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기 주코프

소련군 원수
육군
●1
알렉산드르 예고로프클리멘트 보로실로프P미하일 투하쳅스키세묜 부됸늬바실리 블류헤르
세묜 티모셴코보리스 샤포슈니코프그리고리 쿨리크게오르기 주코프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이오시프 스탈린P이반 코네프레오니트 고보로프콘스탄틴 로코솝스키로디온 말리놉스키
표도르 톨부힌키릴 메레츠코프라브렌티 베리야N바실리 소콜롭스키니콜라이 불가닌P
안드레이 예레멘코키릴 모스칼렌코SRF바실리 추이코프세르게이 비류조프AD, SRF이반 바그라먄
마트베이 자하로프필리프 골리코프니콜라이 크릴로프SRF표트르 코셰보이파벨 바티츠키AD
레오니드 브레즈네프P드미트리 우스티노프니콜라이 오가르코프빅토르 쿨리코프세르게이 소콜로프
바실리 페트로프세묜 쿠르콧킨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드미트리 야조프
해군
●2
니콜라이 쿠즈네초프이반 이사코프세르게이 고르시코프
공군
●3
알렉산드르 노비코프알렉산드르 고로바노프파벨 지가레프콘스탄틴 벨쉬닌파벨 쿠타코프
보리스 부가에프알렉산드르 콜두노프
 : 소비에트연방 초기 5원수
 : 전간기 ~ 제2차 세계대전(~1945년 8월) 중 진급
 : 냉전 시기 진급
P : 정치장교, AD : 방공군, SRF : 전략로켓군, N : NKVD
● 1 : 전원 소비에트연방원수(Marshals of the Soviet Union). 스탈린은 대원수.
● 2 : 소비에트연방 함대사령관(Admiral of the fleet of the Soviet Union)
● 3 : 공군(항공원수)은 병과상원수(Chief marshal of the branch, 상급대장에 상응)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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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러시아어: Гео́рг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Жу́ков
영어: Georgy Konstantinovich Zhukov
한국어: 게오르기 콘스탄티노비치 주코프
출생1896년 12월 1일, 러시아 제국
사망1974년 6월 18일,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복무러시아 제국군(1914-1917)
소련군(1917–1957)
최종 계급육군 원수
주요 보직소련군 총군부사령관
주요 참전적백내전
할힌골 전투
레닌그라드 공방전
모스크바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
베를린 전투
주요 서훈소비에트연방영웅 4회
전승훈장 2회

1 개요

사실상 독소전쟁의 주역이자 러시아군, 소련군 역사상 최고의 장군 가운데 한 명.
왼쪽 가슴 위쪽의 소비에트연방영웅 4개, 그 밑의 전승훈장 2개로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소전쟁에서 맹활약한 소련군육군 장성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독소전쟁에 참전한 소련군 장성 중에서 가장 빛나는 공훈을 세우고 소련의 전쟁 승리에 크게 기여한 명장이다. 소련군 장성 중에서 가장 널리 이름을 알린 사람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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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5월경 입대 바로 직전 촬영한 청년 시절의 사진 오오 저 우람한 턱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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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제국군 부사관 시절의 주코프.[1]

1896년 12월 1일, 모스크바 근교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2] 집안 사정으로 초등 교육만 받았다고 하며, 당시의 여러 가난한 가정 출신 아이들처럼 제화공의 도제로 들어갔지만, 하루 12시간 이상의 중노동에도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일한 지 몇 년 뒤 도제를 벗어나 장인이 되었는데, 1916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병사로 징집되었다. 그러나 신병 훈련소에서 성적이 탁월했기 때문에 바로 훈련소 수료후 자대 배치 대신 추천을 받아 기병 부사관 학교에 들어갔다. 역시 장군이 될 사람은 훈련병 시절부터 다르다

이후 동부전선에 기병으로 배치되었고, 용맹을 발휘해 게오르기 십자 훈장 등 적잖은 무공 훈장을 받았다. 10월 혁명이 발발하자 러시아 제국군은 해체되었고, 주코프는 전선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티푸스에 걸려 1년 간 요양해야 했고, 회복된 후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붉은 군대에 부사관으로 입대하였다. 입대 후 적백내전에 참전해 여러 전공을 올렸다.

그런데 이 시기에 자신과 똑같은 주코프라는 성을 가진 정치장교가 같은 이름을 가진 그를 주목했고, 근무 성적이나 출신 성분도 우수했기 때문에 사관학교에 시험보라고 권유했다. 주코프는 가방끈이 짧아서 별 기대 안하고 봤는데 덜컥 합격했고, 이후 1년간 교육을 받은 뒤 장교로 임관했다. 처음에는 소대장으로 일선에서 활약하며 각지의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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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병 지휘관 학교(이후의 프룬제 군사대학) 1924/25 기수 졸업 당시의 촬영 사진. 2번째 줄 왼쪽에서 2번째가 주코프,[3] 6번째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1번째 줄 오른쪽에서 1번째가 이반 홉하네스 바그라먄, 3번째가 안드레이 예료멘코. 이 4명은 모두 원수까지 진급했다.

1925년에는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이었던 독일과의 군사 협력의 일환으로 독일군 장교들과 교환 연수를 갔는데, 이때 소련으로 맞교환 연수를 갔다 온 독일 장교가 다름 아닌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었다(!). 간혹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는 말이 밀덕에게 와 닿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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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세의 주코프.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와는 달리 벌써 망가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점점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에 점점 승진했고, 30대에 기병 여단장까지 승진했다.[4] 그리고 고급 장교 코스[5]에서 공부했다. 이 시기에 소련군 종심작전 이론의 창시자인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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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 34세의 주코프. 회춘하셨네

1938년 군부에 불어닥친 대숙청의 피바람을 무사히 넘긴 후, 야전 사령관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여단장~사단장급 장교들이 대대적으로 군단장급~군관구 사령관급으로 승진했는데, 그 덕분에 그도 벨라루스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다. 이때의 계급이 상장(한국군중장)이었다.

주코프는 엄격한 훈련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여러 기동 훈련에서 우수한 지휘력을 보였기 때문에 곧 소련군 수뇌부에서도 그를 주목하게 되었다.

2.2 할힌골 전투에서 화려하게 데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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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년 42세의 주코프.

1939년 5월 몽골-만주 접경 지역에서 소련군과 일본군 관동군은 산발적인 교전을 벌였고, 이 시기에 벌어진 일련의 전투는 훗날 할힌골 전투라고 불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소대급의 단순한 충돌이었으나, 금새 양군에서 군단급 병력이 집결하여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였다. 당시 소련 국방장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는 급히 유능한 야전 지휘관을 찾았고, 그때 소련군에서 주목받고 있던 주코프를 파견했다. 주코프는 곧장 소련 극동군 사령관 자격으로 몽골에 파견되어 일본군에 맞서는 소련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당시 소련군은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일본군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었고, 그래서 위기 의식을 느껴 에이스를 파견한 것이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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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힌골에서 소련 극동군 참모장 그리고리 쉬테른(왼쪽), 몽골 대통령 허를러깅 처이발상(가운데)과 함께 작전 계획을 짜는 주코프(오른쪽).

이후 소련군이 두번째로 일본군과 충돌했을 때 주코프는 현지 집단군사령관으로 병력을 지휘하여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주코프는 차량화된 보병포병의 지원을 받는 2개의 경전차 여단을 재빨리 일본군의 양익으로 이동시키는 급속 기동으로 삽시간에 일본군 제6군을 포위하고 1개 사단을 전멸시키는 큰 타격을 주는데 성공했다. 현대전에서 전차의 재빠른 기동이 중요함을 일찍이 증명한 전과였으며, 이 때의 전공으로 소련 최고 영예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받고 대장으로 승진했다(바로 아래 목 칼라에 별 5개의 계급장을 붙인 사진이 그때 사진).

