이듬해인 2002년에 한신 타이거즈 감독을 맡게 된다. 호시노 센이치가 없는 주니치는 2007년에 기어코 53년간의 한을 풀고 일본제일을 이룩하게 된다.

5 한신으로 가서도 콩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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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당시 1987년 이래로 665662[16]4466566664456656666이라는 비참한 성적을 기록하며 리그 밑바닥을 찍다못해 내핵까지 파한신 타이거즈 감독을 맡았다. 참고로 저 밑의 6666은 한신 타이거즈 팀 최다 연속 꼴찌기록(4년 연속).

2002년 시즌이 끝나고 히로시마가네모토 도모아키, 텍사스 레인저스를 떠난 이라부 히데키 등을 FA로 영입하고, 이마오카 마코토, 세키모토 겐타로, 후지모토 아츠시 등을 등용하며, 그 해 B클래스(리그 4~6위권) 탈출에 실패했지만 센트럴리그 4위를 기록하며 부활의 가능성을 보였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노무라 카츠야3년 연속 리그꼴찌 대신 남긴 유산 덕택이라는 얘기가 있긴 했지만, 결국 2003년에는 한신 타이거즈에 18년 만에 우승을 안기며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였으나 4년 전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시절에 맞붙었던 팀인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아쉽게 패배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17] 이게 진짜 아까웠던 게 다이에에게 후쿠오카 돔에서의 1~2차전을 내준 후, 코시엔에서 내리 3연승을 하며 리버스 스윕을 할 뻔했으나 이후 후쿠오카 돔에서 또다시 6~7차전을 연달아 내주며 역관광당하고 말았다(...).[18] 호시노는 그 해를 끝으로 건강상의 이유로 인해 오카다 아키노부에게 감독직을 넘겨주게 된다.

이 해 한신이 시즌 내내 1위를 달리며 18년만의 우승 가능성이 비치기 시작하자 미디어들이 거의 스토커 수준으로 한신과 호시노 감독을 따라 다녔고, 팬들이 1승 1패에 일희일비하는 낙차가 매우 컸다. 특히 리그 우승 매직넘버가 켜진 이후로는 팬들과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미디어들의 조급증이 극에 달해서 매일매일의 승패에 따라 간사이지역 전체의 분위기거의 조울증 수준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꽤 여유있게 우승을 차지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선수단 전체가 우승을 확정짓기까지 상당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오죽하면 철권으로 소문났고 남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를 혐오하는 호시노가 고혈압을 견디지 못해서 경기 도중에 자리를 떠서 응급조치를 받을 정도였고 우승이 결정된 후에 이어진 우승감독 인터뷰에서 아나운서가 소감을 물었을 때 첫마디가 "아~ 신도캇타(힘들었네)[19]"일 정도였다. 이러한 점이 일본시리즈 패배와 시즌 후 호시노의 사임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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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센트럴리그 우승 확정 후 헹가레를 받는 호시노.

하지만 2003년, 18년만의 우승으로 이쪽 동네가 아주 폭발하게 된다.. 호시노가 나오는 광고가 전국구로 홍수를 이룰 정도니깐.. 하지만 결과는 극적인 콩라인이고.. 오카다에게 감독 자리를 물려준 이후인 2005년에 또 다시 한신은 센트럴리그 우승을 하여 일본시리즈에 올라가지만.. 그 결과는 매우 끔찍했다(...) 그냥 한신 자체가 안 되는 팀. 그 뒤에도 2014년 와다 유타카의 지휘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리그 우승팀 요미우리 자이언츠도쿄돔에서 4연승으로 박살내고 일본시리즈에 올라왔건만.. 1승 후 4연패에 4차전 오승환의 끝내기 홈런 허용에 니시오카 츠요시가 5차전에서 대형사고를 침으로써 어이없게 우승을 날려먹고 말았다(...)

