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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G8Fgmbv.jpg
당시 선거 포스터. 깨알같은 허경영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최초로 선거에 의한 여, 야의 평화적 정권교체.
온갖 기운이 다 몰린 김대중의 기적적 승리. [1]
제13대 대통령 선거의 리버스 버전. [2]
목차
1 개요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로 1997년 12월 18일에 실시 되어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다.
2 배경
제14대 대통령 선거 패배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에서 출마를 선언한다. 한편, 재벌의 연속 부도 등 엄청난 수준의 경제 위기로 김영삼 대통령과 신한국당은 지지를 잃고 있었다.
3 과정
3.1 신한국당의 경선
신한국당은 김영삼 대통령이 엄정 중립을 선언한 가운데 집권 여당으로서는 사실상 처음으로 대통령 후보 경선을 실시했다.[3] 당시 신한국당 내부에서는 이른바 '9룡'이라 하여 김영삼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이회창, 이홍구, 이수성, 민주계의 최형우, 김덕룡, 이인제, 민정계의 김윤환, 이한동,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150만 표를 득표한 적이 있던 박찬종이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에서 내무장관을 지내면서 1995년 행정구역 개편을 실행하는 등 실력자로 통했던 최형우가 1997년 3월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경선에 나서지 못했고, 김윤환도 "차기 대통령은 TK가 아니어야 한다"고 후보 등록을 포기했다. 대신 민정계 중진인 최병렬과 김종호가 경선 참여 선언을 했다. 경선 과정에서는 후보 줄세우기 등의 논란이 계속되면서 당내 기반이 약했던 박찬종, 이홍구가 경선자격을 중도 반납했고, 김종호도 중도 사퇴해 최종적으로는 6인이 경선을 치렀다. 용의 눈물에서 육룡이 나르샤로? 여튼 저 9(-3)명의 각축전 때문인지 경선열기만큼은 대체로 '김대중으로 대동단결'분위기로 정리가능한(하지만 하술할 DJP연합의 파장이...) 새정치국민회의보다 높았던 듯 하다. 신문만평에서도 마침 히트사극인 용의 눈물을 패러디한 경선상황을 풍자한 만평들이 날마다 실릴정도. 다른 신문만평도 사극패러디 만평을 제법 내놓았지만 당시 경향신문에 있던 김상택이 주로 이런 풍자구도를 써먹었다.
결국 1997년 7월 21일 실시된 경선에서 이회창이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인제가 2위를 기록하며 결선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으나, 대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김윤환을 중심으로 한 민정계가 단합하여 이회창을 지지한 반면, 민주계는 이인제, 김덕룡, 이수성 지지파로 분열한 것이 이회창 승리의 배경으로 분석되었다. 이때만 해도 이회창의 당선이 유력해 보였다.
3.2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의혹
그런데 이회창이 신한국당 대선 후보가 된 후, 이회창의 아들 두 명이 모두 체중미달 사유로 병역 면제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4] 이회창은 부정하게 병역을 면제받은 사실이 없다고 항변했으나, 둘째아들의 병적기록표에 부모가 아닌 백부, 백모가 기재되어 있는 등 석연찮은 정황이 계속 발견되자 국민 여론은 차갑게 돌아섰고 급기야 이회창의 지지율은 10%대로 폭락하기에 이른다.
3.3 이인제의 독자 출마
사실상 DJ 집권의 최고공신이자 최대원인.
이회창의 지지율이 바닥을 치자, 신한국당 내에서도 이러다가 대선에서 정말 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경선에서 2위를 차지한 이인제[5]가 이회창의 대안으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결국 이인제는 9월 14일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대선에 독자 출마한다고 선언한다[6]. 그 후로 김영삼의 최측근이었던 서석재를 포함해 이인제를 지지하는 인사들이 속속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을 창당하여 이인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한다.
10월 27일 한겨레 여론조사에 의하면 이 당시 지지율은 김대중 34.3%, 이회창 10.6%[7], 이인제 21.9%, 조순 4.7%, 김종필 2.9%였다.
3.4 DJP연합
11월, 자유민주연합 총재 김종필이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 김대중과 손을 잡는다.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김종필을 국무총리로 지명하고,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함께 내각을 구성하는 등 공동 정부를 운영한다는 내용으로써 발표 이후 민주자유당 시절 민정계의 수장이었던 박태준도 여기에 합류한다. 이로써 김대중은 충청도 지역의 지지를 얻음과 JP의 입을 통해 '빨갱이가 아님'을 보장 받아 보수 세력의 거부감을 누그러뜨릴 수 있게 되었다.