할힌골 전투의 승리로 명성을 얻은 주코프는 스탈린의 주목을 받아 1940년에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키에프 군관구는 다가올 독소전쟁에서 최전방 지역인 만큼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이었고,[7] 주코프는 알게 모르게 투하쳅스키의 종심 이론에 기초한 전차 부대, 기계화 부대의 대량 양성을 주장했다. 기동 비슷한 말을 꺼냈다가는 모가지가 가출하기 일쑤였던 당시의 소련군에서 이러한 행동은 매우 대담한 일이었다.

이후 독일의 위협이 다가오자 1940년 12월 당시 국방장관이던 세묜 티모셴코는 주코프를 불러들여 국방차관 겸 키릴 메레츠코프의 후임의 총참모장(한국군의 합동참모의장에 해당)으로 임명했다. 주코프와 티모셴코는 독일의 침략 징후를 감지하고 방어 태세를 굳건히 하려고 했지만, 스탈린은 독일의 의도에 말려들어간다고 생각해서 이를 금지시켰다. 결국 독일군의 공격 징후가 확실해진 1941년 6월 21일에 이르러서야 소련군 최고사령부에서는 전군에 비상 경계령을 발동했지만, 그 전에 독일군 특공대가 소련군 전방 부대의 통신선을 절단해 버린 상태라 이 경계령은 전달되지도 못했고 이미 독일군은 국경을 넘고 있었으며 일선 부대에는 명령이 전달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2.3 독소전쟁에서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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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참모장 시절의 주코프.[8]

2.3.1 총참모장에서 물러나다

주코프는 전쟁이 발발하자 비행기로 여러 전선을 누비며 전투를 지휘했다. 독일군의 공세는 거침이 없었고, 그는 일시적으로 공간을 내 주더라도 후퇴하여 병력과 장비를 보존하는 게 옳다고 스탈린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마라는 명령만 내렸고, 결국 독일군의 대규모 포위전에서 수십 만의 병력을 날려먹었다.

8월에는 드미트리 파블로프 대장이 지휘하던 60만의 전선군이 스몰렌스크에서 하인츠 구데리안 휘하 독일군에 포위당한 끝에 섬멸되었고, 이 때문에 파블로프는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패배의 책임을 떠안고 처형되었다. 9월에는 세묜 부됸늬가 지휘하던 비슷한 규모의 전선군이 키예프에서 독일군에 포위당했다.

주코프는 이때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와 함께 독일군의 공격을 피해 후방에서 병력을 보존할 것을 건의했지만, 스탈린은 현재 위치의 고수만을 주장하다가 키예프에서도 또 60만의 병력을 잃었다. 스탈린이 사사건건 자신의 의견을 무시하자, 주코프는 "총사령관께서 제 말을 안 들으시겠다면, 저는 참모 역할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고 자진해서 물러나 야전 지휘관으로 가겠다고 청원했다. 스탈린은 이 청원을 받아들였고, 후임 총참모장으로는 겨울전쟁에서 참패한 뒤 물러났던 보리스 샤포슈니코프 원수가 임명되었다.

총참모장 시절 주코프는 소련군 전투력 회복에 큰 역할을 했는데, 수용소에 갇혀 있던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대숙청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하던 장성들의 복권을 강력히 주장해 스탈린의 승인을 얻어낸 것이다.[9]

2.3.2 레닌그라드 공방전

참모가 아니라 전선 사령관으로 나서기를 바란 주코프는 원하던 대로 무능한 보로실로프의 후임으로 레닌그라드 수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당시 레닌그라드는 독일군에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고, 주코프를 태운 수송기루프트바페Bf109에게 격추될 뻔했다. 다행히 기체만 손상되고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

당시 독일군은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려고도 하지 않고 포위만 단단히 해서 시민들을 모두 굶어죽이려고 했다. 이 때문에 군인들과 시민들 모두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주코프는 사령관에 부임하자마자 휘하 장군들을 엄청나게 갈구고 전의를 상실한 장교들을 해임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 레닌그라드의 무너지던 군기를 잡았다. 주코프 휘하에서 연이어 터지는 위기 상황에도 냉철히 대처한 소련군은 1941년 11월에 레닌그라드 북동부의 티흐빈을 탈환하는 소규모 반격전을 성공시켰다. 이후 레닌그라드는 871일이 지난 1944년에야 포위가 풀려 최종 해방되었다.

2.3.3 모스크바 공방전

1941년 10월에 독일군은 태풍 작전을 실행하여 수도 모스크바를 함락시킬 기세로 진격하고 있었다. 레닌그라드에 있던 주코프는 스탈린의 지시로 모스크바 방위 사령관에 임명되어 건강이 안좋은 총참모장 샤포슈니코프를 대신한 총참모장 대리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중장과 모스크바 방어전을 지휘하게 됐다.

당시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아돌프 히틀러의 엇갈리는 명령 때문에 모스크바를 곧장 공격하지 못했고, 키예프로 갔다 레닌그라드로 갔다하는 등 갈팡질팡하는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10] 덕분에 소련군은 모스크바 방어를 위한 충분한 시간을 얻었다. 주코프는 주어진 시간을 활용해 공병 부대들을 동원하여 모스크바 둘레에 종심이 깊고 튼튼한 거점 방어망들을 건설했고, 시베리아에서 후송된 추위에 단련된 병력들과 우랄 산맥 동쪽에서 보급된 군수 물자를 재빨리 배치시켰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크렘린이 망원경으로 보일 정도로 모스크바에 가깝게 접근했지만, 결국 소련군의 방어망을 뚫지 못하고 후퇴하면서 독소전쟁이 장기전으로 가게 되는 계기를 만들고 말았다. 방어에 성공한 주코프는 개전 이래 처음으로 모스크바 근교의 클린에서 독일군에게 제한적인 반격을 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방어 성공에 지나치게 기고만장해진 스탈린은 1942년 봄이 되자 전 전선에서 독일군을 공격한다는 무리한 작전인 '동계 공세'를 수립할 것을 명령했다. 주코프는 이 어이없는 계획에 당연히 반대했지만, 스탈린은 그를 해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결국 동계 공세의 일환으로 진행된 제1차 르제프 전투,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데미얀스크 포위전 등에서 소련군은 다시 연패했고, 독일군은 소련 남부 공략을 더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전략이 실패했음을 깨닫고 의기소침해졌으며, 결국 주코프를 최고사령관 대리 겸 총군부사령에 임명해 소련군의 전체적인 지휘권을 사실상 위임했다.

2.3.4 스탈린그라드 전투 : 천왕성 작전의 성공

1942년에 독일군은 코카서스 지방에 대한 하계 공세, 일명 '청색 작전'을 실행하여 코카서스 지방을 휩쓸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길어지고 있을 때 샤포슈니코프의 후임으로 총참모장에 임명된 바실렙스키는 독일군의 우익이 약체인 루마니아군으로 방어되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고,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한 독일군을 100만의 병력과 수백 대의 전차로 '한 겹 더 포위'해서 그대로 궤멸시키는 '천왕성 작전'을 입안해 주코프에게 달려갔다.