6 한신 감독 사퇴 이후

한신 타이거즈의 시니어디렉터(SD)라는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애매모호한 직함으로 활동했다. 이 기간 중의 행보를 살펴보면 답이 없던 한신 타이거즈를 다시 일으켜세워 전국구 인기팀으로 탈바꿈시킨 전임 감독 경력을 활용해 카리스마형 경영자의 롤모델 기믹으로 여기저기 강연회 돌아다니면서 강연료 챙기는게 주업이었던 것 같다. 왠지 한국의 이분이 생각나는 건 기분 탓일까? 다만 2009년 FA 시장에서 조지마 겐지를 설득해 낚는 데에 한신이 조지마를 영입하는 데 깨알같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7 베이징 올림픽 목메달

한신 타이거스의 시니어 디렉터라는 애매한 직책에서 강연회 알바를 뛰는 외에도 간간이 NHK에서 야구해설가알바를 맡다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과의 본선 경기에서 이와세 히토키가 불질을 하며 3대 5로 패해 삐꺽대기 시작하였으며, 심지어 쿠바와의 경기를 피하기 위해 미국에게 지기 위해 일부러 승부치기[20]까지 끌고 가서 끝끝내 져주기 게임을 실행하여 4강에서 그토록 바라던 대한민국을 만나게 되지만....

베이징에서 내내 부진하던 그 지긋지긋한 교진의!! 이승엽의 역전 투런 홈런이 터지고 뒤이어 강민호의 쐐기 안타에, G.G.사토가 플라이 타구를 떨어뜨리는 삽질을 저지르며(허구연 : G.G. 사토 고마워요.) 2:6으로 패해 3, 4위전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미국과의 3,4위전에서 4대 8로 패배하여 대한민국 네티즌으로부터 목메달이라는 불명예스런 칭호가 걸리고 말았다.

일본시리즈 우승경력이 없는 지도자답게 단기전에서의 직관력과 통찰력, 유연성있는 운영능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는데 그 면모가 베이징 올림픽에서 드러났다는 분석이 많다. 아무튼 이 일로 안티가 엄청나게 생기고 말았다. 오죽하면 일본위키에 호시노 센이치를 일본명인 星野仙一 로 검색하면 연관어로 호시노 센이치 재일(星野仙一 在日) 이 나올 정도(...) 4년 뒤에는 또다른 구기종목에서 똑같은 사태가 벌어지는데...

8 폐허의 땅에서 우승기를 들어올리다


올림픽에서의 실패 이후 두 번 다시 감독직에 복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나 2011년부터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 라쿠텐의 의도는 한신이 노무라-호시노 라인으로 개막장이던 팀을 기적적으로 부활시켜서 초인기 강팀으로 탈바꿈시켰으니 노무라 다음에 마티 브라운이 1년 끼어있기는 했지만 호시노를 감독으로 앉히면 혹시 한신 같은 강팀으로 탈바꿈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심리였던 것 같다. 하지만 라쿠텐은 한신만큼 돈을 쓰지는 않잖아?[21]

어쨌거나 라쿠텐 부임 첫 해에는 토호쿠 대지진 등의 여파로 정상적인 팀 운영이 힘들었던 상황이라[22] 5위를 기록하게 된다.먹튀 김병현이 있음에도 의외로 선전했다. 놀랍게도 2011년도 꼴찌 자리는 전년도 일본시리즈 우승 뒤에 미네소타 지역 한정 금지어의 MLB 진출과 김태균마저 도망간 치바 롯데 마린즈의 차지.

그러나 부임 2년차인 2012년 시즌 후반기부터 팀이 서서히 정비되기 시작하더니 승수를 쌓으면서 플레이오프 진출을 사정권에 놓기도 했다. 결국은 전반기의 성적이 영향을 미쳐서 4위에 머물러 가을야구를 실패했지만 라쿠텐 구단 창단 이후 두번째로 승률 5할로 이끌었다. 투수 출신 감독 최초의 1000승 달성은 덤.

