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발

파일:Attachment/변발/Example.jpg
가장 흔히 알려진 만청 후기에 유행한 변발. 음양두라고 한다.

파일:Attachment/GRBB.jpg
거란의 변발



프로이센 육군의 변발 뒤로 길게 땋은 머리는 18세기 유럽 군인들에게 규정된 헤어스타일이었다. 단, 당연히 앞옆윗머리를 밀어버리진 않았다. 그냥 올백 머리가 뒤로 길어진 형태다. 당시 유럽에선 희고 긴 머리가 권위의 상징으로 남녀노소 가발을 착용하곤 했다. 병사들도 즐겨 썼는데 수병들은 이로 인해 고충을 겪기도 했다. 가발 항목 참조. 지금도 홍콩 법정에서도 판사들은 가발을 쓸 정도.

1 개요

중앙아시아 북방의 흉노, 돌궐, 몽골, 여진, 거란, 만주 등 북방 기마민족들의 유서깊은 헤어스타일. 만주어로는 손초호(soncoho), 몽골어로는 캐쿨(kekul) 이라고 한다. 몇몇 아메리카 원주민들이나 고대 이집트인들도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했다.

사실 물이 귀해 머리감기가 어렵고 말타고 달리는데 산발이 되기 쉬운 유목민족들은 이런 변발을 자주했다. 슬라브계 유목민족인 카자크도 비슷한 변발을 했다.

4031738799_62690b039c.jpg

2 상세

앞머리는 깎고 뒷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헤어스타일로 몽골인, 만주족, 여진, 거란, 튀르크 등 몽골계 유목민들의 전통 헤어스타일이다. 거란족은 위의 그림과 같이 양 옆 조금만 남기고 다 밀어버렸으며, 몽골족튀르크인은 앞머리와 좌우 양쪽의 머리를 조금 남긴 후 귀 뒤 2갈래로 길어 늘어놓았다. 여진족, 만주족은 뒷머리의 일부만 남기고 죄다 깎아버린 후 남은 뒷머리를 땋아 길게 늘어놓았다. 굳이 머리를 이렇게 하는 이유는 전쟁시에 편하라고 이렇게 했다는 의견이 대세다. 과거 냉병기 시절 전투는 두꺼운 옷 위에 쇠로된 갑옷을 입고 역시 쇠로 된 투구까지 쓰고 격렬하게 움직이는데, 이때 체온이 급격하게 상승하게 되어 열을 빨리 식히기 위해 머리를 밀었던것. 아무래도 다른 부위에 비해 뇌가 열받으면 훨씬 후유증이 크다는 점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쟁이 잦았던 유목민족들에게도 마찬가지. 사실 변발이 유행했던 지역은 기마민족으로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물을 아끼기 위한 측면도 컸다. 지금도 위구르같은 경우는 모든 남자들이 아예 스킨헤드를 기본 스타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위구르인들도 전통적으로 변발을 해서이다. 터키인의 복식에서 유독 모자가 발달한 이유 역시 변발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터키인 남자들은 머리를 박박 밀고 그 위에 모자를 쓰는게 일반적이어서 터번이나 페스(말총으로 만든 꼬리술이 달린 붉은 모자) 같은 모자가 발달했고, 현재도 터키의 노인들은 대게 민머리이다.

한국에서는 원간섭기 시절에 충렬왕이 변발을 틀고 귀국하면서부터 몽골의 문화가 전파되어 고위층들과 관료들 사이에서 변발과 몽골풍 옷을 입는것이 유행하였고[1]일부 백성들에게까지 변발이 유행하였다. 다만 변발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강제되었던건 아니기에 청나라와는 다르게 대다수의 일반인과 유학자들은 여전히 상투를 틀었으며 공민왕이 왕위에오른 이후로는 고위층들에게 변발을 풀고 다시 상투를 틀도록 명하고 자기 자신도 상투를 틀며 변발의 유행은 1세기도 안가 사그라들었다. 드라마 기황후에서 이 때의 변발의 형태가 제대로 재현되었다. 하라는 내용고증은 안하고

