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묜 부됸늬

소련군 원수
육군
●1
알렉산드르 예고로프클리멘트 보로실로프P미하일 투하쳅스키세묜 부됸늬바실리 블류헤르
세묜 티모셴코보리스 샤포슈니코프그리고리 쿨리크게오르기 주코프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이오시프 스탈린P이반 코네프레오니트 고보로프콘스탄틴 로코솝스키로디온 말리놉스키
표도르 톨부힌키릴 메레츠코프라브렌티 베리야N바실리 소콜롭스키니콜라이 불가닌P
안드레이 예레멘코키릴 모스칼렌코SRF바실리 추이코프세르게이 비류조프AD, SRF이반 바그라먄
마트베이 자하로프필리프 골리코프니콜라이 크릴로프SRF표트르 코셰보이파벨 바티츠키AD
레오니드 브레즈네프P드미트리 우스티노프니콜라이 오가르코프빅토르 쿨리코프세르게이 소콜로프
바실리 페트로프세묜 쿠르콧킨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드미트리 야조프
해군
●2
니콜라이 쿠즈네초프이반 이사코프세르게이 고르시코프
공군
●3
알렉산드르 노비코프알렉산드르 고로바노프파벨 지가레프콘스탄틴 벨쉬닌파벨 쿠타코프
보리스 부가에프알렉산드르 콜두노프
 : 소비에트연방 초기 5원수
 : 전간기 ~ 제2차 세계대전(~1945년 8월) 중 진급
 : 냉전 시기 진급
P : 정치장교, AD : 방공군, SRF : 전략로켓군, N : NKVD
● 1 : 전원 소비에트연방원수(Marshals of the Soviet Union). 스탈린은 대원수.
● 2 : 소비에트연방 함대사령관(Admiral of the fleet of the Soviet Union)
● 3 : 공군(항공원수)은 병과상원수(Chief marshal of the branch, 상급대장에 상응)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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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저 멋진 콧수염은 내전 시기부터 그의 대표적인 트레이드마크였다.
스탈린: 요원 동지, 자넨 방금 "멍청한 콧수염쟁이"를 누구라고 생각했소? 요원: 부됸늬 동무입니다.

1 개요

이름러시아어 : Семён Миха́йлович Будённый
영어 :Semyon Mikhailovich Budyonny
한국어 : 세묜 미하일로비치 부됸니
출생1883년 4월 25일, 러시아 제국
사망1973년 10월 26일, 소련 모스크바
복무러시아 제국군(1903년 ~ 1917년)
소련군(1922년 ~ 1973년)
최종 계급육군 원수
주요 참전제1차 세계대전
적백내전
소련-폴란드 전쟁
독소전쟁
주요 서훈소비에트연방영웅 3회
레닌훈장 8회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소전쟁까지 활약한 소련군 군인이다. 초기 소련군의 대표적인 보수파로 알려져 있으며 독소전쟁 초반에 남부전선군 사령관을 맡았다가 키예프 포위전에서 대패하였다.

2 이름에 관련하여

표기가 다양하다. 부됸니, 부죤늬, 부데니 등등. 원어에 가장 가까운 발음을 굳이 꼽자면 '부존늬이'.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부됸니'이다. ㅢ라는 표기 자체가 외래어 표기법상 허용되지 않기 때문.

러시아어의 ё는 우리말로 '요'의 발음이 나는데, е로 쓰이는 경우가 잦기 때문에 '에'로 옮겨 부데니라는 오역이 나오기도 했고,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에서 발간한 세계전쟁사에서도 마찬가지로 표기했다. 안습.

3 생애

3.1 젊은 시절

기마 민족인 카자크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진짜 카자크는 아니고 그냥 카자크 마을에서 자랐다고 한다. 스무 살 때까지는 농부로 일했지만, 을 굉장히 좋아해 잘 부리고 잘 탔다.


1903년, 날리던 시절.소련 이후에 사진이다. 진짜 1903년이라면 어떻게 적기훈장이 있겠는가? 더구나 저게 20살의 얼굴이라면... 안습

1904년,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에 징집되어 드라군으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나고도 계속 군에 남아 있었고, 1907년에는 뛰어난 기마술 덕분에 병사에서 부사관으로 올라갔다.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기병학교를 졸업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때는 엘리트 드라군 연대상사였으며, 서부전선[1]에서 카자크들로 이뤄진 기병을 이끌고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다. 이후 캅카스 전선에 파견되어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도 용맹을 보여 성 게오르기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용맹했을 뿐만 아니라 인품도 훌륭해서 병사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그런데 병사에게 가혹행위를 하던 선임 부사관과 언쟁을 벌이다가 화를 못 참아 병사들 앞에서 싸웠고, 이후 상관에게 불려가 심문을 받았다. 병사들은 부됸니에게 유리한 증언을 했지만 부됸니는 결국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박탈당했다. 하지만 부됸니에 대한 징계는 이 훈장 박탈로 끝났고, 상관도 그의 군사적 재능을 무시할 수는 없어서 군법회의에 회부하지는 않았다.

