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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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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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공화국제4공화국
10대 백두진11대 김종필[1]12대 최규하
문민정부국민의 정부
30대 고건31대 김종필[2]32대 박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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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시절 김종필의 가족 사진.

젊은 시절(좌측)[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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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4] 아직 정정하다

김종필(金鍾泌) 1926년 1월 7일 ~


1 소개

대한민국정치인. 약칭은 JP. 본관은 김해, 1926년 1월 7일 충청남도 부여군 태생으로, 호는 운정(雲庭)이다. 40년 이상 정치가로 활동하며 여러 정부에서 국무총리만 6년 반을 지냈다. 굳이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지 않았더라도, 시사에 관심이 있다면 반드시 한 번 정도는 들어봤을 정도의 인지도를 지닌 정치가. 저 유명한 삼김시대의 삼김 중 한명이 바로 이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삼김 중 가장 오래 산 인물이 될 듯.

조조에게는 순욱이, 태종에게는 하륜이, 세조에게는 한명회가 있다면 박정희에게는 김종필이 있었다.

둘째 형 김종익도 3선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2 생애

2.1 5.16 군사정변 이전

부친은 부여군 규암면의 면장이었고, 김종필도 부여에서 자랐다. 부여보통학교 6학년 때 기쿠치 강(菊池 寬)의 연애소설 <두번째 키스>를 읽다 하루종일 두들겨 맞았고[5], 공주중학교에 진학했을 때는 동맹휴학을 주동하다 말그대로 복날 개잡듯 두들겨 맞고 공주경찰서 사상계에까지 넘겨졌다. 면장이던 아버지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후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 일본 주오대학[6] 예과[7] 독법학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조센징은 왜 전역(戰役, 병역의무)에 참여하지 않나"[8]라는 개소리를 하던 일본인 선배를 때려눕히고 후환이 무서워 자퇴원서를 내고 도망치듯 귀국했다.

귀국한 뒤 대전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했는데, 이번엔 교생실습 중 일본인 교감과 말다툼 끝에 또 때려눕혀(...) 헌병대 영창까지 구경했다. 역시 면장이던 부친이 또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퇴교는 간신히 면했다. 다만 보복조치(?)로 산간벽지 쌩오지 학교로 발령이 나버렸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넉 달만에 사표를 내버렸을 때[9] 8.15 광복을 맞았다.

1946년 경성사범학교 사회교육과 (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에 진학했다. 여기서 5.16 군사정변의 동지 김용태와 동기생으로 조우한다.[10] 그리고 여기서 그의 인생을 뒤바꿀 사건이 터진다.

광복 이후 좌익단체인 충남교육연맹 위원장이던 둘째형을 잡으러, 서북청년단이 그의 친가를 습격했다. 경찰의 방조 아래 서청단원들은 집에 불을 질렀고, 연로한 김종필의 부친을 마구 폭행했다. 충격을 받은 부친은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재산은 모리배들의 손에 넘어가버렸고, 형제들의 집도 마찬가지로 빼앗겨버렸다. 결국 집안이 좌파가 아님을 증명해야될 처지가 되버려, 육군에 입대해버린 것. 김종필은 중앙일보에서는 집안에서 독립한 뒤 스스로 벌어먹고 살기 위해 택시운전을 하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내버려 막막하던 차에 한 번 입대해서 정신을 차려볼 깜냥이었다고 회고했다.

