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22/개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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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22의 상세한 개발역사.

1 ATF사업 이전

1.1 1970년대

F-22의 개발사업은 ATF가 최초가 아니다. F-22의 개발을 위한 움직임은 1969년 4월부터 있었는데, 훗날 ATF사업에 통합되는 이 사업은 TAC-85라고 불렸다. 미 전술공군 사령부에서 최초로 발주하였다.
TAC-85사업은 1960년대 중반 최초로 거론되기 시작하다가, 1969년부터 탐색개발을 시작하게 되었다.

참고로 현재 F-22의 최고 장점인 공대공 능력은 TAC-85 사업안에 따르면 부가적인 능력이었고, 지금의 F-111처럼 공대지 능력이 핵심이었다.
이 사업은 1980년대 이후부터 도태예정인 F-4,F-105,F-111을 대체할 계획이었다.

TAC-85 사업 시작을 위해, 1969년 4월~6월에 미 공군의 전술공군사령부(TAC), 미공군사령부(AFHQ), 공군 무기체계사령부(AFSC), 공군 항공시스템 개발부(ASD), 아날리틱 시스템즈(Analytic Systems)사 등에서 나온 대표단이 TAC-85의 개념을 확립하는 회의를 가졌다.
회의가 끝난 7월에 미공군사령부는 공군 항공시스템 개발부에게 사전설계 분석을 지시하였고, 미국 항공기 업체들(보잉 , 록히드, 맥도넬 더글러스사, 제너럴 다이나믹스사, 그러먼사, 페어차일드 사, 노스럽사, 록웰 인터네셔널사.)에게 자료 제출을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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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1월 한달동안, 8개의 항공사들이 연구자료를 제출하였고, 여기에서 맥도널 더글러스사와 제너럴 다이나믹스사와의 연구개발 계약을 체결한다.

1973년 1월에는 최초의 공식적인 TAC-85의 ROC 제안서(TAC-ROC 301-73)의 최초안을 완성하였는데, 이때 ROC의 주요 요구 사항으로는 중고도에서 작전후 초음속 비행능력을 통해 신속한 전장이탈 능력이었고, ASD와 공군 참모부에 배포되었지만 각 기관은 실제로 이 제안서를 통과시키지않았다.

그러던 와중 1973년 미공군 산하 기관들이 F-X의 작전 요구능력 범위를 검토하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F-XX 기술 통합 사업(ATFI)을 연구중이었다.
ATFI를 통해 다양한 실험/연구 보고서가 만들어졌고, 다양한 풍동모델과 RC모델등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후에 ATF에 통합될 여러 기술들을 R&D하기 시작한다. [1]

미 공군은 이렇게 여러가지 사업을 통합하여 연계시킴으로써 ATF를 발전 시키기 시작했고, 다양한 모델들을 제작하여 실험하여 TAC-85의 ROC제안서를 수정하고 연구를 계속 진행한다.

1974년에는 공대지 기술 통합 및 평가연구
1975년에는 CASM 분석
1976년에는 CAS 및 BIM 분석과 공격형 CASM 분석
1976/1977년에는 타격무기체계 연구
1978년에는 타격 무기 체계 연구가 F-X연구와 차기 TAS이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지속
1979년에는 전술기 기술개념 대안연구(TAFTA)와 1995년 이후를 상정한 전술기 개발 연구를 추진. [2]