이후의 전투에서도 용맹을 떨쳐 다시 성 게오르기 훈장을 급수별(1~4급)로 4개 더 받았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러시아군은 독일군에게 연패해 거의 그로기 상태였고, 결국 지휘 계통이 무너지자 병사들은 스스로 소비에트(평의회)를 구성하고 투표로 지휘관을 선임했다. 병사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던 그는 당장 지휘관에 선임되었고, 이때부터 그는 좌경화되어 공산주의 지도자가 되었다. 1919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하였으며 이 때 스탈린, 보로실로프와 친구가 되었는데, 이것이 훗날 정치적 출세와 보신의 지름길이 되었다.

3.2 적백내전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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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크 기병 삘이 나는 사진. 붉은 군대 초창기 때 촬영된 모습이다. 왼쪽으로부터 보로실로프, 부됸니, 세묜 티모셴코.

부됸니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새롭게 구성된 붉은 군대에 가담하여 제1기병군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곧 내전에서 큰 활약을 했다. 이 때 폴란드군이 막장크리를 타고 있던 러시아를 쳐서 영토를 넓히려고 침공하자, 부됸니의 부대는 이에 맞서 싸웠다. 부됸니는 처음에는 승기를 타고 폴란드군을 격파하면서 폴란드 영내까지 진입했지만, 크라쿠프에서 대패하고 다시 소련 영내로 후퇴하였다. 이 소련-폴란드 전쟁은 대체로 기병으로 승부가 갈렸으며, 이 때문에 양국이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기병에 집착하게 되는 나쁜 영향을 끼쳤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 때 폴란드 기병의 삽질은 유명하며[2] 부됸니도 이후 투하쳅스키의 군 기계화를 강하게 반대했다. 전차에 창기병이 돌격했다는 건 과장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폴란드가 기병을 매우 중시한 건 확실하다. 물론 폴란드의 경우 아직 국가 공업화가 미진해서 기병을 차선으로 택한 것이다. 반면 뷰됸니는 소련이 공업화를 이뤘고 전차를 생산할 수 있음에도 기병을 고집했지만.[3]

어쨌든 부됸니가 이끄는 붉은 군대 제1기병군의 명성은 당시 신화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하일 숄로호프가 쓴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소설 '고요한 돈강'에도 잘 묘사된다. 그리고 부됸니를 우상화하는 군가들이 작곡되기도 했고, 붉은 군대가 쓰던 뾰족모자는 그의 이름이 붙어 부됸노프카라고 불렸다.

3.3 전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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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병영에서. 슈퍼 마리오

내전이 끝나자 부됸니는 북캅카스 군관구 사령관을 시작으로 여러 군관구들의 사령관을 역임했다. 기병 전문가답게 그는 기병에 관련된 여러가지 장비나 말의 종자 개선에 많은 공헌을 했으며, 1924년부터는 기병총감을 맡아서 전반적인 기병을 감독하였다. 이렇게 기병에 큰 공을 들이는건 좋았는데, 문제는 기병이 이제는 시대에 뒤떨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붉은 군대에는 기병 대신 기갑부대가 전장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것을 내다보고 기계화를 추진한 선견적인 이론가들이 많았지만 부됸니는 이를 크게 반대해 수시로 제동을 걸었고 결국 소련군 현대화의 장애물이 되었다.

1935년 붉은 군대에 다시 계급제도가 부활되자 부됸니는 보로실로프, 투하쳅스키, 예고로프, 블류헤르와 함께 소련 원수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들 중 투하쳅스키와 예고로프, 블류헤르는 1937~1938년의 대숙청 기간 중 처형되었고, 부됸니와 보로실로프만이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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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1월 11일 촬영.

