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

왜구란 조선 반도중국 대륙 등지에 배로 침략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가끔 역사 교과서를 보면 출병했다느니 하고 쓰여있긴 합니다만, 그건 해적이라고요. 약탈을 하러 간 거라 이겁니다. 나쁜 녀석들이에요

- 오다 에이이치로(만화 원피스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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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이런 이미지. 저랬던 이미지가 고려 말 이후 확 바뀐다.

파일:Attachment/왜구/Japan pirate route.jpg

16세기 왜구들의 활동 영역.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후기 왜구라 불리는 16세기 왜구는 조선보다는 주로 중국 해안에 침입했다. 그런데 밑의 서술을 보면 알 수 있듯이 16세기 왜구의 경우 그건 대부분 왜구를 자칭하는 중국인 해적들이었고 일본인 해적들은 여전히 주로 한반도에 와서 깽판을 쳤다.

짙은색은 산둥반도, 한반도가 포함된 전기 왜구의 활동 영역이고, 연한색은 후기 왜구의 활동 영역이다.

전기는 일본의 남북조시대, 후기는 전국시대의 혼란기에 영향을 받았고, 보통 혼란기가 진정되면 왜구도 함께 진정되는 양상을 보였다.

1 개요

倭寇 / Wokou

해적. 일본의 해적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와코(わこう)라고 불렀는데 어감을 봐도 알겠지만 일본에서도 무척 경멸하는 투로 불렀다.

동북아 역사상 등장하여 수많은 나라들에게 해악을 끼쳤으며 결국 중국고려, 조선 등이 바다를 포기하게 만든 주범들 중 하나. 당시 동북아시아에서는 국제적 골칫거리였다고 할 수 있겠다. 현대로 치환하면 인도양 해적. 왜말리아 이들은 주로 이키 섬, 쓰시마 섬, 키타큐슈, 세토내해 등지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왜구"란 이름대로 대부분은 일본인이었으나, 후기 왜구들 중에는 중국인이나 동남아 계통, 심지어는 포르투갈인도 섞여있었다. 새역모와 같은 일본에서는 이를 핑계로 왜구는 일본만이 아닌 명, 동남아, 조선을 포함한 국제적 집단이었다는 주장을 종종 해댄다. 물론 해적=왜구라는 것은 아니어서, 고려 때는 여진 해적이 울릉도를 습격하는 사건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일반인은 물론이고 기자들까지 "왜구=일본군"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애초에 왜구란 일본인들로 구성된 특정 무장집단을 가리킬 뿐이지 일본 전체 혹은 일본 정규군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본이 도쿠가와 막부 이전까지는 중앙집권이 희박했고 다이묘들이 해적업을 직접적으로 운영하며 따라서 왜구 집단을 사략함대 마냥 다뤘기 때문에 아주 틀린 묘사인 것만은 아니다. 다이묘들이 해적업을 운영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남북조시대와 전국시대의 혼란기 속에서 전쟁자금을 대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따라서 죄없는 시민들을 납치해와서 노예로 쓰거나 전재산을 강탈해서 전쟁자금으로 쓰는 등 온갖 범죄를 저질렀다. 대표적인 사례가 시마즈, 아리마, 류조지 등으로, 이 중 시즈마의 경우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등의 진입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류큐국[1]을 수시로 침략, 약탈하여 결국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태로 점유하기에 이른다.

