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문서 : 동명이인/ㅂ, 역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대한민국 국군/인물, 정치인/목록. 개신교/인물
- 전 국무총리를 제외한 박태준은 박태준(동명이인) 항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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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10월 24일 ~ 2011년 12월 13일)[1]
역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 ||||||
31대 김종필 | ← | 32대 박태준 | → | 33대 이한동 |
목차
1 소개
포항제철(현 포스코)의 초대 회장 및 명예회장. 일명 철강왕. 한일협정으로 당시 일본 정부에게서 받은 배상금 중 상당 부분이 투입되어 지어진 포항제철을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리고 이와 연관되어 포항공과대학교의 창립자이자 초대 이사장을 지냈고, 포항 스틸러스의 전신인 포항제철 실업축구단을 창단하기도 했다.
회장직에서 물려난 이후에는 민주정의당 대표, 자유민주연합 총재,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한국 현대사의 정치계, 경제계 거물인 셈. 사후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군인, 경제인, 정치인으로 다방면에서 한국 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보기 드문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군인 박태준
1927년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에서 태어났다.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였으나 해방 후 귀국하여 경비사관학교에 입학, 이후 임관하여 한국전쟁을 거치는 등 육군 초창기 일선에서 뛰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5사단 작전참모, 육사 교무처장, 국방부 인사과장, 25사단 참모장 및 일선 연대장 등을 거쳤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설치되자 박태준은 의장인 대통령의 비서실장에 임명되며 경제분야 최고위원으로도 일하게 된다. 경제인으로서 소양을 이때부터 다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후 소장 진급과 동시에 퇴역함으로써 군인의 길을 마치게 된다.
특이사항으로는 1961년 단국대학교에 편입, 1963년 8월 정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한 것으로 확인됐다. 육사 6기이던 그를 비롯해 당시 국군 장교로 근무하던 사람들이 정부의 조치로 4년제 정규대학의 학사 학위과정을 이수했다고 한다. 이것은 해방 이후 국군에 근무하던 사람들이 정규 학위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채 현역으로 복무했고, 또 정규 학사과정 육군사관학교(설립 당시 남조선경비사관학교)가 (11기 이후) 뒤늦게 신설되어 정부차원의 학사 학위과정 위탁교육이 필요해서 취해진 조치인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군생활을 하면서 육군대학교, 국방대학원을 수료하였다.
그 당시 군수물자 빼돌리기가 심했던 때인데 박태준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부사관 이상급이면 집에 군용 모포가 하나씩은 꼭 있던 시절이었다. 박태준이 군의 물자를 빼서 쓴 것은 단 한번이었다. 그마저도 농사 일을 하느라 갈라진 어머니의 손에 군대에서 쓰는 반창고를 가져와 감아드린 일이다. 박태준의 어머니가 지나가는 말로 '군대에서 쓰는 반창고를 감으면 잘 낫는다던데...' 라고 했는데 박태준이 다음날 군대 반창고를 가져와 감아드린것. 다른 일화로 당시 세들어 살던 집 주인이 박태준의 아내더러 "군 장교면서 뭐 이리 초라하게 사냐. 저 아래 다른 집은 없는게 없더라 청렴결백 지켜봐야 헛일이니 새댁이 남편 설득좀 해라." 라고 했다고 한다. - 조정래 작가의 박태준 전기에서 인용.
군수품 납품비리 업자를 내쫓고 정직한 납품업자와 재계약 한 일화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톱밥 고춧가루 사건'. 어느 날 박태준이 사병식당을 순시하던 도중 병사들이 김치를 먹지 않자 보급장교를 불러 양동이에 물을 붓고 그 물에 창고에 있는 고춧가루를 풀어보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고춧가루에 든 빨간색 색소가 빠지고 하얀 톱밥의 모습이 드러났다. 화가 난 박태준은 톱밥 고춧가루와 물이 든 양동이를 보급장교의 머리에 뒤집어 씌웠다. 그러면서 한 말은 "너는 민족의 반역자다!". 이후 박태준은 믿을 만한 군수업자를 새로 찾아 "3일 내로 김치를 담가 먹을 수 있도록 고춧가루를 가져오라"고 지시했고 그 부대의 김치는 제 모습을 찾게 됐다. 이 이야기는 이대환 작가가 쓴 박태준 평전에도 등장한다.