8.1 2013년


2013년 웬쑤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무너뜨리고 사상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뒤 헹가래를 받는 호시노.
아싸 콩라인 탈출!

그 여세를 몰아서 초반부터 선전을 거듭하면서 상위권에서 놀더니 7월 이후에는 단독 1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8월에 들어와서는 2위 그룹과 3~5게임 차이의 선두를 유지하면서 여유 있게 순항한 끝에 9월 26일 팀의 첫 정규리그우승을 개막 22연승이라는 무지막지한 기록을 세운 다나카 마사히로을 위시해 이끌었다.그리고 이어진 2013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를 상대로 라쿠텐의 사상 첫 우승을 이끌어냈다. 다만 11월 2일 경기 선발인 다나카 마사히로를 9회까지 160개를 던지게 하고 그 다음날 9회말에 또 마무리를 시킨 것으로 해서 메이저리그 진출을 앞두고 너무 혹사시키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견해는 어디까지나 상품에 하자가 생기기를 원하지 않는 메이저리그와 메이저리그식의 투수운용이 주가 되어버린 한국의 견해이고 아직도 에이스라면 닥치고 완투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은 일본에서는 생각보다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어짜피 다나카 본인도 일본에서의 마지막 투구라고 생각하고 마지막 경기는 미련 안 남게 내가 끝까지 책임진다는 생각으로 던지겠다는 자세를 견지했고[23] 정작 일본에서는 국내에서의 마지막 등판에서 팀의 우승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미화되었다. 물론 투구수 과다와 관련된 기사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미국에서는 이런 식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대"라면서 미국에서의 걱정스러운 반응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쳤다. 여기까지가 이전 버전의 서술인데, 확실히 이 상황을 깐 일본야구인이 있다. 바로 다르빗슈 유. SNS를 통해 대체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며 대차게 까내렸다. 전적으로 선수생명을 걱정하는 멘트였다. 메이저리거 선수 신분으로 미국에서 깐 거니까 미국의 반응일지도..[24] 어쨌거나 11월 3일 7차전에서 3:0으로 승리하여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함에 따라 콩라인에서 탈출하였다. 드디어 감독생활 27년, 프로야구 입문 44년 만에 일본제일이라는 평생의 목표를 실현하였다. 참으로 인간승리가 아닐수 없다. 하지만 다나카의 팔을 제물로 바쳤다 그렇지만 교진(정확힌 교진 OB)한테 몇 번씩이나 당한 한을 이제야 풀었다.

아무튼 우승이 목표였던 주니치나 한신 시절과는 달리 효율적 경영을 목표로 하는 라쿠텐에서는 콩라인만 해 줘도 영구결번 시켜줄 판에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우승까지 시켜줬으니 영구결번에 레전드 감독 자리는 예약일 듯. 어쨌거나 생소한 상대를 만나는 단기전보다 같은 상대를 여러번 상대해야 하는 장기전에 특화된 감독임은 라쿠텐에서의 선전으로 증명된 듯 하다. 워낙 올림픽의 임팩트가 커서 그렇지 생각만큼 막장 감독은 아니라는 증거.

그러나 2013 아시아 시리즈 2라운드에서 대만의 퉁이 세븐일레븐 라이온즈에게 4:1로 패하면서 아시아 시리즈 최초로 결승에 진출하지 못한 일본팀 감독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역시 국제전 나가면 안된다

8.2 2014년

시즌 초반부터 요추추간판탈출증 이라는 일종의 허리디스크를 앓으면서 5월 26일자로 경기에서 빠지고 수술을 받고 요양을 가게 되었다. 당분간은 사토 요시노리 투수코치, 오쿠보 히로모토 2군 감독이 대신 지휘봉을 잡을 예정이다. 사실 디스크는 라쿠텐 감독을 맡기 시작했던 2011년도부터 앓고 있었다고 하며 지난해 요미우리와의 일본시리즈에서는 진통제를 먹고 출장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걷기도 힘든 상태라 올스타전 감독직을 맡는것은 불발됐다.

