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와이 마사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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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트의 신 그렇다. 지구용사 김뻔트가 생각나면 기분탓이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No.78
카와이 마사히로(川相 昌弘)
생년월일1964년 9월 27일
국적일본
출신지오카야마
포지션유격수, 2루수, 3루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82년 드래프트 4위
소속팀요미우리 자이언츠(1983~2003)
주니치 드래곤즈(2004~2006)

일본프로야구선수. 현 요미우리 자이언츠 3군 감독.

등번호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는 60번 - 0번(1989년~1999년) - 6번,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에는 7번을 달았으며, 이후 2006년에 은퇴하면서 그 등번호를 이병규에게 물려주게 된다.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가장 이상적인 2번 타자로 유명했으며, 별명은 번트의 장인. 별명답게 팀내에서는 주로 1번 타자가 출루하면 번트를 쳐 자신이 아웃되더라도 1루에 있는 1번타자를 2루로 출루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실제로 교진군은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중반까지 1번타자 시노즈카 카즈노리가 안타를 치고 나가면 그 뒤를 카와이가 나와서 번트를 대는 식으로 경기를 풀어나갔다.

그래서인지 프로생활 23년동안 타율 0.266(1199안타), 43홈런, 1199안타, 322타점, 47도루에 불과한 비교적 초라한 타격성적임에도 십수년간 요미우리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했으며, 1991년 시즌에는 66희생타로 당시 희생타 일본기록을 세웠으며[1] 2003년에는 통산 512개의 희생타를 기록하며 통산 희생타 세계기록을 세웠다. 2000년을 기점으로 이미 주전 유격수 자리는 강타자였던 니오카에게 넘기고 주로 대수비로 나왔지만, 간혹 대타로 나와 번트를 대는 방식으로 희생타 수를 늘렸다. 이후 요미우리 구단과의 불화로 인해 2004년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였고, 최종적으로 2006년 은퇴할 때까지 총 553개의 희생타를 기록했다.

희생타 기록 이외에도 수비에도 능하여,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을 무려 6차례나 수상하였다. 그것도 1980 ~ 90년대 세리그에서 득시글댔던 거물 유격수들 사이에서 타낸 상이라 더욱 가치가 있다. 또한 단짝 2루수였던 시노즈카 카즈노리와의 키스톤 콤비는 지금도 교진군 사상 최고의 키스톤 콤비로 꼽히고 있다.

은퇴 후, 2007 시즌부터 2010시즌까지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수비코치를 맡았다가 2011년부터 자신의 친정팀 요미우리의 코치, 그것도 2군 감독으로 돌아왔다. 2003년에 한 번 현역 은퇴 의사를 밝혔다가 번복하고 2004년에 주니치로 이적하면서 요미우리와는 등을 돌렸던 상태였다. 사실 2003년에도 현역 계속의 의지가 있었으나 팀 편성상 하라 타츠노리감독의 인간관계를 동원한 집요한 설득으로 "그래, 이것도 팀을 위한 길"이라면서 은퇴 결심을 굳혔는데 막상 결심하자마자 은퇴를 결심하게 한 하라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물러나게 되고, 부진의 책임을 감독에게만 떠넘기고 책임을 지지 않는 프런트의 행태에 반발하여 은퇴를 번복하고 주니치로 이적해서 3년을 더 뛰었다. 이미 요미우리가 아닌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기로 한 순간 요미우리의 감독 자리는 물건너가고[2] 심정적으로는 거의 요미우리하고 등을 돌린 상태였으나 결국 하라 감독도 다시 감독자리에 복귀했고 세월이 지난 동안 서로 앙금은 풀린 듯하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는 1군 수석코치를 맡았고, 같은 해 오프에 하라 감독이 용퇴하자 감독직 승격이 점쳐졌으나, 다카하시 요시노부가 은퇴 후 감독에 취임하면서 없는 일이 됐고, 2016년부터 3군 감독을 맡고 있다.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에서 OB선수로 나오는데 번트쪽 특능이 초특능이다. 그만큼 번트를 잘 댔던 선수.
  1. 이후 2001년 시즌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미야모토 신야가 67희생타로 경신한다.
  2. 요미우리 퇴단 이 후 다른 팀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감독이 된 케이스는 故 후지타 모토시가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