철저한 원리원칙 주의자여서 결혼 후 당번병을 쓰지 않았고(그 당시엔 오히려 자기 과시를 위해 늘리곤 했단다) 당시 존재한 통금을 지키느라 첫 아이를 병(病)으로 보내야 했었다. 사사로운 일에 부대 차를 부를수 없고 통금 시간이라 조금만 기다리자 했는데 결국 아이는 통금이 풀리는 걸 기디리 못했다고. - 조정래 작가의 박태준 전기에서 인용.
2.2 기업인 박태준
일본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박정희의 신임을 받고 있던 박태준은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특사로 파견되었다. 임무를 마치자마자 박태준은 대한중석[2] 사장에 임명하고, 여기서 경영의 실제를 배우며 만성적자와 부패의 온상이었던 기업을 흑자기업으로 돌려놓게 되면서 기업인으로 첫 발을 내딛게 된다.[3]
제철소 건설에 대한 제반 준비에 착수한 박태준은, 그러나 자금 원조를 해 줄 모든 외국 기관들로부터 '불가'판정을 받고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1967년 제철소 건설의 첫 삽을 떴지만 정작 외국에서 차관 불가 입장을 내려 미국 등 서방의 지원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한 와중에 한일국교정상화 때 받아낸 대일청구권 자금을 전용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면서 상황은 급변하고[4], 결국 일본의 동의를 받아내어 제철소에 자금을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5]
이후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를 건설해 왔으며, 1992년 결국 양 제철소 8개 고로 건설을 완성함과 동시에 포스코 창업자로서 역사를 마감하였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는 포스코의 명예회장으로 타계하기 전까지 경제계의 원로로 자리했다. 한국 기업인의 전형적인 문제점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업가 중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업적을 쌓은 거물 중 하나임도 분명하다.[6]
2.3 정치인 박태준
정치인 박태준의 역할은 현재 정치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고 간단한 이력만 소개한다.
2.3.1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81 |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17번) | 민주정의당 | - | 당선 | |
1988 |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6번) | 민주정의당 | - | 당선 |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2번) | 민주자유당 | - | 당선 | 1992.12월 의원직 사퇴 |
1997 | 1997년 7.24 재보궐선거 (15대 국회 경북 포항 북)[8] | 무소속[9] | 70,379 (71.2%) | 당선 (1위) |
3 몇 가지 이야기
3.1 축구 매니아
박태준은 축덕 축구 마니아로 유명했다. 축구 마니아로서의 성향과 기업인으로서의 위치가 시너지 효과로 작용하여 대한중석(現 대구텍) 사장 시절에 축구단을 운영했다.[10] 1973년에 포항제철 실업축구단(포항 스틸러스 전신)을 창단하기도 했고, 그것도 모자라 축구 전용구장을 두 개나 건립하였다.
한국의 첫번째 축구전용구장 포항 스틸야드를 건설한 사연도 재밌다. 한국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과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에 연속 진출하면서 통산 3회 월드컵 진출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해외언론에서 '축구전용구장 하나 없는 축구후진국이 무슨 본선 진출?' 하고 조롱거리고 삼았고, 이에 열받은 박태준이 사재를 털어 전용구장을 건설한다.(...) 건설업체는 당시 아무런 노하우도 없었던 포스코 건설이었고, 마땅한 부지가 없어서 포스코 뒷동산을 밀어버리고(...) 지었다. 이후 지속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현대적이고 미려한 전용구장이다. 다만 전술한 사연 탓에 포스코 부지 내에 건설된 경기장이다 보니 접근성이 약간 떨어지는 것이 흠이다. 하지만 포항 스틸야드 앞은 포항시 시내버스의 빗자루 배차 중에서도 최고의 배차를 자랑하는(...) 101번, 102번[11]이 오가므로 사실 접근성이 그다지 나쁘지도 않다. 다만 서술했듯이 시가지에 외곽지에 경기장만 덩그러니 있다보니 상업시설이 뒷받침 되지 못한 다는 것이 흠.