김종필은 충남 온양(지금의 아산시)의 육군 제13연대사병으로 배속되었는데, 해방정국의 혼란에 당시 군대는 악폐습, 똥군기라는 설명으론 가히 표현이 부족할 만큼 개판이었다. 결국 가혹행위를 못이겨 불침번을 서던 와중에 탈영해버렸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와 서울대 동기생의 자취방에 얹혀 살게 됐다. 한심한 처지의 울분을 억누르며 지내던 중, 해방이후 국도극장(國都劇場)[11]으로 이름을 바꾼 옛 황금좌 극장으로 바람을 쐬러 갔다가 육군사관학교 교도대와 마주쳤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극장 매점에 있던 교도대 중대장을 찾아가 솔직히 사정을 말하고 재입대를 부탁했다. 워낙에 탈영이 흔하던, 전쟁 이전 시절이라 중대장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결국 육사 교도대에서 다시 사병으로 복무하던 중, 깜냥을 눈여겨본 중대장은 육사 입학시험을 칠 것을 권유했고 그렇게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하게 된다. 그리고 8기생 졸업식에서 우등상장을 받을 정도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보병 소위로 임관하게 된다. 이때 1,300여명의 8기 졸업생들 중, 단 32명만이 육군본부로 배속됐는데 김종필 역시 그 중 한 명이었다. 김종필은 정보장교로 배정[12]되어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북한반장으로 근무하게 되는데... 여기서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이던 장도영, 상황실장이던 박정희와 그렇게 마주하게 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박정희의 중매(?)로 박정희 큰형, 박상희의 딸 박영옥과 결혼한다.[13] 즉, 박정희의 조카사위로 묶이게 된다.[14]


2.2 제3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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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종필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들어선 제2공화국 장면내각시절에 부패한 장성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정군운동을 하다가 항명파동으로 강제 전역 돼 예비역 중령의 신분으로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여 실질적인 계획을 기획하는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15]
5.16 성공 후 바로 정보기관 설립을 주장 해 초대 중앙정보부 부장을 지냈다[16]. 중앙정보부장 시절, 민주공화당 정치자금 마련 명목으로 벌인 이른바 4대 의혹 사건[17]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면서 물러난다.

이후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시절 공화당내에서 JP계라 불리는 독자적인 세력(양순직, 예춘호, 박종태, 이진용, 오학진 등)을 형성하여 암암리에 박정희의 후계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친위세력의 견제로 여러차례 장기간 외유를 떠나기도 했다. 외유를 떠날 때 자의 반 타의 반이라고 한 발언이 유명하다. 특명전권대사 직함으로 1년 넘게 외국을 다니면서 수교협상 임무를 맡기도 했다. 특히 수교협상 관련으론 일본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적이 많았다. 미일의 적극적인 주도로 시작된 1964년 일본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과의 막후교섭으로 한일협정 성립에 큰 역할을 하였다. 당시 작성한 일명 오히라-김종필 메모는 한일협정의 초안이 된다. 그러나, 박정희정부는 위안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전달해야 할 자금을 사실상 중화학공업 육성에 전용하는데 허가했다.

1976년 경제기획원의 <청구권자금백서> 및 2000년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대일 청구권 자금의 활용사례 연구>에 따르면, 자금에서 가장 큰 몫을 가져간 것은 대표적 공업기반시설인 포항제철이었다. 전체 자금의 절반이 넘는 55%가 포철에 투입되었다. 이 밖에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소양강댐 건설, 영동화력발전소 건설 및 상하수도 시설확충 비용이 그 뒤를 잇는다. 전근대적 농업국가답게 다수의 피해자들이 직접적으로 해당될 농어촌 진흥기금에는 가장 작은 몫이 할당되었다.[18] 또한, 한국일본 사이 일제강점기에 대한 모든 것을 없었던 것으로 하는 한일기본조약에 따라 일본 입장에서는 당연히 "지나간 일로서 사과할도 필요가 없으며 배상금까지 치렀다"고 주장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일본측의 명확한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 점은 지금도 비난받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일제강점기 관련 정책은 "배상이 아닌 진실된 사과"로 일관한다.

그 배상금 액수조차 헐값이라는 비판이 있다. 다만 헐값이라는 주장에는 반론이 존재한다. 청구권 타결액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 상업차관 3억 달러, 총 8억 달러였다. 정부부문 청구액 5억 달러는 66년부터 75년까지 10년에 걸쳐 나눠 받되, 매년 무상 3,000만 달러, 유상 2,000만 달러 총 5,000만 달러 한도 내에서 양국 정부의 협의에 의해 받기로 했다. 유상 2억 달러에 대해서는 산업시설과 기계류 등 공공차관의 형태로 7년 거치 13년 분할 상환하되, 금리는 연 3.5%가 적용됐다.