이회창은 이에 대항하여 민주당과 합당함으로써 조순[8]과 단일화한다. 이회창은 조순의 지지율을 그대로 흡수해서 지지율이 단번에 2~3배로 뛰어 오른다.
이회창-조순, DJ-JP 단일화 직후의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11월 10일 한겨레 - 김대중 35.3% 이회창 21%, 이인제 28.1%
11월 25일 한국일보 - 김대중 32.1%, 이회창 31.5% 이인제19.9%
3.5 본선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의 3인으로 최종 후보가 압축됨으로써 천하삼분찌개 천하삼분지계가 완성 되었다.
한동안 여론조사 결과는 김대중 1위, 이인제 2위, 이회창 3위로 나왔으나, 보수 표심이 차차 결집되면서 이회창이 2위로 치고 올라왔다. 이 때 나온 말이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된다'라는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네거티브 구호.적중했다. TV토론에서 이인제는 이 말을 언급하면서 '이인제를 찍으면, 이인제가 됩니다' 빗나갔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회창 후보는 김대중 후보의 비자금 문제를 터트리려 했으나 제14대 대통령 선거 비자금 문제도 함께 건드리는 바람에 김영삼 정부는 선거 중립을 고려해 수사를 연기한다. 이후 이회창 후보 진영이 제16대 대통령 선거 비자금 '차떼기 문제'로 고난을 치를 것이란 건 누가 알았으랴 이 사건을 계기로 YS와 이회창은 다시 한 번 더 멀어져서 이회창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탈당을 종용하는 최악의 상황에 이른다.[9]
그 와중에 1997년 외환 위기가 닥치고 11월 21일 정부가 IMF 구제금융 신청을 발표하면서, 여당 심판론이 힘을 얻는다. 이회창은 이회창-조순의 보수-진보 연합이라는 대형호재와 이에 따른 지지율 급상승에도 불구하고 끝내 판세를 뒤집지 못했다. 원인은 피닉제. 더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최종 결과는 김대중의 아슬아슬한 승리.
재미있는 사실은 14년 뒤, 이회창과 이인제는 자유선진당이라는 한 지붕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총선 패배 후 다시 이합집산해 새누리당에서 또 만나버리지만(…) 참으로 질긴 악연인 듯. 근데 이인제는 진보 정당을 뺀 대부분의 정당에 가입한 그랜드슬램 보유자이기 때문에 같은 둥지를 틀지 않았던 정치인 자체가 드물다. 정치계의 케빈 베이컨
4 결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 |||||||
기호 | 후보명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선유무 | |
1 | 이회창 | 한나라당 | 9,935,718 | 38.7% | 2 | 낙선 | |
2 | 김대중 | 새정치국민회의 | 10,326,275 | 40.3% | 1 | 당선 | |
3 | 이인제 | 국민신당 | 4,925,591 | 19.2% | 3 | 낙선 | |
4 | 권영길 | 국민승리21 | 306,026 | 1.2% | 4 | 낙선 | |
5 | 허경영 | 공화당 | 39,055 | 0.2% | 7 | 낙선 | |
6 | 김한식 | 바른나라정치연합 | 48,717 | 0.2% | 6 | 낙선 | |
7 | 신정일 | 통일한국당 | 61,056 | 0.2% | 5 | 낙선 | |
선거인수 | 32,290,416 | 투표수 | 26,042,633 | ||||
무효표수 | 400,195 | 투표율 | 80.7% |
5 평가
"준비된 대통령"을 내세운 김대중의 중도 안정 전략의 승리였다. 처음 실시된 TV토론 역시 DJ의 지지율을 높이는데 한몫 했다. 반면, 이회창 측은 "깨끗한 정치, 튼튼한 경제" "3김 정치 해소" 등 아무리 봐도 야당에게나 어울릴법한 구호를 내세웠고, 1992년 당시의 조지 H. W. 부시의 선거전처럼 강력한 네거티브 전략을 펼쳤다.
이 정권교체는 1961년 이후 36년만의 여야 교체에 해당한다. 그러나 1961년의 정권교체는 5.16 군사정변의 결과였고 1960년의 정권 교체는 전국적인 시위로 사상자까지 나온 4.19 혁명의 결과였기 때문에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평화로운 정권 교체'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경우도 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49년, 근 반세기만의 일이었다. 또한 90년대를 풍미했던 소위 3김시대의 끝물을 장식한 대선으로, 이후의 대선부터는 포스트 3김을 자처하는 새로운 유력 정치인들이 부상하기 시작한다.
