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쉰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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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kar Schindler (1908년 4월 28일 - 1974년 10월 9일)

Der Unvergessliche Lebensretter 1200 Verfolgter Juden

박해받았던 1200명 유태인들의 잊을 수 없는 생명의 은인


예루살렘에 있는 오스카 쉰들러의 묘비명.

1 개요

유럽욘 라베[1] 혹은 스기하라 지우네.[2]

나치 독일의 사업가.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외래어 표기법에 맞는 표기는 '오스카어 신들러'.
생전에 오스카 쉰들러는 파티, 여자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방탕하고 쾌락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 때문인지 결혼을 여러 번이나 했고, 아내 말고도 애인을 여럿 두었다고 한다.

2 생애

2.1 전반

쉰들러는 1908년 4월 28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으며 현재는 체코에 속하는 스비타비(Svitavy) 지방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스비타비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가 되었으나, 쉰들러 일가는 16세기에 빈에서 모라비아로 이주한 독일/오스트리아 계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독일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1935년, 쉰들러는 체코슬로바키아 내의 독일계 민족주의 조직인 '주데텐 독일인 당' (Sudetendeutsche Partei)에 들어갔다. 이 당에서 활동하면서 쉰들러는 독일 국방부 첩보부와 접촉하여 스파이가 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철도 정보를 독일 측에 누설했다. 이 혐의로 체코 당국에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때마침 뮌헨 협정이 체결되어 형벌은 중지되었다.

2.2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1939년 2월 10일, 나치당에 자원 입당 하였으며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한 밑천 챙겨보려는 목적으로 독일에게 점령된 폴란드로 간다.

2.3 유태인 구출

1939년 10월, 쉰들러는 나치로부터 법랑 용기를 만들고 있던 유태인 소유의 공장을 불하받았다. 이 공장은 점점 확대되어 45,000m² 부지에 800명 이상의 노동자가 일하는 거대한 군수 공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쉰들러는 나치당 친위대슈츠슈타펠로부터 유태인 노동자를 공급받았다. 말하자면 강제노동의 일환으로 수용소에 수감된 유태인들을 차출해 공장으로 데려온 것이다. 그런데 쉰들러는 이 특권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어린이나 여성, 대학생들을 숙련된 금속공이라 속이고 자신의 공장에 노동자로 데려와 은밀히 보호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쉰들러는 암시장을 이용해서 모자라는 물자를 조달하거나 유태인을 우대하는 등 뉘른베르크 법을 위반한 혐의 등으로 게슈타포에게 조사를 받지만 돈, 보석, 예술작품 등을 뇌물로 써서 무마시켰다.[3]

1944년에 소련군의 진군으로 동쪽의 수용소가 해체되자, 많은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기 시작했다. 이에 쉰들러는 약 1,100여 명의 유태인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자신의 고향인 스비타비 지방에 군수공장을 세운 다음 이들을 이곳으로 모두 빼돌리는 등 약 1,200명을 구해낸다.[4] 이후, 자신의 모든 재산을 소모하면서까지 약 7개월 간 그들을 보호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쉰들러는 활동 초기 당시엔 우리가 아는 모습보다 물질적으로 탐욕스러운 성향이 더 강했다. 본래 나치에 동조한 부패한 기업가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수용소에 갇힌 유태인들을 노동자로 끌어들인 것도 그저 돈을 수월하게 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쉰들러는 유태인들을 데려오고 난 이후부터 어딘가 변하기 시작한다. 그들을 점점 더 인간적으로 대우해주더니, 결국은 보호했다. 쉰들러의 행동은 점점 돈벌이가 목적이라고 설명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수백만 마르크에 달하던 자신의 재산을 모두 소모하면서까지 유태인들의 생명을 구하는데 힘썼다.

2.4 전후

전후 쉰들러는 몇 가지 사업을 시작했지만 모두 파산하였다. 1949년에 쉰들러 부부가 아르헨티나에 가서 살다가 1958년에 오스카만 독일로 돌아간 뒤 1974년에 숨을 거두었다. 아내 에밀리 쉰들러는 계속 아르헨티나에서 살다가 2001년 7월에 독일로 돌아왔지만 3개월 뒤에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었다.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사람이며, 그 외에도 세계 어디서든 위인으로 평가받는다.