이런 이유로 포항 서포터즈들의 걸개에도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데, 타 팀 팬들이 "저 영감 누구임?" 하고 갸웃거리는 걸개의 그림이 바로 이 사람. 절대 체 게바라가 아니다!![12] 사실 서포터를 떠나 포항시에서 그의 평가 및 위치는 매우 우호적이다. 울산에서 고 정주영 현대 회장이 받는 평가와 비슷.
포항 구단측에서는 창단 40주년이 되는 2013년에 스틸야드 E석 스탠드를 청암존이라고 명명하며 박태준 회장을 기렸다. 청암(青岩)은 박태준 회장의 호.
두번째 전용구장은 광양에 건설했는데, 놀랍게도 애초부터 구장 확장을 염두에 두고 설계, 건설했다. '언젠가 광양시가 커지면 구장도 확장해야지'라는 비전을 갖고 지은 것. 다만 광양축구전용구장을 건설하게 된 계기는 프로축구단 전용이 아니라 광양제철소 직원 복지차원에서 건설한 것이다. 포항 스틸야드처럼 광양제철소 공단 안에 위치해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 그러다 보니 접근성은 스틸야드 보다 더 안 좋아졌다.(...)
여담으로 축구매니아이기도 했지만 야구선수 장효조를 굉장히 좋아했다. 실업야구팀인 포항제철 야구단에 영입할때 강남에 아파트 한채를 달라고하자 거기에 보너스까지 얹어줬다고.
3.2 긍정적인 일면
- 퇴임 당시 포스코 주식이 한 주도 없었다.
- 포항제철 공사 시, 이 돈은 우리 조상님들의 핏값이다. 공사를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모두 다 우향우해서 저 포항 앞바다에 빠져 죽자라고 설파했다.
포항 영알만 앞 피바다실제로 공장착공부터 완공까지 박태준 사장 이하 전 직원이 집에 거의 들어가지 않고 포항에 상주하며 일을 진행할 만큼 열의를 보였다. - 열정페이를 강요하는 쓰레기 기업의 안티테제적인 면모를 보였는데 기업이 살기 위해서는 인재를 유치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이 윤택해야 한다는 신념 아래 수 많은 욕을 먹으면서도 직원들이 거주할 최상의 아파트와 학교, 병원 등 직원들의 복지를 공장 착공 전 우선적으로 만들었다. 포항 및 광양 사업장의 직원 주거시설이 건립 시기를 감안해도 상당히 혁신적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 1977년에 크레인 기사가 야간근무 도중 졸음 때문에 쇳물을 잘못 부어서 제강공장의 각종 배선이 완전히 망가지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는데, 박태준은 해당 기사에겐 징계를 내리지 않고, 오히려 중간 간부들에게 호통을 쳤다. '당신들은 잠도 안자나? 야간근무라면 출근하기 전에 충분히 수면을 취했을 텐데, 그럼에도 사고가 났다면 집에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 아닌가? 당신들은 부하 직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가?'라고 혼냈다고.
- 부실공사 현장을 발견하곤[13] 짓던 공장을 손수 다이너마이트를 가져와 폭파시킨 뒤 다시 짓게 했다. 당시 포스코 건설에 참여했던 일본인 실무자가 "폭발 충격 때문에 기초 부분이 잘못될 수도 있다"라고 항의하자, '그 부분은 군(해병대) 공병대에게 의뢰해서 해결했으니 걱정마시오.'라고 해명했다. 또한 잘못 조여진 볼트 하나하나 하얀 분필로 표시해가며 "다시 꼼꼼하게 볼트를 조이도록"이라고 불호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때 표시된 볼트는 모두 400개.(...)
- 광양제철소 건설 당시 잠수복을 입고 비서와 함께 광양 앞바다에 입수해 직접 줄자를 들고 치수를 쟀다. 바다를 메워서 공정을 진행하는만큼,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야하는걸 염두에 두고 회장이 앞장섰던 것.
