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 이소로쿠

야마모토 이소로쿠
山本 五十六(やまもと いそろく)
생애1884년 4월 4일 ~ 1943년 4월 18일
출생지일본 니가타나가오카
사망지솔로몬제도 부건빌섬 상공
복무일본제국 해군
복무기간1901년 ~ 1943년 4월 18일
최종계급중장->대장[1]
근무연합함대 사령장관
주요참전 러일전쟁(쓰시마 해전)
제2차세계대전(태평양전쟁)
서훈내역국화장菊花章(きっかしょう)

(2등급)
욱일장旭日章(きょくじつしょう)
(1등급)
서보장瑞宝章(ずいほうしょう)
(1등급)
금치훈장金鵄勲章(きんしくんしょう)

(1등급과 2등급)
기사십자 철십자장(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
묘소야스쿠니신사靖国神社(やすくにじんじゃ)


다마 공동묘지多磨霊園(たまれいえん)

쵸코지長興寺(ちょうこうじ)

제국의 운명은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의 직무에 헌신하느냐에 달려 있다.
苦しいこともあるだろう 言い度いこともあるだろう 不満なこともあるだろう 腹の立つこともあるだろう 泣き度いこともあるだろう これらをじっとこらえてゆくのが 男の修行である.

힘든 일도 있을 것이다. 말하고 싶은 것도 있을 것이고 불만도 있을 것이다. 열 받는 일도 있을 것이고 울고 싶은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을 가만히 참아가는 것이 남자의 수행이다.

私たちは真珠湾を空襲して6ヵ月間は勝利ができるだろう。 しかし、それ以降は断言できない。

우리는 진주만을 공습하고 6개월 동안은 승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장담할 수 없다.

もしかすると、私たちは、眠れる獅子を触っ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

어쩌면 우리는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것은 아닐까.

寝ている巨人を起こして恐ろしい結果を生むことが私は怖い。

잠자는 거인을 깨워 끔직한 결과를 낳을 것이 나는 두렵다.

してみて、言って、させて、誉めてくれなければ人間は動かないだろう。

해보고, 말하고, 시키고, 칭찬해주지 않으면 인간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1 일본군인

이름에 쓰인 한자가 참 간단하기로 유명하다.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산본오십육'. 산본 거주하는 56세 아저씨

총사령관 취임 직후말년에 국회에 출석하며

1.1 개요

일본 해군 제독. 일본 연합함대 사령장관(총사령관).

진주만 기습작전의 입안자로, 미국에 유학을 갔다와 그 잠재력을 알고 있었던 지미파였고 해군 내 조약파에 속했다. 그렇기에 미국과의 전쟁을 결사반대하였다. 하지만 결국 전쟁이 확실시 되자, 진주만 기습을 성공시키며 승승장구 하지만, 약 반 년 후 미드웨이 해전에서 정규항모 4척을 날려 먹는 치명적인 패배를 겪는다. 이후로도 일본 해군의 실질적인 최고 지휘관으로서 과달카날 전투 및 그에 연계된 해상전/공중전을 지휘한다.

이후 이어진 부겐빌 공중전이 한참 진행되던 중인 1943년 4월 18일, 1식 육공에 탑승하여 쇼틀랜드, 라바울 등 남방 전선을 시찰하던 중,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한 미군의 캑터스 항공대 토머스 랜피어 대위의 P-38 라이트닝에 의해 부겐빌 섬 상공에서 격추되어 전사하였다.[2]

1.2 생애

1.2.1 어린 시절

부친의 나이가 56세였을 때 그를 얻었다고 하여 이소로쿠(五十六)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본명은 다카노 이소로쿠[3]였으나 1916년에 과거 번(藩)의 유력가였던 야마모토 가에 양자로 들어가면서 야마모토 이소로쿠로 개명한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과 싸우게 된 미국은 일본인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문화를 조사하다가, 그들이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장남부터 순서대로 숫자를 붙이는 일이[4]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소로쿠를 보고 많이 충격 먹었다고. 근데, 그 사령관 이름이 오십육이라고? 아들만? 얼마나 파워풀한 아버지였길래? 사실 56세에 애를 본 것도 충분히 파워풀한거다

1.2.2 가계

계보
타카노 사다미치-타카노 사다요시->타카노 이소로쿠
미나미토 노 미츠마사-야마모토 요시미치-> 야마모토 이소로쿠

타카노 가[5]

  • 아버지 : 타카노 사다요시(타카노가의 데릴사위)
  • 어머니 : 타카노 미네코(사다미치의 장녀)
    • 장남 : 타카노 유즈루(타카노 사토루)
    • 차남 : 타카노 미노루
    • 삼남 : 타카노 타이조
    • 사남 : 타카노 토메키치
    • 오남 : 타카노 季八
    • 장녀 : 타카노 加壽

야마모토 가

  • 양부 : 야마모토 요시미치(야마모토 다테와키)
    • 장녀 : 야마모토 하츠로
    • 차녀 : 야마모토 타마로
    • 본인 : 야마모토 이소로쿠
    • 아내 : 야마모토 레이코
    • 첩 : 카아이 치요코
      • 장남 : 야마모토 요시마사
      • 차남 : 야마모토 타다오
      • 장녀 : 야마모토 스미코
      • 차녀 : 야마모토 마사코

친척
삼촌[6] : 노부라 테이/타다노 (해군소장), 처의 조카
아내의 사촌의 딸 : 유카와 레이코(본명 유노카와 카즈코)

1.2.3 제2차 세계대전까지

러일전쟁 당시 해군 소위로 종군하며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지휘 아래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트 함대와 교전한 경험이 있었다. 이 전투에서 오른손 왼손 손가락 두개를 잃었는데, 전상이 아니라 그냥 사고였다.