무상자금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일본, 대만의 뒤를 잇는 지역강국이던 필리핀[19]이 5억5,000만 달러로 가장 많았다. 두번째로 한국이 3억 달러, 이어 인도네시아가 2억2,308만 달러, 미얀마가 2억 달러, 베트남이 3,900만 달러 순이었다. 반면 일본정부가 차관 형태로 내놓은 유상자금과, 민간 상업차관을 더하면 한국과 필리핀이 각각 8억 달러로 가장 많다. 즉, 무상자금만 따질 경우 필리핀보다 적으나, 유무상을 모두 합칠 경우 필리핀과 더불어 가장 많은 자금을 받아낸 셈이다.

물론 36년에 걸친 식민지배의 배상이 겨우 8억 달러라는 사실은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 본격적으로 선진국 궤도에 진입하기 직전이었음을 감안해야한다. 1965년 기준으로 일본의 외환보유고는 14억 달러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청구권자금 역시 일본이 미국의 압박에 못이겨 한국, 필리핀 등에 울며 겨자먹기로 지불한 것이었다. 당시 최전선에서 공산진영과 대치 중인 한국과, 유엔사의 후방기지가 존재하는 일본이 국교조차 맺지 않은 상황은 동북아 반공진영 구축이라는 미국의 구상에 크게 엇나간 것이었다. 필리핀에 대한 청구권 자금 지불 역시 베트남전쟁으로 동남아 공산화 마지노를 우려한 미국의 압박이 주효했다. 현재로서는 헐값이라는 비판도 존재하나, 당시로서는 8억 달러가 마냥 헐값은 아니었다.

대일청구권 자금이 헐값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선 까닭을 한일협정을 졸속으로 진행한 것이라 지적한 것이라며 [국민대학교 국제학부 이원덕 교수의 일본의 전후 배상외교에 관한 고찰 - 국제 비교의 관점]는 전쟁으로서 비교하고 있다. 다만, 전쟁피해와는 구분될 필요가 있다는 반론이 있으나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이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 보상을 하고 있는 지금 이는 그럴 여지를 모조리 차단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2.3 제4공화국

박정희가 3선 개헌을 추진하자 초기에는 반대하였으나, 설득과 압박에 눌려서 결국 찬성으로 돌아섰다.[20] 박정희가 3선 대통령이 된 후 국무총리로 임명되면서, 다음 차례에는 대통령이 되어보나 했는데...

박정희가 유신을 단행해버렸다.대통령의 꿈은 망했어요 2인자의 자리에 만족하며 유신 이후에도 적극 협조하며 국무총리직을 장기간 유지했고, "통일, 외교, 국방, 중화학공업만 빼고 나머진 모두 임자가 알아서 하라"는 박정희의 신임으로 보기 드문 실세 총리로 군림했다. 어느정도 실세였냐면, 대통령비서실에서 만든 경제개발계획을 국무총리실에서 맘대로 고치는 수준이었다고... ㄷㄷㄷ.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이 정도 수준의 실세 총리는 이후 DJP연합으로 집권했을때 김종필 본인과, 노무현 정권에서의 이해찬 총리 단 둘 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실세 총리라도 결국 절대권력자인 대통령 아래 서열인, 말 그대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일 수 밖에 없었다. 대통령 눈밖에 나면 코렁탕을 먹을지도 모르는 시절이었으니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1975년, '건강상의 이유로' 국무총리직을 사임한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자아 이럴 줄 알았으면 국무총리 계속 하는건데, 민주공화당 총재에 선출되고 김영삼, 김대중과 "빠른 시일내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합의하였다. 민주공화당에서는 유신헌법에 따른 후임 대통령 선거를 준비했지만, 김종필 본인이 직선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이유로 거부했다고. 후임 대통령으로는 최규하가 당선된다.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면? 전두환에게 끌려나갔겠지


2.4 제5공화국

그러나 12.12 군사반란5.17 내란으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에 의해서 정치활동을 금지 당했다.[21] 당시 부정축재자로 발표되며 강제로 (일부)재산을 헌납하고 정계은퇴 선언을 한 뒤 미국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노태우에게는 별 불만이 없었고, 오히려 2인자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충고해주었다.