중국을 정복한 거란, 여진, 몽골 등 유목민족들은 이 머리를 한족들에게도 강요했는데, 특히 이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시대에 제일 심했다. 1644년, 순치제는 치발령을 내려 이 머리를 모든 한족들에게 강요했으며 이는 청 대를 이어가며 중국의 풍속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치발령이 떨어질 당시에는 아직 남명과 같은 명나라의 잔존 세력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자존심 강한 한족들은 야만족의 풍습을 따를 수 없다면서 전국 각지에서 엄청난 반발을 일으켰다. 게다가 머리를 한 가닥만 남긴다는 자체가 조선의 유생들이 단발령에 반발한 것 처럼 유교의 "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에 완전히 대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특히 보수적 경향이 강했던 양쯔강 이남에서 가장 극심하게 반발했는데, 이 때문에 본보기로 성 하나를 전부 도륙한다는 도성(屠城)을 시행해 양주 대학살과 가정삼도가 일어났다. 서양에서는 이런 모습이 기묘해 보였는데 보통 '돼지꼬리(변발을 말한다.)를 거부하면 죽음을 당했다'이라는 식으로 언급하곤 했다.

청나라는 산해관 입관 후 이듬 해 남명 정권을 붕괴시키고 명나라 영토 대부분을 석권하자 전국에 변발령을 내리면서 "'머리를 남기려면 머리털을 남기지 말고(留頭不留髮), 머리털을 남기면 머리를 남겨 두지 않겠다(留髮不留頭)"'고 선언하였는데, 이는 단순한 엄포가 아닌, 말 그대로 '천명'이었으며, 이에 불응하는 것은 천명에 거스르는 반역 행위로 간주되었다. 청나라는 변발령을 결연한 의지로 밀어붙여 체발(剃髮)에 불응하는 자가 새벽에 잡혀 오면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저녁에 잡혀 오면 저녁 해가 지기 전에 가차없이 처단하였고, 변발령에 저항하여 일어난 봉기들을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한편 변발령을 집행하는 관리가 마을을 방문할 때 체발 도구와 함께 먼저 거쳐 온 마을에서 체발에 저항하다 참수된 자들의 수급을 다발로 엮어서 가지고 왔다고도 하며, 고을 안에 변발을 하지 않은 자가 하나라도 있으면 그 고을의 관원들도 한 묶음으로 처벌되었다고 한다.

또한 비록 체발을 했더라도 규정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면 역시 처벌되었는데, 위의 사진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앞머리를 체발하고 뒷머리를 남겨 놓은 소위 음양두(陰陽頭)는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서야 등장한 것으로서, 원래 변발은 동전 크기만한 면적의 머리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체발하는 소위 금전서미(金錢鼠尾)로 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니까 머리는 동전 크기만 남기고 모두 체발하며, 남겨 놓은 머리를 땋았을 때 그 굵기가 쥐꼬리와 같이 얇아서, 동전을 꿰는 구멍을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되어야 했다. 금전서미(金錢鼠尾)의 뜻 자체가 금전(金錢)이 동전을 뜻하고, 서미(鼠尾)는 쥐꼬리를 뜻한다.

Manchuhairstyle.jpg
이렇게 해야 한다. 서미라는 말 그대로 쥐꼬리와 닮았다.

파일:/20150208 122/kyunghee9226 1423324756168Vzu4a JPEG/7be0a43e35c589b9838b1308 yasisikim79.jpg
황제의 딸의 등장인물들. 후기의 음양두를 했다.