1914년 고급 과정인 해군대학을 졸업했다. 1919년에 미대사관 무관으로 파견되었을 때, 하버드 대학에서 연수하고 유창한 영어를 익히게 되었다. 1921년부터 1923년에 걸쳐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관계로 미국을 자주 방문하였다. 이 때 그가 직접 보고 느낀 미국의 잠재력에 훗날 태평양 전쟁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게 된다. 디트로이트의 광활한 공장지대, 애팔레치아의 크고 아름다운 광산, 끝도 없이 이어지는 농장, 심지어 야마모토가 몰다 퍼져버린 자동차를 지나가던 평범한 소녀가 뚝딱 고쳐내던 경험에 의해 그러한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압도적인 생산능력, 풍부한 물적/인적자원, 기술력과 교육 수준 등등 미국의 모든 것은 일본에 비해 말 그대로 넘사벽이라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귀중품이었던 설탕이 미국에선 아무나 가져가라는 듯이 노상카페의 테이블에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져있었던 것도 그에게 있어 쇼크였다고. 사실 이러한 야마모토의 판단은 정확했다. 미국은 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이미 모든 인프라와 철강 생산량 등 경제적 수준에서 열강들이 수두룩빽빽히 모여 있던 유럽을 압도하였으며 대학의 수와 수준 또한 이미 유럽의 그것을 능가하여 식자율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그런데 인구도 1억 1천만을 돌파하여 러시아와 맞먹던 상황이었으니... 더 무서운 건 농노나 빈민층이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유럽과 다르게 미국은 이렇게 전 국민을 동원 가능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유학시절 방학 때 친구들과 멕시코에 밀입국해서 유전지대를 관찰하다 걸린 건 흑역사.(…) Hoyt의 전기에 의하면 멕시코 정부에서 일본 대사관에 조사 의뢰를 맡겼다고 한다.

1935년 해군성 항공본부장에 취임해 일찍부터 거함거포주의의 한계를 간파하고 해군항공대와 항모전단 편성에 심혈을 기울여 선진적인 항모전술을 만들어냈다는 주장이 있지만, 사실 항공기의 진가를 알아봤다기보단 일본이 미국과의 생산력 경쟁에서 이기려면 선박보다는 항공기 쪽이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특히 전함은 미국과의 경쟁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야마토의 건조에 대해서 '야마토를 만들 돈이면 제로센을 1000기는 뽑아낼 수 있다'며 반대한 것도 이것의 일환.

다만 구상한 항공모함 운용은 최후의 함대결전을 위한 점감작전의 일환이었고, 그것이 결정적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항공모함을 잘 운용하여 적의 주함대를 약화시킨 다음, 일본근해로 다가오는 적의 함대를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과 같은 함대결전으로 제압하여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다는 것이 그의 원래 구상이었다. 게다가 정작 본인이 항공전에 무지했던지라 일본의 항공기 개발이 산으로 가버렸고, 항공기 운용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하는 탓에 파일럿들에게 '우리의 적은 우리 장관님이다'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전후에도 사카이 사부로같은 항공대 출신 파일럿들에게도 대차게 까이기도.

'전함이란건 함대 기함으로 사용할 것과 그 예비로 사용할 것으로 총 두 척만 있으면 충분하다'라는 발언이나, 야마토의 건조현장에서 작업자들에게 '이제 전함은 필요없어질테니 자네들은 조만간 실업자가 되겠구만'같은 소리를 하여 수많은 관계자들에게 원한을 산 에피소드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막상 야마토가 완성되고 난 뒤에 '이 배가 있으니 반드시 이길 수 있다'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보면 야마토 자체를 싫어했던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감각이라는 게 아예 없었던 다른 장성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미국과의 전쟁이 승산없는 전쟁임을 예감했던 것은 사실이며,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유지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에 정국을 장악했던 육군 강경파와 대립했는데 오죽하면 1939년에 연합함대 사령장관에 오른 것도 강경파의 암살위협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얘기가 있다. 당시 연합함대 사령부는 육상이 아닌 전함 나가토 함상에 있었기 때문에 암살자가 오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가 당시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에게 언급한 '"우리는 처음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맹렬하게 돌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는 텍사스의 유전과 디트로이트의 공장들이 (우리에게) 단호하고 결정적인 반격을 시도해 올 것이다."는 언급은 실제로 거의 들어맞았다. 주변에서는 요나이 미츠마사, 이노우에 시게요시 와 함께 해군 좌파 삼인방으로 불렸다고.

1.2.4 진주만 공격, 그리고 짧은 영광

그러나 개전이 결정되자 미 태평양 함대의 본거지인 진주만을 공습해 기선을 제압해야 승리의 가능성이 있음을 역설하며 철저한 준비와 훈련에 매달렸다. 1941년 12월 7일 개시된 진주만 공습을 철저한 준비로 대성공을 거두어 미국의 당시 가용전력은 거의 없다시피한 상황이었으나 본래 목적인 미 함대 전력들을 상당수 격침시키거나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시 유류저장고 등의 기간시설을 제거하지 못함으로서 후일 미해군의 재기의 단초를 만들어주고 말았다. 실제로 그는 진주만 공습 성공소식을 듣고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것은 아닐까?'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진주만 공습으로 주력 전함 및 중순양함이 왕창 털린 미해군은 이때의 전훈을 집중적으로 받아들여 현대적인 항모를 전력의 핵심으로 삼는 함대를 찍어내기 시작한다.

진주만 공습 이후에 그가 요미우리 신문의 기자와 한 인터뷰는 아주 인상깊다.