다나카 마사히로의 부상에 대해 인터뷰를 하였다. 그리고 이 인터뷰 내용에 대해 논란이 상당.

결국 라쿠텐은 최하위로 추락하는 치욕을 당했고, 호시노는 성적부진의 책임으로 시즌 종료후 사임을 발표하였다. 이후 10월 7일 시즌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은퇴식을 거행하며 라쿠텐에서 퇴단을 하게 되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이전부터 건강이 많이 좋지 않았었고 나이도 일흔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더이상 프로팀 감독을 맡기는 어려워 보인다.

9 라쿠텐 구단 GM이 되다

라쿠텐 감독 퇴임 이 후 한신 시절처럼 시니어 어드바이저(SA)라는 명예직으로 활동하다가 2015년 9월 구단 부회장에 취임하며 사실상의 GM 역할을 맡게 되었다. 취임 후 신임 감독으로 나시다 마사타카긴테츠, 닛폰햄 감독을 영입하고, 레다메스 리즈이마에 도시아키를 영입해 선발투수와 클린업트리오의 한 축을 보강하는 데 성공했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라쿠텐은 4월 10일까지 퍼시픽리그 선두를 마크했다. 하지만 역시나 빈약한 전력이 금방 뽀록나면서 성적이 하락해 6월 12일 기준으로 꼴찌를 순항하는 중이다..였으나 6월 20일 기준 오릭스, 세이부의 삽질로 5위로 다시 상승한 상태. 그래봤자 오릭스 바로 위. 거기다 지금 무시무시한 매놈들 땜시 올해 리그 우승은 땡이다. 내년 시즌이나 기대하자[25]
한가지 희망적인 게 있다면 드래프트 1순위 지명에서 센다이 출신의 히라사와 타이가를 롯데와의 경합 끝에 놓치고 대신 지명한 나이지리아계 혼혈 오코에 루이가 기존의 일본 프로야구계의 상식을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성장 스피드를 보여주고 있고[26], 3순위로 뽑은 대졸 모기 에이고로가 일찌감치 유격수 주전자리를 차지하고 2015년 드래프트에서 지명된 신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이면서 강력한 신인왕 후보가 되고 있는 등 신인 농사는 굉장히 잘 지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2016년 당장은 아니더라도 팀의 에이스인 노리모토만 큰 부상없이 건재하다면 진짜로 다음해, 다다음해에는 기대를 해 볼 수도 있겠다.