오늘날 중국에서 제작된 청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을 보면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시절 남자들의 머리 모양이 당시의 금전서미가 아닌 청 말기에 나타난 음양두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만일 진짜로 그들 시대에 음양두를 하고 있었다면 당장에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차라리 강철의 연금술사에 등장하는 버커니어 대위의 머리 스타일이 원래의 변발에 가깝다. 한편 이러한 변발령에서 예외인 자들이 딱 하나 있었는데, 그들은 다름아닌 '승려'들이었다. 때문에 변발을 피해 승려가 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비교적 종교에는 관대한 유목민 왕조의 특징인지 일부 도사들도 제외되었다고 한다. 만약 청나라 시대, 그것도 한창 변발 보급하던 초창기가 아니라 변발이 정착된 시기가 배경인 사극에서 예전 한족 옷을 입고 속발을 한 사람이 나온다면 그 사람은 무조건 도사다.[2]

대머리의 경우 가짜 변발이라도 붙여야 했다. 사실 아예 머리털이 없는 사람은 극소수고 대다수의 탈모가 있는 사람들은 정수리와 앞머리가 없으니 뒷머리만 길러서 땋으면 되었다. 다만 무모증같이 진짜로 없으면 가발을 써야 했다.

f_3301536_1.jpg
다운그레이드

전투적인 머리모양이지만 후기에 유행한 음양두는 오히려 약점이 되기도 한 듯. '변발을 잡히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이래서 군인같은 경우 초~중기의 변발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처음에는 이렇듯 엄청난 반발이 있었는데, 변발을 행한지 몇백여년 간의 오랜세월이 흐른 까닭에 점차 '역시 남자라면 변발이 멋져야 함'같은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변발을 전문으로 가꿔주는 직업이 등장하는 등 한족들, 특히 화북 지역 중국인들의 경우 만주족들의 풍습처럼 중히 여기게 된다. 그래서 신해혁명을 전후로 혁명의 의미로 변발을 자르고 민간에도 '변발금지령'을 내렸는데 여기에 대해서 다시 저항이 있어 가위를 들고 변발을 잘라가는 광경이 연출되었다고 한다(...). 북방민족에 동화된 일부 지식인들과 변발이 전통 한족의 풍습이 아니란 걸 몰랐던 일반인들이 '변발은 우리의 조상이 물려준 소중한 것이므로 자를 수 없다.'같은 주장으로 반발했다고 한다(...). 화남 지역이 예로부터 한족 전통문화가 강하게 남아있었고 그에 따라 청나라 초기의 변발령이 화남 지역에서 특히 반발이 심했으며 반청복명사상도 화남 지역에 기반을 둔 반면, 화북 지역 한족들은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예로부터 북방 유목민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3] 그에 따라 다른 지역 한족들에 비해 변발에 적응하는 속도도 상대적으로 빨랐기 때문에, 변발령과는 반대로 화북 지역에서 특히 반발이 심했다. 사실 이런 식으로 변발을 멋지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거의 현대 초기에까지 내려오다 보니 변발이 폐지된 뒤에도 아예 머리를 그냥 밀어버리는 사람들이 속출했고 지금도 중국에서는 민머리(꽝터우, 光头)에 대한 인식이 한국보다 비교적 좋은 편이다.(##) 한족 민족주의자들에겐 자국의 안타까운 현실일지도 탁발승 시절을 부끄럽게 여겨 빛 광(光) 자를 쓴 사람들을 모조리 문자의 옥으로 처형한 주원장에겐 더더욱 안타까운 일일 것 같다

파일:Attachment/Byeonbal1.jpg
19세기 말 청나라 사람들의 미국 이주가 활발해졌는데, 미국인들은 중국인의 변발을 보고 돼지 꼬리(pig tail)라며 쥐꼬리인데조롱했다..능지처참과 마찬가지로 이런 머리를 하는 중국인은 야만적이므로 우리가 개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널리 이용되기도 했다. 쑨원 등의 혁명가들은 외국인 친구들에게 변발은 원래 중국의 풍습이 아니라고 설명하며 오해를 풀고 다녔다고 한다. 극단적인 경우 원래 한족의 상투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현재 중국에서는 과거 한족이 어떻게 머리를 묶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변발로 대체되는 과정과 더불어 문화대혁명으로 완전히 실전(...)된 탓이다.