요미우리 기자 : 자, 진주만 공습이 성공했는데, 이제부터 어떤 방식으로 미국과 싸우실 겁니까?

야마모토 이소로쿠 : 미국과의 휴전조약을 준비할 겁니다.

말만 들어보면 곧바로 전쟁을 중단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와이를 점령하고 이곳을 기점으로 파나마 운하를 틀어막으면 공업기반이 동부에 집중돼있는 미국으로서는 손을 들 수 밖에 없을테니 이때 선심쓰는척 조약을 맺으면 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야마구치 다몬이 상부에 제출한 계획도 대충 이런식. 다만 야마구치 다몬의 경우 조약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미국 본토까지 점령하는 완전승리까지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이후, 둘리틀 특공대의 공습으로 충격에 빠진 대본영의 분위기를 바꾸고, 미군의 잔여 항공모함들을 모조리 격침하기 위해 미드웨이 공략을 계획하였으나 이미 미군은 일본군의 암호를 모조리 해독해 작전의도를 다 파악한 상태였고, 여기에다 방만한 작전 계획으로 인해 제대간 협동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항모기동부대의 지휘를 맡았던 나구모 주이치의 뻘짓이 겹치면서 작전에 동원된 정규항모 4척을 잃는 대참사를 당했다. 너무 믿기지 않는 지독한 패배라, 사기에 영향을 줄까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반에는 기밀사항이었다고.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츠 마모루도 전후에야 이걸 알고는 경악을 금치못했다고 하니... 미드웨이 해전 항목 참조.

이후, 그의 노력은 아무 소용 없이 전황은 악화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1.2.5 야마모토의 전사(戰死) : 작전명 '복수'

Yamamoto_last_image_alive.jpg
사망 사흘 전, 라바울에서 촬영된 사진

1943년 4월 18일. 야마모토는 부겐빌 섬으로 전선시찰에 나섰다. 문제는,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극비였지만) 미군일본군암호를 거의 실시간으로 완벽에 가깝게 해독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시찰 며칠 전에 야마모토의 비행일정이 입수되자마자, 이 대박 월척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Operation Vengeance(복수 작전)"로 명명하고 즉시 추진하였다. 진주만 공습의 주인공이었던 야마모토는 일본에서의 범국민적인 위상과 인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그만큼 미국에 있어서는 원수 중의 원수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야마모토를 제거하면 미군이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향후 암호해독을 통한 정보입수 루트가 차단되는 극심한 손해를 볼 수도 있었다. 때문에 단순한 군사작전일 수 없었던 이 작전은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는 물론,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결재까지 받아야만 했다. 루스벨트의 선택은, 어떠한 비용을 치르더라도 야마모토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일본군도 바보는 아니어서, 미군 전투기들의 작전반경 밖으로 야마모토의 비행경로를 잡았다. 그러나 당시 미 육군의 최신 전투기였던 P-38 라이트닝이 특수 보조연료탱크까지 가득 채울 경우, 야마모토의 목적지인 부겐빌 섬 부인(Buin) 비행장 상공이 (당시 미군의 최전선 비행장이었던) 헨더슨 비행장(과달카날)으로부터 비행반경에 아슬아슬하게 들어간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미군은 즉시 최정예 조종사들(캑터스 항공대)와 보유한 모든 P-38들 중 최상의 기체들을 엄선하여 며칠 간 극도의 보안 속에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라바울에서 출발한 야마모토 일행의 수행단이 G4M(베티) 폭격기 2대 + 호위 전투기 제로센 6대의 편대라는 사실까지 알아낸 미군은, 18기의 P-38를 출격시켜 이 중 14기가 호위 제로센 6기를 상대하는 사이, 나머지 4기의 P-38이 2기가 한 조를 이루어 수송기 1기씩을 최대한 신속히 격추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작전의 핵심은 P-38의 체공시간이었다. 부겐빌 상공은 미군기에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먼 지점이었는데, 거기다 육상(섬)과 해상(초계정)으로부터의 탐색을 기만하기 위해 웨이포인트를 갈 지(之) 자로 꺾어가며 2시간 넘게 아슬아슬하게 초저공 비행을 해야 했던 탓에, 비행장 상공에서 P-38이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5분 남짓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수행단이 조금만 일찍 or 늦게 도착하면 그대로 작전은 실패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야마모토의 철저한 시간관념을 알고 있던 미군은 비행스케줄에 맞춰 수행단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대로 작전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야마모토는 자신의 그 철저한 성격 탓에 목숨을 잃었다.

4월 18일 오전 7시 20분, 헨더슨 비행장에서 18기의 P-38이 이륙하였다. 그러나 2기가 이륙 중 기체 이상으로 탈락했다.

오전 9시 34분, 2시간의 초저공 비행 끝에 부인(Buin) 비행장 인근에서 1만 피트 상공으로 급상승한 16기의 P-38은,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경로로 이동 중인 수행단 일행을 1분 만에 발견했다. 그 즉시 연료탱크를 버리고 급가속하며 달려 들었지만, 이 때 1기의 P-38이 연료탱크가 분리되지 않아 그의 윙맨과 함께 이탈하여, 교전한 P-38은 14기(호위공격기 상대 10기 + 1번 수송기 공격 2기 + 2번 수송기 공격 2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숫적으로도 여전히 우위였을 뿐더러, 호위 제로센 조종사들이 접근해 오는 P-38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상대거리가 1마일 이내였을 정도로 철저한 기습이었기 때문이다.