10 기타

  • 안티 거인의 선봉장 같은 이미지에 비해 나가시마 시게오오 사다하루 같은 거인 OB들과는 친하게 지낸다. 그리고 이 친목질이 호시노가 일본프로야구에서 생존하는 비법이다.
  • 한신의 감독으로 가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주니치의 얼굴이자 상징같은 존재였으나, 2001년 감독직 사퇴시에 구단과 모종의 알력이 있었던 듯 하다. 주니치 감독 자리를 물러날 때 호시노의 반응이 "내가 평생을 선수, OB, 감독으로서 이 팀을 위해 분골쇄신을 했는데 결국 이런 식으로 대접하냐?"라는 서운한 반응을 보였다. 한신의 감독직 제안을 받았을 당시, 그래도 주니치의 상징이라는 자신의 이미지 때문에 고민에 빠져 있었으나 나가시마 시게오의 전화를 받고 수락을 결심했다고 한다. 나가시마는 당시 "센짱(호시노의 애칭), 뭘 고민하고 있나? 요새는 거인-한신 전을 '전통의 일전'이라고 부르는 게 옛말이 되고 있다네. 자이언츠를 보라고, 열심히 하고 있잖은가"하며 한신을 라이벌로 부활시켜 야구계를 부흥케 하자며 독려했다. 한편 주니치 측에서도 호시노의 한신 감독 취임에 "팀의 간판으로서 그렇게 섭섭하게 대우해 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30년 가까이 정든 팀을 뿌리치고 그렇게 간단하게 다른 팀 감독자리에 앉을 수 있냐."라는 식의 반응이었고 지금은 주니치 구단과 호시노 사이의 관계는 상당히 서먹하다.
  • 선수들에게 강한 정신력을 강조하고 가차없는 폭력까지 행사하는 카리스마형 감독이지만 막강한 기업가, 부자들이 많기로 소문난 자신의 후원회가 마련한 외제차 등을 수훈선수들에게 선물하는 등 채찍과 당근을 잘 배합하는 지도자였다. 참고로 말하면, 선수들을 때리더라도 그 다음날 그 선수의 출장기회를 보장해주고[27], 유부남 선수는 가족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는 절대로 때리지 않는 등 폭력에도 원칙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철권 감독이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따르는 선수들도 꽤 많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나카무라 다케시 포수(현 KIA 타이거즈 코치)
  • 하지만 감독으로서는 자신의 과거를 아는 선수들을 상당히 껄끄럽게 생각했던 듯 하다. 아무래도 자신의 과거를 아는 선수들이 섞여 있으면 선수들 사이에서 카리스마를 유지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던 듯. 그래서 호시노가 감독으로 취임하면 기존의 고참급 선수들을 중심으로 방출 내지는 트레이드의 소용돌이가 한번 지나가고는 한다. 그리고 팀의 중심이 될 고참급 선수들은 오치아이 히로미츠가네모토 도모아키 등 자신이 지휘하지 않았던 타 팀에서 영입하는 케이스가 많다. 가장 비근한 예로는 라쿠텐에 감독으로 취임하자 마자 최고참급이자 중심타자인 야마사키 다케시를 방출한 것. 야마사키는 주니치 감독시절의 제자로 개인적으로는 둘 사이의 관계가 그렇게 서먹하지는 않지만 호시노 본인이 팀을 장악하는 데 걸림돌이라고 판단한 듯 하다. 그리고 팀을 이끌어갈 고참의 자리는 메이저리그에서 방출당한 마츠이 가즈오이와무라 아키노리 등의 영입으로 채웠다.
  • 한신 시절 주전 유격수였던 후지모토 아츠시가 유난히 호시노 센이치 감독에게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벤치에서 멍하니 있다가 그대로 뒤통수 맞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고. 한 카리스마 한다는 기요하라 가즈히로를 쫄게 만들 정도로 그 성질머리가 대단했다.[28] 근데 어차피 기요하라는 진짜 센 놈한테는 꼼짝도 못하는 게 현실. 하지만 2003년 일본시리즈 3차전에서 후지모토가 결승 끝내기 희생플라이로 팀을 승리로 이끌게 되는데 이 때 인터뷰에서 후지모토에게 '타석에 들어서기 전에 감독에게 무슨 지시를 들었냐'라는 질문에 '부인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와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등 위에서 기술한대로 때로는 선수들의 사기를 진작시켜줄 줄도 아는 감독이기도 했다.