- 포스코의 초대회장인 만큼, 포스코 건설 당시 수많은 청탁과 압력을 받았으나 대부분 거절했다.[14] 이게 지나쳐서 당시 박정희 주변에서 떡고물을 받아먹던 측근들에게 밉보인 덕에 중앙정보부에선 허구한날 박태준의 집을 수색하고 꼬투리를 잡으려 하자 박태준은 이렇게는 못 해먹겠다고 박정희를 찾아가서 손을 떼겠다고 말했다. 이에 박정희는 비서에게 종이 한 장을 가져오라고 해서 그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종이에 써주는 걸로 화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포철 창립 당시 세계은행의 보고서에서 '한국은 철강 생산을 하면 투자금을 다 날린다'고 나오는 바람에 원조를 받지 못했다. 결국 박태준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활용해서 포항에 제철소를 짓고 포스코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었다. 1986년 박태준은 런던에서 당시 보고서를 작성했던 존 자페와 만나 그 때 똑같이 보고서를 쓰겠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 자페가 한 말이 걸작. "나는 그 때로 돌아가면 똑같이 쓸 거다. 철강 수요가 없는 나라가 백만톤짜리 제철소를 짓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내 실수는 박태준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당신이 상식을 초월하는(beyond common sense) 일을 하는 바람에 내 보고서가 엉망이 된 것."
- 중국의 개방/개혁 초기인 1978년 8월, 덩샤오핑이 일본에 가서 포항제철소 같은 제철소를 하나 지어달라고 하자, 이나야마 요시히로 당시 신일본제철 회장은 '공장이야 지을 수 있지만 박태준 같은 인물이 없어서 그런 제철소는 못 짓는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해 말 일본 도쿄에서 박태준을 만난 이나야마 회장은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 "박 사장, 중국에 납치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 1992년 회장직 사퇴 발표 후 양 제철소 직원들이 회장 사퇴를 반대하며 시위를 하는 국내 기업 역사상 전무한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런데 김영삼 정부 때 부하직원들이 비리를 고발한걸 보면 속으로 품어둔 사람도 있었던듯
3.3 부정적인 일면
- 전두환 정권 시절 전두환의 처남 이창석에게 특혜를 봐 주었다.
친척 청탁은 거절해도 정권의 청탁은 거절할 수가 없었나보다 - 비자금으로 90년대 초반에 이미 380억이 넘는 재산을 형성했고 이 재산 분배 과정에서 탈세를 위해 온갖 친인척을 통해 분배하다가 증여세 탈세로 68억 징계받았고 그중에 납부한 것은 55억이다. 다만 박 회장을 옹호하는 측에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보복으로 혐의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5] 후술되겠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과 박태준 회장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누구 말이 맞는지는 각자 알아서 판단할 문제.
- 37억에 달하는 뇌물을 수수하고, 약 7천만원이 넘는 회사 자산을 유용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뒤 지병 치료를 구실로 일본에 장기체류했었다.
주식 한 주 없다던 양반이 - 박 회장 스스로가 선조들의 피값으로 지어진 회사라고 밝혔듯 포스코 자체가 한일협정으로 일본 정부에게서 받은 배상금 중 상당 부분이 투입되어 만들어진 회사인데, 당연히 피해자들 입장에선 개인 배상금을 정부가 마음대로 횡령(?)한 격이니 강제징용자와 위안부 할머니 등 일제시절 피해자들이 포스코에 배상을 요구하며 당시 명예회장이던 박 회장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으나 박 회장은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4 드라마 강철왕? 불꽃 속으로!
KBS 1TV에서 그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강철왕"메탈킹..이름 센스하곤 스틸킹을 기획했다가 2012년 대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을 받고 보류되었다. 결국 KBS에서는 편성을 포기하였으며, 이후 몇년이 지나 2014년 종합편성채널인 TV조선에서 불꽃 속으로라는 이름으로 작품명이 바뀌어 방영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5 트리비아
- 군인 출신이라 그런지 조인트를 잘 깠다고 한다.(...) 다만 이 조인트를 까인 사람이 결국 자회사 사장까지 간 거 보면 뒤끝은 없었던 듯.
김영삼 때 부하직원들이 비리를 고발한 건 뭘까 - 김영삼 전 대통령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의 동지로 만났지만, 결과적으로 김영삼과의 파워게임에 밀린 박태준이 정계와 포스코를 떠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사실상 김영삼 대통령 되기 작전에 이용만 당한 꼴. 하지만 최형우 등 상도동계 정치인들과는 의외로 꽤 친하게 지냈다.