오전 9시 35분, 조용하던 하늘에서 순식간에 난전이 벌어졌다. 2기의 수송기는 허겁지겁 서로 반대 방향으로 급강하하며 어떻게든 피하려 했지만, 수송기인 G4M으로서는 (G4M 1기 당) 2기씩 작정하고 달려드는[7] 최신형 고속전투기 P-38를 따돌리는 것은 당연히 무리였다.

먼저, 야마모토가 탑승중이었던 1기의 G4M이 토마스 랜피어의 집중사격으로 순식간에 오른쪽 엔진과 날개가 박살나며 밀림에 추락하였다.(탑승인원 11명 전원 사망.) 곧이어 나머지 1기의 G4M도 다른 P-38 2기의 공격을 받고 해상에 불시착한 직후 가라앉았다.(탑승인원 3명 생존.) 수송기 2기를 모두 격추한 사실을 확인한 모든 P-38 조종사들은 그 즉시 고속으로 상승하며 퇴각하였다. 바로 코 앞의 부인 비행장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대경실색한 일본 전투기들이 벌떼같이 비상출격하였지만, 고속상승이 주특기인 P-38을 따라 잡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 모든 과정에 1분도 채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미군기들의 기동은 신속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의 손실은 (2번째 G4M에 달려든 2기의 P-38 중) 1기가 격추된 것이 전부였다(조종사도 전사).[8] 일본군 측 손실은 수송기 2기가 전부였다. 수송기 2기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누구였느냐가 매우 심각한 문제였지만.

조종사들이 귀환한 헨더슨 비행장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2기의 G4M을 모두 격추시켰으므로 그 중 어느 것에 야마모토가 타고 있었는지 여부는 미군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작전은 완벽히 성공하였다. 미군은 이 작전의 성공이 '대전투의 승리'와 맞먹는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했으며, 실제로 야마모토의 죽음은 일본군과 국민들에게 엄청난 사기 저하를 가져왔음이 종전 후 확인되었다.

전후, 미군이 일본군의 서류를 조사하자 야마모토의 죽음에 대한 상세한 진상이 드러났다. 야마모토는 2기의 G4M 중 먼저 격추된 (정글에 추락/폭발한) G4M에 탑승해 있었다. 일본군은 그 즉시 추락지점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워낙 빽빽한 정글이었던 탓에, 24시간이 지난 후에야 야마모토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부서진 폭격기 옆에 튕겨 나와 군도를 꼭 쥔 채 숨져 있던 그의 시신에서 2개의 관통상(가슴, 얼굴)이 발견되었다. 격추되기도 전에 기관포탄에 끔살당했다는 얘기.

바다에 떨어진 나머지 1대에는 참모장인 우가키 마토메 일행이 탑승하고 있었다. 우가키는 중상을 입었지만 즉각 출동한 보트에 구조되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아래는 야마모토 사망 직후의 미일 양측의 뉴스 보도이다. 실제 격추 필름이 들어가 있다. 그야말로 탄창이 바닥날 기세로 총알을 때려 박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일본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2011)에서의 피격 장면.[9]

Yamamoto_state_funeral.jpg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장례식

야마모토의 시신은 워낙 험악하게 훼손된 탓[10]도 있어서 현지에서 화장하였고, 전함 야마토에 실려서 일본으로 운구되었다. 일본 정부는 처음에는 국민과 군의 사기가 떨어질까봐 사망 사실을 숨기고 문제의 전투를 "해군 갑(甲) 사건"이라는 암호명으로 부르다가 1달 후에 화장한 유골이 일본에 도착하자 그때서야 사망 사실을 일반에 공개하고 영웅 대접을 했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원수 칭호[11]가 추서되었으며, 동맹국 독일에서는 곡엽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보내왔다. 지금까지 외국인 중에서 이 훈장 서훈자는 야마모토 제독이 유일하며, 또한 하위 훈장을 받지 않고는 위 훈장을 받을 수 없는 철십자장 수훈 제도[12]를 따르지 않은 특례를 인정한 유일한 수훈 사례이다.

tama-reien09.jpg
야마모토의 유해는 러일전쟁 시절 쓰시마 해전의 영웅이며,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바로 곁에 안장되었다. 이곳은 일본에서도 명사들이 다수 묻힌 도쿄 다마레이엔(多磨霊園)에 위치한다.

한편 미국은 암호감청 및 해독 사실을 어떻게든 숨기기 위해, 야마모토 사살 보고를 받았음에도 철저히 침묵을 지켰다. 일본이 1달 후 스스로 야마모토 제독의 사망 사실을 실토하자, 그제야 "해안감시원이 야마모토 제독이 폭격기에 타고 부겐빌로 가는 사실을 보고받아 작전을 펼쳤다"란 브리핑을 내놨다. 일본군 또한 암호해독을 강력히 의심했지만, 그 확증이 필요했다. 그래서 매우 그럴 듯한 거짓정보를 흘려 미군기들을 유인함으로써 확인하려 했으나, 이를 간파한 미군은 이를 철저히 회피하였다. 결국 일본군의 진상조사 노력은 흐지부지되었고, 이 작전의 구체적인 전모가 공개된 것은 전후의 일이다.