2.5 제6공화국

87년 대선 포스터

1987년 민주화 이후 현실 정치에 복귀하여 민주공화당의 계승을 표방한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였다.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182만 표를 얻으면서 4위에 올랐고, 1988년 총선거에서 신민주공화당이 충청권을 중심으로 35석을 획득하면서 제4당 총재가 되었다. 1989년 말 노태우,김영삼과 비밀리에 의원 내각제 개헌을 합의하고 3당 합당에 참여하였다.

김영삼이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을 지지하고, 김영삼 정권 전기에 민주자유당 대표를 지냈으나 민주계와의 갈등 끝에 1995년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자유민주연합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대전, 충남, 충북, 강원 4곳의 광역지방자치단체장을 당선시키며 선전하고,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일약 역대 최다 의석 3당으로 올라선다.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2년 후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김대중과 연합했으며 이를 두 사람의 약칭인 DJ와 JP에서 따와 'DJP연합'이라 부른다.[22] 이 연합의 성공으로 김대중 후보는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김종필 총재는 김대중 정부의 국무총리직에 오르며 연립정부의 한 축을 맡았다.

그러나 집권후 2년이내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며 시작했던 DJP연합은 1999년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내각제 개헌 이행 유무와 대북정책에 대한 의견차이가 엇갈리면서 결국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는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의 후보연합공천이 무산되고, 전국 대부분의 지역구에 두 정당이 동시에 후보를 내보낸다. 자민련은 비충청권 지역에선 보수표를 모조리 한나라당에 뺏기면서 사실상 군소정당으로 전락했고, 충청권에서도 민주당, 한나라당과 박빙의 승부를 보이면서 기존 50석에서 1/3수준으로 줄어든 단 17석 확보에 그쳐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하였다. 16대 총선 직후 DJP연합의 복원을 희망하는 김대중 대통령이 자당 의원을 자민련으로 보내는 이른바 의원 꿔주기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게 되였다. 여기에 자민련 소속 이한동 의원을 국무총리로 임명해서 연립정부는 간신히 이어졌다.[23] 그러나 한나라당의 133석 획득으로 인해 연립정부의 내각제 개헌은 끝내 무산되었고,[24]설상가상으로, 햇볕정책으로 대변되는 대북 유화책과 관련해 시각차를 보이면서 자민련이 2001년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에 가담, DJP 연합은 최종적으로 무너졌다.

한편 16대 총선 3개월 뒤인 7월 22일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가 경기도 용인의 은화삼 컨트리 클럽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만났다. 이날 폭우로 골프가 취소된 뒤 회동에서 이 총재에게 원내 교섭단체 정족수를 20명에서 17명으로 완화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 총재는 대변인을 통해 “단둘이 앉은 시간은 30초에 불과하며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고 부인해 논란이 됐다.[기사]

매번 대선때마다 킹메이커로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던 김종필이었지만 2002년 17대 대선을 앞두고는 이미 고령의 나이에 2000년 총선 참패 등 세력이 크게 위축된 상태였기 때문에 출마는 커녕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지지기반이던 충청권이 행정수도이전 공약을 내세운 노무현 후보와 선영이 충남예산에 있다는 지역 연고를 내세운 이회창 후보로 양분되는 상황을 구경만 해야 했다. 선거를 앞두고 같은 보수 성향의 이회창을 지지할 것이란 이야기가 흘러나오기도 했지만, 끝까지 아무런 입장표명을 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탄생후 열린우리당이라는 신당을 창당해 독립해 나온 상태였고 노무현 대통령도 민주당을 탈당한 상태였다. 그 와중에서 '열린우리당이 잘 되기를 바란다'는 발언을 하였고 이 발언을 꼬투리 잡아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자민련이 힘을 합쳐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를 일으키는 초병크 실책을 저지르게 된다. 사실 탄핵은 미온적 반대였으나 소추 가결이 확실시 되자 마지막 순간에 버스에 올라탄 것.