더군다나 "왜"라는 표현은, 일본에선 헤이안시대 이후 "일본"이라는 국호를 정식으로 사용하며 사라졌고, 당 왕조 이후 중국에서도 일본으로 대체된 것이다. 이후에도 간혹 '왜'라는 명칭이 사용되나, 이 경우엔 만주족을 "호인"이라고 부른 것 처럼 일부러 비하하려는 의도의 멸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간혹 무지한 사람들이 정식 명칭인줄 착각하고, 임진왜란 관련 서술에서 "일본군"이란 정식 명칭을 사용할 경우 왜구를 미화한다고 오해하는 모습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2 역사

왜구들의 활동 영역은 대개 조선과 명 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본 본토도 그들의 활동 영역 중 하나였다. 사극 등 현대 매체들의 경우 왜구들을 야만인 집단인양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올바른 묘사로 보기 힘들며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서에도 볼 수 있듯 이들은 사실상 당시 일본 열도에 퍼져있던 다이묘들의 사략함대로 보는 게 더 현실에 가깝다. 이들은 막부에 소속된 정규군인 수군에게까지 통행세를 받아낼 정도였으니 규슈에서 수입한 명이나 조선의 물건들이 교토를 넘어 동쪽으로 갈수록 물류비가 더해져 값이 몇배나 뛰었다. 또한 일본과 무역하던 네덜란드나 포르투갈, 에스파냐 상선들을 공격하기도 하였으며,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동남아에 진출하기도 했다.[2]

한·중 양국의 역대 왕조가 왜구의 약탈행위를 중단시키라고 수도 없이 일본에게 요구했지만, 일본의 막부가 제대로 기능했던 역사 자체가 매우 짧았고, 애당초 막부라는 것 자체가 봉건제의 토대에 있는 마당에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고 제대로 지켜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왜구의 약탈이 가장 심각했던 일본의 후기 무로마치 막부는 완전히 허수아비인 상태였으며 각 지역의 다이묘들이 할거하여 150년간 난리를 치던 전국시대였다. 더군다나 이 시기에는 지방 다이묘들의 해적업이 가장 극한으로 치닫던 시기다. (전쟁자금을 꾸준히 모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 당시 중앙의 통제가 제대로 잡힌 나름 선진국이었던 명나라나 조선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이러한 문제 때문에 왜구라고 부르며 멸시하는 경향이 더 강해졌다.

지금 동아프리카 해역에서 소말리아 해적들이 거의 군벌과 다름없이 난립하고 때로는 군벌 밑으로 들어가 난동부리는 일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자국내 군벌들이 벌이는 내전도 수습 못하고 있는 소말리아 정부에게 해적 활동 중지시키라고 항의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습게도 이런 왜구짓을 하며 해상 경력을 쌓아서 등용되어 수군 간부직을 차지한 경우도 있었다. 물론 정반대로 왜구 토벌을 벌여 이름을 떨친 일본 수군 간부들도 있었지만.

2.1 전기 왜구

전기 왜구는 14~15세기에 쓰시마와 이키, 마쯔우라를 근거지로 한 왜구들이다. 이들은 본래 사무라이 세력이었으나 전란으로 근거지를 잃고 결국 인근의 유력한 다이묘들에게 사략선으로나마 몸을 의탁하기 시작한 게 시초이다. 이로 인해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일어났다.

이 당시의 왜구들이 흔히 생각되는 이미지와 같이 단순히 무법스런 해적 집단이었느냐 아니면 다이묘들의 사략함대에 가까웠는가 하는 점은 사실 한국사적으로 생각하면 어느 정도 중요한 문제인데, 이에 따라서 당시 고려의 정치 상황에 대한 평가가 180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기존에는 공민왕과 같은 경우, 겉으로는 소위 "개혁 군주"를 표방하면서도 정작 나라 꼬라지는 해적들한테나 털릴 정도로 엉망이었다는 부정적 평가가 있기도 했으나 만일 왜구들이 다이묘들의 사략함대에 가깝다고 볼 경우는 이 또한 어느 정도 참작할 여지가 생긴다. 이 시각으로 볼 경우에는 당시의 고려가 이웃국가인 일본의 정치적 혼란에 휘말린 것으로도 볼 수 있고, 이는 왕 개인이 딱히 사전에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왜구들이 한반도에 침입했다는 사실보다는 결국에는 왜구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에 더 높은 비중을 두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가 있다.