미국이 야마모토를 끔살시킨 이유가 야마모토의 '호전성' 때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백악관까지 진격해서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는 게 그 이유. 한 번의 결정적인 승리로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는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이니, 미 본토를 점령할 능력없으면 개전을 하지 말라는 의미였는데, 이게 와전돼서 미국 점령을 획책하는 광인으로 그려졌다는 것이다.[13]

물론 어차피 전쟁과 전투에서 군인은 기본적으로 '살해'의 대상이다. 더구나 야마모토는 일본의 전쟁수행에 있어 특히 중요한 고위장성이었으므로, 제거할 기회가 있으면 제거하는 게 당연하다. 다만, 진주만 공습의 주인공이면서 + 덤으로 저런 시건방진 발언까지 한 야마모토가 미군에게 있어 좀 더 각별한 제거목표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여담이지만, 야마모토 제독은 함정 및 육상 모두에서 범용으로 착용할 수 있도록 채택된 최신 군복인 '3종 군장'(#)을 처음으로 입고 갔다. 원래는 평소처럼 해군의 흰색 하정복인 '2종 군장'(#)을 입고 있었지만, 육군 장병들을 만날 예정이라 육/해군이 동질감을 느낄만한 녹색 군복을 입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참모들과 함께 3종으로 갈아입고 비행기에 탄 것. 이 때문에 한동안 해군에선 3종 군장이 재수없는 옷으로 통했다는 야사가 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야마모토 암살 작전에 참여했던 미군 조종사들은 누가 야마모토가 탄 비행기를 격추했느냐를 놓고 전후 법정 공방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1.3 평가

제2차 세계대전에 종군한 일본군 장성들 중에서는 흔치 않은 상식인이며 개념인으로 평가되는 사람. 그러나 일본군 해군의 한계는 그닥 극복하지 못했다고 보인다.[14]

진주만 공습의 대성공하자 이때의 기동함대(3개 항공전대, 항모 6척)에서 4척은 남방작전에 투입하고 5항공전대(항모 2척)를 때어내 동쪽의 미국을 막게 하였다. 기동함대의 전력을 분산 시킨 것이다. 일본은 그동안 아무도 생각못한 항모의 집중 운용을 스스로 포기하였고, 그에비해 미국은 일본에게 무겁게 배워 이후 항모를 집중 운용한다. 미국쪽의 사료를 보면 당시 매우 긴박하게 표현한다. 태평양방면에서 운용할 전력이 남아 있지 않는 것이다. 그야말로 위기일발인 상황에서 일본은 더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만약 일본이 기동 함대로 동쪽을 계속 공격해서 몇척 안남은 태평양함대를 전멸 시키거나 최소한 고착견제만 해도 남방은 저절로 일본의 손에 들어오는 상황이였다. 실제로 분산되어 남방작전에 투입된 항모 4척도 상대할 적이 없었다. 미국의 전함이나 항모가 남쪽에 있던 것도 아니였으니, 지상 폭격에 동원 되는 것이 고작이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진주만 공습의 비행총대장 후치다 미쓰오는 그외 회고록에 "(적이 없어서)폭탄을 떨어트릴 목표를 찾으려고 고생하는 작전에서, 일본 해군 함대 결전의 주력인 항공모함 여러척을 투입해도 괜찮은지 연합함대 사령부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내가 존경하는 야마모토 대장이긴 하나 야마모토 이소로쿠도 평범한 제독이라는 생각이 내 가슴에 싹트기 시작했다."라며 비판 하였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나구모가 아닌 그가 작전지휘를 맡았다면 전투에서는 이겼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미드웨이 당시 야마모토가 이끄는 본대는 미드웨이로부터 400여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고, 다른 함대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지원이 여의치 않은 상황임을 보면, 일본측의 무의미한 아쉬움일 뿐이다. 게다가 작전 전반에 걸쳐 야마모토 자신이 작전의 제1목표를 미 함대 격멸인지, 미드웨이 섬 점령인지 애매모호하게 지시를 내림으로서 나구모의 실책을 유도하는 데 일조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더구나 미드웨이 해전을 벌일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살펴보면 지휘체계가 일원화되지 못한 당시 일본군 군령체계에 문제가 많았으며, 야마모토는 이 점을 해결하기는 커녕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상층부의 전략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였다는게 드러난다. 즉, 나구모가 지휘했든 야마모토가 지휘했든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 볼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미드웨이 해전 항목을 참조.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이라는 위치 때문인지 해전에서는 대부분 전선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진주만 공습에서는 그가 그다지 신뢰하지 못하는 나구모를 보내고 자신은 먼 전선 후방에 있었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역시 전함 야마토를 기함으로 하여 먼 후방에 있었다. 반면에 태평양 섬 전투에 신경을 써서 지상부대를 격려하기 위해 돌아 다녔다. 그의 사망 역시 부겐빌 전선에서 육군 부대를 격려하기 위해 날아가다 죽은 것으로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은 아닌것이 해전과 육전의 양상에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해전은 보통 단기 결전으로 양상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육전은 상당 기간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항공전 양상이 되면서 수백km 를 날아와서 때리고 불쑥 잠수함에서 쏜 어뢰가 날아드는 걸 - 그것도 눈에 잘 띄고 탐나는 먹이감인 덩치 큰 기함에게 집중되는 걸 - 감안하면, 사실상 해전에서 전선이나 전선 후방의 안전지대 같은 개념은 없다. 따라서 해전에서 괜히 어쭙잖게 전장 근처에 어슬렁거리다 눈먼 폭탄, 눈먼 어뢰 맞아서 전황이 뒤집어질 리스크가 있지만,[15] 육전은 그런 리스크보다는 장기간의 전투에 지쳐가는 병사들을 위무하거나 전장의 상황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야 할 필요성이 컸을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전설을 시찰했다는게 문제가 아니라 연합함대 사령관의 전선 시찰 계획, 즉 특급 군사 기밀이 고스란히 적국에게 실시간으로 털리고 있다는 상황 자체가 문제였다.

도고 헤이하치로 곁에 묻혔을 정도로 일본에서는 나름 추앙받는 인물이기는 하다. 물론 그 정도의 평가에 거품이 낀 것은 후술할 이유로 부인할 수는 없다.