파일:Attachment/Byeonbal2.jpg
오늘날 중국에서는 아무래도 전통 한족의 문화는 아닌데다가 비주얼적(...)으로 좀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에서도 변발을 비난하는 중국인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얼른 변발같은 유목민족의 풍습이 아니라 전통 한족의 모습으로 중국의 이미지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4]
비슷한 유래로 위와 같은 일본식 상투촌마게가 있다. 촌마게도 변발의 일종으로 분류하는 구분법도 있다. 그러나 촌마게는 보통 변발이라기보다는 상투라 구분짓는다.

3 그 외

중국에서 청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드라마를 찍을 때 어설프게 대머리 가발을 씌우지 않고 진짜로 머리를 삭발한 다음 그 위에 변발을 씌운다. 황제의 딸을 보면 얼마나 빡빡 밀었는지 머리에서 광이 날 정도.(...) 최근에는 분장기술이 발달해서 머리를 박박밀지 않고도 변발효과를 내는 특수가발이 개발되었다. 최근에 나오는 중국드라마를 보면 이런 가발을 쓰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중국 남자배우들은 청나라 시대 사극을 찍는걸 꺼려할 정도로 변발이 중국 남자 배우들에게 주는 마음의 상처는 크다(...) 이례적으로 이연걸처럼 변발이 잘 어울리는 배우들이 있기는 하지만 비주얼의 50% 정도를 날려버리기 때문에 젊은 남자 배우들이라면 청대 사극 찍기 전에 고민 좀 한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중국, 일본[5]과 달리 한국의 경우 스님 역할을 제외하면 삭발할 일이 없다.

장철 감독의 영화 자마<<刺馬>>[6] 에서는 머리를 밀지 않고 그냥 땋은 정도로 우리의 댕기머리와 상당히 비슷한 변발을 등장시키는 상당한 혁명(?)을 했다. 사실, 그 당시까지는 만주인의 청나라 자체가 재평가받기 전이라 부정적인 이미지인데다 비주얼(...)도 좀 그런 탓에 아예 변발이 등장하는 자체가 선호받지 못했다. 등장하더라도 악당의 상징. 청나라가 중국사극의 단골배경이 된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시간적으로는 청나라일 작품을 보면 변발을 있던 듯 없던 듯 왠지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 변발 같은 게 있던 것 같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어 민국시대스런 비주얼이다. 사실 고증을 별로 신경쓰지 않았 던듯도 한데 이소룡정무문이나 성룡취권이 이런 예.[7] 시간적 배경은 청나라말기인데 비주얼은 굉장히 민국스럽(?)다. 어쨌든 이런 암묵적인 징크스를 최초로 깬 작품인 셈. 이 비주얼과 나름의 고증을 동시에 가지는 시도는 제법 성공해서 이후 80년대 청나라 시대극을 이러한 순화 변발(...)로 찍는 게 유행했다. 그리고 청나라 배경의 시대극도 조금씩 흥하기 시작한다. 이소룡이 찍을 뻔 했던 연갱요도 '자마'의 영향을 받았는데, 돌아다니는 스틸컷의 의상이 바로 자마 촬영에서 적룡이 입었던 것. 이 시기의 무협물들이 일본에서도 인기를 끌며 일본 만화에도 영향을 줘 무술만화가 유행하거나 인기소재가 되었고, 이미지를 정착시켜서 일본 작품에서 이러한 순화 변발(...)을 차용한 중국풍 캐릭터를 제법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란마 등이 있을 듯.

이후 90년대에는 서극 감독의 황비홍의 음양두가 엄청난 임팩트를 선사한다(...)

최근까지도 쉽게 볼 수 있던 중국의 거리 이발사는 청나라 때 변발을 깎으려고 파견한 하급관리에서 유래했다는 얘기도 있다.