주코프는 바실렙스키와 머리를 맞대고 오랜 시간을 상의하면서 여러 부분을 수정하여 스탈린에게 천왕성 작전 실행을 주장했다. 스탈린은 못 미덥다는 얼굴로 작전 실행을 명령했고, 주코프는 이 작전을 독일군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완수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으나, 결국 포위는 성공했고 히틀러의 철수 불가 명령까지 겹쳐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휘하의 독일 제6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다. 여기서 수십 만의 병력과 대규모의 장비를 손실한 독일군은 이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했고,[11] 그 다음 해인 1943년까지 계속해서 후퇴를 거듭해야 했다. 이 공적으로 주코프는 바실렙스키와 더불어 소련 원수 계급장을 획득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제6군을 구원하기 위해 '겨울폭풍 작전'으로 돈 집단군을 이끌고 달려오자, 주코프는 '소(小) 토성 작전'을 통해 만슈타인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2.3.5 화성 작전 논란

미국의 저명한 독소전쟁 역사가인 데이비드 글랜츠는 소련 붕괴 후 발굴한 자료로 1999년 4월 28일 <Zhukov's Greatest Defeat: The Red Army's Epic Disaster in Operation Mars, 1942>이라는 저서를 펴냈다.

데이비드 글랜츠에 의하면 모스크바 전투 이후, 15개월에 걸친 르제프 전투 중 1942년 11월 25일부터 3주간 진행된 소련군 동계 대공세는 실패로 끝났는데, 이는 주코프가 단독으로 지휘했으며 소련군에 큰 피해를 남긴 전투라는 것이다. 글랜츠에 의하면 소련은 불패의 명장이라는 칭송을 받는 주코프를 보호하기 위해 이 흑역사를 감추었으며, 이 전투에 참가한 여러 장성들이 별도의 회고록을 남기지 않거나 일찍 전사했기 때문에 이 전투는 발굴되기 전까지 묻혀 있었다는 것이 글랜츠의 저서의 요지이다.

화성 작전은 천왕성 작전 실행과 동시에 르체프 돌출부의 독일 중부집단군도 포위 섬멸하려는 대규모 작전으로 천왕성 작전과 비슷한 규모의[12] 병력이 투입됐다. 하지만 1942년 1월부터 르제프 '고기분쇄기(Meatgrinder)' 전역에서 소련군을 끊임없이 패퇴시키고 돌출부 점령 지역을 확대, 완만한 전선을 구축해 가던 9군 사령관 발터 모델은 이미 참호를 2줄로 파 놓아 대비하고 있었고, 특히 서전을 장식한 소련군의 대규모 포격이 오히려 공격자인 소련군의 진격에 심각한 장애물이 될 만큼 지형을 파헤쳐 놓았을 뿐 아니라 가뜩이나 망가트려 놓은 지형에 투입된 전차 부대마저 보병과 뒤엉키게 됐다. 결국 독일 9군은 물량과 인원 면에서 압도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도 예비대의 정확한 투입으로 제파적 공세를 모조리 막아내며 역으로 소련군을 포위, 섬멸했다.[13]

이러한 데이비드 글랜츠의 견해에 의하면 모스크바 방어전 이후 '상승 장군'의 명성을 얻은 주코프로서는 감추고 싶은 역사가 되었고, 스탈린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소련군 승리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싶었기에 주코프를 문책하지 않으면서 소련에서는 현대까지 잊혀진 작전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성 작전이 소련군의 대패를 안겨 준 전투임은 분명하나 이 전투에 대한 중요성에 대한 관점은 미국의 유명한 친소련 전사학자데이비드 글랜츠가 제기한 일설이다.[14]

학계의 연구자가 아닌 밀덕들이 범하는 실수 중의 하나는 학계의 정설과 학자의 일설을 구분하지 못하는 점인데, 바로 일부 밀덕들이 글랜츠의 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동안 존재조차 몰랐던) 르제프 전투나 화성 작전에 관한 글랜츠의 저서가 한국 밀덕계에서 널리 알려졌다. 심하게 과장해서 주코프를 세묜 티모셴코류의 2류 지휘관으로 평가하는 밀덕들도 있다. 하지만 다시 말하면 르제프 전투나 화성 작전에 관한 설은 글랜츠가 제기한 설이다. 글랜츠가 독소전쟁사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학자이고 그가 처음으로 화성 작전의 명칭을 밝혀내며 문제 제기를 한 것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하지만, 르제프 전투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현재진행형이며 더욱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글랜츠에 반대하는 대표적인 영미권 학자는 앤소니 비버.[15] 그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르제프 전투, 특히 화성 작전이 스탈린그라드보다 중요했는가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을 내놓고 있고, 특히 러시아 군사학자들은 대놓고 글랜츠의 의견에 반대했다. 르제프 돌출부의 9군은 1943년 3월, 들소 작전으로 소련군을 화려하게 물먹이고[16] 스몰렌스크 방면으로 퇴각하였고, 결과적으로 소련군은 전투에는 줄기차게 패했을 망정 르제프 돌출부를 잘라내고 남부의 독일군을 일소하는 목표는 달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랜츠가 가설을 제기하여 열띤 토론이 벌어지게 된 이후인 2006년, <Zhukov's Greatest Defeat>가 러시아에서 번역판으로 출간되면서 기존 영문판과 달리 다량의 군사 문서가 함께 수록되었고 이는 주코프,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이반 코네프의 회고록보다 더욱 신빙성 있는 자료가 되어 주었다.[17]

게다가 2007년, 러시아에서 르제프를 '군사 명예의 도시'로 지정하며 르제프에서 위대한 방어를 펼친 공로를 인정한다는 내용에 르제프 주민들과 전투 생존자, 그 후손들이 크게 반발하게 되었고 전사학자들과 방송인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르제프 전투 관련 다큐멘터리가 꾸준히 방영되면서 러시아에서도 르제프 전투에 대한 반성적인 시각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와 군 관계자들은 영미권 전사학자들의 서고 출입을 제한하고 문서 공개를 금지하는 등 더욱 폐쇄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문제는 한국에서는 독빠들이 이 르제프 전투를 들어서 주코프가 범장이라고 왜곡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바실렙스키가 주코프보다 더 뛰어낫다느니 하는 말도 안되는 주장의 근거가 이 르제프 전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한국 독빠들의 주장인데, 전세계 어떤 밀덕도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2.3.6 쿠르스크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성공으로 또 기고만장해진 스탈린은 하르코프를 무리해서 탈환할 것을 명령했지만,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기동 방어에 걸려 56개의 사단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이 하르코프 공세에 대해 주코프는 의외로 제동을 걸지 않았는데,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소련군 내부에 만연해 있던 지나친 낙관주의는 그도 예외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만슈타인의 승리로 쿠르스크 지방이 돌출됐고, 주코프는 바실렙스키와 치밀한 돌출부 방위 계획을 수립해 튼튼한 종심 방어망을 만들어 쿠르스크 돌출부를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바실렙스키와 함께 입안해 둔 쿠투조프, 류먄체프, 수보로프 작전을 실행해 쿠르스크 축선에서 독일군에 대한 반격에 성공했다.

2.3.7 우크라이나 탈환

주코프는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계속되는 공세에서 전선군들의 작전을 통합 지휘하고 조율하며 하르코프 탈환과 키예프 탈환, 키로보그라드 공세 등 우크라이나 우안의 독일군 축출 작전들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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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라티온 작전 당시의 주코프.[18]

1944년이 되자 주코프는 계속된 공세를 진두 지휘하며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을 통해 독일군의 전력을 크게 손상시키고 우크라이나 좌안에서도 독일군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 때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지휘하던 니콜라이 바투틴 대장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게릴라에게 피습당해 사망하자, 주코프는 바투틴의 지휘권을 넘겨받고 전선군을 직접 지휘하며 우크라이나 전역의 탈환을 달성해 44년 동계-춘계 전역을 끝마쳤다.