이때 오죽 맺힌게 많았으면 DJ랑 손 잡을 생각을 - 그러다 1997년 4월에 정계 복귀를 선언하여 같은 해 7월 24일에 실시된 포항시 북구 국회의원 재선거에 출마,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11월에는 JP의 자유민주연합에 입당 후 당 총재로 추대되어 김대중과의 김종필간의 연합(DJP연합)을 통해 정권교체를 이끌어낸다.[16] 이 후 김영삼과 박태준은 IMF체제 돌입을 위해 대선 후보를 초청한 자리에 함께 참석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 생전 정리정돈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공사 현장에서 자재를 어질러둔 것을 보고 저게 공사자재냐고 소장에게 물어봤고, 소장은 버리는 자재라며 멀쩡한 자재를 모두 버리고(...) 새 자재를 깔끔하게 정돈해뒀다고 한다.
- 태백산맥, 아리랑 등을 집필한 소설가 조정래는 박태준의 일대기도 썼는데[17] 2007년 자신이 집필한 아동용 위인전의 15명의 위인 중 한 명으로 박태준을 넣었다. 세번째 대하소설 한강에서도 한 챕터를 할애해 등장인물 중 신문기자가 취재를 하는 형식으로 박태준과 포항제철을 긍정적으로 묘사하였다. 박태준은 조정래를 '투철한 민족주의자'로, 조정래는 박태준을 '순수한 기업인'으로 평가하는 관계이다.[18]
- '포항제철'과 '광양제철'이 붙는 학교의 주인인 포스코교육재단 창립이사장이다. 전신은 1976년에 설립된 학교법인 제철학원으로, 포항공과대학교도 이 법인 산하 학교였으나 1995년 별도의 법인으로 분리되었다.
- 박정희의 심복으로 5.16 군사정변 당시에 박정희가 '거사 명단'에서 박태준을 배제했었다. 박정희 왈 '일이 꼬여서 잘못되면 내 식구들을 돌봐달라고 할 생각이었다'고. 하지만 박태준은 지시를 어기고 당일 지휘부에 참석하였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비서실장으로 근무하였는데, 정작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뒤에는 경제인으로 활약했을 뿐 정치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남인 박지만의 후견인을 자처하였는데, 만일 박태준이 없었다면 박지만은 지금도 마약에 찌들어있었을지도 모른다(...). 박지만이 현재 회장으로 있는 "EG"의 전신인 삼양산업을 박지만이 인수하는데 주선한 장본인도 박태준이었다. 그리고 EG는 현재 알짜 기업으로 소리소문없이 성장했다.
- 포항공과대학교 설립 당시 초대 총장인 김호길 박사가 '지금은 포항제철 부설 포항공대지만 나중에는 포항공대 부설 포항제철이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하며 '학교조직, 개설학과, 교수 수준, 교수 대 학생의 비율은 자기가 모두 다 하겠다'라는 요구를 했다. 원래 이러한 요구는 사학법에 규정된 재단이사장의 권한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는데, 박 회장은 오히려 '초대 총장은 창업자와 같기 때문에 그 사람이 잡아야 한다'며 기분 좋게 웃었다고 한다.
- 1남 4녀를 두었다. 박태준의 아들은 삼표그룹[19] 회장의 사위이며, 4명의 사위들 역시 그 면모가 화려하다. 맏사위는 국내 3대 대형 회계법인 중 하나인 삼정KPMG의 윤영각 회장이고, 막내딸은 원래 전두환의 차남 전재용과 결혼하였으나 결별한 뒤 현 MBK파트너스 사모펀드(홈플러스를 인수한 그 곳 맞다)의 김병주 회장과 재혼하였다. 둘째딸은 고승덕 전 국회의원과 결혼하였으나 결별하였다.
그리고 그 딸 덕분에 고승덕은 애비메탈을 완성한다 - 포항시 남구의 청암로, 포항공대의 박태준학술정보관 등 포항에는 그를 기리는 지명들이 은근히 많다.
- 포항공과대학교 부설 박태준미래전략연구소가 있다.