한국도 사실 변발의 일종을 하긴 했다. 상투를 틀때 가지런한 모양을 잡기 위해서, 그리고 더 실용적으로 보자면 더운 여름에 조금이라도 시원하고자, 정수리 부분을 짧게 깎았다. 하지만 상투를 튼 상태에선 잘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손바닥 면적의 반도 안되게 밀었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도 않았다. 이를 백호친다라고 말했다.

중상주의 실학자로 유명한 연암 박지원은 변발과 관련해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처음 청태종이 조선의 항복을 받고 난 뒤에 청에 투항한 한족 관리들이 나서서 "조선인들도 한족한테 하는 것처럼 변발시키고 조선풍 의복도 금지시켜야 된다"고 주장했는데,물귀신 작전 쩐다 청태종은 묵묵부답으로 있다가 "조선 애들은 예법이라는 것에 목숨 거는 애들이잖아? 지금 쟤들한테 머리 깎고 옷 소매 좁은 걸로 바꿔 입으라고 하면 더 날뛸지도 모르지. 그리고 재들이 옷이나 머리 모양 같은 예법을 버리고 편하게 옷 입게 되면 쓸데없이 실용 같은 다른 것에 눈 돌릴지도 모르는데, 그냥 지금 쟤들 하는 대로 치렁치렁한 넓은 소매나 상투에 목숨 걸면서 예법 예법 따지느라 실용 같은 것은 말도 못 꺼내는 저런 식으로 살게 놔두자구."라고 했다고. 연암의 글은 물론 소중화에 물들어 고루한 예법에 얽매여 사는 조선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서 쓴 것이므로 사실여부는 알아서 걸러 듣자.

4 이 속성을 가진 캐릭터

4.1 가상인물

  1. 물론 초기에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라는 반응이 지배적이라서 충렬왕의 모습을 직접 본 백성들 가운데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으며 신하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쏟아질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졌는지 일부 백성들 사이에서도 몽골풍 복장을 하고다니거나 변발이 유행하기도 했다.
  2. 영화 무인 곽원갑에서도 중간에 순식간에 지나가긴 하지만 도사로 추정되는, 변발이 아닌 속발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드라마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민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어떤 드라마에도 다른 남자들은 다 단발을 하고 있는데 도사인 듯 유독 혼자서 속발을 한 사람이 나와 뭐라뭐라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런 게 괜히 나온 것일 리도 없고...비록 속발이 청에 의해 금지되고 일부 도사에게만 허용되긴 했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의외로 변발이 없어진 것보다 더 뒤일지도 모르겠다.
  3. 당장 화북지역 한족들은 유전적으로 몽골인들과 비슷하며 동북 3성 한족들은 유전적으로 만주족과 비슷하다.
  4. 어찌보면 한족 민족주의 지식인들 입장에서는 절대 치부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자민족의 헤어가 아닌 오랑캐의 헤어가 한족의 것으로 외국에 알려져 있으니(...)
  5. 여기도 촌마게라는 특유의 전통 머리모양 때문에 역사극 찍는 남성배우들이 머리를 밀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6. 진가신 감독의 영화 명장의 원작격
  7. 이 두 작품의 주인공은 각각 곽원갑제자와 아무도 신경쓰지도 않고 아무래도 상관없고 알지도 않지만 황비홍이다(...)
  8. 현대 버젼. 여자애인데... 차라리 만두머리로 하는 게 어땠을까?
  9. 로봇이므로 정확히는 변발 모양의 머리부품. 중국 출신 로봇이라서 협화어를 쓴다.
  10. 실제로는 프로토스 종족 특유의 텔레파시 기능을 담당하는 신경삭이지만 얼핏 보면 변발처럼 보인다.
  11. 근데 사복 차림에서는 앞머리가 생겼다. 어?
  12. 정작 주연 인물들은 변발을 하지 않았다. 특히 루오대사(만사통)의 경우 한푸에 전형적인 명나라 행색을 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잘못 걸리면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는 행색이다. 루오대사가 도사였다면 고증오류가 아니었겠지만 도사가 아닌 다른 직업(요리사)이므로 엄연히 고증오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