2.3.8 바그라티온 작전

우크라이나를 되찾는 대성공을 거둔 주코프는 바실렙스키와 함께 독일 중부집단군을 일거에 섬멸할 바그라티온 작전을 입안해 스탈린의 재가를 받아낸다. 오랜 전투로 단련되고 후방 군수 공업 지대가 피해를 보지 않아 무장까지 갈수록 좋아지는 소련군은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말도 안되게 두들겨 맞던 때와도 비교도 안되는 수준으로, 말 그대로 정예군으로 거듭나고 있었고 이제는 독일군에게 정면 공세를 가해도 무리 없는 수준으로 성장한 상태였다.

주코프는 독일 중부집단군의 남익과 북익에서 공세를 가하려는 모습을 보이도록 연출하라고 극비리에 지시했고, 독일군은 결국 이 술책에 넘어가 주요 병력을 전선 남부와 북부로 보내는 중대한 실책을 범했다. 소련군은 이 틈을 타 전선 정면을 맹공했고, 독일 중부집단군을 섬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독일군의 이 패배는 일명 '베를린 레이스'로 불리는 독일군의 연이은 패퇴 중에 가장 치명적인 것이었다.

2.3.9 베를린 전투

이어 주코프는 바실렙스키와 더불어 발트 3국폴란드, 동프로이센 공세를 주도했고, 제1벨라루스 전선군을 직접 지휘해 마침내 베를린에서 100km도 떨어지지 않은 오데르 강 동안에 도착했다. 주코프의 전선군은 베를린 정면으로 치고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그 앞에서 젤로 고지가 진격을 가로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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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젤로 고지 전투를 지휘하는 주코프. 전황이 잘 안 풀려서인지 주코프는 물론 부하 및 참모들도 표정이 매우 굳어있다.

주코프는 야간에 공격을 가하기로 계획하고 독일군 방어선에 대해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대규모 탐조등을 사용하기로 했지만, 이것은 이후 큰 실책임이 입증되었다. 방어선 돌파를 위한 포병의 대규모 포격까지는 좋았는데, 그 이후 비춘 탐조등 불빛이 되려 포연 속에 섞여서 바실리 추이코프 대장이 지휘한 소련 제8근위군의 시야를 차단해 진격에 큰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독일군은 소련군에게 간만에 신나게 포화를 퍼부었고, 소련군은 목적지까지 거의 다 와서 또 수많은 병력과 장비를 잃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코프는 이 아수라장 속에서 제1근위전차군을 섣불리 투입했고, 보병과 전차가 좁은 길과 진창에서 뒤엉켜 결국 안 입어도 되는 피해만 잔뜩 입게 됐다. 이 소식을 들은 스탈린은 주코프를 힐난했고, 남쪽에서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지휘하던 주코프의 라이벌 이반 코네프에게 "주코프 동지가 베를린을 점령하지 못하면 동지가 점령해도 괜찮겠소."라고 제안했다. 스탈린은 덤으로 작전 초기 코네프와 주코프의 전선군 사이에 할당되었던 전투 지경선을 없애버리기까지 하면서 둘의 경쟁 심리에 불을 붙여 베를린을 빨리 점령하고자 하였다. 주코프는 이에 '질 수 없뜸!!'을 외치며 안 봐도 되는 피해까지 감수하며 물량 공세로 젤로 고지 돌파에 성공했고, 코네프보다 먼저 베를린 라이히스탁으로 진군하는데 성공해 의사당 옥상에 붉은 깃발을 꽂았다.


▲ 백마를 타고 개선식을 하는 개선 장군 주코프.[19]

2.4 전후의 활동

2.4.1 중앙에서 쫓겨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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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6월 5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승전 축하 집회에 참가한 연합군 수뇌부와 주코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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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7월 12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조우한 연합군 수뇌부. 가운데 있는 소련군 장군이 주코프. 오른쪽에 키 큰 장군은 로코솝스키이며, 베레모를 쓰고 카메라를 등지고 있는 장군은 몽고메리 원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코프의 위상은 독소전쟁 이후 높아질 대로 높아졌다. 1944년 7월과 1945년 6월에 각각 소련영웅 칭호를 추가 수상해 그 당시 유일한 3중 영웅이 되었고, 찬가 '주코프 원수의 승리'가 작곡되는 등 소련 전체가 그를 영웅으로 받들었다. 하지만 주코프는 공식 석상에서 스탈린은 한 거 없고, 실은 내가 다 했다는 발언을 할 정도로 도가 지나친 자기 과시를 보여주었고, 이는 당연히 스탈린의 의심을 부추길 만했다. 몇 년 전의 피바람에서 살아남은 지 얼마나 됐다고...

주코프의 이러한 자화자찬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위해 독일에 파견된, 대숙청 당시 수석 검사였던 안드레이 비신스키의 귀에 들어갔고, 비신스키는 이를 스탈린에게 일러바쳤다. 스탈린은 주코프의 자만에 분노해 NKVD의 수장 라브렌티 베리야에게 그의 비리 혐의에 대해 수사하도록 했고, NKVD는 주코프의 아파트를 샅샅히 뒤졌다. 결국 주코프는 베를린에서 온갖 귀금속을 약탈해서 빼돌렸다는 매우 불명예스러운 혐의로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베리야는 스탈린의 총애를 받는 주코프의 혐의를 매우 과장하여 보고했고,[20] 공군 사령관 알렉산드르 노비코프를 고문해 주코프가 반역을 꾀했다는 자백을 추가했다. 위기의 순간에서 주코프는 스탈린 앞에서 변명 대신 자아비판을 하고 참회하는 척했다. 왕건도 자신을 의심하는 궁예를 마찬가지로 속였다 애초에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명장을 굴라그에 보내는 대신 1947년에 한직인 오데사 군관구 사령관으로, 그 후 다시 예비 부대로만 채워져있는 우랄 군관구 사령관으로 좌천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스탈린의 의심과 베리야의 농간 때문에 주코프뿐만 아니라 독소전쟁에 큰 공을 세웠던 공군 원수 노비코프와 해군 원수 니콜라이 쿠즈네초프도 반역 및 근무 불성실 혐의로 기소되었다. 노비코프는 15년 징역형을 받은 뒤 스탈린 사후 석방되었으며, 쿠즈네초프는 감옥은 가지 않았지만 중장으로 강등되었다. 그레고리 쿨리크를 이러한 전후 공신 숙청에 추가하는 사람도 있으나, 쿨리크는 독소전쟁에서 병크만 저지른 데다가 전화로 스탈린을 뒷담하다가 걸렸기 때문에 비록 죄목 자체는 터무니없긴 해도 소련에서는 얄짤없는 사형감이었다. 사실 쿨리크를 제외하면 이러한 전후 군인 숙청에서 처형된 "네임드 인사"는 없다. 그리고 쿨리크의 병크를 보면 죽어도 마땅하다[21]

2.4.2 귀환과 국방장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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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년의 주코프 장군.