당연하지만 기밀로 분류된 여러가지 추가연구가 진행되었고, 여기에서 차기 공대공 교전 임무 분석(ACEMA)을 통해 임무요소 요구제안서(MENS)가 구체화 되었다. 이 2가지가 이후 미래형 TASM 분석인 ATASMA로 수행된다. 이 분석에서 현재 F-22가 끌어안고있는 공대지 공격능력이 부족한 점이 지적되었고, 이를 기복하기 위해 기술개발과 운용개념등의 대대적 검토를 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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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980년 4월이 되면서 전술 항공기 기술 사용운용안 'R-Q7036940/63230F'가 배포되고 ATF 의 사업 방향도 재설정된다. [3] 이와 함께 F-X에 적용 가능한 최신 현용기술에 대한 검토가 시작되고 이때부터 점진적으로 ADF란 개념이 핵심요소로 자리잡으면서 사실상 공대지 능력이 주였던, TAC-85사업 방향과 완전히 틀어진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1981년 5월, 정보제공 요구서(RFI)가 9개 항공기 제조사[4]에 발송되었고 이들은 개념모델과 각종 기술서류를 제출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근데 이때 요구된 기술수준은 무려 10년을 앞선 1990년대 중반의 초도작전능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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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81년 6월에 F-X에 대한 RFI가 발송되었는데 여기에는 슈퍼 크루즈, STOL, FS(통합 스텔스), 저가의 유지비용이 포함되었다. 무려 1981년에 말이다!

이렇게 ATF사업은 지속되는데, RFI 피드백 과정은 참여 업체들의 중간보고와 최종보고를 포함하여 9개월이 걸릴 예정이었으나, 미정부에서는 보고서를 매우 신속하게 검토하여 업체들이 보고서를 제출한지 60일밖에 되지않은 기간만에 피드백을 끝낸다.

최초 RFI는 공대공 능력과 공대지 능력의 통합적 사용을 주장하였으나, 1982년에 들어 공대공 능력을 통한 AS(제공권 우세)이 아닌 압도적인 공대공 능력을 갖춘 AD(제공권 장악)이 핵심목표로 변경되었다. 이로써 개발 방향역시 제공권 확보를 위한 공대공 능력 발전으로 수정된다.

2 ATF사업 시작

2.1 1980년대 중반에서 최종 경쟁사 선정까지

TAC-85사업이 한창 진행중인 1970년대에 미국의 정찰위성에 소련의 새로운 신형전투기들의 시제기들이 포착되었고,[5] 미 공군은 이에 대항할 새로운 전투기의 개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1960년대에 미 공군이 F-4을 배치하면서 제공권 장악의 필요성을 잊게질때, MIG-25의 배치에 쇼크를 받은 미 공군이 TF-X사업을 통해 F-15을 확보하면서 제공권 장악을 달성한 형태을 뒤따르는데, F-15을 통해 제공권 장악의 필요성을 잊어가던 미 공군은 다시 신형 소련전투기의 대응할 전투기를 개발하기로한다. [6]

소련의 신형 전투기들의 위협이 가속화되면서 미 공군은 이 위협에 대응할 전투기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 1979년부터 점점 부각되었고 여기서 공대지 능력보다는 공대공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나오게 되었다. 공대공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한 개발에 들어간다. 1981년에 탐색개발에서 체계개발 연구 단계에 들어가고 드디어 연구가 아닌 공식적인 무기체계 개발 사업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1982년 3월부터 예산지원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체계개발이 지연되었지만, 1983년부터 다시 예산이 대폭 늘어나기 시작하자 사업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여담이지만 2차대전이 제트 전투기를 만들었다면, 1980년대는 제트 전투기를 성숙시키는 시대였다. AFTI등의 기술개발 사업등을 통해 다양한 항공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합성소재및 경량합금, 신형 비행제어장치 및 통합 항공전자장비, 개량형 추진체계, 스텔스 기술등이 개발되었다.
물론 저 기술들은 전부 F-22에 적용된다.

사업이 한창 진행중이던 1981년 11월에 ATF사업이 실전 운용단계에 들어가면 미 공군의 일선 전투기인 F-15와 F-16이 한계에 다다를 것으로 예측되면서 ATF사업은 F-15와 F-16을 대체할 신형 전투기로 배치될 계획이 세워진다

그리고 요구성능 및 작전능력에 대한 개념을 정립한다.

이 때 ATF사업은 일정이 확정되는데, 1987년에 실물모델개발(FSD)을 하고 1993년에서 1994년에 IOC를 취득하기로 되었다.