그러나 '니들이 뭔데 우리가 뽑은 대통령을 니들 맘대로 자르려고 하냐?'는 심리가 국민들에게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탄핵에 앞장 섰던 3개 정당은 엄청난 역풍을 직격으로 맞고 말았다. 이미 2000년 총선으로 비충청권 지역에선 모든 지지기반을 상실한 상태였고, 17대 대선을 거치면서 인물이나 정책 그 무엇도 새로 내보일 힘을 잃은 김종필은 이제 믿을건 충청권 지역감정 뿐이라는 판단이었는지 연일 대전, 충남권을 순회하면서 지지를 호소하였고 본인은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하였다. 그러나 탄핵역풍속에서 벌어진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국회 전체 의석 299석 중 152석을 얻어 원내 제1당으로 껑충 뛰어올랐고 한나라당은 천막당사를 치고 지지를 호소하면서 간신히 121석을 얻어 나름 선방했지만, 자민련의 선거결과는 비참했다. 지역구는 충남에서만 간신히 4명 당선, 정당득표 2.8%에 지역구 4석으로 정당득표 3% 혹은 지역구 5석이라는 비례대표 의석 배분 기준에 아슬아슬하게 미달해서 비례대표 전원 낙선.[25] 사상 첫 10선을 노리던 김종필의 꿈도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김종필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40년이 넘는 현실정치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다.

삼김의 하나인 김종필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확실히 마지막은 대단히 비참했다. 이미 모든 정당이 여성표를 노리고 비례후보 1번에 여성을 배정하는 상황에서[26] 거물 중의 거물인 김종필이 여성몫인 1번으로 등록한 것 자체가 자신의 처지와 당의 불안정성, 개인의 의원직에 대한 욕심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무리수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며 지역구 출마를 했으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대전에 열린우리당 돌풍이 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러나 저러나 낙선했을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2016년 들어서 대권을 준비 중인 반기문이 외교행낭을 통해 편지를 보냈고, 김종필은 “내가 비록 힘은 없지만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돕겠다”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3 기타