그러나 고려 조정에서 큐슈와 쓰시마 지역에 사자를 파견해 억제를 요청하는 한편 황산대첩에서 대승을 거두고 수차례의 쓰시마 정벌을 감행하자 전기 왜구는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특히 박위, 이종무의 쓰시마 원정은 전기 왜구의 직접적 종말 원인이 되었다.

2.2 후기 왜구

후기 왜구는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가 통제력을 잃고 전국시대(일본)가 되자 감합무역이 유명무실해지면서 시작되었다. 감합무역이란 조공과는 달리 외교관계가 없는 오로지 무역만 허가되는 형태로써 황제의 인장이 찍힌 문서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그러나 전국시대의 대혼란을 겪으면서 명나라 황제의 인장이 찍힌 가짜 서류가 난무하는 현상이 나타나자 감합 무역이 더이상 불가능했고 밀무역이 속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중국과 일본 사이를 밀무역상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겼으나 중국 해안의 방어를 뚫기 위해 자연스럽게 무장을 하게 되었고 결국 밀무역 대신 일방적인 약탈을 가하게 되는게 후기 왜구의 등장이다. 후기 왜구는 16세기 말 명나라 군대의 적극적 대응으로 소탕이 되면서 점차 잠잠해졌다.

16세기의 후기 왜구는 쓰시마와 이키를 근거지로 하였으나 구성원 중에서 7할이 중국인이었다.# 이는 왜구왕으로 불린 왕직을 통해 알 수 있다. 왜 이런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우리도 알고 있는 명나라의 해금령 때문이다. 명나라의 해안지방에서 거주하던 상인 집단이 자신들이 먹고살길이 완전히 막혀버리자 배를 타고 동남아나 일본 등의 섬으로 이주하여 살길을 찾았으나, 명나라가 해금령을 실시한 이상 상거래가 가능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무역루트인 명나라 항구를 이용할 방도가 없었고, 결국 도자기나 비단 등을 목표로 약탈 및 해적질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이익을 취하며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으나 1557년에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왕직의 죽음으로 왜구는 내부 분열을 맞게된다.

1589년 전국시대를 종식하고 태합의 자리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구에 대한 전격적인 금지령을 내렸다. 물론 이 규정은 지켜지지 않아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일본 수군에 편입되어 조선을 노략질하는 데 동원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 사령관이었던 구키 요시타카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고, 에도 막부 수립 이후 다시 금했다. 또한 기독교 탄압의 일환으로 쇄국 정책을 펼쳤는데 이 과정에서 당연히 왜구도 혹독한 탄압 대상이 되었고,[3] 그 결과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즉, 적어도 왜구가 17세기이후에도 타국에 침입했다는 것은 히데요시의 해적금지령 등으로 볼 때 생각하기 어렵다. 일단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후에[4]는 조선이 왜구한테 시달리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3 한국사의 왜구

3.1 신라 시대

왜구가 동아시아 전역에서 창궐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긴 하지만, 한반도는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땅이기에 왜구가 한국 역사에 등장한 것도 굉장히 오래 전부터다. 신라 박혁거세 즉위 8년에 왜구가 쳐들어왔다는 기사가 있을 정도로 그 짓의 역사가 유구하다.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이다! 물론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구체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기는 하지만 왜구가 어지간히 쳐들어왔던 것은 알 수 있다.

신라 역대 왕들의 삼국사기 기록을 뒤져보면, 왜구의 침략에 대한 기록이 없는 왕보다 있는 왕이 더 많을 정도. 게다가 신라의 수도 경주시동해 바다와 그 건너 일본 열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지리적 조건상 일단 상륙을 허용하면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소지가 컸고, 실제로 왜군에게 수도가 포위당한 적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고려 말처럼 궤멸적인 피해를 입는 정도까지 간 적은 별로 없었던 듯 하다.