RFI을 제출한 항공사들은 대부분이 다목적 전투기(MRF)로 개발계획을 잡고있었던 반면, 맥도넬 더글러스사 만이 F-15를 대체할 제공전투기가 필요하다고 답을 하였고, 미 공군은 21세기에 존재할 위협에 대체할 수 있는 제공 전투기를 개발한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1982년 8월 29일에 사업지침이 발표되면서 사업명칭도 최종적, 정식적으로 ATF사업으로 명칭된다. 미 공군은 ATF사업을 2가지 사업으로 나누는데, 하나는 차세대 전술전투기 기체및 시스템을 개발할 회사로 록히드,보잉,제너럴 다이나믹스,그러먼,맥도널 더글라스,노스롭, 록웰 인터네셔널 총 7개 회사와 100만 달러 상당의 탐색개발을 계약한다.

또 다른 하나는 엔진 사업으로 제너럴 일렉트릭(GE)사, 프랫 앤 휘트니(P&W)사와 각각 2억 200만달러의 엔진 기술 시연 계약을 맺었고 여기서는 앨리슨, 개럿, 텔레다인/CAE도 참여한다.

이렇게 계약을 맺은 기체의 탐색개발을 맡은 회사들은 19개의 모델을 제출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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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회사들이 내놓은 모형들은 다 다른 형태지만 F-X의 임무와 성능 달성을 위해 슈퍼크루즈 능력을 포함한 강력한 추력비의 엔진, 전방위 스텔스 능력을 지향하면서 무장과 연료를 탑재하는 크기, 복합소재의 사용, 당시로썬 최첨단의 AESARS사용, 통합항공전자장비 등이 포함된다.

이런 수많은 개발을 통해 1982년 12월에 각 업체들이 내놓은 RFI 최종보고서가 제출되었고, 미 하원은 ATF사업에 약 2300만 달러의 예산을 배정한다. 그리고 1983년 5월에 최종 RFP가 개발업체들에게 보내졌고, 같은 달에 엔진 최종 RFP가 제너널 일렉트릭, 앨리슨 ,프랫 앤 휘트니 3개 업체에 전달된다. 최종 RFP가 나왔을때는 스텔스 기술도 중요한 요소였는데, 이 방면에서는 이미 F-117을 제작해본 록히드와 노스럽에 유리했다.

1983년초 오하이오 주에 있는 라이트-패터슨 공군기지에 있는 항공시스템 개발부(ASD)에서 ATF 사업국이 건립되고, 국장으로 앨버트 피치릴로 대령이 임명되면서 경쟁의 시작을 알린다. 1983년 9월 미 공군이 7개 업체와의 탐색개발 계약을 하고 ROC를 제출하라고 하였는데, 업체들은 1984년 말에 기본 요구 조건을 받는다. 이 때 요구 조건은 작전반경 800마일, 마하 1.5수준의 슈퍼 크루즈 능력, 2000FT이하의 STOL능력, 이륙총중량 50000ibs, 통합적 스텔스 능력이라는 1980년대에는 불가능한 기술 구현을 받았는데 플러스로 대당가격은 4000만 달러 이하였다. 이 조건에 충족한 업체가 진정한 ATF의 승리자가 된다.

1985년 9월에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ATF의 RFP가 작성되었고 1985년 10월 공식 승인을 받고 7개의 항공기 업체들에게 RFP가 전달된다. 그리고 1986년 1월까지 피드백 제출 기한을 주지만, 업체들의 반발에 4월로 연기되고 탐색개발 단걔에서 보잉, 제너럴 다이나믹스, 그러먼, 록히드, 노스롭, 맥도널 더글러스, 록웰 인터네셔널이 참가한다. 이 탐색개발은 1986년 10월 말에 종료되지만 연구 과정에서 그러먼은 미 해군과의 계약을 위해 탈퇴하였고 록웰 인터네셔널은 B-1B 개발 사업에 참여하여 결국 탈락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항공업계에 엄청난 혁명을 일으킬 ATF는 1986년 7월에 받은 제출서를 토대로 록히드와 노스롭의 설계가 우수하다는 최종적 평가를 받는다. 이로써 ATF의 기체를 개발하는 2개의 회사는 록히드노스롭으로 굳혀진다.

