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역사

서아시아의 역사
레바논바레인사우디아라비아시리아아랍에미리트
예멘오만요르단이라크이란
이스라엘카타르쿠웨이트키프로스터키
이라크의 역사
تاريخ العراق
메소포타미아 문명고대
수메르 아카드바빌로니아미탄니히타이트아시리아신 바빌로니아아케메네스 조마케도니아셀레우코스파르티아파르티아사산 왕조사산 왕조
바빌론로마비잔틴
아랍계 이슬람 제국중세몽골/튀르크 계 왕조들
정통 칼리파 시대우마이야아바스함단우카일셀주크 제국장기 왕조아이유브몽골 제국일칸국잘라이르티무르흑양 왕조백양 왕조
부와이흐 왕조셀주크 제국셀주크아바스
터키 vs 이란근대근현대현대
사파비오스만사파비오스만아프샤르오스만이라크 맘루크오스만대영제국이라크 왕국아랍연맹이라크 공화국바트당 집권기연합군 점령기이라크 정부
ISIL
쿠르드

1 개요

이 문서는 이라크역사에 대해 다룬다.

이전 버전에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이라크 역사가 아니라는 내용의 서술이 있었는데 북미나 호주같이 거주민들의 혈통이 완전히 물갈이 된 지역이나 거주민의 혈통은 이어졌으나 민족정체성면에서 완전히 이질화한 이집트와 다르게 메소포타미아는 까마득하지 그지없는 기원전 20세기경 머나먼 고대 바빌로니아 시절부터 확고하게 셈족이 절대다수를 차지했던 지방이다. 이는 디아도코이 왕조,이란계 제국,투르크계 제국등 타민족의 기나긴 지배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문헌으로 확인할수가 있다.[1] 물론 고대,중세에 셈족 민족주의 같은것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고대 메소포타미아 역사가 이라크 역사가 아니라는것은 고대부터 그럭저럭 민족주의라고 부를만한 정체성이 형성된 그리스.이탈리아를 제외한 타 유럽대륙 국가들은 프랑스 혁명[2]이전의 역사는 아예 존재하지 않다는거와 동일한 논리의 폭론이다.[3]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신바빌로니아 붕괴 이후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완전히 통일시킨 메소포타미아인의 단일국가가 이어지거나 계승되지 않고 타민족의 지배를 받았기에 고대 메소포타미아 역사는 이라크의 역사가 아니라고? 그럼 느슨하기 그지없는 통제력의 반독립적인 봉건영지가 늘어져서 수많은 영지들이 끊임없이 독립과 분열,통합, 소속변경등 이합집산이 복잡하게 이뤄지던 유럽은?? 애초에 유럽의 작위계승이나 국가영역은 민족주의와는 완전히 상관이 없어서 프랑스인이 스페인,영국,시칠리아,폴란드,헝가리,스웨덴 왕 하고 독일인이 스페인,러시아,영국,스코틀랜드,그리스,불가리아의 왕을 하고 그외 지면문제상 안쓰는 수많은 민족가문이 타국가 왕을 먹은 일은 매우 흔하다. 최고작위 밑에 봉건영주의 작위들까지 따지면 타민족 가문에게 넘어가면서 여러국가소속으로 복잡하게 오가서 더 머리아프다.[4]

지배자의 민족이 바뀌어도 분명하게 계승의식이 있어서 괜찮다고? 신성로마제국은 서로마의 계승을 주장했는데 그럼 신성로마제국은 이탈리아역사인가? 프랑스도 샤를마뉴 기원의 신성로마제국에서 떨어져 나왔는데 프랑스혁명 이전의 프랑스 역사는 이탈리아 역사? 아니면 프랑크부족의 발흥지인 독일 역사라 해야할까?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처음부터 서고트 왕국의 계승을 주장하고 레콩퀴스타를 부르짓던 반이슬람 저항세력부터 이어졌는데 그럼 두국가의 역사는 스웨덴 역사? 아니 고트족 자체가 스웨덴족에게 동화되어 소멸했으니 스웨덴도 라틴계인 스페인,포르투갈도 아닌 아무의 역사도 아닌가? 메소포타미아의 셈계열 토착민족들이 같은 어파이기까지 한 아랍인에게 동화되었다고 고대 메소포타미아 역사가 이라크 역사가 아니라는데? 이탈리아는 서로마 멸망 이후부터 사르데냐 왕국의 이탈리아 통일 이전까지 타민족의 지배와 분열이 이뤄졌는데 그럼 고대 로마제국과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도대체 누구의 역사인가?? 현재의 국토와 거의 일치하게 국가가 이어지지 않거나 분열되어 있으면 그나라 역사가 아니라는 참신하기 그지없는 이론은 누구 머릿속에서 나온것일까?[5] [6]