  • 1980년대 이후 끊임없이 의원 내각제를 추진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의원내각제를 추진한 까닭은 김종필의 지역 기반인 충청도가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지역이기 때문에 소수의 의원으로도 "캐스팅 보트"를 쥘 수 있는 내각제 쪽이 유리했기 때문. [27] 위에도 나와있듯 그와 연대한 다른 정치 세력 모두 자신이 당선된 후 내각제 개헌을 약속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그야 다른 정치세력들이 모조리 대통령이니까 최근 들어 현행 대통령제의 개선 방향으로 대통령제에 내각제를 결합한 이원집정부제나 순수 의원내각제가 언급되고 있는데, 김종필로서는 소회가 남다를 듯. 장도리 같은 만평에서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 매번 김종필을 속이고 뒷통수를 때리는 일을 묘사하기도 했다. 부인 박영옥 여사의 빈소를 찾은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의원 내각제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 예인(藝人)이라는 별칭처럼 그림, 글씨, 음악, 문학 같은 예술 분야에 관심과 조예가 깊었다. 7.4 남북 공동 성명 당시 이북을 방문한 사람들이 북한에서 우리 것의 묘미를 잘 살린 창극을 공연하더라는 증언을 접하고는, 배비장전[28] 같은 해학 넘치는 판소리를 현대화하여 공연할 수 있도록 후원한 것을 위시해, 시민회관에서 좋은 공연이 이뤄질 수 있도록 지원해주기도 하였다. 이 외에 전쟁사의 극적인 장면을 그린다는 명분으로, 국내의 이름있는 화가들에게 수입해온 양질의 화구들을 지원하기도 했다는 후문.
  •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3김으로 불리는 인물이며 이들의 정치 시대를 삼김시대라고 부른다. 3김 중 유일하게 대통령에 오르지 못했던 인물이지만,[29] 박정희 정권부터 김대중 정권까지 장기간 정권의 핵심에 있기도 했으며, 김영삼 및 박준규 등과 함께 최다선 국회의원(9선)의 기록을 가진 인물이다.[30]
  • 이회창의 선배격인 인물로 대통령 빼고 다해본 사람이라는 매우 적절한 별명을 갖고 있다.사실 콩라인의 원조다. 진짜 정치계의 콩라인이라 불릴만한 2인자 속성의 캐릭터.
  • 노무현이 대통령으로서 재임하는 모습에 대해 아예 [대위를 사단장에 임명시킨 꼴]이라며 혹평한 적이 있다. 나도 못해본 걸!!! 적어도 쿠데타는 안했는데요 하지만 해당 발언은, 말에 젊은 혈기가 남아있는 노 전 대통령의 언행을 비판하는 한편, 노 전 대통령의 선거공약이자 2004년 정계의 뜨거운 감자였던 행정수도 이전 약속 이행을 촉구하는 것으로, 그 외에는 인간미가 있고, 순진한 모습이 남아있는 노 전 대통령에게 [호기심과 흥미]가 있었다고.
  • "몽니"[31] 등의 낯선 단어를 구사하는 등, 순우리말과 고사성어를 막론하고 어휘 구사력이 풍부한 정치인이기도 했다. 상술한 "자의 반 타의 반"도 그렇고, "유구무언"이란 사자성어도 유행시킨 장본인. 고령임에도 17대 총선 출마를 감행할 땐 "해는 저물면서도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인다"는 말도 남겼다. 일본어에도 능하여 일어로 연설이나 인터뷰를 소화한 적도 많았다.[32] 한 예로 한일 수교 40주년을 맞아 2005년에 일본 NHK에서 제작한 한일협약에 대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일본어로 인터뷰한 사례가 있다.[33] 수준급의 수채화 실력, 아코디언, 골프, 피아노, 바둑 등 예술적 소양이 대단히 풍부한 정치인으로도 꼽힌다. 한마디로 예인(藝人).
  • 한학에 조예가 있었으며, 심계도 깊은 김종필이었기 때문에, 취재하는 기자들이 JP의 말을 나름 유추했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말을 운치있게 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의미가 여러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기 때문. 또한 김종필의 멋들어진 휘호 정치와 예술에 대한 일가견 있는 면모가 중국 언론이나 정가에서 줄곧 호의적인 시선으로 다뤄졌기 때문에, 중화권 외교에도 도움이 되었다는 후문.
  • 아내와의 금슬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실제로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스캔들, 혼외자 등으로 논란을 빚을때 JP는 그런 소문이 전혀 없었다. 2015년 아내가 숨졌을 때, 거물급 정치인답게 오자와 이치로를 비롯, 한일 양국의 정치 거물들로 구성된 조문객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2015년 4월에는 국정원이 정치에 개입하는 현상의 원인은 자체 수사권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자체 수사권을 검찰에 양도하고 대북정보 수집 등 정보기관 업무만 수행하도록 조직을 개편할 것을 제안했다. 김종필 본인이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의 창설자라는 것을 감안하면 아이러니.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이인임은 김종필의 얼굴을 따서 그렸다고 한다. 대놓고 이인임이 '원조보수' 드립을 치는 장면도 있다. 줄타기의 명수였다는 것도 공통점.
  • 그리고 2009년 8월 18일 김대중 대통령이 사망하고, 2015년 11월 22일 김영삼 대통령도 사망함으로서 이제는 3金의 마지막 남은 한 명이 되었다.
  • 하하무한도전 짝꿍 특집에서 주장한 바에 의하면 독일에서 한창 잘 나가던 아버지가 귀국한건 김종필이 불러서 온 것이라고 한다. 진위여부는 알 수 없지만, 하동훈이 독일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온 것 자체는 사실이다. 박명수가 얼핏 옹호했다가 네티즌에게 욕을 먹은 경우도 있었다.
  • 초록색을 좋아한다. 그래서 신민주공화당과 자유민주연합의 당 색이 초록색인 것도 이 때문이다.