2.2 경쟁사 선정후

2.2.1 기체 및 항전장비 경쟁

이렇게 사업이 시작되고 경쟁사에게도 강력한 후보가 존재하였는데, 그건 바로 록히드사 였다. 이 회사는 1986년 6월부터 보잉과 제너럴 다이나믹스사와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하였고 10월에 개발 방향을 합의하였으며, 노스롭은 맥도널 더글라스 사와 손을 잡고 컨소시엄을 구성하여서 결국 1986년 8월에 두 컨소시엄에서 한개의 컨소시엄이 ATF사업의 승자가 될것으로 분명해졌다.

록히드 컨소시엄은 각각의 특장점을 살려 작업을 분담하였는데, 록히드는 F-117A사업의 경험을 살려 설계와 제작을, 보잉은 주력인 항전장비의 개발과 통합을, 제너럴 다이나믹스는 F-16의 최초 FBW 통합 경험을 살려 FBW시스템의 통합을 맡았다.[7] 이렇게 해서 각 회사가 1/3씩을 분담하기로 하였으나,

1993년 3월에 록히드가 제너럴 다이내믹스의 전술 항공기 부문을 매수했고, 그 결과 작업 비율은 2/3이 되었다. 그리고 1995년 3월에는 마틴 마리에타 사와 합병함으로써 록히드 마틴으로 회사명을 바꾼다. 록히드 마틴이 F-22와 관련해 맡았던 작업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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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에타 공장(구 록히드): 무기체계로서의 전체적 조립작업과 전면동체의 제작, 수직미익과 수평미익 및 주익의 제작, 후방 동체의 최전면부와 에일러론 및 플랩프론의 제작, 랜딩기어의 제작, 전자장비 개발과 통합, 최종 조립. 최종 조립 후 도색.

- 포트워스 공장(구 제너럴 다이내믹스): 중앙 동체의 제작, 무장 관련 장비 제작, F-22전용 전자전 시스템 개발과 제작, CNI 시스템의 개발 및 통합, 장착품 관리 및 INS의 개발과 제작, 지원 시스템 개발.

보잉은 록히드와의 약정에 따라 F-22 전체 작업의 1/3을 맡는다. 주요한 작업은 시애틀 공장을 중심으로 제작하고, 제작 주요 부위는 주익과 후방동체의 후반부이다. 엔진 부착부의 제작과 TVS장착 작업도 포함된다. 그 외에도 훈련 시스템, 조종사 생명 보장 시스템, 화재 방호 시스템, 항공기 전체 스텔스 코팅과 적외선 방출 절감책의 개발등도 담당한다. 보잉의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전자전 장비 융합 작업인데, 이를 위해 보잉은 B757을 개조하여 전자전 장비 비행시험장치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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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개조한 B757.

이 B757기는 기수를 F-22와 동일하게 만들고, 그안에 AN/APG-77을 장착한다. 그 외에도 F-22에서 사용하는것과 같은 AN/ASQ-220 CNIS이나 ECM 전자장비, IFDL 장치등도 장착한다. 동체 앞 카나드에는 CNI관련 장치나 방어용 전자기기들을 장착하였고, 객실 앞부분 왼쪽에는 F-22와 동일한 조종석을 재현하여 각종 장치의 동작 상황을 모니터링 할 수 있게 하였다.