게다가 나구모와 야마모토에 대한 니미츠의 평가도 바닥을 기어서, 그를 기습하는 계획을 보고받은 니미츠 제독이 더 유능한 놈이 대신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당시 계획을 입안한 정보장교 레이튼 중령은 '일본군의 정신적 충격이 매우 클 것이다' + '그의 후임이 될 사람 중에서 그보다 똑똑한 사람은 없다라고 설득했다고 하고, 니미츠는 마지못해 승락했다고 한다. 그리고 레이튼 중령의 장담대로, 야마모토의 뒤를 이은 후임들도 변변치 못했으니….[16]

또한 그 역시 일본군의 전형적인 병폐였던 연공서열과 구시대적 함대결전 사상에 찌든 면모가 속속 드러나고,[17] 그 자신이 조약파이면서도 조약파와 함대파간에 논쟁이 벌어졌을 때는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군령부총장이 이끄는 함대파에 영합하는 발언을 하여 조약파가 대량 숙청당했을 때 무사히 빠져 나갔으며, 전쟁을 막고 싶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떠벌이기만 하고 다녔다는 비판이 나오는 등 실은 평판에 거품이 많이 낀 인물임이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심각한 도박 중독였다. 일단 자리에 한번 앉으면 열시간이고 스무시간이고 일어나지 않을 정도였는데, 이런 기질이 전투에서 드러난 것은 참으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진주만 기습도 미드웨이 해전도 자기 감에 맡기는 "올인"한 작전이었는데 전자는 제대로 허를 찔렀으나 후자에서 180도 뒤집힌 까닭에 그 한 판으로 여지껏 번 돈의 절반을 홀라당 말아먹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후임들은 아예 판돈을 불살라버리고, 막판에는 손모가지 까지 걸었다가 그 병신력에 크게 감동먹은 미국이 오함마로 화려하게 날려줬다

또한 러일전쟁에 초급장교로 참전했을 때 전투와는 무관한 사고로 손가락을 잃었는데 후에는 이것을 전상이라면서 자랑하고 다녔다고도 하고, 이래저래 과시욕이 좀 있는 사람인 건 사실인 듯 하다. 이런 예는 일본군 전체를 봐도 많은데 예로 황족인 후시미노미야도 러일전쟁 중 가슴에 전상을 받았다는 걸 자랑하고 다녔다는데, 실은 전상이 아니라 사고로 다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함대파에 속하였던 후시노미야가 군령부 총장이 되었을 때 동병상련의 정이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야마모토가 조약파였음에도 중책에서 내쫓지 않은 것은 그러한 일 때문에 살려준 것이다. 게다가 야마모토 자신의 정치력도 대단했고. 케케묵은 전함우위사상에 물들어서 그렇지 후시노미야는 사람보는 눈 하나는 나았다.[18] 함대파에게 가장 강경하게 반응한 이노우에 시게요시를 "강경한 남자야말로 쓸모가 있다"는 이유로 한직이긴 하지만 연습전함 히에이의 함장으로 임명하여 해군 상층부로[19] 복귀할 길을 열어놓은 것만 보아도 사람보는 눈은 확실히 있었던 사람이다.

그래도 일본 군부에서 미국의 쇼미더머니의 힘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인물임은 확실하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당시 불만을 품은 강경파들을 상대로 이 조약의 의미는 일본 해군이 3으로 묶인 게 아니라 미국과 영국을 5로 묶은 데 있다. 무제한의 건함 경쟁이 일어나면 3대 해군국간의 전력비는 5대 3은 커녕 10대 1로 벌어질 것이다라면서 설득한 적이 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에서 그 말은 현실이 된다. 3국동맹에도 불만을 가졌었고 진주만 기습때도 대미교섭이 타결되면 어떤 시점이든 간에 즉시 귀환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일선 사령관들이 불만을 품자 "불만이 있는 자는 당장 이 자리에서 사표를 제출하라."'는 식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의외로 인재보는 눈은 있어 그도 오자와나 야마구치 같은 이들을 눈여겨보긴 했지만 기기묘묘한 일본 해군의 구조덕에 그들은 필요한 순간에 함대를 지휘할 자리에 앉지 못했다. [20]

가끔 일본 해군의 바보짓중 하나인 "물에서 석유뽑는 사기 사건"에 야마모토 제독이 연루되어 있었다는 말이 돌긴 하지만 그냥 보고 라인에만 야마모토 제독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기에 낚인 사람은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대신과 해군 항공본부 교육과장 오니시 타키지로 대좌. 여담인데 이 오니시가 바로 카미카제를 최초로 지시한 장본인이다. 천하의 개쌍놈. 그리고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고노에도 상병신이다.

구두쇠 기질이 있어서, 집에만 오면 옷 닳는다며 훈도시만 입고 지냈다고 한다.

1.4 어록

苦しいこともあるだろう 言い度いこともあるだろう 不満なこともあるだろう 腹の立つこともあるだろう 泣き度いこともあるだろう これらをじっとこらえてゆくのが 男の修行である.

힘든 일도 있을 것이다. 말하고 싶은 것도 있을 것이고 불만도 있을 것이다. 열 받는 일도 있을 것이고 울고 싶은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을 가만히 참아가는 것이 남자의 수행이다.

私たちは真珠湾を空襲して6ヵ月間は勝利ができるだろう。 しかし、それ以降は断言できない。

우리는 진주만을 공습하고 6개월 동안은 승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장담할 수 없다.

もしかすると、私たちは、眠れる獅子を触っ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

어쩌면 우리는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것은 아닐까.