  • 초창기 주니치 감독시절 요미우리와 벤치클리어링이 잦았는데 호시노 감독의 성향상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때 오 사다하루 감독 앞에서 주먹을 쥐어보이면서 '너 님 나랑 맞짱깔거삼?'하고 도발하기도 했고 오 사다하루 감독이 그 기세에 위축된 모습을 보여서 요미우리 팬들은 실망 & 요미우리 안티팬들은 호시노 킹왕짱 이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카더라가 있는데... 실상은 요미우리의 용병 워렌 크로마티가 빈볼을 맞자 주니치 투수인 미야시타를 주먹으로 가격했고 벤치클리어링 과정에서 호시노가 오 사다하루에게 주먹을 내밀며 "주먹으로 가격하는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라고 어필한 것 뿐이라고. 비록 안티 거인으로 유명한 호시노이지만 선배격인 인물들에게는 굉장히 예의바르다고 한다. 그 덕에 일본야구계의 마당발로 통하기도 하고...
  • 선동렬이 은퇴하고 이상훈을 중심으로 불펜진을 구상하던 무렵, 이상훈이 메이저에 진출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남자라면 큰물에서 놀아야 된다'라고 격려를 해주었다고 한다. 오오 상남자 오오.
  • 재일 한국인이라는 설이 많은 유명인사 중 한 명이다. 재일한인 야구인들은 호시노=한국계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국내 일본야구팬들도 아예 대놓고 '김선일 씨'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인이 자신의 입으로 한국계라 밝힌 적은 없기 때문에 함부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이렇듯 한국에선 아예 한국계라고 못박아서 취급하는 것 때문인지 베이징 올림픽 당시 혐한들 사이에서 '한국계라서 일부러 한국에 져준거다'라는 중상모략이 돌았다고 한다. 정작 한국에서는 입만 털다가 목메달만 땄다며 조롱당했다
  • 폭력 감독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기부천사 성향이 있다고 한다. 매년 고향에 있는 복지시설들에 거액을 기부하고 있고, 선수들에게 "인생의 1%는 자원봉사에 투자하라"고 조언할 정도라고 한다. 호시노의 이러한 성향은 아버지가 자신이 태어나기 직전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나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학창 시절을 보낸 것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1. 난카이 호크스, 호시노가 못 가본요미우리 자이언츠, 닛폰햄 파이터즈,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1969년부터 1981년까지 13시즌을 뛴 선수.(은퇴는 1982년 시즌 종료 후 호시노와 같이 선언했다. 이 해엔 1군 경기에 한번도 못 나감.) 커리어는 호시노, 타부치, 야마모토보단 못하지만 은퇴 이후 해설가, 탤런트로 활약했고 이후 경비회사 탑 아카데미를 창업해 연매출 1억엔에 직원이 100명에 달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둔 사업가가 되었다. 2015년 5월 28일 폐암으로 사망.
  2. 하지만 그저 나쁜 운만으로 보기도 그런 것이, 이 1968년 드래프트는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드래프트 중 하나로 남았다. 호시노 센이치, 야마모토 코지(히로시마), 타부치 코이치(한신-세이부), 야마다 히사시(한큐), 아리토 미치요(롯데), 히가시오 오사무(니시테츠-타이헤이요 클럽-크라운라이터-세이부) 등등 다른 팀에 1순위로 지명받은 선수들은 대부분 팀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로 성장했다. 하위 지명에도 후쿠모토 유타카 등 대선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반면 가능성만을 믿고 고교생 투수 시마노를 지명한 요미우리는...ㅠ
  3. 그 후 오릭스 버팔로즈는 시마노를 기리는 의미에서 마스코트 변경을 발표. 네피는(덤으로 같이 활약하던 리프시도) 마스코트로써 은퇴하게 되었다. 그 뒤를 이어받은게 거의 존재감이 없는 버팔로 불과 묘하게 모에한 인기를 얻고 있는 버팔로 벨.