특히 보수층에서는 심히 안타까운 선거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김대중이 39만표 차이로 이겼지만, 이것은 이인제 독자출마로 인한 경상도 표 분열이랑 DJP연합 으로 인해 충청도 표가 김대중으로 심히 휩쓸렸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때 자민련이랑 신한국당 같은 보수진영이 제18대 대통령 선거 때 처럼 합쳤으면, 재 아무리 정치 10단인 김대중이라도 이길수 없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 야권이 분열함으로써 패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보수층이 분열함으로써 패배의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의 야권후보단일화 실패과정에 대해서는 항목을 참조할 것.
6 특기 사항
- 1, 2위간 전국 표차가 불과 39만여 표(1.6%차) 정도인 초박빙이었다. 이는 34년 전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15만 표차(1.5%) 다음으로 근소한 차이이며, 게다가 5대 대선 투표에 참가한 인구가 15대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최저 득표율차 당선이다. 이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는 사상 최초로 1천만표 이상 득표로 당선됐으나 이회창 후보도 993만표로 거의 1천만에 근접했다. 민주계 입장에서는 DJP연합으로 긁어모을 수 있는 표는 다 긁어모은 상태에다 이인제 후보로 인한 보수진영의 대분열이 있었음에도 40만표 정도의 차이에 그치면서 아슬아슬한 결과였다. 보수 입장에서도 아까운 석패였다. 반대로 민주 진영 입장에서는 여당이 외환위기라는 전대미문의 국가적 위기를 초래했음에도 보수 진영의 후보 분열이 아니었으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고 그나마도 1.5% 차이로 겨우 신승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많이 보였다. 그래서 보수편향적인 한국의 정치지형을 설명할 때 이 선거 결과가 가장 많이 인용되기도 한다. 후에 이 선거결과는 국개론이라는 무서운 괴물을 낳는데 결정적 요인이 된다.
- DJ의 눈물겨운 이미지 개선 노력이 돋보인 선거였다.[10][11] 가장 유명한 CM송 광고로는 DJ DOC의 "DOC와 춤을"을 패러디한 "DJ와 춤을"이 있다. 그 # 희대의 명광고에서 김대중은 정권 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준비된 자신에게 꼭 한번 기회를 달라는 식으로 접근했다. (이른바 '프레임의 연성화') 또 DJP 연합 강조를 위해 김종필과 박태준 등 자민련의 인물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이웃집 할아버지 이미지나 신세대적 감각의 원곡, 당 소속 연예인(정한용, 손숙)의 등장 등.. 가히 가장 모범적이고 집약적인 선거 광고랄까.[12] 자세히 보면 "행복한 가정, 안정된 사회, 강력한 국가!"라는 보수 여당에나 어울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지금도 노무현의 상록수 기타 광고, 이명박의 국밥 광고과 함께 성공적인 대선광고의 예로 꼽히는 역사를 바꾼 선거 광고이다.[13]
- 허경영이 처음으로 등장한 선거이기도 하다.
- 대통령 선거에 계수기가 처음으로 도입된 선거[14]이긴 했으나 투표지분류기를 통한 개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개표방송을 날밤 까면서 했다.[15] 문화방송의 개표방송 오프닝 부분인데, 투표 종료 다음날인 12월 19일 새벽 3시의 현황이다. 개표율은 90%를 넘은 상태. 또 MBC 개표방송에서 오후 6시가 되자 출구조사결과[16]를 발표했는데 김대중 39.9%, 이회창 38.9%. 이인제 19.7%로 오차범위내로 맞쳐 선거가 끝난직후에 출구조사 결과를 방송하게 만드는걸 정착시키는데 공헌했다.[17]
당시 MBC 출구조사 결과
- ↑ 밑에 서술한 대로 DJP연합, 이인제의 독자적 출마로 인한 경상도 지역의 표 분산이 없었다면 승리가 불가능했다.
- ↑ 갓 민주화를 이루었던 민주진영이 유리한 환경이었음에도 후보 분열로 상대 진영에게 자리를 내준 13대 대선과 대비된다. 다만 굳이 따지면 야권의 일원인 통합민주당이 신한국당과 합당했고, 진보정당이 독자 출마를 하는 등 완벽한 단일화는 아니었다.