하도 시달렸다보니 유례 이사금 때는 진지하게 왜국 정벌을 논의하기도 했다.

결국 왜구의 침략이 절정에 달한 내물 마립간 때는 고구려광개토대왕에게 헬프를 친다. 그리고 그 대가로 한동안 신라는 고구려의 반속국신세로 떨어지기도 했다.

사실 고대 신라에 쳐들어온 건 항상 그랬던 건 아니지만 왜국 조정의 정규군이었다. 고려 때와 달리 정식으로 동맹 백제나 가야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적도 많았다. 삼국통일전쟁 때는 백제가 대충 망하자 부여풍이 이끄는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국력을 쏟아부어 1000여 척 전선에 수만명의 대군을 보내기도 했지만 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궤멸되었다.

신라 문무대왕대왕암에 묻어달라는 이유도 이 되어 왜구를 막기 위해서였다.

신라가 통일하기 전 경상도의 소국일 때는 그렇게 뻔질나게 쳐들어왔지만 훨씬 커져버린 통일신라의 정세가 안정된 뒤에는 침략이 거의 없었다.[5]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이 있었지만 발해가 협조하지 않아서 흐지부지되었다. 오히려 신라 말 혼란기에는 신라구가 일본 서부를 탈탈 털었다. (...)

물론 기록에는 없지만 신라 외 고구려도 왜구의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없진 않다.

3.2 고려 시대

고려시대 왜구들이 특히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부터였는데, 당대 한반도 해안지역은 동서남해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이 약탈대상이었다. 조운선을 습격해 조세를 털어가고, 육지에 상륙해 도시를 약탈하고 사람들을 잡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러한 왜구들을 토벌하기 위해 고려군이 지속적으로 전투를 치렀으나 원 간섭기를 거치며 사실상 무장해제 상태에 놓였던 고려군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고려 말부터 시작된 왜구는 이미 갑주를 갖추고 정확한 지휘계통을 갖춘 군대였다. 아기발도 항목을 보면 전신갑주로 무장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 정도의 무장을 갖출정도면 사실상 정규군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고려말 극심한 왜구의 활동은 사실상 국력이 침체된 고려의 수군력을 강하게 만들었다. (...) 왜구가 5백여척을 몰고와 고려를 습격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지만 최무선이 화포를 자체 개발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함포 테크를 완성하여 화력덕후의 시작 진포대첩으로 왜선 500여척을 박살내는데 성공했다.

사실 고려 초만 해도 고려의 군사진지를 보면 대개 강변에 위치해있지 해안가에 위치한 것이 드문걸 보면 국가 단위에서 대규모 수군을 운영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고, 그나마 고려 말에는 제대로 된 해군 자체가 사라졌다. 애초에 그럴 해군이 있었다면 괜히 육지까지 올라와서 왜구들 설쳐대는걸 보느니 처음부터 바다에서 때려잡았을 것이다.

최영이 1,000여척의 해군 증강 계획을 세웠으나, 무리한 인력 징발로 백성들의 원성을 사 실패해 왜구가 강화도까지 들어와서 설치는데도 제대로 몰아내질 못했다. 해전에서 고려가 절대적인 열세에 있던 상황을 뒤집은 것이 바로 전술한 최무선의 화포 테크에 이은 진포 해전이고, 그 다음이 정지의 해군 정예화 계획에 힘입은 관음포 전투. 이 시점에 이르러서 고려-조선의 수군은 본격적으로 왜구를 압도하기 시작한다.

자세한 것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 항목 참조.