문화의 변화에 대해 반론하자면 메소포타미아 지방이 페르시아-헬레니즘 문화에 큰 영향을 받은것은 맞으나 단방향이 아니라 영향받은 만큼 페르시아-헬레니즘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애초에 페르시아 문명형성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은 로마문명형성에서 그리스문명의 영향력과 비견할 수준이고, 그리스 문명의 독자성은 부정할수가 없으나 그 시초는 이집트-시리아-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영향을 받아서 탄생한 문명이고 교과서나 백과사전에서 헬레니즘 문명이란 그리스 문명과 중동 토착문명의 융합이라고 하는것처럼 기존토착문명의 연장선상이지 완전히 문명이 물갈이 된 게 아니다. 중동의 아랍화와 이슬람문명권의 경우는 유목민이거나 자체농업기반없이 교역로에 의존해서 간신이 이루어진 소규모 상업도시인인 아랍인의 자체적인 문화적인 역량이 근린문화에 비해서 낮아서 언어나 종교적인 분야를 제외하고는 중동 토착문명에서 거의 일방적인 영향을 받아들이고 지배지의 문명을 서로 융합시켜 탄생한 문명이다. 그리고 애초에 이슬람 발흥이전의 아랍문명을 따져봐도 위에 쓴 페르시아 문명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영향을 받은것 못지않게 셈어권 중동문명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그다지 이질적이지 않은 비슷한 문화다. 언어 변화의 경우 애초에 메소포타미아-시리아 인들의 아람어와 아랍어는 같은 어파이다.[7] 이슬람도 따지고 보면 기독교-유대교와 같은신을 믿고 경전과 교리도 공유하는 부분이 많은 같은 종교의 다른 분파라고 볼수가 있다. 이슬람과 아랍인의 정복이 고대중동문명의 단절을 불러왔다고 하는것은 인종차별적인 인도유럽어족 백인 우월주의에서 기원한 레파토리이다.[8]

2 근대

오스만 제국은 1차대전에서 가장 먼저 탈락하고 후세인은 통일 아랍국가 건설의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영국은 1917년 팔레스타인유대인의 독립국을 건설해준다는 '밸푸어 선언' 까지 해둔 상태였다. 한 마디로 한 집에 이중분양을 한 것이었고 그나마도 프랑스와 함께 레반트 지역과 팔레스타인을 접수했다.

후세인의 차남 압둘라는 영국에 의해 1921년 요르단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되었다.그나마 남아있던 이라크에 무함마드의 씨족으로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하심 가의 일원인 후세인의 셋째아들인 파이살을 파이살 1세로 앉혀서 1922년 국제연맹 위임통치라는 방식으로 형식적인 왕국으로 독립시켜 주었다. 새로운 이라크 왕국의 영토는 과거 오스만 제국의 무술, 바으다트, 바스라 빌라예트 (Vilayet) 3개를 통합시켜서 세워졌는데 오늘날 쿠르드족이슬람 국가와 이라크 정부군의 전쟁을 생각하면 왠지 오묘하다(...) 1933년에 파이살 1세가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은 아들 가지 1세는 6년 만에 사망, 손자 파이살 2세가 4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3 현대

1958년에 반란의 위기에 직면한 이웃나라의 왕이자 친척인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이 이라크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를 기회로 이집트의 나세르가 주창한 '아랍 민족주의' 에 영향을 받은 압둘 카림 카심 장군 중심의 자유장교위원회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이 무너지면서 이후 이라크는 왕정이 폐지되고 카심 장군을 총리로 하는 공화국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카심 총리의 공화국 정권도 1963년 바트당 쿠데타로 무너지고 68년 이후부터는 계속 바트당 독재가 계속된다. 1979년에 사담 후세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그 뒤로 후세인에 의한 철권통치가 이루어진다. 후세인의 군복 모습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데 후세인은 군 출신도 아닌 데다 쿠데타도 아닌 합법적인 권력 이양을 통해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외적으론 바크르 대통령이 심장 발작을 일으키고 나서 건강을 이유로 합법적 절차로 정권을 이양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가 바크르 대통령 주변 요직은 후세인 쪽 파벌들이 장악하여 대통령의 입지가 매우 약해진 상태였고 훗날 나오는 여러 증언들에서는 사담 후세인이 매형인 아드난 카이랄라 장군,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바트당의 인텔리인 아드난 함다니, 이복동생 바르찬 후세인, 타리크 알 아지즈, 사촌 알리 알 마지드 장군 등의 정권 핵심층과 엘리트들을 포섭하여 바크르 대통령을 퇴임하도록 강한 압력을 넣었다고도 한다.[9]