노스럽과 맥도널 더글러스 팀도 노스럽은 F-5,F-20 설계 경험을 통해 전투기 경량화와 첨단재료및 스텔스 기술을 통합하였고, 맥도널 더글러스 사는 매우 많은 전투기를 개발한 경험을 살려 기체 제작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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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0월 3일에 두 컨소시엄은 각각 2대의 시제기를 제작하여 시연평가에 제출하도록 선정되고 약 6억 9100만달러의 예산을 받음으로써 록히드를 주축으로 한 컨소시엄은 MODEL1132를 내놓고, 노스롭을 주축으로 한 컨소시엄은 N-14라는 모델을 내놓음으로써 각각 YF-22와 YF-23으로 제식명을 부여받는다. 6억 9100달러중 약 1억달러가 레이더및 전자센서에, 2억 달러가 항전장비 통합에, 그 이외 비용은 기체 개발에 할당된다. [8]

그 후, 시연평가가 구체화되기 시작하는데 시연평가는 다음의 3단계로 이루어졌다.

1단계- 시스템 제원 개발.
2단계- 항전시제기.
3단계- YF-22A/YF-23A 시제기.

이렇게 단계대로 하여 마지막 단계에서 시제기를 내놓은 후 1989년에 시제기가 첫 비행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1990년 8월에 실물 개발 제안서 제출을 마감한뒤 1990년 말에 사업자를 선정하려고 하였으나, 개발지연이라는 문제가 터지고 만다.

시제기의 출고 시기가 다가오자 각 컨소시엄은 자체 중량을 50000IBS에서 55000IBS로 수정하기 시작한뒤 개발 지연이 시작되기 시작하는데, 개발 지연의 이유는

록히드 - 록히드 팀은 당초 문제가 적었던 사다리꼴형 날개에서 역 다이아몬드형 주익[9]으로 설계방식을 변경하면서 부가적인 문제를 떠안게되었다. 게다가 AOA상태에서도 저속으로 비행가능하게 하기위해서 기체전면부를 상당히 줄였기 때문에, 이에 따른 설계변경이 필수였다. 따라서 풍동시험을 통해 기수와 수직미익의 형태를 최적화하는데 노력을 집중했다.

노스롭 - 항전장비 통합문제가 가장 시급했다. YF-22와는 다르게 미래지향적 형태를 띄고있던 YF-23은 항전장비 소형화가 절실했고, 이에 따른 비용증가와 개발지연이 시작됐다. 뒤이어 기체구조적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는데, 비행중 진행되는 수직미익쪽 진동이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 결국 록히드사와 비슷하게 풍동시험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엔진 역추진기에 존재했다. 이는 원래 ATF의 설계요구조건으로, 참여업체중 하나인 맥도널 더글라스가 F-15S/MTD를 통해 세밀하게 평가했지만 큰 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이런 문제는 무게와 정비면을 조정함으로써, 상쇄할 수 있다는 노스롭와 맥도널 더글러스사의 ATF 통합사업부가 결론을 내렸다. 비행중 엔진 역추진기를 사용하면 방향안정성에 큰 영향을 미치고, 대기중으로 엔진 열을 냉각시켜 내보내야하는데 심각한 냉각문제가 일어나서 스텔스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결국 업체들은 설계변경을 실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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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컨소시엄들은 요구된 성능에 맞추기 위해 여러 기술을 적용하는데서 문제가 발생하여, 설계를 변경하기 시작하는데, 그로인해 예정된 일정이 연기돼 버린다. 1987년중반에는 ATF 사업국은 설계변경을 허락하지않았지만 문제가 너무 터지는 바람에 결국 그 해 7월 설계를 허가한다(...) [10]

결국 7월 13일, 설계수정과정을 거친 설계안 1132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록히드사는 설계한 모형을 이용하여 상당 시간을 풍동시험에 썼는데, 제어성과 안정성에서 무려 6517시간을 쓰고 항공역학분야에 5405시간을, 고속 항력/안정성/제어에 4000시간을 투자할 정도로 록히드는 기동성과 안정성을 추구하는 항공기를 만들길 원했다. 물론 위에서 설명했듯이, 설계문제점이 가장 컸었지만.