寝ている巨人を起こして恐ろしい結果を生むことが私は怖い。

잠자는 거인을 깨워 끔직한 결과를 낳을 것이 나는 두렵다.

してみて、言って、させて、誉めてくれなければ人間は動かないだろう。

해보고, 말하고, 시키고, 칭찬해주지 않으면 인간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1.5 매체에서의 등장

가공전기나 대체역사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이다.

굽시니스트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몽키 D. 루피로 분했다. 원래는 이 문서 최상위에 링크된 란스 시리즈의 야마모토 이소로쿠 코스프레를 시킬 셈이었는데 너무 매니악해서 교체당했다고 한다.(…)

허니와 클로버의 일본 해군빠인 하나모토 슈지가 좋아하는 인물... (오해할까 덧붙이지만 만화는 밀리터리랑 전혀 상관이 없다. 그냥 지나가는 컷으로 언급되는 수준.)이지만 역자가 밀덕이 아니여서 '야마모토 고주로쿠'로 잘못 표기되었다.

2011년 12월 진주만 공습 70주년 기념으로 일본에서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개봉했다. 제목은 그의 이름과 같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감독은 《8일째 매미》의 나루시마 이즈루이다.야쿠쇼 고지가 야마모토 이소로쿠 역을 맡았고 에모토 아키라요나이 미쓰마사 역을, 아베 히로시야마구치 다몬으로 출연한다.

오오와다 상무다.

영화의 성격상 그를 꽤나 미화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일례로 미드웨이 해전 패배의 책임에 대해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아니라 군령부 측에 전가하고 있다.[21] 실상은 야마모토 본인 지위를 이용해서 똥고집을 부린게 그 원인이었지만....

몇몇 인물 미화 부분을 스킵하고 보면, 전반적으로 3국동맹이나 미국과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부추기며 혹세무민에 앞장섰던 당대 일본의 언론이나, 짧은 이익에 집착하며 여기에 편승, 호응했던 일반 국민들[22]의 모습도 비추는 등 제법 볼만한 영화다. 작중 이러한 시국에 비판적인 사람은 야마모토와 절친한 사이인 호리 테이키치 예비역 중장을 비롯해서 몇 명 뿐인데, 호리 제독은 실제로도 막장 일본에서 손꼽을 만큼 올바른 전쟁관을 지닌 인물이었다.

영화에 나오는 장면들 중 과달카날에 상륙한 병사들이 고립된 상태에서 "지금이야말로 거함거포를 쓸 때가 아닌가!"라며 함대결전을 주장하는 함대 사령관이[23] "연료가 없다."고 대답하는 말을 듣자 조용히 주저앉는 장면이 유명하다. # [24]

정말로 연료가 없었다 당시 트럭의 연합함대 정박지는 전진기지 개념이라 진주만처럼 플랜트가 건설돼지 않았다 각 전진기지로 파견돼는 함정들이 들럿다가 급유,휴식하고 가는 개념이라 하루 급유능력은 제한적이다 전통적으로 일본군은 석유의 비축분은 성공한편이나 그것을 전방에 보급하는 체계가 열악했다
더군다나 침공상태에서는 전진기지가 늘어나므로 더더욱 고정기지 구축이 힘들다 그래서 유조선급유가 일상이다 심지어 트럭에서는 야마토 정도돼는 거대함은 정박도 못하고 계류상태로 있어야한다 당연히 매일 기름은 소모하는데 과달카날에 구축함, 후소급 전함들은 계속 작전해야 하나 아무것도 안하는 야마모토의 거대함정들이 매일 일정량의 기름을 퍼먹고 있으니 결국 트럭의 보급상황은 바닥...결국 나중에는 계류함정들의 기름을 빼다가 출동함정에 나눠줘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즉 기름이 없는게 아니라 기름을 운반할 능력이 바닥이었다 그러니 아부라가 나인다는 사실이다. ]

당시 일본의 급유선은 합 76척 485,000톤이다 비교로, 과달카날 초기의 곰리제독 함대의 하루 중유소비량이 4,200톤인데, 그보다 훨씬 함정수가 많은 트럭정박 연함함대의 중유소비량이 그보다 적을수가 없다 못해도 6천톤은 소비했을것이다 문제는, 미해군은 누메아나 호주등, 저장시설이 충분했고 일본해군역시 필리핀 등지의 중유생산량도 충분한편. 결국 수송능력인데, 트럭의 저장시설이 열악한 관계로 오로지 유조선의 투입댓수가 연료보급능력을 결정한다.

일본 유조선은 대충 5천톤에서 만톤 사이고, 당시 트럭에는 약 20% 이하의 유조선 수량이 상시보급상태였는데, 야마토를 위시한 모든 함정에 전투상태의 소비량을 급유하려면 순간이라도 일본전체 유조선의 반정도는 한방에 몰아넣어야 한다

야마모토 로서는 그만한 도박을 하기가 어려웠을것이다 물론 전술적으로는 야마토나 나가토나 공히 고속전함이 아닌지라 연료가 충분해도 과달카날 전역의 전투에는 부적합했다 야마토가 나서려면 상공엄호로 항공모함이 합류해야하고, 지상비행장에 적항모까지 출현하는 지라 나구모 입장에서는 미드웨이MK-2에 다름아니었을것. 결국은 카도쿠라 제독이 야모토와 나가토를 끌고 함대결전을 하자는 발상은 완전히 아마추어적 생각일뿐 영화적 연출정도로 생각하자

추축국이 승리한 소설인 높은 성의 사나이 드라마 판에서 언급되는 몇 안되는 실존 인물로 이미 사망해서 샌프란시스코에 그의 신사가 마련되어 있다.