후방 군관구 사령관으로 찬밥 신세가 되었던 주코프는 스탈린 사후인 1953년에 다시 국방차관으로서 복권되었고, 니키타 흐루쇼프와 함께 베리야를 제거하는 데 한몫 했다. 주코프는 항상 군의 일에 멋대로 간섭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던 베리야와 사이가 좋을 수 없었고, 자신의 좌천이 스탈린의 의도라기보다는 베리야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린 것으로 생각하여 베리야 숙청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교차검증이 안되긴 하지만, 흐루쇼프의 회고록에 의하면 베리야를 직접 체포한 인물이 바로 주코프라고 한다.[22] 야사에 의하면, 주코프가 직접 베리야의 머리에 권총을 쏴 처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이후 주코프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를 중심으로 한 반(反) 흐루쇼프파 숙청에도 협력해 정치국원 자리까지 획득할 수 있었다. 1955년 국방장관 자리에 오른 주코프는 핵무기의 등장이 소련의 군사학과 작전술, 전략에 큰 변화를 미칠 것을 예견했고, 이에 따라 소련 지상군의 구조를 핵전쟁 시대에 걸맞게 개편하기 시작했다.

주코프의 개편 목적은 전군에 더 큰 기동성과 핵전쟁 상황 중의 부대 유지와 생존력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주코프는 편제에 기동성을 부여하기 위해 포병 군단이나 공병 군단 같은 특수 목적 편제를 제외한 모든 군단급 편제들의 해체를 명령했고, 야전군을 기존의 3개 군단이 아닌 5~6개 사단으로 구성하게 했다.

기계화군과 기계화 군단은 핵전쟁에서 살아남기에 너무 둔중하고 거추장스러워 핵공격의 목표가 되기 쉽다고 여겨져 해체되었고, 대신 이들 부대는 더 유연한 전차군으로 개편되었다. 또한 주코프는 전군에 핵전쟁 상황에서 생존성을 부여하기 위해 전 소총병의 차량화를 천명했다. 기계화 사단, 소총병 사단, 경(輕) 소총병 사단 등 다양한 보병 사단 편제들은 전부 기동성을 갖춘 차량화 소총병 사단으로 통일되었다. 이렇게 해서 소련군 편제의 모든 보병은 기계화보병 혹은 차량화보병으로 편성되어 알보병이 전무하게 되었다.

주코프가 만든 이런 식의 소련군 편제는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1956년 12월에는 이러한 군 편제 개편에 대한 공로로 4번째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이는 소련 역사상 주코프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두 사람만 누린 영예인데, 브레즈네프는 별 공적도 없는데 직접 달고 다닌 것이었고 주코프는 굵직한 공적을 인정받아 남이 달아준 것이니 가치는 비교가 안된다.

2.4.3 퇴출과 최후

흐루쇼프는 1957년에 핵 만능주의를 주창하며 전략 로켓군을 창설하고 전략 로켓군이 기존의 지상군을 제치고 소련군의 주류가 되도록 만들려고 했다. 이는 쇼미더머니를 시전하는 천조국 미국돈지랄을 하면서 군비 경쟁을 하다가는 경제 규모가 반밖에 안되는 소련이[23] 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정작 아이젠하워 때부터 미국이 소련의 자원 동원력을 두려워하여 재래 병력보다 비교적 값싼 핵전력을 강화한 것은 아이러니(전체주의 사회의 총자원 동원력은 민주주의를 능가한다고 생각했고, 어느 정도 맞는 생각이다). 이는 사실 현상 유지를 위한 전략으로는 올바른 선택이었고, 1960년대 중국이나 1990년대 북한도 핵무기+미사일로 적군보다 뒤쳐지는 재래식 군사력을 땜빵하려고 했다.

주코프는 전략 로켓군이 지상군을 대체할 수 없다며 흐루쇼프에게 강경하게 반대했지만, 쿠데타를 두려워한 흐루쇼프에 의해 '모험적인 군사 전략을 지향했다' 등의 이유로 공직에서 추방된다. 실제로 흐루쇼프는 주코프가 해임 소식을 들으면 자신에 충성하는 부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킬까 봐 주코프가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시점에서 해임을 발표했고, 주코프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모처로 끌려갔다가 흐루쇼프의 심복인 로디온 말리놉스키 원수가 국방장관직을 인수하고 국방부를 장악한 시점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흐루쇼프 실각 후 복권되었지만, 공직에 복귀하지는 않았고 회고록 집필 등으로 조용히 지내다 1974년 사망해 붉은 광장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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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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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있는 국립 역사 박물관 앞의 주코프 동상.

3 평가

3.1 군인으로서의 평가

어떤 기준으로 봐도 그에겐 군사적 천재성이 있었다.

- 리처드 오버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주코프의 군사적 업적을 보자면 두말할 나위 없는 제2차 세계 대전 최고의 명장 중 하나지만, 일부 독빠들은 독일군 장성에 대한 사랑이 너무 심한 나머지 운좋은 범장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24] 가령 주코프가 이기든 지든 할힌골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 베를린 전투를 빼면 항상 적군보다 수 배의 출혈을 냈던 점이 그러한데, 예를 들어 쿠르스크 전투의 결과는 주코프의 승리이긴 하나 독일군이 5만의 병력을 잃은 반면, 소련군은 무려 20만에 달하는 병력을 잃어버리는 등의 데이터를 보고 있으면 주코프의 이러한 업적에 대해 쉽게 폄하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 논란이 되는 화성 작전의 실패과 베를린 공세 초반 젤로 고지 전투에서의 삽질을 들어 일부 밀덕들은 주코프가 공세에 서툴렀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의 소련군의 상황을 무시한 데서 기인한 사항이다. 당시 소련군은 교리, 장비, 규모에 있어서는 세계적이었지만, 이런저런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운용은 상당히 뒤떨어진 형편이었다. 거기다 당시 독일 국방군은 2년 간의 실전 경험[25]을 쌓아 세계 최강 수준의 군대였는데, 이런 강군에게 엉망인 소련군이 맞서 싸운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다름없었다. 2차 대전 발발 후에는 비록 독일군과의 전투를 통해 전투력이 상승되고 있던 시기였기는 하나, 아직 전술적 차원, 그리고 각 병사의 전투력 차원에서 독일을 따라잡기에는 힘에 부치는 시기였으며, 심지어 대전 말기까지에도 그러했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전간기까지는 소련군도 정신을 차리고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등이 주축이 된 세련되고 강한 육군 보유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스탈린의 대숙청 및 이후 불어닥친 조직 개편 때문에 손발이 안 맞게 되었다. 이렇게 소련의 고급 지휘관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동안, 독일군은 대조적으로 베르사유 조약 체계를 폐기하고 전쟁 준비에 온힘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은 독일군에 비해 조직력이나 작전 능력이 뒤쳐지게 되었다.

하지만 소련군 무기의 성능이 독일군보다 떨어져서 초반에 대참패를 했다는 일설(이전 버전의 설)은 사실과 거리가 있다. 일단 1941년 독소전쟁 개전 당시의 소련군의 전투기 보유량, 전차 보유량, 잠수함 보유량은 당시 세계 공업 생산량 1위였던 미국을 능가하는 세계 1위였다. 당시 소련군의 전차나 전투기들의 상당수가 1930년대 실전 배치된 것으로 독일군이 실전 장비로 채택하고 있던 무기들보다는 구식이었긴 하지만, 소련도 서유럽의 독일군의 가공할 만한 성과를 보고 무기를 계속 개량하고 있었다. 육상전을 예로 들면, 당시 독일군의 주력이었던 3호 전차의 성능을 압도하는 T-34나 KV-1의 개발이 막 끝나 배치가 시작되고 있었고, 공군도 마찬가지여서 독일군에 맞설 만한 Yak-1 전투기가 이제 막 나오기 시작했다. 또한 소련군 병사 개개인의 보병 화기는 독일군보다 뒤질 게 없었으며(다만 소련제 DP-28을 압도하는 독일제 MG34 때문에 지원 화기은 독일이 앞선 게 맞다) 소련군 포병은 독일군과 비교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훨씬 뛰어났다.