4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63제6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5선거구)[36]
민주공화당45,999 (68.2%)당선 (1위)
1967제7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5선거구)
민주공화당58,156 (91.2%)당선 (1위)
1971제8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1번)
민주공화당-당선
1973제9대 국회의원 선거유신정우회-당선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
1978제10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5선거구)[37]
민주공화당42,946 (66.6%)당선 (1위)
1987제13대 대통령 선거신민주공화당1,823,067 (8.1%)낙선 (4위)
1988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부여군)신민주공화당53,967 (81.9%)당선 (1위)1990년 민주자유당 합류
(3당합당)
1992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부여군)민주자유당42,358 (72.5%)당선 (1위)1995년 자민련 창당
1996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부여군)자유민주연합35,292(66.4%)당선 (1위)
2000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1번)자유민주연합-당선최다선(9선) 타이[38]
2004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1번)자유민주연합-낙선10선 도전 실패, 정계은퇴
  1. 임기 1971년 6월 4일~1975년 12월 18일
  2. 임기 1998년 3월 3일~2000년 1월 12일
  3. 1963년 4대 의혹 사건으로 외유를 떠나는 김종필.
  4. 자랑스러운 육사인상 시상식에서 시상자 대표로 연설하는 모습
  5. 21세기에 청소년기를 보내는 학생 위키러들 입장에서는 연애소설 본다고 두들겨 맞았다는게 어이가 없겠지만, 미성년자가 극장에 출입했다 정학 먹던 일도 1990년대 초반까지도 있었다. 올챙이적 모르는 단속 개구리
  6. '中央大學'. 학교측 증언에 따르면, 가장 많은 수의 조선인 유학생을 받은 일본 대학이라고 한다. 지금도 소케이죠치에 이어 소위 MARCH 라인 중에 들어갈 정도로 일본 사립대 중에서는 이름있는 학교다.
  7. 일본은 식민지 조선과 일본 본토의 교육과정에 차등을 두어, 식민지 조선인이 엘리트 계층으로 진출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틀어막았다. 고등학교가 아닌 고등보통학교를 나온 조선인은 본토 기준으론 중졸이었다. 연희전문, 보성전문 역시 전문학교라기보다 '각급학교'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조선인은 일반대학에 설치된 예과 과정을 밟아야만 제대로 대학생 취급을 받았다. 유독 일제강점기 시절 유학생들의 출신이 ㅇㅇ대학교 전문부/예과가 많은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
  8. 식민지인을 믿을 수가 없으므로 본래 조선인에겐 일본인과 같은 병역의무가 없었다. 특히 일본해군의 경우 아예 조선인을 받지 않다가, 종전 직전에야 가미카제로 쓸 항공대와 육상부대에서만 제한적으로 받았을 정도였다.
  9. 사범학교 학생은 징집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졸업후 의무복무처럼 교사로 일정기간을 근무하면 예비역 하사관으로 편입된 것으로 병역의무를 대신했다.
  10. 후술되지만 김종필이 탈영해 서울로 도망나왔을 때 얹혀 산 서울대 동기생의 집이 바로 김용태의 자취방이었다고 한다.
  11. 1913년부터 1999년까지 존재했던 극장. 현 을지로4가역 옆에 있는 베스트웨스턴 호텔국도 자리에 있었다.
  12. 1980년대 초 정보병과가 분리되기 전까지 육군 정보병과는 별도의 병과가 아닌 보병병과의 세부 특기였다.
  13. 김종필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서울에서 초등교사로 근무하던 박영옥은 서울에 있는 유일한 친척이자 작은 아버지인 박정희를 자주 찾아오며 의지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김종필도 안면을 익히게 됐고, 어느날 불쑥 "자네, 내 조카딸 어떤가?"하고 박정희가 말을 던졌다. 당시로서도 나름 미인이던 박영옥을 김종필이 싫다고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14. 이 덕분인지 박정희가 김종필을 부를 때 이름을 부르기보다 조카사위 취급을 해서인지 거의 항상 '자네'라고 호칭했다.
  15. 정변 성공 후 복직 돼 육군준장으로 전역 했다.
  16. 사실상 중앙정보부 자체를 김종필이 구상하고 만들었다. 김종필은 CIA를 본따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당시로썬 FBI에 더 가까웠다. 표어인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또한 김종필의 작품.
  17. 당시 생필품이던 밀가루 등의 가격규제를 풀어주는 대가로 삼성그룹 등으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았다는 의혹이 있다.