이런 록히드사에 큰 문제점이 하나 더 있었으니, 록히드사가 자체 추측으로 얻은 YF-23의 RCS값이 YF-22보다 작았다는 점이다. 록히드와 보잉 통합 ATF 개발부는 이를 엔진에서 뿜어나오는 열과 적외선이 문제인것으로 잠정결론을 내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스롭에서 채용하지않은 2D TVS를 채택한다. 물론 채택 초반에는 오직 대기와의 접촉면적을 늘려서 적외선 피탐 면적을 늘리기 위해 채택했지만, 추력편향장치를 장착한 직후 시험비행에서 기동성이 눈부시게 향상되었다.[11]

2.2.2 추진체계 경쟁

이 경쟁에서는 P&W사가 GE사에 비해 우세를 보였다. 이즈음에는 차세대 전투기 엔진(AFE)라고 불린 이 엔진의 RFI에 따르면, 1983년 5월에 이미 30000IBS의 추력이 요구되고있었다. 그해 9월에 시제 엔진 제작및 테스트를 위해 양사에 각각 5억 5000만 달러가 지급된다. 당시 P&W의 엔진은 PW5000, GE사의 엔진은 GE37이라고 불렸고, 후에 공군은 이 엔진들에게 F119와 F120이라는 제식명을 부여한다.

최초의 예비비행 정격 시험(PFRT)과 지상 가속임무시험(AMT)은 1986년에 비감향성의 시제엔진을 가지고 실시한다. 감향성 엔진으로 시혐평가를 실시한건 2년 뒤였다. 이들은 차기 전술기를 위해 추진체계를 최대한 발전시키기 시작하는데, 엔진 역추진기등 여러 문제를 터뜨려 은근 욕을 많이 먹는다(...)

2.3 시제기 시험비행 경쟁의 시작

두 업체의 시제기는 RCS 평가를 위해 실험에 들어갔고, 뉴멕시코 주 화이트샌즈에 위치한 미 공군 레이더표적산란시설(RATSCAT)에서 일련의 실험평가과정을 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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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TSCAT에서 실험중인 F-22.

계약이 시행된지 4년이 흐르고 원래 예정된 일정에서 1년 지연된 1990년에 드디어 차세대 전술 전투기들의 시제기들이 시험비행을 시작한다. 1990년 6월 22일에 노스롭이 YF-23을, 록히드는 그해 8월 29일 YF-22을 출고시켜 경쟁이 시작된다. 역사상 최대의 사업이다 보니 무려 통합 시험비행팀의 규모가 록히드사는 약 300명을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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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첫 비행은 역시 더 빨리 출고된 YF-23(N231YF:PW엔진 장착 기체, 기체 번호 87-800)가 하게되었다. 7월 7일에 안정적인 첫 비행을 기점으로, 2달후인 9월 14일날 4차비행에서최초 공중 급유에 성공했고 9월 18일에는 슈퍼크루즈 비행을 마하 1.43을 기록하여 성공적으로 달성한다. 그리고 11월 30일 날 87-800 기체는 제 34차 비행을 끝으로 모든 시험비행을 종료한다.

GE사의 엔진을 장착한 N232YF역시 10월 26일 첫 비행을 시작으로 11월 29일날 슈퍼크루즈 마하 1.6을 달성한다. 그리고 12월 18일날 시험비행을 종료한다. 결과적으로 YF-23A의 최고속도는 마하 1.8, 최대 상승고도는 1만 5240미터였다. 참고로 노스롭 컨소시엄의 주요 목표는 스텔스성과 운동성을 확인하는것이었기 때문에, 무장시험은 전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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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F-22은 9월 29일, N22YF(GE사 엔진장착 기체) 기체의 최초 비행을 기점으로 매우 빠른속도로 소티를 올려가기 시작하고, 한달에 10회비행을 달성하였다. 물론 5차 비행때 랜딩기어의 배선 접촉때문에 랜딩기어가 접혀지지않는 문제점이 터지기도 하였지만 독립배선을 통해 직접 랜딩기어를 접을수있게 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10월 25일, 9차 비행에서 최초의 초음속 비행에 성공하였고 26일에는 최초의 공중급유에 성공한다.