- ↑ 원래 1992년 민자당 시절 14대 대통령 후보 경선을 실시하였으나, 이종찬 후보가 중도 사퇴하면서 제대로 된 경선이 이뤄지지 못했다.
- ↑ 이 사건 이후 신검 기준이 대폭 강화되어, 현재는 체중미달만으로 병역면제를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
- ↑ 사실 3위인 이한동과 고작 8표 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 후에 이한동은 자유민주연합으로 간다.
- ↑ 이 때 이인제가 경선결과에 불복하고 대선에 뛰어든 이유 중 하나가 뒤에서 이 분이 은근히 지원사격을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 이회창 캠프에서는 이인제 배후에 김영삼이 있다거나, 김영삼이 이인제 신당을 지원한다는 공세를 퍼부으며 반YS 감정을 자극했다.
- ↑ 7월까지는 지지율 40%로 압도적이였지만 아들의 병역 의혹으로 8월에는 15.2%까지 수직 하락하고(그 지지율을 고스란히 이인제가 다 받아 먹음. 여기에 자신감을 얻고 탈당
피닉제 전설의 서막) 10월에는 김대중 비자금 의혹을 잘못 건드려 지지율이 또 떨어졌다 - ↑ 초대 민선 서울시장으로 재임중이었으나 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하기 위해 시장직을 사퇴했다. 10~15%대의 지지율을 찍고 있었으나 10월 들어 4.7%로
폭망하락하면서 돌파구를 찾던 상황. - ↑ 당시 분위기가 얼마나 좋지 않았냐면 이회창 측에서 YS인형 화형식을 할 정도였다.
- ↑ 그는 이경규가 간다의 전격 방문으로 TV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 한 꼭지의 등장으로 DJ는 30년 가까이 계속 된(혹은 조장 된) 부정적 이미지, 굳은 얼굴을 모두 벗게 되었다. # 그런 컨셉의 선거 광고도 있었는데 출연하는 연예인들이 그야말로 역대급#. 최종원, 백일섭, 윤석화, 손창민, 이선희, 노영심, 오정해, 이봉원, 팽현숙, 최양락, 코리아나, 김수미가 출연했다.
- ↑ 사실 92년 대선까지만 해도 DJ는 이런 방식의 선거 전략을 탐탁잖게 생각했다고 한다. 계속해서 대선에서 낙방하고, 정계 복귀 후 처음으로 치러진 96년 총선에서 정치 입문 후 처음으로 서울을 내 주는 대이변이 벌어지자 주변의 조언을 받아들여 방향을 튼 것.
- ↑ 이 광고에서는 노무현 당시 의원이 직접 등장하고,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연상하는 장면이 나오기에 "5년 후를 예언한 광고"라는 드립도 있다. 게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나오는 장면은 공교롭게도 16초다. 백괴사전에선 한술더떠 중간에 나오는 지구본이 1999년 지구멸망설을 부정한 것이라고 한다(...).
- ↑ 이 광고를 기획한 사람은 스포프서울 사장을 지냈던 윤흥렬인데, 이밖에도 김대중 캠프 안팎에는 쟁쟁한 선거 전략가들이 상당수 포진되어 있었다. 이 선거 외에 다음 선거도 지휘한 이해찬이라든지, 요즘도 종편에 종종 출연하곤 하는 이영작이라든지(DJ의 처조카다), 훗날 이명박 대통령 당선의 공신으로 꼽히는 최시중(당시 한국갤럽 사장)이라든지, 김한길이라든지.
- ↑ 계수기가 선거에 최초로 도입된 것은 93년 4·24 재보궐선거이다. 전국단위 선거로는 95년 6.27 지방선거에 처음 도입되었다. 당시기사
- ↑ 최종 개표 마감 시각이 선거 다음날 오전 5시 29분 강남을 선거구 개표가 마무리되면서 모든 개표가 끝났다.
- ↑ 참고로 KBS와 SBS에서도 출구조사 결과를 발표할 계획이 있었지만 선거 막판 김대중과 이회창의 지지율이 오차범위내로 좁혀지면서 15대 총선의 악몽이 다시나타날까 두려워진 방송국들은 출구조사는 하되, 발표는 안하기로 협약을 했는데 MBC에서 이 협약을 깼다.
속였구나 MBC - ↑ 그런데 정작 MBC는 득표율 수치를 유효투표수가 아닌 무효표가 포함된 전체투표수로 계산했다. 그리고는 당선확정 순간의 득표율이 예상 수치와 0.1%밖에 차이가 안났다고 뻥카를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