  18. 협상 당시 일본은 피해자에게 직접 전달할 것을 주장했으나, 우리 정부는 간접 전달을 주장했다. 경제개발의 종잣돈이될 자금 확충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간접전달은 일본 특유의 뻗대기 탓도 있었다. 직접전달은 일본측에서 피해사실을 개별적으로 인정하고, 피해자들의 주장을 일본 정부가 인정하지 않을 경우 피해자 개인이 직접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야 한다. 2000년대인 지금도, 피해자 개인이 소송을 걸어도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일본법원에서 패소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1964년에, 한국인 개인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거는 것 자체가 수월했을까? 물론 간접전달에 의한 방식 탓에, 후술되듯 일본측에서 "이미 해결된 문제"라고 뻗대는 또다른 측면의 문제 또한 야기되었다.
  19. 미국의 전통적인 동아시아 근거지였다.
  20. 당시 야당과 재야쪽에서는 공화당내에서 강력한 세력을 가진 JP가 반대하는걸 보고 3선 개헌은 결국 무산될꺼라고 예상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선두에 나서서 노골적으로 공화당내 개헌 반대파 국회의원들을 조지고 두들겨 패서 모두 찬성으로 돌려놨다(...) 60여명이 넘던 JP계와 반대파중에서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다가 쫒겨난 게 정구영, 이만섭, 양순직 3명이다.
  21. 김종필 본인은 부인했지만, 당시 신군부에 의해 고문당했다는 설이 있다. 지금도 김종필은 신군부에 대해 좋지 않게 평가하고 있다.
  22. 나중에 민주자유당 시절 민정계의 수장이었던 박태준이 가세하면서 DJT 연합으로도 불렸다. 이 연합은 김대중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23. 다만 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을 합쳐도 원내 과반수에 미달해서 2석을 차지한 민주국민당(2000)한테 까지 손을 내밀어야 했다. 민국당 한승수 의원을 외교부 장관으로 임명하면서 민주+자민+민국 3당연합으로 간신히 원내과반수를 채웠다.
  24. 1998년에 당시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에서 한나라당 의원 일부를 영입하여 의석 과반을 달성하지만 개헌선과는 현저한 차이가 났었다. 더군다나 16대 총선에서 따로 후보를 내는 바람에 자민련이 20석도 확보하지 못하여 민국당이나 무소속 의원을 영입해야 겨우 과반을 확보한 셈이니 아예 개헌 자체가 불가능.
  25.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당시 민주노동당에 비례대표 의석 1석이 더 돌아갔고, 그 덕분에 당시 민주노동당 비례 8번이었던 노회찬이 국회에 입성할 수 있었다.
  26. 한나라당 1번 - 김애실(여성경제학자), 새천년민주당 1번 - 손봉숙(여성운동가), 열린우리당 1번 - 장향숙(여성장애인), 민주노동당 1번 - 심상정(여성노동운동가). 그외에도 3번 5번 7번 9번 등 자민련을 제외한 모든 정당들이 홀수 번호에 예외없이 여성을 배정하였다.
  27. 이것이 20대 총선 전후로 호남 정가를 중심으로 내각제 개헌 논의가 활성화된 근본 원인이기도 하다.
  28. 이 무렵 유명했던 연극인이 추상미의 부친 추송웅 씨. 추 선생이 공연한 배비장전은 지금도 견줄만한 공연이 드물다 할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고.
  29. 그래서 1990년도 말에서 2000년 초만 해도 "3김이 그 사람 빼고는 다 대통령 했는데 이제 그 사람 차례 아니겠는감?"이라고 나이드신 어른들이 말하면 비교적 나이가 어린 중년이나 젊은 층에서 "전혀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요?"라고 반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30. 그가운데 1회는 유신정우회로 임명직에 가까웠다. 전술했듯이 17대 총선에서 10선에 필사적으로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31. (명사)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할 때 권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심술을 부리는 성질.
  32. 한일협상의 기초가 된 김종필-오히라 메모 역시 일본어로 적혀 있다.
  33. 다만 이때의 인터뷰를 보면 나이탓인지, 유창하게 곧바로 회화한다기보다 머릿속에서 우리말을 일본어로 번역한 뒤 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34. 한일회담때 언저리 사진을 보면 많이 닮은 편이다
  35. 웃기만 하고 답은 하지 않다
  36. 현 충청남도 부여군 일대
  37. 충남 부여, 보령, 서천 일대. 유신 시절인 9대 국회부터 5공화국 12대 국회까지 중대선거구제였다.
  38. 9선을 기록한 인물은 같은 3김 중 하나였던 김영삼박준규 前 국회의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