3 논란?

참고로, 쉰들러는 본인의 의지로 유태인을 구한것이 아니라 실은 유태인을 부려먹기 위해 빼돌린 것 뿐인데, 이게 졸지에 유태인을 살린 것이 되어 영웅 취급을 받았다는 주장이 나와 논란이 되었는데, 그 주장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쉰들러는 공장에 온 유태인들의 돈과 귀중품을 빼앗고 그것으로 술을 사먹었다.
  • 쉰들러는 호색한으로, 도덕적으로 좋은 사람이 아니다.
  • 쉰들러의 행동은 자신의 사업을 위한 것이었다.
  • 쉰들러가 유태인을 탄압한것을 본 증인들이 있다. 그중에는 쉰들러 부인과 내연녀도 있었다.
  • 전쟁이 끝나자 살아남은 유태인들을 무장시켜 소련군과 싸우게 하고 자신은 도망쳤다.

하지만 바로 아래의 반박에 나와 있듯이, 이 주장들은 전부 터부니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5]

  • 쉰들러는 자기공장에 온 유태인들의 돈과 귀중품을 빼앗고 그걸 팔아서 유흥비로 썼다?
당시 유태인들은 가지고 있던 돈과 귀중품을 전부 나치 독일군에게 압수당하고 수용소로 보내진지라 겨우 지급된 옷 말고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는데, 어떻게 돈과 귀중품을 뺏고 팔아서 유흥비로 썼단 말인가?
  • 쉰들러는 호색한으로, 도덕적으로 좋은 사람이 아니다?
쉰들러 리스트에서조차 묘사되듯, 쉰들러의 전쟁 초기 행보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이며 부정부패와 복잡한 이성관계 등 개인적인 문제를 많이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인류의 흑역사나 다름없는 나치 독일의 콘베이어 벨트식 학살 즉, 증오나 분노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 마저 배제한 체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기관에 의해 사람의 목숨이 폐기물이나 다름없이 기계적으로 종결처리되는 비인간적 상황에서, 모든 양심과 도덕이 침묵 할 때 이 부패한 기회주의자이자 호색한은 최소한의 인간성을 지키며 위험을 무릅쓰고 천명이 넘는 사람을 구한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그의 수많은 인간적인 결점은 그가 성자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임을 보여주며, 사람들은 바로 그 평범한 사람이 이토록 진실한 인류애를 실천했다는 점에서 더더욱 감동하는 것이다.[6]
  • 쉰들러의 행동은 자신의 사업을 위한 것이었다?
쉰들러는 직업이 사업가였던 만큼, 처음엔 그저 돈을 수월하게 벌기 위한 수단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처럼 유태인들을 구한 이후로는 일부러 불량품을 납품하였고, 이로 인해 독일군들이 계속 반품하는 바람에 곧 적자에 빠졌다. 이 때문에 쉰들러의 지인들은 공장폐쇄와 사업을 접어 더 이상 빚을 늘리지 말라고 했지만, 쉰들러는 오히려 유태인들을 위해 많은 빚을 져가면서 공장을 유지하였다. 실제로도 쉰들러는 전쟁이 끝난 뒤 빚 때문에 파산했다. 비록 처음에는 이득을 보기 위한 나치당에 가입하고 장교와 비밀경찰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등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했을진 몰라도, 결국 자신의 재산으로 그들의 목숨을 구해냈던 것이다.
  • 쉰들러가 유태인을 탄압하는 것을 직접 본 증인들이 있다. 그 중에는 쉰들러의 부인과 내연녀도 있었다.

쉰들러의 부인과 내연녀는 쉰들러가 파산한 뒤 그나마 남은 재산도 모두 가져가버렸다. 경제적인 이유와 심한 성격 차이로 인해 이혼했다. 그 후 쉰들러 생전에는 사실상 서로 원수로 지냈고, 아무런 연락도 주고받지 않았다. 그러다 쉰들러 사후 영화 쉰들러 리스트가 흥행하면서 쉰들러 가문에 많은 돈이 들어오자, 배당을 요구하다 거절당해 앙심을 품고 한 증언이라 객관성이 거의 없다. 쉰들러가 유태인을 탄압하는 걸 봤다고 증언했던 사람들도, 유태인 학살과 나치 전쟁범죄에 참여한 것으로 인해 처벌받은 사람들이라 신빙성이 거의 없다.