독소전쟁 초반 소련군의 대참패는 무기의 성능이 아니라 조직력이 매우 약화되었던 최악의 시기의 소련군을, 2년 간의 실전으로 작전 능력이 극대화된 최상의 시기의 독일군이 찔렀기 때문이다.[26] 상호 협조 체계와 조직이 소련군보다 우수했던 독일군은 병력을 한 곳에다 모아 놓고 공격했다. 소련군은 지나치게 산개된 병력으로 무자비하게 각개격파당했고, 그나마 뒤늦은 대응도 제대로 하지 못해 초기에 수십 만의 군대가 한순간에 증발했다. 거기에 갑자기 군을 확장하면서 야전의 허리가 되는 하급 장교와 부사관이 모자라는 바람에 바르바로사 작전 시기에는 아예 대졸이면 무조건 장교, 고졸이면 무조건 부사관으로 징집하여 별다른 교육 없이 바로 실전에 투입하는 일도 있었으니 이런 조직이 제대로 싸울 리가 없다.[27] 그러나 이런 난감한 상태에 있던 소련군도 실전 경험을 충분히 쌓아본 1943년 정도 되면 어느 정도 정리되어 독일군과 맞먹는 수준의 작전 능력을 보유하게 된다.

여담이지만, 소련군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대응하게 된 것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입을 다물게 된 일도 한 몫 한다. 대전 초기에 압도적인 병력의 소련군이 한순간에 증발하여 당장 소련의 생사조차 불명인 상황까지 몰리자 스탈린은 참모와 지휘관들의 말을 이전보다는 잘 따르게 되었고, 모스크바 공방전에서의 승리에 고무되어 병크를 터뜨린 후에는 점점 더 위축되는 경향을 보였다. 비록 주코프 같이 스탈린에게 쓴소리를 서슴치 않는 지휘관들을 좌천시켜 버리는 등 예전의 드러운 성질머리는 살아있었지만, 그 이후 금세 일선에 복귀시키는 등 예전의 대숙청 시절에 비하면 많이 온순해졌다.[28]

때문에 조직력이나 지휘관의 교육 상태가 부족해 작전 능력이 열등한 소련이 믿을 구석은 사실상 수적 우위 이외에는 없었고, 따라서 이러한 우위를 통해서나마 확실히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지휘관이 현실적으로 소련이 바라는 최고의 지휘관이었는데,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령관이 엄청난 병력을 낭비만 할 뿐 승리는 하지 못했을 정도로 막장이던 시기에, 비록 많은 수의 병력을 희생하긴 하나 적에게 연전연승을 거뒀던 것이 바로 주코프였던 것이다. 이렇듯 주코프는 비록 단기간 내에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소련군의 한계를 안고서, 그 한계 안에서 이룰 수 있는 최대의 업적을 이루고서 대전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때문에 당당히 2차 세계대전 최고의 지휘관 중 하나로 우뚝 서게 되는 자격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이렇듯 빛나는 전과를 올렸지만, 화성 작전이나 젤로 고지에서의 삽질 때문에 독빠 밀덕[29]들에게 주코프가 운 좋은 운장이거나 혹은 소련군의 물량빨에 버프된 범장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다만 불패의 명장이란 소설 속에나 나오는 이야기고, 후에 명장이라고 평가받은 사람들 대부분도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곤 했으니[30] 이것이 그가 졸렬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이런 주코프에 대한 한국 밀덕계의 저평가는 사실 냉전적 시각이나 독일군 측의 시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국뿐만 아니라 서방 밀덕계에 전반적으로 퍼져 있었다. 이런 독일군 측의 그릇된 독소전 관념이 이들의 회고록을 주요 사료로 쓰던 서방의 독소전사에 스며들었는데, 자신들이 독소 불가침조약까지 맺었으면서 가만히 있던 소련을 기습침략했다가 도리어 역관광당해 참패한 사실을 이런 식으로 호도하는 것은 패자의 구차한 변명일 뿐이다.

한편 작전 수립 때는 주코프 자신이 말솜씨가 없고 직선적인 면이 자주 표출되어 스탈린과 충돌할 때 번번히 스탈린의 속을 상하게 해 후일 좌천당하는 계기가 된다. 또한 작전 입안과 실행에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의 영향력이 상당히 컸던 탓에 일각에서는 바실렙스키 없으면 시체 소리까지 하는 사람이 있으나, 바실렙스키가 없었던 할힌골 전투나 단독으로 지휘한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도 주코프가 대단한 활약을 한 것을 보면 그냥 주코프가 야전 지휘관으로 훌륭하지 않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명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을 쓴 영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는 "어떤 잣대로 보더라도 주코프에겐 군사적 천재성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냉혹하고 고집이 세며 거칠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라서 스탈린과도 여러 번 충돌이 있었지만, 군사적인 문제에서 스탈린을 설득하는 데는 주코프만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계속 싸우면서도 의외로 성격이 잘 맞았는지, 실제로 스탈린은 개인적으로 그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결국 주코프를 숙청하기는 했지만 그 숙청도 좌천시키는 정도로 끝냈다. 스탈린이 전쟁 영웅들을 경계하며 주시하던 시점에 주코프가 "스탈린은 2차 대전에서 별로 한 게 없고 전부 내 공이다."라는 식의 치명적인 말실수를 한 것에 비하면 비교적 가벼운 처분이었다.

성격이 오만했고 정치적 야심을 의심받았기 때문에, 항상 정치권으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이 점에서는 미국더글러스 맥아더와 매우 비슷하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주코프가 쿠데타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고 비난했는데, 성격을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시기에 막장이던 소련군을 강군으로 거듭나게 하고 전쟁을 끝까지 이끌어 승리를 거둔 것은 엄연히 주코프다. 이 사실만으로도 주코프는 충분히 높게 평가받을 자격이 있다.

독소전쟁에서 어떤 전투가 전세의 전환점이 되었냐는 질문에 예상과는 달리 1941년 12월의 모스크바 공방전을 들었다. 대체로 다른 역사가들이나 장군들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쿠르스크 전투를 드는 것과 대조된다. 모스크바 전투는 그가 독소전쟁에서 처음으로 지휘한 공세였다. 그리고 그 동안 유럽에서 무적이었던 독일 육군을 소련군이 처음으로 패퇴시킨 전투이기도 했다.

3.2 인간성 논란

예절과는 거리가 먼 그 직업 내에서도 유달리 거친 성격의 소유자였다.

- 리처드 오버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인간성이 나쁘고 처세에 문제가 좀 있더라는 평가가 많다. 일단 아랫사람에게는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하며, 일본군처럼 하급자에 대한 구타도 서슴치 않았다. 바그라티온 작전에서[31] 자기 임무를 다하지 못한 한 대령은 주코프가 날린 죽빵에 이가 부러졌다고 한다. 더불어 위에도 지적되었듯이 성격이 오만하고 자만심이 강해서 적을 많이 만드는 성격이었다. 주코프와 매우 사이가 나빴던 소련군 장성으로는 이반 코네프바실리 추이코프가 있다. 그리고 국방장관 시절 육군 중심의 군정을 이끌어 해군을 확장하려던 해군 사령관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원수와도 매우 사이가 나빴다. 소련군 버전 육해군 대립 또 자기 신임을 잃은 장교들은 정치적으로도 어떻게든 제거한다든지. 자기에게 밉보인 장교를 형벌부대로 보내서 독일군의 총알받이가 되게 했다고 한다.