사실 후세인 집권 초기만 해도 이라크는 미국과는 단교 상태(1967년)였고 소련에서 지원을 받고있는 아랍 내 대표적 친소 국가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란에서 시아파 원리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상황이 변했다. 혁명 전 이란의 샤 왕조 붕괴를 위해 암약하던 사우디아라비아가 혁명과 함께 손을 떼는 것과 동시에 바톤 터치하듯 이라크가 이란에 대한 무력 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4 이란-이라크 전쟁

1980년, 이라크의 침공으로 시작된 이란-이라크 전쟁은 결국 양국의 피폐만을 가져왔다. 이라크는 1984년, 미국과의 국교 회복과 함께[10] 이후 4년 동안 297억 달러에 이르는 거액의 군사원조를 받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5 걸프전

1988년, 승리는커녕 쪽박만 깨진 형태로 이란과의 전쟁이 종결되자 후세인은 약이 올랐다. 결국 국내의 불만도 잠재우고 삥뜯기도 겸하여 90년에 쿠웨이트를 침공했다가 미국과 서방 세계는 물론이고 인근 아랍 국가까지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완전히 밑천까지 거덜내는데 이것이 바로 걸프전이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아버지 조지 부시.

걸프전 이후 UN은 안보리결의 687, 688을 통해 후세인 정권의 손발 묶기에 나섰다. 특히 안보리결의 688은 시아파나 쿠르드족 보호를 명목으로 다수의 비행금지구역(북위 36도선 이북과 33도선 이남)을 설정, 이를 기회로 조지 부시는 이라크인들에게 후세인 정권을 전복하라고 선동하는 발언을 자주 했고 실제로 시아파나 쿠르드족 지역에서 봉기가 빈발했다. 하지만 막상 봉기가 일어나자 미국 정부는 이를 외면했고 서방 국가들도 나 몰라라 했다. 주변 아랍 국가들도 구경만 하는 판이었다. 정작 비행금지구역만 설정했을 뿐 지상군 이동에 대한 제한은 전혀 없는 반쪽짜리 규제였던 것이다.[11] 그렇게 봉기는 압살되고 애꿎은 희생자만 양산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서 후일 일어나는 혼란의 불씨만을 남긴 채 후세인 정권은 의연히, 계속 유지되었다.[12][13]

UN과 미국은 경제제재를 통해 후세인 정권의 고사를 기도했지만 후세인의 위세는 흔들림이 없었다. 군대는 살찌고 아이들은 굶주리는 판이었다. 돌이켜보면 역사상 경제난으로 물러난 독재자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다. 물론 몇몇 혁명들의 원인은 굶주림 때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어떤 사이비 교단급으로 통치를 누가 봐도 답이 안 나올 정도로 엉망으로 하는 데다가 분위기가 제대로 무르익었을 때의 이야기고 대부분은 정해진 조건 안에서는 통치를 그럭저럭 하는지라 도리어 체제가 공고해지는 독재자가 더 많았다.

6 이라크전

이라크는 국제사회에 국내 기아 문제를 어필하여 UN으로부터 석유 식량 프로그램(Oil-for-food program)이라는, 군수품을 제외한 생필품과 석유를 거래하는 유예를 얻었다. 이라크인의 생활고에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눈 먼 돈 폭발로 UN 내에서는 뇌물, 부정 의혹이 끊이지 않았고 이때문에 서방 각국은 서로를 질시와 의심의 눈으로 바라본다.

