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D 샐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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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90%는 이 얼굴로 안다. 19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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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9월 15일 타임지 선정. 사랑대선생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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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경. 도촬에 충격을 잡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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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친구 Donald Hartog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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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시간이 흘러 2009년.

미국겁나 까칠한 히키코모리 소설가. 풀 네임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Jerome David Salinger. 1919.01.01~2010.01.27. 대표작은 그 유명한 호밀밭의 파수꾼.

1919년 1월 1일, 뉴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폴란드유태인이고, 어머니는 아일랜드계의 가톨릭 집안 출신이었지만 결혼 후 유대교로 개종.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콜필드처럼, 맥버니 고등학교에 입학했다가 성적이 나빠 퇴학당한 일이 있다. 펜실베니아의 웨인에 있는 밸리 포지 군사학교를 평범한 성적으로 수료한 뒤[1], 1936년 뉴욕대에서 학업을 시작하지만, 이듬해 봄에 제적당했다. (샐린저는 특수교육을 이수하길 고려해 보았다.) 이후에 아버지의 강권에 따라 오스트리아, 빈의 한 회사에서 일하고, 1938년 3월 12일, 오스트리아가 나치에 병합당하기 한 달 전에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으로 돌아온다. 1938년 가을에는 Ursinus 칼리지에 지원하지만, 뉴욕대와 마찬가지로 한 학기만에 제적당하고 만다. 1939년, 컬럼비아 대학교의 문예창작 수업(Columbia University School of General Studies)[2]의 청강생으로 들어갔는데, 이 수업은 샐린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940년, "스토리"라는 잡지에 "젊은이들"(The Young Folks)이라는 소설을 발표해 데뷔했고 이듬해에 "Slight Rebellion off Madison"를 뉴요커에 발표할 예정이었지만 군입대로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다. 이 소설은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인 홀든 콜필드가 처음으로 등장한 소설이었다.

군입대로 직접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샐린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최대 격전중 하나인 유타 비치에 투입되었고, 프랑스 해방 이후에는 정보부대에서 복무했다. 파리에서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만났고 헤밍웨이에게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는 찬사를 받았지만 정작 샐린저는 헤밍웨이의 터프함에는 동조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홀든이 언급하는 헤밍웨이에 대한 평가에서 드러난다. 독일 패망 후에 신경쇠약으로 뉘른베르크 육군 종합병원에 입원했다가 독일인 여의사인 실비아 베르타를 만나 그녀와 결혼한다.

1945년 11월, 군을 제대한 뒤 바로 그해 12월 호밀밭의 파수꾼의 원형이 되는 단편소설 "나는 미쳐간다"(I'm Crazy)를 Collier's에 발표했다. 이듬해에 실비아 베르타와 이혼한 뒤 샐린저의 생활은 변해서 차도남같은 삶을 살게 된다. 1949년에 코네티컷 주의 웨스트포트에 집을 빌린 샐린저는 그곳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의 집필을 시작해서 1950년 가을에 완성한다. 책은 1951년 7월 16일에 출판된다.

문단에서는 격렬한 찬반양론이 일었고 작품의 성격 때문에 청교도적인 사고의 소유자들이나 개신교의 세력이 강한 주들에선 금서로 지정될 정도였다. 어쨌든 전 세계적으로 6천만부가 넘게 팔렸다고 하니 말 다했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성공 때문에 조용히 살기가 힘들어지자 샐린저는 뉴욕을 떠나 뉴햄프셔의 시골로 가서 원시적인 삶을 살았다. 현지의 고교생들이 호밀밭의 파수꾼에 감동을 받고 샐린저와 교류했지만 한 여고생이 샐린저와 한 대담을 그대로 현지 신문에 넘겨서 기사화 돼버리는 바람에 불같이 화를 내며 고교생들과의 교류마저 끊어버렸다. 원래 교내 신문에 싣기로 했던 것으로 문제의 여고생은 이것을 지방신문에 넘겼고 그 대가로 그 지방지의 기자가 되었다. 고작 촌구석 찌라시 기자 자리 때문에 그런 짓을 하다니 찌질하기 그지없다

이후 단편집 "나인 스토리즈", "프라니와 조이", "목수여, 지붕에 대들보를 올려라" 등의 작품을 냈고, 1965년 "hapworth 16,1924"를 발표한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작품을 내지 않고 철저하게 은둔생활을 하는 통에 갖가지 루머가 판을 쳤다. 공식적으론 1965년작 "hapworth 16,1924"[3]가 마지막 소설로 간주되고 있다.

그렇게 은둔자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는 지방사회에서 교회의 행사에도 참석하면서 잘 어우러져 살았다. 대신 본명으로 부르지 않으며 절대로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는 불문율이 있었다.

1985년에는 어떤 문학평론가가 텍사스 대학에서 샐린저의 편지를 발굴해서 이것을 가지고 샐린저의 전기를 썼지만 샐린저는 여기에 대해서 재판을 걸었고 결과적으로 샐린저가 승소하여 편지의 내용을 인용하지 않는 전기가 출판된다. 이후 2008년, J.D 캘리포니아라는 작가의 이름으로 호밀밭의 파수꾼의 후속작이라는 "60년 후: 호밀밭에서 나오며"가 출판되자 크게 노하면서 법원에 저작권 침해소송을 내서 승소했다.

2010년 1월 27일, 노환으로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 이 소설 하나로 설명이 다 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처럼, 세상의 모든 허위와 가식을 증오하고 모든 허위와 가식에서 벗어난 순수함을 동경하는 것이 샐린저 작품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는 동양의 선불교에 심취하는 모습을 보였고 얼마 안 되는 그의 말기 작품들에서 이런 경지에 도달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은둔하는 소설가라는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으며, 여러 창작물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만약 창작물에 '한 권의 소설만을 쓴 후 평생을 잠적한 소설가'가 등장한다면 샐린저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4] 대표적으로 1989년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영화 <꿈의 구장>에 등장하는 은둔 작가는 원작 소설에는 샐린저 실명으로 나온다. 거스 밴 샌트의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의 소설가 포레스터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의 두번째 아내에 의하면 아마도 PTSD때문에 굉장히 종교에 의지했으며, 그 종교관도 굉장히 변덕적이었다고 한다. 한때는 인도의 힌두교에 심취했다가, 사이언톨로지의 모태가 될 종교쪽에도 관심을 보이고, 이후에 뉴에이지에도 관심을 돌렸다고 한다. 문제는 혼자 심취하면 좋은데, 주위에 계속 권유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 사람이 워낙 주위와 교류없이 조용히 살던 사람이다보니 그 타겟이 아내였다는 것. 그리고 최후에는 조용한 시골의 개신교 교회에 다니면서 어느정도 마음의 안식을 찾은 것 같다.
  1. 이 시절 샐린저는 "mediocre", 지극히 평범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IQ도 글래스 가의 특출난 재능에 비하면 그다지 높지 않았다
  2. 트루먼 카포티, 조지프 헤라, 노먼 메일리등이 이 수업에서 배출된 대표적인 신인 작가들이었다.
  3. 글래스 가의 장남인 시모어 글래스가 7살에 미래를 예언하고 자신의 죽음을 알게 된다는 내용으로, 이 소설은 20년 전에 쓰인 "The Ocean Full of Bowling Balls"와 구성면에서 흡사하다
  4. 다만 위에서 읽어 봤다면 알겠지만, 실제 샐린저는 호밀밭 이후에도 다른 작품도 몇 개 더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