게다가 졸렬하게도 사이가 나쁜 부하는 전혀 회고록에 언급하지 않거나 혹은 매우 간략히 언급했다. 대표적으로 자신과 사이가 나빴던 부하인 바실리 추이코프를 스탈린그라드 전투베를린 전투에서 단 한 번, 그것도 마지못해 언급했다. 추이코프를 디스하기 위해서였는지 추이코프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겁쟁이로 매도한 전임 제64군 사령관 안톤 로파틴에 대해서는 반대로 매우 칭찬했고, 스탈린그라드 수비가 로파틴의 덕이라고 했다. 이건 한국으로 치면 권율을 까기 위해 원균을 높이는 격

레닌그라드 수비사령관을 맡았을 때는 투항자 가족의 투옥을 명령한 스탈린의 220호 명령, 그리고 허가 없는 후퇴자를 처형하라는 227호 명령에 훨씬 앞서서 주코프는 투항자의 가족을 색출해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32][33] 사실 주코프가 수만 명의 인명 피해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무자비함과 냉혈함을 보여 주는 일화는 상당히 많다. 물론 이것도 서방과는 달리 러시아군이 전통적으로 인명 피해에 둔감했다는 사실을 조금 감안할 필요가 있다.[34]

이렇듯 승리를 위한 병력의 희생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지로 몰아 넣는 등의 행위로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심지어는 '인간 백정' 스탈린조차 그를 냉혹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오만하고 자존심이 너무 강해 베를린 전투 때는 하마터면 베를린 함락의 주연이 될 뻔한 이반 코네프의 군대를 공격하려 하는 등 지나친 면이 없지도 않다. 주코프와 사이가 안 좋았던 인물들은 뒷담화를 깔 때 주코프라는 성의 어원인 '주크'(러시아어바퀴벌레 또는 딱정벌레)라는 멸칭으로 불렀다.

4 그 외

  •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과 마네쉬나야 광장 사이에 위치한 국립 역사 박물관 앞에 이 분의 기마상이 서 있다.
  • 주코프의 회고록 <추억과 묵상>은 제2차 세계 대전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여담이지만 그의 회고 중에 스탈린과의 대화를 "못으로 돌을 찍는 것과 같았다."라 묘사한 부분이 있다. 물론 이렇게 쓰긴 했지만 그래도 주코프는 스탈린의 정치, 경제, 외교적 수완과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전쟁에서 승리한 공을 스탈린에게 적지 않게 돌리고 있다. 물론 스탈린의 쓸데없는 간섭이나 터무니없는 작전 계획 같은 병크도 써놓긴 했다. 그에게 스탈린은 애증의 관계였을 것이다. 주코프는 회고록에서 1930년대 소련은 국방에 투자를 많이 했기 때문에 독일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고 했고, 그런 의미에서 스탈린의 중공업 우선주의를 옹호했다. 소련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는 대숙청도 한번 언급되는데, 짤막하게 군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숙청에서 숙청되었던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나 야키르 같은 붉은 군대의 선구자들에 대해서 매우 높이 평가함으로써 우회적으로 대숙청을 비판하고 있다.
이 회고록 집필에 약간에 흑역사가 있었는데, 당시 서기장 브레즈네프가 회고록에 자신이 독소전에 참전하여 영웅적으로 싸우다 부상을 입었다는 내용을 집어넣으라고 압력을 넣은 적이 있었다. 주코프는 반발했지만 압력을 못 이기고 결국 그 부분을 회고록에 넣고 말았다. 안습. 결국 이 대목은 소련이 붕괴되고 회고록 10판이 발간됐을 때에 가서야 삭제됐다. 초판이 나왔을 때 워낙 검열과 간섭이 잦아서 "이 책은 내가 쓴 책이 아니야"라고 했다나...
  • 흑역사로 소련이 핵무기를 개발한 후, 원자폭탄이 시험 투하된 곳에서 기동 훈련을 하는 바람에(!) 후에 그 부대원 대부분이 에 걸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이고... 1950년대는 방사능 후유증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으니 개인적인 문제로 보긴 곤란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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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조지 S. 패튼과 만나 담소하는 주코프.
  • 패튼 대전차 군단의 문제의 장면 모델의 소련 측 당사자이기도 하다. 당장 독일이 항복한 후 베를린에서 벌어진 연합군 퍼레이드에 참석했을때, 소련군 총사령관 대리인 주코프가 패튼에게 신형 중전차인 IS-3의 위용과, 각종 소련제 대전차포의 긴 사정거리를 자랑하자, "제 부하가 그렇게 먼 거리에서 적을 쏘는 비겁한 짓을 한다면, 제가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고 답해 주코프를 당황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하여간 패튼 성깔은 어디 안 간다...
  • 해리 터틀도브의 단편 마지막 신조에서는 인도 주둔 사령관 발터 모델 장군의 회상을 통해서 모스크바 함락 때 잡혀서 모델과 짤막하게 이야기 나눈 다음에 총살되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으아악! 누구세요..? 하긴 고증에 충실했으면 안 팔렸을 것 같긴 하다