3.3 조선 시대

조선 건국에 이르러서도 왜구들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다. 건국 시조인 이성계부터가 아지발도(아기바투)가 이끄는 왜구들을 크게 소탕함으로서 입지를 쌓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의 왜구들 역시 고려 때만큼이나 골치거리였다. 이에 1396년 문하우정승 김사형의 지휘하에 대마도 정벌이 진행되었고, 1419년 세종초에 상왕 이방원의 섭정과 이종무의 지휘하에 다시 대마도 정벌이 진행되어 왜구에게 큰 타격을 주었지만 왜구들의 반격이 거세 완전히 토벌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 공격은 재법 효과를 봐서 1421년 4월 대마도주가 통상을 요청하자 조선정부는 왜구를 회유하려는 목적으로 삼포(부산포, 내이포, 염포)를 개방하고 왜관을 설치했다. 그리고 명나라에 간 왜구들도 몰살당한데다 일본 내부에서도 무로마치 막부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면서 해적인 왜구들을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약 50여년간 왜구의 활동은 잠잠해진다.

그러나 세조 말 즈음 오닌의 난을 계기로 일본의 최대 혼란기인 센고쿠 시대가 시작되면서 일본 전역에 도적들이 기승을 부렸고 당연히 왜구들도 다시 준동하기 시작한다. 이후 중종때 3포 왜란을 시작으로 명종 을묘년에는 수천명이나 되는 대규모 왜구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래도 선조 초기에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을 통일하면서 왜구의 준동도 서서히 줄어드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왜구가 아니라 대규모 정규군이 조선을 공격했다. 그리고 이후 에도 막부가 들어서면서 일본도 안정화 되면서 왜구는 사라지게 된다.

  • 계해약조 : 위에서 말했듯이 삼포를 개방하고 왜관을 설치하며, 조선과 교류하거나 방문하는 왜인들은 증명서를 소지해야 했다. 수도서제(授圖書制라고 하여 통교증명서인 도서(圖書)를 받는(授) 제도(制)가 있었고, 서계(書契)는 대부분의 외교문서, 문인은 여행증명서를 뜻한다. 참고로 서계는 후일 운요호 사건으로 시작되는 일본의 침입의 단초가 된다. 또한 왜인들이 왜관에 들렀다가 돌아갈 때의 비용은 조선에서 담당했는데 이게 비용이 만만찮은데다 왜구가 도적 천성 못 버리고 이런저런 위반을 일삼다가 삼포왜란이 터지게 되었다.
  • 기유약조 :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먼저 제안(내지 간청)함에 따라 맺은 약속. 아무래도 임진왜란 직후이다 보니 일본측 무역선의 숫자를 제한하고 개항장도 부산포 하나로 줄이는 등, 자연스레 일본에 불리하게 적용되었다.

4 중국사의 왜구

중국사에서의 왜구는 크게 전기 왜구와 후기 왜구의 2시기로 나뉘어진다. 전기 왜구의 경우 명나라 초기 원나라의 멸망-명나라의 등장 사이의 공백을 틈타 왜구가 중국의 동해안을 약탈하는 일이 있었으나 명은 건국 초부터 왜구에 대한 토벌전을 벌였고, 산둥에서 수만단위의 왜구를 토벌하기도 했다. 1419년 명나라의 수군이 요동반도의 대련 부근에서 왜구를 격파하면서 에게 있어서 왜구는 한동안 문제가 되지 않았다.

후기 왜구가 가장 큰 문제였는데, 대략 16세기 중반부터 왜구의 약탈이 본격적으로 되었으며 이때부터 약 20-30년 동안 왜구의 약탈이 극심했다. 이 때가 가정제 시기였기 때문에 가정왜구라고도 부른다.

명나라 시기의 왜구는 명말의 명장인 총병 척계광의 활약에 의해 1567년의 전투를 마지막으로 소탕된 것으로 간주된다. 척계광은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후에 병법서인 "기효신서"를 집필하는데, 왜군을 상대하기 위해 개발된 원앙진당파에 대한 언급이 들어있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기효신서는 임진왜란 시기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에 전파했고 이후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기본적인 군사 교본이 되었다.