  4. 다만 이 해 호시노가 거둔 세이브는 10개 뿐이었다. 고작 10개 하고 세이브왕이라니.. 요즘처럼 1이닝만 던지고 세이브를 따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현대의 전문 마무리에 비해 현저히 적은 세이브 수.
  5. 그리고 요미우리에서 중심타선을 보강하기 위해 1975년 시즌 종료 후 데려온 것이 하리모토 이사오.
  6. 당시 롯데 오리온즈 감독은 공교롭게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OB이자 영구결번 No.34 가네다 마사이치였다. 참고로 가네다의 투수 통산 400승 겸 마지막 우승도 주니치 드래곤즈를 상대로 이뤄낸 것이다.(1969년 10월 10일) 가네다는 사실 원래 소속 팀인 고쿠테츠산케이 신문으로 넘어가서 교진 간거지만 그런건 신경쓰지 말자
  7. 거기다 우승 결정전인 6차전이 다름아닌 드래곤즈의 홈구장이었던 나고야 구장에서 열렸다. 주니치에겐 이만한 굴욕도 없을 듯.(롯데는 현재도 일본시리즈 우승을 홈구장에서 결정지은 적 없다)
  8. 공교롭게도 이때 세이부 감독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OB히로오카 타츠로였다. 참고로 히로오카는 1978년 야쿠르트의 첫 일본제일을 이룬 감독이기도 하다.
  9. 이 해 일본시리즈 우승 결정전인 6차전도 나고야 구장에서 열렸다.. 파리그 팀 일본제일 시켜주는 데 특화된 구장
  10. 또 공교롭게도 당시 세이부의 주전엔 다름아닌 그의 대학 시절 라이벌이자 친구인 타부치 코이치가 있었다.
  11. 다만 패전의 1/3 가량을 차지하는 31패도 거인전에서 쌓았다.
  12. 참고로 이 때의 세이부 감독 역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OB 모리 마사아키였다. 덤으로 이 해 세이부는 10.19긴테츠 버팔로즈가 1승 1무로 머물러 간신히 우승을 차지했다.
  13. 참고로 이때 감독은.. 뭐 말이 더 필요한가? 역시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OB이자 영구결번 No. 1 왕정치. 이쯤되면 운명이다
  14. 이 해 일본시리즈 우승 결정전인 5차전이.. 또 주니치의 홈구장인 나고야 돔에서 개최되었다(...) 거기다 이 해 일본시리즈에서 주니치는 승리한 2차전, 다이에의 우승이 결정된 5차전을 제외한 나머지 1, 3, 4차전에서 전부 영봉패로 패배하는 굴욕을 당했고, 5차전에선 1회말 1점을 먼저 얻으며 잘 나가나 싶더니 3회초 6실점이나 하면서 대역전 당했고 이후 3점을 더 얻으며 반격에 나섰으나 결국 패배했다(...) 여담으로 이 해 일본시리즈는 사상 최초로 돔구장에서만 시리즈 전 경기가 열린 시리즈였다.
  15. 위에 나오듯이 한큐 브레이브스(現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뛰었던 투수로 프로 통산 284승을 기록, 언더핸드 투수 중에서는 NPB 통산 최다승 투수이다. 원래대로라면 한큐 브레이브스의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오릭스에서 감독직을 맡을 가능성이 컸지만, 오릭스가 한큐 색깔 지우기에 여념이 없었던 시절이라... 어쨌든 호시노와의 인연으로 투수코치를 하고 있어서 감독 후보로는 물망에도 오르지 않았는데 본인도 갑작스럽게 감독을 맡은 듯. 즉 호시노의 사임에는 구단과의 알력이 작용했으며 이 때문에 감독 교체도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야마다는 성적부진으로 2003년 시즌 도중 해임당하고 말았다(...)
  16. 1992년 당시 성적. 사실 이것도 그 해 세리그 우승을 둘러싸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에 우승팀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성적은 69승 1무 61패로 우승팀 치고는 그리 좋은 성적도 아니었고 1위와 최하위 주니치간의 게임차가 9.0게임밖에 나지 않았다.(당시 주니치 성적은 60승 70패) 1위 야쿠르트와 4위 히로시마와는 3.0경기차였고 히로시마조차도 66승64패의 성적으로 우승을 노릴 정도로 대 난전이었다. 이 해 한신 타이거스도 67승 2무 63패로 2위팀 치고는 승률이 높은 편도 아니었다. 그나마 그 2위도 요미우리하고 공동 2위였다.