그 후로 1주일만에 받음각 60도를 기록하여 록히드에 목표를 만족 시킨다. 그리고 1호기는 마지막 비행에서 최대 속도(마하 2로 추정)과 최대 하중(7G이상 추정)을 기록했다.

뒤를 이어 N22XY(PW사 엔진 장착)이 투입되었고, 이 기체는 11월 28일의 11차 비행에서 AIM-9M을 성공적으로 발사하고 12월 20일날 AIM-120을 성공적으로 발사한다. 초음속 비행을 집중적으로 시험한 기체 2개는 1990년 12월 28일 부로 모든 시험비행을 종료한다. 1호기와 2호기는 합쳐 약 74회의 비행을 실시하였다.

2.4 끝없는 경쟁의 승자

시연평가 기간에 YF-22가 보여준 비행데이터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풍동시험 및 시뮬레이터의 데이터와 면밀하게 비교한 결과 대부분의 데이터가 일치하였다. 착륙평가의 경우 엔진 1개만을 사용하여 실시한 착륙과 20노트의 바람이 측면에 부는 가운데 실시한 착륙이 모두 성공하였다. 회전성능은 예상보다는 나빴다. 3만FT 상공에서 마하 0.9로 비행할때 최대회전각도는 초당 200도일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180도였고, 4만 피트 상공에서 마하 1.5에서 비행할때는 시뮬레이션 상으론 초당 185도였으나 실제 각도는 175도였다. 시험비행에서는 YF-22의 진동감소능력이 뛰어나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는 편대비행과 공중급유를 쉽게 만족시켰다.

YF-23역시 스텔스와 통합 항공장비측면에서는 YF-22보다 우세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기동성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심각하게 느린점과 뒤늦게 여차저차 개발일정에 맞춘 록히드사와 다르게 지속적으로 지연이 돼 버렸다. 그외에도 당시 개발된 시제기중 가장 비싸다는 YF-22를 뛰어넘을정도로 과도한 비용덕분에 결국 탈락하고,

이런 치열한 경쟁이 지속된지 8년이 지난 1991년 4월 23일, 미 공군장관 도널드 라이스 장관은 록히드/보잉/제너럴 다이나믹스 컨소시엄의 합작인 YF-22가 승리했음을 발표한다. 이제 EMD 제작 단계로 넘어가면서 동시에PW사의 F119-PW-100이 GE사의 F120-GE-100을 쓰러뜨리고 ATF 사업의 공식엔진으로 선정된다.

이렇게 기본이 되는 최초의 개념연구부터 선정까지 34년, 사업의 탐색개발부터 선정까지 22년이라는 긴 시간은 끝나고 공중을 재패할 전투기가 탄생되기 시작한다.

3 F-22A 생산까지

1997월 9월 7일, 첫 양산형인 EMD(기술및 제작 개발용) F-22가 초도 비행에 성공한다. 당초 계획으로는 EMD 11기중 2기를 복좌형인 F-22B로 생산하려고했으나 비용문제때문에 1인용 F-22A 9대만 제작하였다. 9호기는 2002월 4월 15일 초도비행을 실시한다.

EMD는 각종 기술시험과 실용시험에 사용하기 위한것으로, 모든 EMD기는 캘리포니아 주 에드워드 기지의 시험 부대로 인도한다. 1호기는 일단 분해하여 에드워드 기지까지 수송, 현지에서 재조립하여 1998년 5월 20일부터 비행을 시작한다.


분해되어 수송되는 EMD 1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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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F-16D와 시범비행중인 기체번호 91 - 4002의 EMD 2호기.

EMD 2호기는 1998년, 3호기는 1999년, 6호기는 2002년에 각각 시험비행등을 통해 민간에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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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유명한 짤인데, 네이버등지에는 세월의 흐름이란 이름등으로 돌아다닌다. 여기에 찍힌 F-22는 PRTV 1호기인 기체번호 91-4007이다.