이 와중에 이라크가 핵 개발을 기도한다는 의혹이 국제사회에서 터져나왔다. 풍문 정도의 애매한 의혹이었지만 UN 사찰단은 이라크 영내에서 방해 받았고 의혹은 부풀려져 갔다. 미군은 제재를 목적으로 몇 번이고 공습을 감행했지만 효과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결국 9.11 테러가 발생하자 조지 W. 부시(조지 부시의 아들이자 미국 대통령)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병기를 만들고 있다" 고 주장하며 이라크를 위험주자로 지목하고는 싸울 의지도 별로 없는 나라를 조져버린다. 후세인이 1차 걸프전 때도 대량 살상무기에 화학무기, 생물무기를 가지가지 만들면서 쫓아냈던 UN 시찰단을 무역 봉쇄에 경제 제재라는 명백한 손실을 감내하면서까지 전쟁 발발 때까지도 계속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 의혹을 크게 살 만 했다. 다만 이는 이슬람 문화권의 자존심에 관한 문화적인 차이(집 안에 다른 남자를 들이지 않는다든가)에 기인한 것으로 서양 문화권과 중동 문화권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전쟁 직전 후세인은 사실상 조건부 허용하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는데 미국이 이를 무시했다.

여튼 어떠한 물적 증거 없이 정황적인 이유 하나만으로 이라크전이 일어나게 된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폭격이야 테러에 대한 응징과 차후의 안보를 위해서라고 정당화가 될 수 있다고 쳐도 이라크 침공으로 전쟁을 확대한 것에 대해 깔끔한 근거를 들 수는 없을 것이다. 후세인이 구린내를 슬슬 풍기고는 있었다지만 결국엔 누명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으니 수도인 바그다드가 이슬람이 형성된 이후 두번째로 비 이슬람 세력에게 점령당하는 수모를 당했다.[14] 처음에 이라크인들은 미군이 들어오자 성조기를 휘두르고 '예스 부시' 를 외치면서 열광했으며 전국의 후세인 동상과 초상화를 때려부수고 신발로 때리며 분풀이를 했지만 이라크 주둔 미군이 계속 '오인 공격으로 인한 부차적 피해' 를 내고 점령지의 문화와 상태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일방적인 행동을 일삼았으며 점령정책을 아주 개판으로 처리하는 바람에 대혼란이 와서 미국 하면 이를 갈게 됐다.

우리는 미국에게 그렇게 쉽게 점령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이라크 쪽에서 말하자 조지 W. 부시는

이라크 사람들이 점령당하는게 불쾌하다고 느끼는 것 같은데 저도 점령당하는 것은 싫습니다.

라며 공개석상에서 이야기했다.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에 벌인 짓을 보면 신발이 아니라 총알세례를 받아도 모자란 지경.

이 때문인지 이라크 국내에서는 미국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의견이 썩 좋지만은 않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함으로써 좋아진 점은 언론의 자유밖에 없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 후세인의 통치 자체는 어떤 사이비 교단보다 조금 나은 수준일 뿐 대체로 막장이었지만 해방자랍시고 들어온 미국과 그들이 이라크에 구현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오히려 대혼란만 야기하자 그 반동으로 후세인이 차라리 나았다는 소리가 나오는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시리아의 알 아사드, 리비아카다피가 결국엔 어떤 꼴을 났는지를 보면 후세인이 있어봐야 결말은 좋지 못할 것이다.

그 뒷수습이 매우 애매하게 된 덕택에 지금 이라크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지옥의 경지로 빠져들었다. 특히 이라크군 자체는 금방 무너졌는데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군과도행정처(Coalition Provisional Authority, CAP)에서 수니파=바트장 잔당[15]이라는 괴이한 공식을 들이대는 삽질을 해대는 통에 직장에서 죄다 쫓겨나고 영향력이 축소되어 장기적으로는 시아파들 손에 도륙나게 생긴 수니파 주민들이 "이대로 몰락할 수 없다. 그럼 우리는 다 죽는다" 고 총칼을 들고 일어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여기에 CAP의 온갖 삽질[16]이 겹쳐 반쯤 내전이 되어가는 상황 덕분에 미군만 죽어라 고생 중.

게다가 아프가니스탄의 상황도 갈수록 악화되어 가고 있고... 덕분에 미군이 개발하려고 했던 무기들은 이라크 때문에 드는 비용 덕분에 전부 개발취소 크리[17]. 이 내전에 준하는 상황은 2004년에서 2005년 사이 절정이었고[18] 2008년까지 계속됐으나 결국 수적으로도 압도적이고 미국의 지지를 받는 시아파[19]가 최종 승자라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2009년 경 대부분의 소요 사태가 종결됐다.