  17. 이때 감독도 왕정치. 어째 교진 출신만 만나면 진다냐? 교진 출신만 만나면 지는 게 아니라 본인 감독 커리어 내내 일본시리즈만 올라가면 상대팀 감독이 꼭 요미우리 출신이었다.
  18. 즉, 2009년 한국시리즈처럼 전부 홈팀이 우승한 시리즈였다.
  19. '신도캇타'는 힘들다를 의미하는 사투리 '신도이'의 과거형이다
  20. 베이징 올림픽 야구부터 도입된 제도. 11회에 처음부터 주자를 1, 2루에 두고 진행하는 방식으로, 일본 아마야구의 규칙에서 유래했다. 자세한 방식은 항목 참조.
  21. 어쨌거나 호시노가 감독자리에 앉고나서 그 성질머리를 배겨내지를 못했는지 감독 취임 조건이었는지 과거보단 조금 지름의 폭을 넓히기는 했다. 노무라가 감독할 때 그렇게 좀 하지?
  22. 당장 연고지인 미야기는 개박살났고 거기다가 홈구장인 미야기 구장마저도 파손. 결국 먼 동네 인기없는 친구들인기없는 돔을 임시 홈구장으로 써야 했다..
  23. 시리즈 후에 나온 기사에 의하면 다나카 본인의 의지가 워낙 강해서 호시노가 의사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마운드 운용을 했다고 한다. 어째 신시내티의 빵감독과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24. 애초에 다르빗슈 유와 같은 생각을 하거나 생각을 하더라도 그것을 공개석상에서 분명하게 밝히는 야구인은 일본에서는 소수파이다. 그나마 다르빗슈는 완전한 일본인이 아니라 이란인 아버지를 둔 입장에서 다문화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어느정도 스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발언에 영향력이 생긴 이후로는 다른 일반적인 일본 야구인들과는 약간 다른 주장을 해오고 있으며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이러한 점도 일반적인 일본인과는 약간 다른 점. 한편 토종 일본 야구인 중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기요하라 카즈히로와 KK콤비를 이룬 일본 야구 내에서도 괴짜, 이단아 취급을 받는 구와타 마스미(전 요미우리)이다. 근데 구와타도 선수생활 말기에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 뛰어본 적이 있는지라 완전히 토종으로 보긴 무리.
  25. 나시다가 감독을 맡은 팀들은 전부 2년차에 리그 우승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근데 문제는 일본시리즈 우승을 못했지. 또한 라쿠텐 항목에 나온 감독들의 사이클을 보면 무능한 감독이 1년을 말아먹은 뒤에 유능한 감독이 취임해서 3년차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징크스가 있다. 내년에 안 되더라도 다음 해에 희망을 가지자.
  26. 스프링 캠프 때 까지는 천부적인 툴은 좋지만 타격자세에 문제가 많아 교정하려면 1~2년 정도는 걸리며 주전으로 정착하려면 3년 후쯤이나 돼야 할 것라는 평이 지배적이었으나 불과 3개월만에 타격폼을 교정하고 고졸임에도 1군 클래스로 손색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또한 인터뷰 스킬도 좋고 상당히 모범생스러운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장차 구단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 후보로서 기대가 큰 상황
  27. 이게 베이징 올림픽 목메달의 결정적 요인 중의 하나가 됐다. 준결승에서 결정적 실책을 저지른 G.G. 사토더러 명예를 회복하라고 다음날 동메달 결정전에서도 그대로 선발 좌익수로 출전시켜줬더만 그 경기에서도 똑같은 실수를(...)
  28. 한신 감독 시절 요미우리와 벤치클리어링이 벌어졌는데 기요하라가 나서려는 찰나에 호시노가 뒷덜미를 잡고 "이미 끝났어 이 바보야!!(終わっとるんじゃこのボケ!)" 라고 외치며 기요하라를 끌어내버렸다. 기요하라조차 호시노 앞에서는 아무말도 못하고 데꿀멍할 정도다.
  29. 1001을 일본어로 읽으면 '센이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