  • 전쟁이 끝나자 살아남은 유태인들을 무장시켜 소련군과 싸우게 하고 자신은 도망쳤다.

당시 유태인들은 굳이 자신들을 해방시키러 온 소련군과 싸울 이유가 없었고, 만약 쉰들러가 진짜로 그랬다면 오히려 무장한 유태인들이 그를 소련군에 넘겼을 것이다. 이 주장은 무지한 아마추어들, 특히 홀로코스트 부정파 측에서 제기한 터무니없는 소리고, 실제로 쉰들러에 의해 구출된 유태인들은 그런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게다가 만약 쉰들러가 진짜로 그랬다면 이스라엘에서 그를 처벌하긴 커녕 예루살렘에 그의 시신을 안장할 것을 허락하고, 당시 생존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쉰들러의 묘에 와서 참배할 이유도 없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악명높은 모사드를 통해 불법적, 합법적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아메리카 등 해외로 도주한 나치 독일 관료들을 마구 잡아들여 재판정에 세워 처단한 것으로 유명하다. 전쟁 끝나고 돈도 없고 사업도 망해서 파산하고 빌빌대는 홀아비 하나 족치지 못할 놈들이 아니란 말이지

4 죽음

쉰들러는 1974년에 숨을 거두었고, 시신은 예루살렘 기독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묘지는 유대인들의 성지인 시온 산에 있는데, 나치 독일 사업가가 유일하게 시온 산에 묻힌 것이다. 박해받던 1200명의 유대인들의 잊을 수 없는 생명의 은인이란 비문은 쉰들러의 인생을 가장 간결하게 전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쉰들러를 추모하는 유대인들이 그의 묘지를 참배하고 있다.

1962년에 쉰들러의 이름을 딴 나무가 야드바셈의 거리에 자리잡았고, 1993년에는 이스라엘 야드바셈에서 오스카 쉰들러와 에밀리 쉰들러(Oscar Schindler, 1907~2001)[7]에게 세계의 의인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오스카 쉰들러는 흔해빠진 기회주의자요 부패한 사업가였다.

그러나 거대한 악이 세상을 점령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 악에 대항해서 사람의 생명을 구한 것은
귀족도 지식인도 종교인도 아닌 부패한 기회주의자 오스카 쉰들러였다.
그의 영혼에 안식과 축복이 있기를.

  1.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욘 라베의 경우는 난징 대학살 당시 쉰들러의 100배가 넘는 수인 약 20만명의 중국인들을 일본군으로부터 구해냈다. 둘 다 사업가이자 나치 당원이었으며, 목숨을 걸고 불의에 맞섰으나 이후 재정적으론 매우 어려운 삶을 살았다.
  2. 2차 대전 당시 주 리투아니아 일본 대사로 나치 독일을 피해 외국으로 망명하던 유태인들을 위해 일본비자를 대량 발급하여 그들이 소련을 통해 각국으로 피난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렇게 목숨을 구한 인원이 약 6천여 명. 역시나 위의 두 사람과 비슷하게 일본으로 귀국한 뒤, 정부 명령에 불복한 죄로 면직되어 어려운 삶을 살았다.
  3. 쉰들러는 뇌물로 바친 것들을 장부에 꼼꼼히 정리해두었는데, 악명높은 게슈타포를 매수해야 하는 만큼 정말 어마어마한 액수의 선물로 그들을 구워삶았다.
  4. 행정 착오로 목록으로 차출했던 여성 유태인 근로자들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자 이들을 다시 데려 오면서 아우슈비츠 쪽에서 약 150명 정도의 장정들을 추가로 구출했다.
  5. 위의 주장은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나온 것인데, 이 프로그램은 흥미 위주 프로그램이다 보니 내용에 신빙성이 거의 없다.
  6.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소수의 '특별한' 혹은 '타고난' 위인들만이 박해와 압제 속에서 인간성(양심)을 지키며 정의와 인류에같은 숭고한 행위를 할 수 있는게 아니라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7. 오스카 쉰들러의 아내로 1928년에 오스카와 결혼했고, 그가 유대인을 구출하는데 동조했으며,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도 직접 출연했다. 2001년뇌졸중으로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