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자유당

(민자당에서 넘어옴)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정당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민주자유당신한국당
자유민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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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995


진행 순서1990년: 민주자유당 창당에 참여한 정당과 과정
1민주정의당(1981년)통일민주당(1987년)신민주공화당(1987년)
2민주자유당(1990년)

1 개요

1990년 이른바 3당 합당으로 출범하여 1995년 12월 신한국당으로 개명하기 전까지 존속한 한국의 집권보수정당. 1990년 여당이던 민주정의당(일명 민정계), 야당이자 그 당시 가장 지지율이 높던 김영삼 계열의 통일민주당(일명 민주계), 김종필 계열의 신민주공화당(일명 공화계)이 3당 합당해서 출범했다. 창당부터 개명 당시까지 계속 여당이었으며 약칭은 민자당.

2 창당 배경

기존 여당이던 민주정의당은 야권 후보의 분열로 정권 유지에는 성공했지만, 1988년 치러진 제13대 총선에서는 전체 299석 가운데 125석만을 확보할 수 있었다. 헌정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가 이루어진 것. 이후 이루어진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5공특위)와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 등에서 탈탈 털리면서 민주정의당야당과의 합당을 통해 이러한 정국을 돌파하려고 했다. [1]

처음에 노태우는 당시 제1야당[2]평화민주당과 합당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김대중의 거부로 무산되면서 김영삼김종필을 끌어들이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내각제 개헌을 밀약으로 내세웠다. 결국 1990년 1월 22일, 갑작스럽게 노태우와 야당의 두 대표는 합당을 선포했다. 민주당에서 거센 반발이 일어났지만, 김영삼의 일대일 설득 끝에 대부분 합당에 참여했고, 이탈자는 5명(이기택, 김광일, 김정길, 노무현, 장석화)에 그쳤다. 공화당에선 김현 한명만이 합류를 거부하였다. 여기에 무소속이었던 정몽준, 문희갑, 유한열 3명이 참여하면서 민주자유당은 299석 가운데 218석(민정127 + 민주54석 + 공화34 + 무소속3)을 차지하는 초거대여당으로 출범하였다.

3 당명을 둘러싼 잡음

민주자유당이란 이름은 우연찮게도 일본 자유민주당과 어순이 반대인데다 유력 정당간의 합당[3]이라는 형성과정의 유사성[4], 의석의 과반을 넘는 집권 거대 보수 정당이라는 점 등이 비슷했다. 이 때문에 이름을 자유민주당에서 따왔다는 속설이 야권에서 돌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김영삼 총재의 경우엔 신당 창당 과정에서 일본자유민주당을 여러번 강조했다고 하나,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외국 나가서 그런 말을 한적 없다'고 부정하기도 했다. 본격 주어 없습니다의 선조 [5] 한편 김종필은 이미 민주공화당 시절부터 자민당과 교섭이 잦았던데다 자민당의 정국 안정 수완을 높이 샀기에 일본 자민당의 예를 여러차례 강조했다. 민자당의 정치적 라이벌인 김대중 총재는 노태우 대통령의 말실수[6] 를 두고 같은 해 2월 연설에서 10월 유신메이지 유신을 따라하더니 신당도 그렇다면서 일본 자유민주당 한국 지부라고 하지 그러냐고 비꼬았다. 결국 실증성보다는 이런저런 정황상의 심증이 속설을 부풀린 셈이다. 그래도 적절하긴 너무 적절하잖아

기실 자유민주는 별로 특이하다고 할 것도 없이 전통적으로 한국 정당명에 흔히 붙었던 단어였다. 실제로 이미 60년대에 야권 계열에서 창당된 동명의 자유민주당도 존재했던데다 민주자유당 이후에 창당한 자유민주연합 쪽도 어감이 비슷하긴 마찬가지. 또 초창기 창당과정에서는 민주통일당 등의 다른 당명이 거론되기도 했다. 더구나 그렇게 의미심장한 이름이라면 불과 창당 5년, 대선 3년만에 바꿀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고[7], 반면 그런 민자당을 "김영삼당"[8]인 신한국당으로 바꾼 김영삼이 더 압박이란 해석도 있다.

노태우 회고록 등에서 보듯, 민정계 인사들은 민자당 창당을 정치 안정의 초석으로 보았다. 그래서 훗날 민정계, 공화계를 축출하고 민자당이라는 '좋은 이름'을 바꿔서 총선과 대선에서 졌다(...)라고 까지 해석했다. 미련이 꽤 있었던 모양. 한편 김영삼 대통령으로서는 정당명 개명은 민정계를 축출하고 당을 민주화시키며 자신의 슬로건인 "신한국 창조"를 상징하는 당연한 마무리 작업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정당자체가 한국판 자민당을 꿈꾼 노태우, 김종필 등과 그런 거 없다였던 김영삼의 동상이몽이었을지도 모른다.

