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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 4일 공동합의문을 타결하고 악수하고 있는 DJ와 JP.
1 개요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을 필두로 한 새정치국민회의, 김종필을 필두로 한 자유민주연합의 연합을 의미한다.[1]
2 계기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YS에게 패한 후 DJ는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영국으로 떠나지만 이후 아태재단(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을 만들며 정치 복귀에 의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후 1995년 정치 복귀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지만, 당시 대통령이었던 YS는 물론 자신이 속한 민주당 이기택 총재 등 14대 대선에서 자신을 지지했던 인사들까지 대놓고 복귀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많았다.
그러자 기존 민주당에서는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될 것을 장담할 수 없었던 DJ가 강력한 지지기반이었던 호남을 믿고 이를 기반으로 새정치국민회의라는 당을 아예 새로 창당한다. 그리고 그 결과 90명이 넘던 민주당 의원 중 65명(이 중 13명은 전국구 의원으로 민주당을 탈당하면 의원직을 상실하기에, 민주당에 남은 채로 사실상 국민회의 소속으로 활동했다) 정도가 국민회의로 대거 이동했고 30여명 정도가 당에 잔류하게 된다.
허나 이는 사실상 야권 지지표를 분열시키는 행동이었고, 결국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야권 표심이 갈라지며 여당인 신한국당이 여유롭게 제1당에 올라서고 국민회의는 의석수 79석에 그치고 만다.[2] 그리고 이 선거의 패배로 DJ는 대권 가도에 적신호가 켜지게 되었는데, 이때 당시 DJ의 정치참모였던 이강래 아태재단 연구원이 JP와 연합해야만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일명 DJP연합 초안을 보고서 형식으로 조언하게 되고, 이를 DJ가 수락하며 1년이 넘는 협상 과정이 시작된다.
3 과정
김종필은 기존 신민주공화당을 이끌고 1990년 3당 합당에 참여하여 노태우-김영삼 정권의 한 축을 담당했으나, 그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던 김영삼과 민주계에 의해 당내 계파투쟁에서 밀리고 민주자유당에서 사실상 철저한 비주류로 몰락하는 신세가 된다. 그러자 JP는 자신을 따르는 공화계와 YS에 반감을 가진 민정계 일부 세력을 이끌고 독립하여 1995년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그렇게 창당한 자민련은 1996년 15대 총선에서 리즈시절을 찍게 되는데, 지역기반인 충청지역 28석 중 24석을 석권했고, 그 외에도 경기 5석, 경북 2석, 강원 2석을 차지했으며 특히 대구에서는 13석 중 8석을 휩쓰는 기염을 토한다. 참고로 대구의 이같은 반응은 당시 YS정권의 민정계 쳐내기에 대한 반발 심리 때문이라고 많이들 분석했다. 그러나 김종필은 애초에 자신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없다는걸 알고 있었기에 누군가와 함께 공동정권을 창출하는 방안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차기 대권 1순위였던 DJ는 당연히 첫번째 협상 대상이었다.
당시 자민련 안에는 3개 계파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김종필 직계 세력인 충청그룹,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한 민정계, 그 외 비김종필 세력이 있었다. 그 중 충청그룹의 중심인물은 김용환 부총재였고 민정계는 박철언 의원, 비김종필 세력은 한영수 부총재였다. 당초 충청그룹과 비김종필 세력은 DJP연합에 부정적이었으나 의외로 권력의 달콤함을 못잊은 민정계는 연대에 매우 적극적이었고, 김종필의 결단으로 충청그룹이 이에 찬성하며 DJP연합은 본격 시동을 걸게 된다.
4 진통
DJP연합은 정치성향이 극도로 상반된 DJ와 JP의 연합이었기에 필연적으로 야합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국민 여론이 매우 부정적이었는데 당시 모 여론조사에선 무려 70퍼센트가 넘는 국민들이 해서는 안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DJ 자신도 지지기반이 날아갈 것을 꽤나 우려해서 독일의 신호등 연정 등 이론적 기반을 만드는데 주력했다.
또한, 김종필은 연대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갈지자(之字) 행보를 보이면서 DJ 측을 초조하게 했다. (아무래도 몸값 올리기였던 것으로 보인다.)[3]
5 연합 그리고 정권교체
1997년 11월 4일 김종필의 청구동 자택에 김대중 후보가 찾아왔고 사실상 연합을 마무리짓는다. (DJ가 나갈 때 JP가 90도 인사를 했다고 한다. 당시 한광옥 DJ 비서실장은 이를 보고 진정한 정치 고수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연합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 총재로 하고 초대 국무총리는 김종필 총재로 한다.
둘째. 제16대 국회에서 내각제 개헌을 하기로 합의하며 실세형 총리로 한다.
셋째. 모든 경제부처의 임명권은 총리가 가지며 지방선거 수도권 광역단체장 중 한 명을 자민련 소속으로 한다.
그리고 연합 결과 DJ는 충청에서 무려 43만여표 차이를 벌리며 대선 승리를 거머쥔다. (당시 총 득표차는 39만여표 차였다.) 또 TK에서도 득표율 14%가 나오는 기염을 토했고,[4] 이후 DJ가 동진 정책을 펴는데 자민련 측 인물들이 선봉장이 된다. 합의대로 경제관료들도 김종필이 지명하였는데 이들은 외환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된다. 또한 지긋지긋하게 DJ를 괴롭혔던 색깔론에서도 방파제가 되면서 중도보수층의 지지를 받아 그나마 반발을 무마시키며 대북정책을 추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