2010년 9월 1일 미군은 공식적으로 이라크전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2011년에는 전 병력이 철수하였다. 이라크에는 이행정부(Iraqi Transitional Government)를 거쳐 정식 정부[20]가 출범했고 군사, 경찰권도 정식 정부가 집행 중이다. 적어도 점령 기간에 비하자면 놀랄 정도로 사회적 안정도 회복했다. 하지만 전쟁 중에 파괴된 전기, 수도 등의 기간 시설 복구는 여전히 미흡하고[21] 미군 점령 기간 동안 뿌려진 사회적 지뢰들은 여전히 현 정부를 위협하고 있다. 정치가 이렇다보니 경제도 마찬가지여서 실업율도 제법 높고 다시 이런 요인들이 정치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여전히 좀체 상황이 좋아지지 않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비해 이라크는 조금 낫다는 주장도 있다. 최소 정부가 자리 잡는 데 성공했고 국내 안정에도 성공해 지금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어떻게든 정상 국가로서 돌아가지도 않겠느냐는 희망적인 견해도 지배적이다. 다만 그게 언제가 될 지 모른다는 게 문제.

하여튼 미군이 철수한지 며칠 안 가 2011년 12월 수니파 부통령인 알 하셰미가 구속조치당하고 그가 쿠르드인 지역으로 달아나면서 그의 소환을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지는 등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조선일보는 미군이 철수해서 그런 것이라고 미군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미군이 있어도 이런 종파 갈등은 빚어졌고 테러는 벌어졌었다. 정작 미군은 떠나고 싶어 안달이었으니.