4 집권에서 개명에 이르기까지

민자당은 일본의 자민당도 역사 내내 이루지도 못했던 전체 의석의 2/3을 확보했다. 그랬기 때문에 1990년 당시에는 자민당의 55년 체제처럼 "90년 체제"가 이루어질 것이란 분석이 상당히 우세했다. 헌법 개정도 가능한 만큼 내각제 개헌을 창당 초창기부터 공약했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내각제 개헌은 김영삼 등 대선 후보들에 의해 지켜지지 않았다. YS가 삼당합당에 찬성한 이유가 DJ와 후보단일화 문제로 싸우기 싫었던 것임을 감안하면 내각제 개헌은 처음부터 지켜질 가능성은 없었다. 그리고 JP가 내각제를 주장한건 대통령제 하에서는 DJ나 YS와의 정면승부는 불가능한 상황[9]에서 자신이 가진 충청도표를 바탕으로 정부내에서 최대한의 영향력을 얻기 위한 면이 컸다.[10]

합당하고 나서도 민정계, 민주계, 공화계의 계파 간 갈등이 상당했다. 이를 두고 당시 문화방송에서 방영하던 일요 아침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이라고 풍자하기도 하였다. 거기에다가 날치기가 심심하면 벌어진데가가 각종 부정부패 사건이 드러나고 더군다나 물가상승률 마저 높아졌기에 1990년 양대 재보궐 선거에서 모두 패배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속에 1991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할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기초의회 선거에서 투표율 저조로 생각보다 선전을 거두었고, 광역의원 선거에서도 막판 계란투척 사건과 야권단일화 실패, 투표율 저조로 광역의원 선거에서 564석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두웠다.

그러나 공천잡음으로 인한 무소속 후보자 난립+군부재자투표 부정사건+안기부 흑색선전물 배포사건이 겹쳐지면서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149석만을 확보하며 과반수 확보에 실패한다.

이후 김영삼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고, 정주영이 조직한 통일국민당에 압력을 넣어 붕괴시키면서 이들 중 일부를 끌어들여 안정 과반확보에도 성공한다. 하지만 YS계와 JP계의 갈등이 본격화되었고 각종 당직에서 JP계가 축출되자 김종필을 위시한 공화계과 일부 민정계가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그 후 치러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15개 광역단체장 중 5곳만을 건지고, 서울에서는 서울특별시장은 물론 강남구서초구를 제외한 모든 구청장을 내주면서 패배한다.

1995년 12월, 김영삼 대통령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특별법을 제정하여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12.12 군사반란 가담자들을 전격 구속한 후[11]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노태우를 잡아가둔 마당에 노태우와 함께 만든 민주자유당 간판을 계속 달고 있기는 좀 그렇잖아

흥미로운건 민자당이 간판을 내리자 자민련은 쾌재를 부르며 "정통 보수" "원조 보수" "민자당 적통"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자민이란 이름부터 노림수잖아

이 시기 당명 변경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대비한 이미지 변신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동시에 개혁공천[12]과 함께 민정계 중심+민주계, 공화계의 1강 2약 구도는 민정계 대거 탈락+민주 중심의 구도로 바뀌게 된다. 당시 신한국당은 과반확보에 실패했으나 수도권에서 분열 상태에 있었던 새정치국민회의민주당을 누르고 승리했다.[13]

4.1 신한국당과 한나라당

당명 변경으로 이미지 쇄신을 노렸던 신한국당은 1996년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과반에 실패하고[14][15] 결국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한 책임론 부상과 더불어 경기도 지사였던 이인제의 탈당 등 악재가 겹쳐 당내 쇄신론이 일었고, 이에 당시 정치 신인이었던 이회창이 대쪽 이미지를 표방하고 총재직에 올라 당의 새 주도권을 쥔다.

이회창 후보는 제15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민주당 잔당(통합민주당)과 합당하면서 신한국당을 한나라당으로 이름을 바꾼다.[16] 이는 정통 여당 민자당(신한국당)과 정통 야당 민주당의 결합이라고 선전되었다. 이로서 탈당한 JP의 자민련과, DJ의 동교동계를 제외한 상당수의 구 야당파(비 호남파) 정치인들이 한나라당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야권의 영남 출신들이 대거 사라지면서 지역감정이 가장 강렬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미지 쇄신 차원에서 당명을 다시 바꾼 보람도 없이 대선에서 불과 1.6%차로 석패하면서, 결국 이들의 여당으로서의 입지는 막을 내렸다. 한국판 자민당이 되려던 계획은 망했어요.. 1+1+1이 반드시 3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좋은 예[17].