2 영화

3 란스 시리즈의 등장인물

란스 시리즈의 등장인물. 야마모토 이소로쿠(란스 시리즈) 항목 참조.
  1. 사망후에 추서되었다
  2. 더 정확히는 격추 이전에 P-38 라이트닝의 기관포탄에 맞아 끔살됐다. 시찰에 동행한 측근인 우가키 마토메 제독은 다른 기체에 타고 있었는데, 중상은 입었지만 살아남았다.
  3. 감벽의 함대에서는 이 이름으로 나온다.
  4. 예: 一郞(이치로),二郞(지로).
  5. 이소로쿠는 오남혹은 장녀뒤에 태어났을 확율이 크다.
  6. 또는 숙부, 고모의 남편
  7. 당시 작전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조종사들은 죽음까지 각오하고 있었다. 자신이 맡은 극비임무가 얼마나 위험하고 또 막중한 것인지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수송기 공격을 담당한 4명의 조종사는 자신이 격추되는 한이 있더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임무를 성공시키겠다고 다짐했다 한다.
  8. 레이몬드 하인(Raymond K. Hine) 중위로 호위하던 제로센에게 공격받아서 격추되었다. 그러나 렉스 바버(Rex T. Barber) 중위가 G4M를 격추시켰다.
  9. 영화적 연출 때문에 사실과 어긋난 점이 좀 있다. 이소로쿠의 얼굴 관통상이 없고 엔진이 피격된 폭격기가 꽤 오래 활공한다. 격추영상을 보면 이소로쿠가 탄 폭격기는 우측 후방에서부터 기총을 얻어맞고 엔진이 폭발하면서 날개가 뿌리부터 박살난다. 그리고 곧바로 추락하는 장면이 보인다.
  10. 무덥고 습한 열대 정글에 24시간이나 방치되었던 탓에, 발견했을 때 구더기가 들끓는 등 부패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11. 일본에서의 원수는 계급이 아니라 칭호다. 원수 항목 참조.
  12. 쉽게 말해, 곡엽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기 위해서는 최하위인 2급 철십자 훈장부터 시작해 하위 철십자 훈장들을 모두 받아야 한다. 루마니아독재자 이온 안토네스쿠 등 다른 비 독일인 수훈자들은 모두 2급, 1급 철십자 훈장 수훈 후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13. <도라!도라!도라!>에서도 저 대사가 나오는데 미국판의 자막은 그냥 순화시켰다.
  14. 이러한 점은 전근대적인 사고를 완전히 떨치지 못했던 이홍장이나 독일 내에서 자기네들의 소왕국을 건설했고 그에 따라 파벌주의적 경향을 보인 독일군의 수많은 장성들에게서도 나타나는 사항이다.
  15. 미드웨이에서 전함에 탑승한 상태로 굳이 직접 지휘하지 않은것 또한 이런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다. 주간에 다수의 항공모함으로 구성된 함대에 대응할 수 있는것은 같은 항공모함이지 전함이 아니다. 즉, 야마토가 가세한다고 하더라도 전력에 큰 보탬이 되기는 어려운 상황인데 비해서 상대하는 항공모함의 입장에서는 반격당할 위험이 없는 매력적인 표적이다. 즉, 위험성은 크지만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적다는것.
  16. 저 표현만으로 니미츠가 야마모토를 경시했다고 보는건 비약이다. (다른 구체적인 발언이 있다면 추가 요망.) 당연히 미국 입장에서는 암호해독이라는 엄청난 이점을 걸고 야마모토를 제거하려는 도박을 하고 있는 건데, 암호해독 간파당하고 야마모토 후임으로 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와버리면 삽질한 건 거꾸로 미국이 된다. 당연히 그런 리스크에 대해서 확인을 거치는 것은 상관의 당연한 역할이지, 임팔 작전처럼 보급 문제가 답 없는게 뻔히 보이는데 모르는척 그냥 승인해주는게 당연한게 아니다. 정말 니미츠가 그렇게 믿었다면 애초에 작전을 강하게 반대했어야 맞고, 니미츠가 반대하면 누가 작전을 추진할 수 있단 말인가?
  17. 사카이 사부로가 여러 서적에서 그를 제대로 깐다 비판한다. 비행총대장 후치다 미쓰오는 그의 책에서 야마모토를 그저 그런 범장이라고 까고 있다.
  18. 야마모토는 나구모와는 다른 라인이었다.
  19. 이 시기에는 전함의 함장으로 근무하는 것이 제독으로 승진하는 코스였다. 그리고 연습전함 히에이에는 히로히토 덴노도 종종 좌승하곤 했다
  20. 나구모는 그가 데려온 게 아니라 연공서열로 앉게 된 케이스였다.
  21. 가령, 해군 군령부는 전선을 동쪽으로 밀기 위해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라고 했고,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미함대 격멸로 잡았다. 그리고 군령부 총장이 자기네 라인인 나구모를 불러 미드웨이 섬 점령을 우선하라고 한 장면이 나온다.
  22. 예를 들면 전쟁 터지면 일거리가 많아진다며 좋아하는 공장주라든가.
  23. 카도쿠라 소지 중장. 영화에서만 등장하는 가공의 인물이다.
  24. 실제로 일본 해군은 연료부족에 자꾸 시달려왔다. 미국이 격노해서 제2차 세계대전에 연합군측에 참가하게 되는 근거를 제공한,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라 평가되는 진주만 공습도 석유부족이 원인중 하나일 정도니... 예를 들면 폭사했지만 그 연료탱크에서 연료를 긁어다 주유해야 했던 전함 무츠라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