그 뒤에 EMD에 이어 만든 PRTV(양산형 준비 시험기) 6대는 부대배치를 위한 시험용으로 초기 운용시험평가(IOT&E)에 사용하였다. 이 작업은 네바다 주의 넬리스 기지를 중심으로 실시한다.

PRTV 1호기의 초도 비행은 2002년 10월 12일이고, 10월 23일날 미공군에 인도된다. 본격적인 양산형인 로트1 생산분은 2003년 9월 23일 부터 플로리다주의 틴들 공군기지의 훈련부대에 인도한다. 훈련 부대에서 1개 대대를 편성하여 작전부대로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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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에드워드 공군기지에서 시험비행중인 기체 번호 91-4010과 91-4011의 각각 PRTV 4호기와 5호기.

지금까지 EMD기는 제 411시험 비행대대에서 계속 운용하였으나, EMD 3호기가 시험비행중 제한 하중을 초과하는 바람에 비행을 중단하고, 미공군 박물관에 전시된다. 또한 5호기 역시 비행임무를 맡지않고, 조종사가 지상에서 조작 순서를 학습하기 위한 GF-22A로 전환하여 랭글리 기지의 제 1전투비행단에서 사용된다. 그외 나머지 7기는 현재 틴들 공군기지에서 F-22A 조종사 양성을 위한 훈련기로 사용되고 있으며,

PRTV 6대는 3대가 전투비행단에, 3대가 시험비행단에 의해 운용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총 사업액 673억 달러에 달하는 ATF사업은 2011년 12월 13일에 기체번호 91-4195의 195번째 기체가 ROLL OUT을 함에 따라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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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실 ATFI은 ATF와는 연관도 없고, 완성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ATF사업의 발전방향을 보여주었고, 최종형태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2. 상당히 많은 인력이 투입된 이 2가지 사업은 1981년 ATF사업의 추진으로 종료.
  3. 이미 1974년부터 시작된 연구부터 TAC-85는 다른 프로젝트들과 뼈가 붙고붙어서, 본질적으로 TAC-85가 아닌 시제형 ATF사업이 돼 버린다.
  4. 최초 시작당시의 8개 항공사에서 상대적으로 소규모였던 보트(VOUGHT)사가 참여하여 9개가 된다.
  5. 이때 포착된 시제기는 미코얀 설계국 9-01과 T-10 시제기였다. 둘다 몇년후에 MIG-29와 SU-27로 발전한다.
  6. 물론 미 공군이 전투기 개발을 전혀하지 않고 놀았다는것은 절대 아니다. 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엄청난 숫자의 개발사업을 하고있었고, 그것들을 통해 얻은 기술은 모두 F-22에 흡수된다. 다만, 위험의식이 없어서 사업자체가 지연되는 경우가 많았을뿐.
  7. 제너럴 다이나믹스사의 분담이 좀 적어보일지 모르나, 절대 아니다. 현재 전세계를 비행하는 대부분의 항공기는 FBW에 의해 운항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시스템이다. 그걸 통합하는 사업은 매우 큰 사업이다.
  8. 참고로 미 공군은 시제기를 컨소시엄마다 각각 2대씩 제작할것을 명령하였는데, 그 이유는 P&W사의 엔진과 GE사의 엔진을 각각 장착하기 위해서였다. 이때는 공군에 정식으로 배치되지않아서 민항기 번호도 부여받는데, GE사의 엔진을 장착한 YF-22는 N22YF로, P&W사의 엔진을 장착한 YF-22는 N22XY로 명명된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노스럽의 YF-23중에 P&W사 엔진을 장착한 기체는 N231YF, GE사 엔진을 장착한 기체는 N232YF로 명명된다.
  9. 제너럴 다이나믹스가 시연평가 초기에 제안했던 설계안이었다.
  10. 이때를 노려 록히드사는 이륙거리 조건을 2000FT에서 3000FT로 늘린다.
  11. 이는 후반으로 갈수록 록히드사 설계의 큰 주력장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