戚繼光
1528년 11월 12일 ~ 1588년 1월 5일
명나라의 명장. 척경통의 아들. 자는 원경(元敬), 호는 남당(南塘), 맹제(孟諸), 시호는 무의(武毅).
산동 등주 사람으로 대대로 등주의 지휘첨사를 하던 집안으로 1549년에 무거시에 합격해 등주의 지휘첨사를 지냈으며, 1553년에는 서도지휘첨사가 되어 북쪽의 타타르족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
훈련을 강화하고 규율을 엄격히 하면서 삼촌이 군율을 어기자 이를 엄격히 적용했으며, 1555년에는 절강도사첨사가 되어 영파, 소흥, 대주 등을 총괄하는 사령관이 되었다. 1556년에 참장으로 승진했으며, 1559년에 금화현, 의오현 등에서 4천명을 모집해 척가군을 조직했다.
원앙진을 고안하여 1561년 왜구가 대주에 상륙하자 원앙진으로 대항해 한 달 넘게 싸워서 5천명 이상을 죽였고 1562년에는 온주, 대주를 공격하자 2년을 싸운 끝에 격파했으며, 왜구가 남하해서 여러 지역을 노략질하자 추격해 횡서에서 2600명을 죽이고 60여개의 진지를 초토화시켰다.
1563년에는 평해위에서 유현, 유대유 등과 함께 왜구의 주력군을 토벌하고 그 공으로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1564년에는 광동 지역에서 왜구의 잔당까지 토벌해 왜구의 자취를 감추게 했다.
왜구가 토벌된 후에는 1568년에 계주로 부임해 타타르족에 대한 대비로 10년에 걸쳐 장성을 건설했고 이로 인해 알탄 칸이 입조해서 공물을 바치게 되었으며, 척계광은 장거정에게 중용받았지만 1582년에 장거정이 죽자 참소를 당해 1583년에 광동으로 좌천되었다가 사임하고 1588년에 등주에서 사망했다.
용행검법의 개조로 알려져 있다.
저서로는 기효신서, 연병실기, 지지당집 등이 있다. 특히 기효신서가 유명하며, 이 책에 나온 전법이 조선 중기 군제의 핵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