7 이라크 내전

이라크 내전 항목 참고.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이라크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1.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시절에는 그 넖은 제국의 영토를 직접적으로 통치할 능력이 부족함과 아케메네스조 특유의 피지배지역 존중적 통치가 결합하여 수도와 그 인근지역인 파르스지방외엔 공물을 받아내고 그 지방의 자치를 존중해주는 선에서 끝나서 메소포타미아인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지킬수가 있었다. 디아도코이 시기에도 비슷하게 그리스인들이 집중 거주하는 일부 헬레니즘 도시와 그 근교를 제외하면 반 자치형식으로 지배했다. 파르티아도 동일하고 사산조의 경우에서는 중앙집권적인 제국이였으나 이란인과 비이란인의 황제라는 그들 황제의 칭호에서도 보거니와 조로아스터를 믿고 인도-유럽어족의 이란어파계 언어를 쓰는 이란계 민족과 다른 기독교의 종파중 하나인 네스토리우스교를 믿고 셈함어족 셈어파계의 아람어를 쓰는 아수리스탄(사산조령 메소포타미아 지방.아시리아인들의 땅이라는 뜻)인들은 종교의 차이와 사산족의 기독교 탄압으로 더더욱 정체성적인 면에서 거리가 멀어졌다. 후대의 투르크인들의 지배는 주로 투르크인들의 정착이 중앙아시아,이란,터키지방에 몰렸기에 투르크화의 물결을 피할수가 있었다
  2. 유럽국가들의 민족주의 형성의 시발점이 됨
  3. 민족주의와 민족국가개념이 고대부터 형성되었던 동북아시아권 사람들이 주로 크게 착각하는데 전지구상으로 따지면 근현대 이전에 민족주의와 민족국가 관념이 존재했던 국가나 민족은 희귀케이스다.
  4. 애초에 중세유럽특성상 민족권역이나 문화별 권역, 고대로부터 내려온 배타적 지역구분에 의해서 국가나 영지가 나뉜것이 아니라 결혼으로 복잡하게 엮인 다국적귀족의 작위계승권을 따라서 가는 귀족개인의 사유재산이였을 뿐이다.
  5. 주로 역갤에서 고조선,고구려,백제에 대해 헛소리하면서 써먹는 논리이기도 하다.
  6. 물론 과거에서부터 현재의 국경과 비슷한 영토의 계승과 민족주의, 국가계승의식이 동시에 삼위일체로 이뤄지면 누구만의 온전한 역사인지 머리아프지 않아서 좋긴하다. 하지만 그런경우는 전세계적으로 매우 드물므로 과거부터 이어져 계승된 비슷한 문화,언어,주민등을 따져서 어느나라의 역사인지 구분하는거다.
  7. 인도유럽어족 게르만어파 할때 나오는것처럼 어족보다 어파가 더 세부분류이고 훨씬 더 언어적 친연성이 가깝다.
  8. 실제로는 이런 엄격하고 깐깐하기 이를데없는 기준으로 따지면 훨씬 불리해지는것은 서유럽이다. 문명 극초기부터 시작된 고대문명의 계승이 확실한 중동과 달리 로마의 정복-게르만,슬라브인의 대이동으로 문화단절 혹은 문화대격변, 언어와 정체성 격변이 수차례 일어나고 지역간의 경계와 관념도 유동적이고 모호하기 그지없었고 그나마 지역구분도 문화적인 경계와 일치성이 차이가 꽤 났다. (중동의 경우는 사막이 대부분이라서 인간이 거주할수 있는 지역이 특정 지역으로 한정되었기에 의외로 지역관념이 어느정도 존재해왔다) 비단 이런 깐깐한 기준이 아니라도 유럽의 역사를 개별국가의 역사로 규정하기보단 유럽사라는 카테고리로 묶어서 유럽 공통의 역사로 보는 시각이 가면 갈수록 대세가 되어가고 있기도 하고..
  9. 이 부분은 영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사담에서 재연하고 있는 부분이다.
  10. 이때 미국의 교섭역이 도널드 럼즈펠드. 이후 오프라 윈프리가 자신의 텔레비전 토크쇼에서 이 국교 회복 교섭 당시 후세인이 럼즈펠드를 반갑게 맞이하며 포옹하는 모습을 틀어줘서 전미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적이 있다(...)
  11. 이라크군이 비행금지구역을 침범하면 생각났다는 듯 찔끔찔끔 토마호크 공격을 해댔으나 봉기와는 무관한 정치적 쇼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나마도 마이클 무어 같은 사람들에게 제국주의적 전쟁놀음, 침략행위라는 욕을 먹어서 여의치 않았다.
  12. 현재 이라크 시아파의 친이란 행보는 이때의 미국의 태도에 대한 배신감과 무관하지 않다. 차라리 원칙대로 시아파 주민들을 보호하고 이를 명분 삼아 후세인 정권을 엎어버렸다면 이란-이라크간 관계도 최악이고 미국 자신도 나름 전성기였던 시절이라 오히려 이라크를 쉽게 안정화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13. 다만 미국 입장에서도 이라크를 완전히 쓰러뜨릴 수는 없었던 것이 베트남전트라우마에서 채 벗어나지 못해서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이었고 쿠웨이트의 회복까지는 주변국들의 합의가 이뤄진 상태였지만 이라크의 전복은 그렇지 않았으며 거기다 끝물이긴 했지만 그때까지도 소련이 유럽에서 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1개 군단을 차출해온 만큼 시간을 오래 끌어서 좋은 점은 하나도 없었다.
  14. 첫 번째 점령자는 중세의 세계 깡패이던 몽골.
  15. 애시당초 바트당 세력은 수니파 내에서도 소수였고 민중의 신뢰를 철저하게 잃어버린 상태로 그 때문에 이라크군이 그렇게 쉽게 붕괴된 것이다. 반대로 시리아는 알라위파와 콥트 기독교인들이 철저한 아사드 지지 세력이기 때문에 저항에 투입되는 전력의 규모가 커서 개입하기가 그만큼 어렵다.
  16. 이라크군 죄다 (무기 환수 없이) 내쫓아 무장세력 만들기, 박살난 병원은 그대로 두고 애꿎은 처방전만 만지작거리기, 이라크 기업의 모든 예금과 부채를 무효로 하기 등등. 라지브 찬드라세카란의 책 <그린존> 참고.
  17.  : RAH-66 코만치, 줌왈트급 구축함
  18. 2005년 이후 미군을 제외한 타국군의 철수가 시작되면서 게릴라의 공격 대상은 미군으로 좁혀졌으나 미군을 공격하면 그 몇 배의 보복이 돌아오기 때문에 2006년부터 소프트 타겟에 대한 무차별 테러로 바뀐다. 결국 06년부터 민간인 사상자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게 된다.
  19. 허나 미국도 시아파를 두고 고민해야 했는데 시아파 성직자 알 사드르를 비롯한 이들은 반미 투쟁을 계속 벌였다. 미국으로선 이들을 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게 수백 만이 넘는 지지자들이 알 사드르를 지지하고 알 사드르는 아버지가 후세인에 맞서다가 살해당한 인물이라 반후세인파 인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상금을 걸었다가 되려 거리 곳곳에 알 사드르에 대한 상금을 취소하지 않으면 미군의 목 하나하나에 상금을 걸겠다는 시아파 성직자들의 분노 어린 반응에 결국 미국이 물러나 현상금을 취소했을 정도.
  20. 내각제 정부로 각료가 43명이다.
  21. 수도 바그다드에서조차 하루에 6시간만 전기가 들어올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