- 굽시니스트는 자신의 만화에서 박태준의 캐릭터로 아이언맨을 밀고 있다. 역대 총리 사진에 아이언맨 슈트를 입은 박태준을 그린다든가 자신의 정적 YS를 까기 위해 아이언 맨 슈트를 입고 날라온다던가(...).
은근히 어울린다
- ↑ 9월 29일은 음력.
- ↑ 텅스텐을 캐내는 국영기업으로 임명되었다, 1960년대 초에는 국가 총수출액의 1/6을 차지하는 매우 중요한 기업이었다. 이후 포항제철 창립 당시 정부와 공동으로 출자하였으며, 90년대에 민영화되었고 지금은 워렌 버핏 계열의 대구텍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 ↑ 이 때 함께한 사람들이 이후 포항제철 창립 시기에 대거 이동하면서 창업요원으로 함께 하게 된다.
- ↑ 하지만 대일청구권 보상금을 포항제철 공사로 대부분 쓰는 바람에 일제의 피해자들은 보상금을 제대로 수령하지 못했고, 이 때 어설프게 한일협정을 맺어놓은 탓에 20세기 후반 ~ 21세기에 들어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우린 1965년에 이미 배상을 마무리 지었다." 라고 두고두고 반론을 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말았다. 당시 제철 건설 자금 중 1억 달러를 해외 차관으로 조달하고자 했는데, 우리나라에 돈을 대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대일 청구자금에 손을 댔던 것. 피해입은 자들에게 오늘 주어진 보상금을 내일을 위한 종잣돈으로 썼고, 그게 대박을 터뜨렸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일제 피해자들이 붕 뜬건 맞지만.
- ↑ 당시 제철소도 짓기 전에 사원복지를 위하여 사원주택단지 건설을 시작하는 당시 관점으로는 말도 안되는 일을 벌였다. 이 때 유일하게 박태준의 의견을 존중하여 한일은행이 자금을 대출해주었는데, 이는 지금까지 포스코의 주거래은행이 우리은행인 이유라고 볼 수 있겠다.
- ↑ 후술될 내용에 비판적인 면도 설명되겠지만, 70~90년대 한국 경제를 이끈 경제인으로서 이만한 성과를 내면서 뒤탈이 그나마(...) 적은 경제인도 드문 편이다.
- ↑ 그러나 김영삼과의 불화가 심해지면서 결국 당선 7개월만에 사퇴하였다.
- ↑ 전임자 허화평 군사반란 혐의로 피선거권 상실
- ↑ 1997년 11월, 자민련에 입당
- ↑ 이때 멤버들은 포항제철 축구단으로 그대로 흡수된다.
- ↑ 101번은 공식적으론 11~12분 간격인데 지방 소도시의 시내버스 주제에 어째 5분에 1대꼴로 오는 경우가 더러 있다.(...) 거기다 이와 맞먹는 배차율을 가진 102번까지 포함하면 사실 포항시에서 스틸야드까지 대중교통 이용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 ↑ 모 팀 서포터들이 체 게바라 깃발을 많이 쓰다 보니 엉뚱하게 포항 서포터들도 오해를 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본가 vs 혁명가 - ↑ 사실 계획안과 30cm 정도 차이였는데 대충 넘길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고.
- ↑ 고향집에 내려갔을 때 친척 어르신이 집안 사람을 하나 데려다 써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박태준 회장은 그대로 방을 나와 포항제철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 ↑ 타계 직전 본인 명의로 된 재산이 거의 없었고, 병원비는 자녀들이 대신 내주었다고 한다. 마지막 남은 재산인 북아현동 자택도 팔아서, 박원순 변호사가 운영하던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하기도 했다. 물론 비리 자체가 잘했다는건 절대 아니다.
- ↑ 그래서 DJT연합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사실상 박태준과 TK쪽 세가 너무 약해서(...) DJP연합으로만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 ↑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정치보복을 당한 때까지의 이야기만 다룬다.
- ↑ 이런 관계 때문에 조정래가 태백산맥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당했을 때도 도움을 주고, 2008년 11월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의 개관 행사에도 참석하였다. 반대로 박태준 영결식의 추도사는 조정래가 써 주었다.
- ↑ 레미콘을 비롯한 건설자재사업을 기반으로 하는 중견 기업집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