사실 부됸니도 대숙청을 총지휘했던 NKVD 부장 니콜라이 예조프의 마수에 걸려 숙청 대상에 올랐지만 NKVD 요원들이 사무실을 덮치자 이들과 완력으로 맞섰다. 당시 그의 나이 56세(...) 괜히 전설의 장군이 아니라구! 그리고 그들이 주춤하는 사이 잽싸게 스탈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를 받은 스탈린이 "아, 그건 오해다."라며 간단히 그 자리에서 혐의를 풀어줘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3.4 키예프에서 벌인 병크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독일 남부집단군에 맞서는 소련 남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당시 세 군데에서 독소의 '원수 대 원수의 빅매치'가 펼쳐졌는데, 북부에서는 레브 대 보로실로프, 중부에서는 보크 대 티모셴코, 남부에서는 룬트슈테트 대 부됸니였다.

남서전선군은 독일군 남부집단군의 전진 속도를 늦추는 등 처음에 다른 두 곳에 비해 선전했다. 그러나 이는 부됸니가 잘 지휘해서가 아니라 키예프 군관구 전임 사령관이었던 게오르기 주코프가 독일군의 침공을 내다보고 엄격한 훈련으로 좋은 부대를 많이 양성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독일 남부집단군은 계속 전진하면서도 다른 집단군들에 비해 큰 피해를 입었고, 룬트슈테트는 이후 이 때의 책임을 물어 파면되었다.

히틀러는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 보다는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스크바보다도 우크라이나의 중심지인 키예프를 먼저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모스크바를 목전에 두고 있던 중부집단군의 전진을 정지시키고 산하 부대의 일부를 남부집단군에 보냈다. 여기에 대해서 전후에 살아남은 독일군 장군들은 히틀러의 오판이라고 주장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만약 그렇게 전진했을 경우 독일군의 우측면이 소련군의 남부집단군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므로, 히틀러의 판단이 옳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쨌든 키예프 포위전은 모스크바 방어를 준비할 시간을 벌어줬다는 점에서 전술적으로는 소련군의 대패로 끝났지만, 전략적으로는 독일에게 해가 되었고 소련에게 유리했다.

1941년 9월 독일 육군 사령부는 기동의 대가인 하인츠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을 중부집단군에서 빼내 남부집단군으로 임시 전속시켰고, 클라이스트의 제1기갑집단과 큰 반원을 그리며 키예프를 포위하도록 했다. 하지만 부됸니는 스탈린의 명령대로 현재 위치만 고수하는 데 급급했고, 독일 기갑군의 고속기동에 손놓고 있는 병크를 범했다. 당시 소련군의 병력이 60만이었고, 독일군이 50만이었음을 감안하면 더 많은 병력에도 당한 어처구니 없는 경우였다. 하지만 이 실책은 거듭된 후퇴 요청을 물리치고 위치 고수를 하라는 명령을 내린 스탈린의 병크이기도 하다.

부됸니는 포위되어 절망적인 상황이 되자 9월 13일 스탈린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전화를 걸었고 스탈린은 화를 내면서 그를 파면했다. 부됸니는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도망쳤고, 뒤에 남겨진 부대는 남서전선군 사령관 미하일 키르포노스 상장이 지휘했다. 하지만 키르포노스는 포위망을 뚫고 부대를 탈출시키려다가 9월 20일 전사했고,[4] 이후 남겨진 부대는 지휘관 없이 우왕좌왕하다가 독일군에게 섬멸당해 60만의 포로를 남기며 대패했다.

스탈린은 당시 스몰렌스크 근방에서 비슷한 규모의 패배를 당한 드미트리 파블로프 대장총살형에 처한 것과 달리 이 옛 친구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이런 구시대적 인물이 야전 지휘를 맡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부됸니를 제1선에 내세우지 않았다. 늦었지만 그걸 알아서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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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군복 예장 촬영 때.

이후 부됸니는 남은 전쟁 기간을 후방에서 상징적인 직위만 가지고 보내다가 종전을 맞았다. 처음부터 그랬으면 좋았을 것을. 이후 농업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고, 이 때도 새로운 말의 종자 개선에 큰 힘을 쏟았다. 꽤 장수하여 90살까지 살았고, 다섯 권이나 되는 회고록을 남겼다. 회고록의 대부분은 적백내전을 다루고 있다. 2차대전 당시의 병크야 그렇다 치더라도, 어쨋든 이 시기 정도 가면 기껏해야 동네 먹물들이 빼돌린 총폭탄 몇개 들고 일어난 걸로 시작하여 세계를 양분하는 백만대군 붉은 군대의 살아 있는 역사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큰 명예와 함께 살아 있는 군사사 박물관으로 대접받았다. 물론 명예만 많았다는 점은 일단 제껴두고(...).

