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居正
1525년 ~ 1582년
명나라 때의 문신. 자는 숙대(叔大), 호는 태악(太岳).
중국사, 최소한 명나라 최고의 정치인(재상) 중 한 명이다. 다만 정치력은 의심할 여지도 없는 먼치킨이지만 인간성면에서는 지탄받아 마땅한 인물로, 특히 재물에 대한 탐욕이 심했다. 만력제를 그나마 구원한 제갈량 급 명신이란 평과 그를 흑화시킨 근원이란 평이 갈린다.
후베이성 장링 현 출신으로, 잘 생기고 수려한 외모를 타고났다. 저 얼굴이? 호북의 천재로 손꼽히며 주목받던 가운데 1547년 가정 24년 진사로 합격했다. 처음에는 가정제 치하에서 한림원 서길사가 되어, 서계에 그 재능을 인정받아 문하생이 된다. 엄숭이 전횡을 부릴 동안은 은거하기도 하는 등 굴곡을 겪었으나, 서계가 엄숭을 탄핵해 실각시키고 재상이 되면서 그의 신임을 두텁게 받아, 예부우시랑, 이부좌시랑, 예부 서경 등을 역임하였고, 융경제 원년(1567년)에 입각하여, 서계가 가정제의 유언에 따라, 가정제가 중용한 도교 도사를 배제할 때 그 한쪽 역할을 맡았다. 요절한 융경제가 물려준 명신 가운데 한명이었다.
문제는 이 명신들 간에 발생한다. 이 때 서계의 정적이었던 고공은 이 모의로부터 배척당한 것으로 인해 앙심을 품게 되며, 서계의 아들의 죄를 들어 서계를 탄핵하지만, 반격을 당해 파면되었다.앜 하야를 한 고공은 태감 이방 등과 연결해 서계의 실각을 노리게 된다. 그 후 서계는 1568년에 관직을 사퇴하고, 그 후임으로서 예부서경 조정길이 선택되었다. 고공은 복권을 위해 이방을 통해 장거정에게 협력하게 하고 고공은 복권하여 조정길을 대신해 재상이 되었다.
장거정은 고공과 결탁해 권력을 기반을 다지고, 알력이 일어난데다, 본인이 더욱 강력한 권력을 얻기 위해 고공에 원한을 가지고 있던 내시 풍보와 연합해, 고공을 실각시키려 했다. 융경제가 1572년 사망하고, 장거정이 지지하던 훗날 파업 황제가 될 만력제가 즉위 한다. 이 때에 융경제의 유언 등을 이용해 고공을 실각시키고, 스스로 수보의 지위에 올랐다. 고공은 당시 재능이 뛰어나 정국을 주도하면서 독선적 면모를 보여 신료들에게 두려움과 미움을 사고 있었고 이에 장거정은 환관 풍보와의 협력마저 묵인받으면서 고공을 실각시킬 수 있었다. 이후 고공은 낙향하여 은거생활을 강제당했고, 그러면서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이 장거정 사후 장거정 탄핵의 수단 중 하나가 되었다.
만력제를 등에 업은 장거정은 독재적인 수완을 발휘하여, 차례로 개혁을 실행해 나갔다. 우선 관리의 탄핵을 담당하는 언관이나 각지의 서원 등의 입을 봉해 독재권을 확립하고, 낭비의 철폐, 강기숙정(綱紀肅正) 등을 실시했다. 그리고 장거정의 최대 공적으로 손꼽히는 전국적인 토지측량과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실시한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중국사/세금 제도항목 참조. 그러면서도 만력제를 철저하게 공부를 시켰다.
당시 지방에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향신세력(鄕紳勢力)이 소유한 땅을 속여 보고하고 탈세하는 일이 많았지만, 장거정은 이것을 단호히 대처하여 관청 몰래 경작하는 대량의 땅을 적발하였다. 그때까지의 세제인 양세법은 항목이 너무 많고 복잡하여, 불공정한 점이 많았다. 일조편법은 그것을 일관화시켜, 과세대상을 토지로 옮기고, 당시 보급이 진행되고 있던 은으로 납세를 하게 했다.
이러한 개혁으로 명의 재정은 크게 호전되었고, 국고에는 10년 분의 식료와 4백만냥의 잉여금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언론 탄압, 기득권의 침해 등으로 조정과 재야에는 장거정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황제와 다른 신료들에게는 준법과 청렴을 강요하면서도, 본인과 측근들은 뇌물을 받고 호화사치를 부렸으며 일가는 강릉에 있던 요왕부를 차지하는 등 위세가 지나쳐 공분을 사게 되었고, 장거정 사후 이것이 폭발하면서 일족이 몰락하게 된다. 아들들이 진사에 급제한 것에 대해서도 부정 논란이 일었으나 넘어갔는데 이 또한 후에 문제가 되어 장거정의 아들들이 귀양당하게 된다. 이미 본인이 수보로서 권력을 누릴 동안 선배격이던 서계 일가는 고리대와 토지 겸병이 논란이 되어 결국 재산이 몰수당하는 와중이었음에도 끝내 자제하지 못했다.
장거정은 또한 매번 범람하는 황하 하류의 치수사업 등의 업적을 남겼다. 여기에는 반계순이라는 관료가 특히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이사람은 장거정 사후 결국 탄핵크리... 또 외치로는 명장 척계광(戚繼光), 이성량(李成梁)을 요동과 몽골에 파견하여 북로(北虜 = 당대에는 몽골족)를 막고, 또 절강성, 복건성, 광동성의 해안 방어에도 주력하여 남왜(南倭 = 왜구)의 움직임도 봉쇄했다. 척계광은 그 과정에서 군사 전법을 개선하고 정예병을 육성하에 후 임진왜란이나 명의 방비에 활약하는 남병을 남겼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남병의 정예화와 지원 편중 등으로 북병과의 알력이 나타나게 된다.
풍보는 궁 내부에서 환관조직을 통제하고 태후들과 친밀감을 유지하고 장거정과의 관계를 중재하는 등 장거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577년 만력 5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삼년상으로 인한) 휴직 중에 탄핵 되는 것을 무서워해 실시하지 않았다. 이는 당대의 예를 거스른 것이라 그를 지지하는 신하들도 그를 깠다. 그러나 장거정은 이들을 크게 탄압하고 권력을 유지한 채 토지조사계획을 밀고 나갔다. 하지만 그를 무너트린건 그 자신이었으니, 1581년 만력 9년 태사 직위에 오른 지 얼마 안되어 병으로 쓰러져 다음 해에 사망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장거정이 과로로 병이 나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치스럽고 여색을 좋아하던 장거정이 회춘약을 잘못 먹었다가 탈이 나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향년 57세. 상주국(上柱國)의 봉호와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러나 문제는 장거정 사후 일어나는데... 만력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