민주자유당과 신한국당의 계보는 사실상 한나라당의 직접적인 전신이 되는 정당으로, 반대파들은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계보를 자유당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한편, YS계에서는 김영삼이 창당한 통일민주당을 근원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5 민주자유당 출신 정치인

민주자유당 소속이었던 정치인
소속기간이름직위비고
1990년 3월 ~ 1992년 9월 18일노태우초대 총재13대 대통령
민주자유당 창당
1990년 3월 ~ 1995년 12월 6일김영삼2대 총재14대 대통령
자유당 3대 국회의원
민주당(1955년) 4. 5대 국회의원
민정당 6대 국회의원
신민당(1967년) 7.8.9.10대 국회의원
통일민주당 13대 국회의원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14대 국회의원직 사퇴
신한국당 명예총재
1990년 3월박태준최고위원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32대 국무총리
1963년 육군소장 예편.
1981년 민주정의당 제11대 국회의원
1988년 민주정의당 대표
※ 구 포항제철(포스코) 회장
1990년 3월김재광상임고문[18]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1988년 국회부의장
충청북도 청주시[19] 출신
1993년 사망
1992년 ~ 1995년 12월 6일이명박.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신한국당 15대 국회의원
※ 15대 선거법 위반 의원직 상실.[20]
한나라당 소속
2009년 6월 7일 청계재단 설립
17대 대통령
32대 서울시
1990년 3월 ~ 1995년 12월 6일김무성의사국장
의원국장
※ 삼동산업(주) 대표이사
통일민주당 총무국장, 국회행정실장, 기조실차장
1994년 제48대 내무부 차관
김영삼 대통령후보 추대위 총괄국장
※ 제14대 김영삼 대통령후보 정책보좌역
※ 대통령 민정비서관, 대통령 사정비서관
신한국당 15대 국회의원(부산 남구을)
한나라당 16대 국회의원(부산 남구)
한나라당 17대 국회의원(부산 남구을)
※ 2007년 박근혜 경선후보 조직총괄본부장
※ 2008년 7월 한나라당 복당 [21]
※ 2008년 5월 18대 총선에서 친박무소속연대 출마 당선
한나라당 18대 국회의원(부산 남구을)
2014년 7월 ~ 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
.박희태[22].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13대 국회의원
신한국당 15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16대~18대 국회의원
2008년 7월 3일 한나라당 당대표
2010년~2011년 18대 국회 하반기 국회의장
새누리당 상임고문
.구상찬.1990년~1992년 민주자유당 정책위원장 보좌역[23]
2006년~2008년 한나라당 강서(갑)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
2006년 한나라당 서울시당 뉴타운 정책개발위원장
2008년 이명박 대통령당선인 중국 특사
2008년~2011년 제18대 한나라당 국회의원(서울 강서갑)
.박대해.통일민주당 창당 발기인
통일민주당 국회 총무실 행정부실장
민주자유당 동래구 을(연제) 지구당 사무국장
한나라당 연제구지구당 부위원장, 중앙위원
한나라당 대선경선후보 박근혜 선대위 연제구 본부장
2008년 한나라당 제18대 국회의원(부산 연제구)
.노재봉.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국회의원직 사퇴
.이만섭.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최병렬.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국회의원직 사퇴
.김종인.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김광수.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국회의원직 상실
※ 국회의원직 사퇴
.최불암.통일국민당에서 민자당으로 당적을 옮김.
통일국민당 14대 국회의원
.박재홍.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국회의원직 사퇴
.강용식.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김영수.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김영진.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이현수.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이재명.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김영순.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민주자유당 탈당

6 역대 선거결과

7 일본의 가상정당명

일본 만화소설에서 사실상 자유민주당을 등장시킬 때, 껄끄러움을 피하려고 '민주'와 '자유'를 뒤집어서 역순으로 써서 '민주자유당'이라는 가공의 당명을 만들어내서 쓰기도 한다. 다만 1940년대 말부터 50년대 초반까지 진짜로 민주자유당이라는 정당이 존재했다. 사회당과의 연정에 반대한 의원들을 중심으로 창당된 민주클럽과 자유당이 합당해 창당한 정당이었지만 1950년에 자유당이라는 명칭으로 개칭되었고, 이후에 1955년에 민주당과 합당되면서 현재의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었다.