4 평가

보로실로프와 함께 근대전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이 스탈린과의 친분만으로 승진한 무능한 소련군 수뇌부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키예프에서의 병크는 어떠한 변명으로도 덮을 수가 없는 사례. 대표적인 표현이 바로 "말 엉덩이만 아는 사람". 그나마 보로실로프에 비하면 무척 나은 편으로, 보로실로프는 아예 '아무 쓸모도 없는 자'라고 까였다. 그리고 부됸니 입장에서는 사실 이런 비교 자체가 억울한게, 기병이라는 자신의 전공 분야 안에서는 부됸니는 확실히 세계구급의 전문가였다. 군사적 능력은 아무 것도 없었던 보로실로프와 달리 부됸니는 원래 자기 위치 안에서는 밥값을 확실하게 하면서 성장한 인물이고, 그의 비극은 기병이라는 그 전공 분야 자체가 도태되었던 것인데 이건 그걸 알면서도 쓸데없이 그를 중용한 스탈린의 책임이 더 크다.

그러나 적백내전에서 세운 전공으로 소련을 건국하는데 큰 기여를 했으므로, 부됸니는 이런 큰 패배에도 계속 소련의 국가적 영웅으로 남아있었다. 운동선수라고 치면 전형적인 국내용. 그 때문인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3회 수훈했다.

후배 원수이자, 실질적으로 독소전쟁의 승리를 이끈 주코프와 이반 코네프의 회고록에서도 부됸니에 대한 평가는 대개 부정적이다. 그래도 코네프는 부됸니가 전혀 발전이 없었다고 완전 혹평을 한데 반해서, 주코프는 그래도 그의 근무 태도나 성실성에는 후한 점수를 줬다고 한다. 용맹함이나 지휘력이나 병사들의 지지로 지휘관에 올라간 것도 그렇고 군인으로써 자질은 있었지만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군인. 차라리 더 일찍 태어났거나 더 늦게 태어나는 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키에프에서의 패배는 후퇴도 부대이동도 인정않고 막으라고만 명령한 스탈린의 책임도 있다 절대 무능하지 않은 기병장교인 세묜 부됸늬가 설마 우회기동의 무서움을 모를리도 없다 그게 기갑이 생기기전 부터의 기병의 역활이기도 했으니

결혼을 3번이나 했는데, 앞의 두 결혼이 아주 드센 대졸 맞벌이 여성과 결혼하면서 엄청난 불화를 일으켰던 반면, 마지막 결혼에서는 아내가 아주 온순한 고졸 전업주부였기 덕분에 아주 평온한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세 번째 부인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한때 맞벌이를 고려했지만, 남편의 만류로 육아에 전념한 덕택에 스탈린의 호감을 샀고, 그녀의 남편은 언젠가 관사에서 나가야 할 때에 대비해 휴일과 휴가를 활용하여 별장과 텃밭을 마련하는 일에 전념한 덕택에 부부가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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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느 집안 할아버지들이 그렇듯이 손주들에게는 따뜻한 할아버지. 1965년의 사진이다.
  1. 독일에게는 동부전선
  2. 하지만 이는 과장되어 독일에서 프로파간다로 써먹힌 이야기로, 실제로 폴란드 기병은 2차대전 당시 이미 반쯤 기계화부대로 변모해 차량과 기관총 등을 충분히 갖춘 부대였고(애초에 폴란드에서 기병은 상당한 엘리트 부대이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 내려져온다), 말을 탄 기병들은 주로 정찰을 위주로 하거나 독일군이 화력지원없이 보병들만 있을 때나 기습돌격을 감행했다고 한다. 프로파간다로 쓰인 독일군 기갑부대를 향한 기병돌격도 사실은 적 보병을 향해 돌격한 것이었는데, 옆에 있던 숲에 매복해있던 전차부대에 걸려서 전멸한 것이다.
  3. 그나마 이것도 적백내전 이후 자본주의 국가에 포위되어 있다는 소련의 공포심이 낳은 결과였다. 당시 소련은 경공업이고 농업이고 싸그리 팽개치고 중공업에 모든 능력을 몰빵했고, 그 결과는 소련 중공업의 기형적인 발전과 홀로도모르라는 대참사였다.
  4. 포로가 될 것을 우려해 자살했다는 설도 있으며, 독소전쟁에서 전사한 소련 장성들 중 한 사람이다. 다른 장성급 전사자로는 1944년에 우크라이나 반소 게릴라에게 저격당한 니콜라이 바투틴 대장과 1945년에 독일군을 추격하다가 전사한 이반 체르냐홉스키 대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