5 수상 경력

  1. 주코프의 첫째 딸 에라, 넷째 딸 마리야의 사진을 보면 이 모습을 쏙 빼닮았다.
  2. 회고록에 의하면 자기 마을 주민들의 성은 모두 주코프였다고 하고 있어서 집성촌 출신으로 보인다.
  3. 사진을 보면 매우 어색한데, 아마도 촬영 당시 불참해서 나중에 합성한 듯. 원래 주코프의 키는 저렇게 크지 않다.
  4. 당시 붉은 군대는 계급이 없이 그저 직책만 있었다.
  5. 후에 프룬제 군사대학이 된다.
  6. 러시아 제국 시절에 만주로 진출하려던 일본에게 패배했고, 적백내전 당시에도 일본군이 개입했기 때문에 소련은 그들의 야욕을 경계하고 있었다. 전임자 페클렌코가 연대급으로 맞붙은 제1차 전투에서 잘 수비했기 때문에, 사안을 중요하게 보지 않았으면 그보다 높은 지위의 군관구 사령관이었던 주코프를 불렀을 리 없다.
  7. 이때 그가 양성한 부대들이 나중에 독소전쟁에서 독일 남부집단군의 진격을 상당히 늦췄다.
  8. 칼라에 붙은 별 5개 때문에 원수 계급으로 오인되지만, 실제로는 한국의 대장에 해당하는 계급인 'General of the army'이다. 원수는 그 당시에도 왕별 하나였다.
  9. 그러나 이 일은 주코프보다는 국방장관이었던 티모셴코의 역할이 컸다.
  10. 특히 남부집단군이 주코프가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시절 육성한 강력한 소련군 부대 덕분에 진격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중부집단군의 선두 부대였던 하인츠 구데리안헤르만 호트 휘하 기갑군을 남부집단군으로 내려 보낸 탓이 컸다.구데리안은 이 조치에 강력하게 항의했으나 히틀러는 남 말 안 듣는 걸로는 자기 숙명의 라이벌 뺨치는 수준의 인간이라 그냥 씹혔다.
  11. 특히 독일 제6군은 정예 부대로 평가받는 부대였기 때문에 전투력 공백이 컸다고 한다.
  12. 천왕성 작전: 70만+40만, 화성작전 68만+41.5만
  13. 2014년 3월 1일 미국에서 발매된 <Fighting Patton: George S. Patton Jr. Through the Eyes of His Enemies>에서는 이를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최대 규모의 방어전 승리라고 높이 평가했다.
  14. 글란츠가 그런 설을 제기한 배경은 첫째, 천왕성 작전 및 토성 작전 전반에 걸친 투입 전력과 사상자 및 전력 손실보다 화성 작전이 더 컸다는 점, 둘째, 스탈린이 지속적으로 모스크바에의 위협 문제를 제기해 왔기 때문에 르제프 돌출부가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리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중 첫째 배경은 애초에 이 지역에 서로 더 많은 병력이 밀집돼 있었고 양쪽 모두 처음부터 주요 위협으로 상정해 왔기 때문에, 글랜츠가 제기한 설과 달리 단순 조공으로서 가해진 작전이었다 해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공산권의 작전 교리에 의하면 상황에 따라서 주공보다 조공에 더 많은 전력을 집중할 수도 있다.
  15. 그 유명한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의 작가이다.
  16. Operation Buffel: 퇴각 작전의 클래식이라고 극찬받으며 지금도 각국 사관학교에서 강의되는 작전으로 소련군은 독일군 9군의 퇴각 자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에 책임을 지고 이반 코네프가 일시적으로 해임됐다.
  17. 독일군 장성들의 회고록 또한 군사 기밀 문서들이 해제되면서 상당수가 그 설득력을 잃으며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18. 이때는 소련군이 공세를 펼칠 때라서 쾌속 기동을 하게 되었으므로 소련군 장교들도 독일군처럼 방진 고글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19. 오른쪽 흑마를 탄 장군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이다.
  20. 다만 과장되었을 뿐이지, 주코프가 베를린에서 귀금속을 약탈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주코프의 진정한 흑역사.
  21. T-34 항목에 자세히 나오지만, 기관단총, 지뢰, T-34를 쓸모없다 여겨 생산에 제동을 걸었다. 사형당해 마땅하다.
  22. 베리야를 체포하면서 주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소비에트 인민의 이름으로 널 체포한다. 이 개자식아!"
  23. 소련은 그나마 천조국의 반 정도의 경제규모를 가지고 있었으나, 당시 동구권과 서구권 전체의 경제비율은 1:4였다.
  24. 이런 허황된 주장이 한국 독빠사이에서 계속 확증편향된 결과 "주코프 거품설" "바실레프스키 최고명장설"과 같은 괴설이 독빠가 지배하는 한국 밀덕계에서 주장되기도 했다. (주코프가 범장이라는 주장은 독일군 자료를 사료로 쓰면서 소련군을 깎아내리기 위해 바빴던 냉전기의 서방 전쟁사학계에서도 감히 주장하지 못하던 것이다) 여러가지 요지는 주코프는 바실레프스키 없으면 시체였으며, 바실레프스키가 진짜 명장이고, 주코프는 이름만 빌린 허당이라는 것. 바실렙스키가 명장이라는 것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만, 러시아에서 독소전 최고 명장을 꼽으라면 당연히 주코프가 1위로 꼽힌다. 왜 수보로프, 쿠투초프 훈장에 뒤이어 러시아에서 주코프 훈장이 만들어졌는지 생각좀 해보자.
  25.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베저위붕 작전, 영국 본토 항공전, 유고슬라비아 침공 등 숱한 실전을 겪은 독일군은 당시 엄청난 강군이었다.
  26. 축구로 예를 들면, 선수 개개인의 기량은 비슷하나, 2년 간 무수히 실전을 치뤄 봤던 팀과 감독도 없고 주전도 정해지지 않은 데다가 훈련도 불충분한 팀이 맞붙는 셈이었다. 덧붙여 이 축구를 서로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규모의 운동장에서 하는 것이다. 당연히 상호 지원과 체계적 대응은 불가능하다.
  27. 사실 독일 국방군도 히틀러 집권 초기의 확장기엔 소련군과 별로 다를 바 없었고, 오스트리아 병합을 위한 에 진공하던 부대는 명장인 페도르 폰 보크가 지휘하고 있었음에도 이탈리아군 무관의 비웃음을 받았을 정도였다.
  28. 물론 어디까지나 대숙청 시절에 비해서 온순해진 거지, 스탈린과의 작전 회의와 보고는 여전히 지휘관들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후퇴 금지하고 멋대로 전선 넓혀서 수많은 장군들 암 걸리게 한 히틀러만 하겠냐만...
  29. 독빠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독빠들은 기본적으로 소련의 승리를 운이나 요행으로 생각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르제프 전투를 비롯한 데이비드 글랜츠가 발굴한 여러 사실들이 한국 독빠들에 의해 오독되어 소련군을 폄하하는 식으로 읽히는 게 한국 밀덕의 현실이다. 정작 글랜츠는 렌드리스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없었어도 소련이 궁극적으로 독소전쟁에서 승리했을 것이라는 것은 전혀 의심하지 않는 친소파 역사가인데도 그런 소릴 한다.
  30. 독빠 밀덕후들이 신화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하인츠 구데리안,에리히 폰 만슈타인 등도 여러 번 삽질을 했으나 이들은 회고록을 남겨서 자신을 변호하고 모든 병크를 히틀러 탓으로 돌리는 바람에 묻혔을 뿐이다. 서방에서 독일군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받았던 에르빈 롬멜이야 초반 반짝 승리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아프리카 군단을 말아먹고 혼자 독일로 후송되어 왔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최근에 재평가되고 있는 발터 모델 또한 쿠르스크 전투 때 고전했고, 최후에는 압도적인 영미 동맹군에 패해 자결했다. 이렇게 하나하나 따져 보면 명장이라고 칭송받는 사람들도 실패가 여러 개 있기 마련이다.
  31. 이때는 소련군이 독일군을 밀어붙일 때이다.
  32. 이 명령은 소련 붕괴 후에야 공개되었다. 그리고 스탈린은 투옥만 명령했지 처형은 명령하지 않았다.
  33. 물론 인도적인 견지에서 많은 비판을 받는 명령이긴 하지만, 당시 소련군을 사로잡았던 패배주의 탓에 싸우지도 않고 수많은 투항자들이 나온 것을 견지한다면 이는 불가피한 극약 처방으로도 볼 수 있다. 220호, 227호 명령에 대한 비판은 자국이 온전한 전장이 아니었던 영미 측의 시각에서 나온 것으로, 독일군에 의해 수백만 명의 양민이 학살되고 제네바 협약이 전면적으로 무시되던 독소전에서는 좀 더 당시의 정황을 봐야 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34. 톨스토이는 직접 참전했던 코카서스 전쟁을 다룬 여러 수기들을 썼는데, 거기서도 러시아군의 우라돌격이나 무모한 자살적 돌격은 자주 나온다.
  35.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는 전쟁 때 협력해서 작전 뛰었던 영국 해군 장교가 전후 선물을 보냈다는 이유로 굴라그에 잡혀온 해군 중령이 나오는데, 실제로 솔제니친의 굴라그 동기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스탈린 시절에는 콜라를 좋아하는 것, 미국이나 유럽에서 택배를 받는 것만으로도 굴라그에 끌려갈 수 있었다.
  36. 색소를 뺀 일명 화이트 코크(White Coke)였다. 아이젠하워가 마시던 콜라도 이 종류였다. 나중에는 해당 콜라를 보드카 병에 담을 것을 요청했다.
  37. 맥아더가 트레이드마크인 파이프 담배가 옥수수 파이프였던 점을 반영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