이 시기 명나라에 침입한 왜구에 대해서는 이들이 큐슈의 대영주인 쇼니 씨[6]사략함대일 가능성이 높다는 쪽으로 연구가 진행되어 아예 이 시기의 다이묘들 중 특정인을 주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당연하지만 이런 경우는 강력한 군장비와 정확한 지휘계통을 갖춘, 사실상 하나의 군대로 보아도 틀리지 않은 규모였다. 심지어 배를 통해 말을 수송해서, 기병대까지 운용한 사례도 보인다. (!)

5 가왜

15세기 이후 후기 왜구들 중에는 중국인도 상당수 끼어 있었다. 중세기 지중해를 휩쓸었던 북아프리카 바르바리 해적들 중에도 유대인이나 유럽 출신들이 꽤 있었다. 이들은 왜구인 척하면서 중국 해안가를 노략질하곤 했으며 이러한 왜구들을 가왜(假倭)라고 했다. 어차피 동북아에서 해적=왜구였으니 이들을 왜구라고 불러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서양 세력의 진출 뒤에는 동남아 지역에서 흘러들어온 일부 서양인들도 왜구로 활동했다고 한다. 동남아 무역에 종사하고 있던 네덜란드 상선이나 심지어 영국 해적(!)을 털려다가 역관광 당하기도 했다. ##.

조선인 왜구 이야기는 이 가왜에 포함된다. 다만 이들은 왜구와 같이 움직였다기 보다는 독자적인 해적이나 도적들이 왜구를 사칭하고 다닌 경우가 많다는 설이 있다. 특히 제주 출신 사학자들은 제주도를 포함한 남부 해안 도서에서, 특히 먹고 살기 어려워서 뭍으로 나가서 김 캐고 미역 팔던 두모악(豆毛岳)이나 포작인(鮑作人)으로 불린 사람들이 왜와 지리적 근접성으로 교류 좀 하고 일본 옷 좀 입고 다닌 것 뿐인데 일본에서 이들을 뭉뚱그려서 왜구 취급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다고 한다.

덧붙여서 일본 사학계에서 가왜에 대해서 활발하게 연구하는 것은 이 가왜를 과대포장해서 왜구와 일본과의 연결고리를 약하게 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는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6 평가

왜구와 관련해서 유명한 책으로 무라이 쇼스케의 "중세 왜인의 세계"가 번역되어 있는데, 해양사적 관점에서 왜구를 다루고 있다. 현재 왜구 개념의 큰 틀을 다루고 있는데, 지나치게 일본 편의적이라는 비판도 존재하니 냉정한 판단을 내려보는 것도 좋다.

일부 역사가는 왜구를 "동양의 바이킹"으로 평하기도 한다. 바이킹과 왜구는 일단 본질적으로 해적이었고, 당시 해당 해역에서 가장 악명높았다는 것이나, 활동 범위가 매우 국제적이라는 것 등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이킹은 왜구와는 달리 특정 민족 전체를 지칭한다는 것과, 상륙한 지역에 아예 나라를 세워 눌러앉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차이점도 있다.
  1. 지금의 오키나와
  2. 사실 굳이 왜구가 아니라도, 일본의 동남아 진출은 일본 역사에서 꽤나 유래가 깊다. 애초에 가마쿠라 막부 이전까지 일본에 살던 민족들 중에는 말레이 계열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3. 왜구가 조선과 중국만 털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자국인 일본도 같이 털었다. 특히 혼란스러운 전국시대에는 절정에 달해서 일본 내의 해상 무역이 위험할 정도였다. 그래서 치안 유지와 안정된 무역을 위해 막부로서는 왜구를 반드시 족쳐야했다.
  4. 최소 에도시대에는 조선이 왜구한테 시달리거나 침입당한 적은 없었다.
  5. 사실 이 때쯤 되면 일본도 나라 시대~헤이안 시대로 안정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연안의 해적을 관리할 여력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6. 대마도의 도주로 유명한 소씨는 이 당시에는 쇼니씨의 가신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