8 관련 항목

  1. 실제로 84년도부터 민정당에서 자민당을 모델로 한 '2000년대 장기 집권 계획'을 계획하기도 했다고. (#)
  2. 당시 70석
  3. 더구나 자유(보수) + 민주의 구도라는 점이 그렇다.
  4. 한국의 경우는 평민당, 일본의 경우는 일본 사회당이 부상할 때 이루어졌다.
  5. 90년 2월 9일자 동아일보
  6. 당시 초대 총재 겸임. 첫 전당대회 날부터 실수로 민주자유당을 자유민주당이라고 불렀다... (90년 5월 12일자, 2월 17일자 동아일보 참조) 자기도 만들어놓고 헷갈린다 이거지
  7. 사실 공화당, 민정당이야 그렇다 치고, 민자당의 정당사 5년은 최근의 정당사 가운데서는 '그나마' 나름 오래간 것이긴 사실이다. 또 그 반면으로 한나라당이나 자유민주연합이 10년을 넘는 역사를 가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심오한 뜻을 품은 당 의미도 아니었다.
  8. 1992년 당시 김영삼 후보의 선거 슬로건이 '신한국 창조'였다.
  9. 3김이라며 김종필을 김대중, 김영삼과 함께 묶기는 하지만 입지면에서 김종필은 다른 두사람과 비교가 안됐다. 애초에 김종필은 다른 두 사람과는 달리 야권운동가도 아니다.
  10. 이에 발끈한 JP계는 YS측과 결별하여 훗날 DJ측과 연합하면서 다시 내각제 개헌을 공동 공약에 내걸고 승리하나, 약속은 또 지켜지지 않았다. 이건 사실 DJ측도 내심 바라지 않은 것도 있지만, 야당인 한나라당이 개헌 저지선을 넘는 의석을 움켜쥐고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회창도 대통령은 하고 싶거든요
  11. 현역 민자당 국회의원이었던 허삼수, 허화평, 유학성도 구속되었다!!
  12. 혹은 민정계 몰아내기
  13. 00년, 04년 총선에서도 계속 진행된 이런 '탈민정계' 흐름은 16대 국회에 당선된 소위 민정계 의원이 세명(이상득, 박희태, 강재섭)뿐이었다는 것으로 잘 드러난다. 한편 공화계 역시 지역들의 표심 변화로 점차 쇠퇴하게 되어, 17대 국회에서 자민련은 4석의 소수당으로 전락한다. 근데 2010년대엔 민정계도 많이 돌아왔네 누가 그리 될 줄 알았나 영영 은퇴 할 줄 알았지
  14. 이는 수도권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대구 경북에서 자민련과 민정계 축출에 의한 무소속에게 대거 의석을 내준 영향이 크다. 관련 해프닝으로 방송3사의 공동 조사에서 신한국당이 무려 175석을 얻는걸로 나타났지만, 예측이 완전히 빗나면서(실제 결과는 139석)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참고로 1995년 지방선거때 MBC에서 예측보도를 했는데, 이 때는 15개 광역단체장 당선자를 전부 맞혔다.)
  15. 그 다음 총선인 2000년 총선에선 새천년민주당이 원내 1당이 된다는 예측이 등장했으나 이 역시 빗나가면서 출구조사 무용론이 나오게 된다. 이후로도 총선 출구조사 결과는 번번히 망신을 당했고, 반면 대선이나 지방선거의 광역 결과는 매우 잘 맞추는 경향을 보면 표본의 크기 차이 문제라고 봐야한다.
  16. 김영삼이 민정계 색을 지우기 위해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꿨듯 이 역시 이회창 대선후보가 김영삼 색을 지우기 위해 바꾼 것으로 풀이된다.
  17. DJP 연합을 통해 여당 지위를 얻은 새천년 민주당 역시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 이후 분당과 하향세 등 비슷한 수순을 밟았다. 다만 새천년민주당이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것에 비해 한나라당은 여전히 대형정당으로 남았다는 차이점이 있다.
  18. 김재광 국회부의장
  19. 청주-청원 통합 이전의 청원군.
  20. 링크
  21. 프로필
  22. http://ko.wikipedia.org/wiki/%EB%B0%95%ED%9D%AC%ED%83%9C
  23. 구상찬-위키백과
  24. 과반수 확보(194석->149석)에 실패하여 패배로서 여겨졌다. 하지만 민주당도 크게 의석수(75석->97석)를 늘린건 아니고 오히려 제3당인 통일국민당이 선전했다.
  25. JP계가 자유민주연합으로 빠져나갔다는걸 감안하면 비교적 선전한 편이었지만 민주화 + 지방자치제 직후였기에 패배로서 여겨졌다. 특히 서울특별시장 선거 패배와 서울특별시 지역 구청장 선거에서 22곳을 내준 것이 패배의 결정적인 증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