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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諸廷垢
1944.3.1~1999.2.9

도시 빈민의 벗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종교가톨릭이며,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1 개요

1944년 3월 1일 경상남도 고성군에서 태어났다.

진주고등학교를 거쳐, 4수 끝에 1966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한 뒤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이듬해 제적되었고, 1973년에 복학했다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되었다.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정지처분으로 출소하였다. 그리고 1980년에야 대학을 졸업하고 1984년에 비로소 사면, 복권되었다.

1972년 청계천 판자촌에서 야학교사로 소외계층을 가르친 것이 계기가 되어 빈민운동에 투신하였다. 도시 빈민의 벗, 철거민의 대부로 불릴 만큼 도시 철거민들의 정착 문제에 힘을 쏟았다. 이렇게 빈민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1986년에 일생의 동지인 정일우 신부와 함께 막사이사이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막사이사이상 수상 직후에도 왕십리 철거민들 앞에서 이른바 '전두환 개xx'로 알려진 연설을 하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는데, 진술서에 '전두환 개xx'는 빼자는 경찰과 실랑이를 하다가 이미 국제적으로 알려진 인사이기도 해서 결국 훈방 조치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제5공화국 말기에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로서 1987년 6월 항쟁을 주도하였다.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재야 세력이 평민당으로 입당하자 원칙 없는 야합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이후 양김 세력에 속하지 않는 재야 인사들의 정계 진입을 돕기 위해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하기도 했다. 윤석양 이병이 폭로한 노태우 정부의 사찰 대상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시흥시-군포시 지역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1] 철거민 반대 투쟁을 이끈 운동가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국회에서는 건설위원회에 소속되었는데, 의원 생활 2년만에 국회의원 중에서 최고의 전문성을 가졌다는 을 듣기에 이른다. 빈민 운동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쌓은 지식도 있고, 정치에 임하는 자세가 워낙 성실하다보니 가능했던 듯.

1995년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하고 나서 야권이 분열하여 민주당에서 새정치국민회의가 떨어져 나갔으나 제정구는 양김 세력을 비판하며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았다.[2]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재선된 뒤 민주당 원내총무를 지냈으며, 국민통합추진회의를 결성하여 사무총장을 맡았다. 1997년 민주당과 신한국당이 합당할 때 정권 교체를 주장하던 통추 주류와 결별하고 삼김청산을 주창하며 한나라당에 합류하였다.[3] 보수 정당 합류 뒤에도 소장파 의원들을 규합하여 정치개혁을 위해 노력하고 동북아평화센터 설립에도 참여하는 등, 정파색에 휩쓸리지 않는 의정 활동을 보였다.

1998년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면서도 정기국회 국정감사에서 서면 질의서를 제출하는 등 선량으로서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다가 이듬해인 1999년 56세의 나이로 작고하였다. 사망 직후에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4]

참고로 복음자리는 1977년에 제정구 의원이 신림/시흥동 지역 철거민들을 이끌고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은행동 일대에 세운 마을이었으나, 2007년부터 복음자리 일대에 신천동 주공 휴먼시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거의 철거되었다. 현재 복음자리가 남긴 유산으로는 작은자리 사회복지관과 복음자리 딸기쨈[5]이라고 한다.

2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88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한겨레민주당15,031 (12.3%)낙선 (4위)
1992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군포/시흥)민주당48,406 (47.1%)당선 (1위)
1996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시흥)통합민주당25,584 (42.9%)당선 (1위)1999년 임기중 작고
  1. 1989년에 시흥군이 폐지되면서 군포읍이 군포시로 승격, 다만 이때 한정으로 시흥시와 하나의 선거구로 묶였다. 단일 선거구의 신설은 1996년의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때부터.
  2. 앞선 94년에 김영삼으로부터 민주자유당 입당 제의를 받았으나 이 역시 비판하며 거절한 바 있다.
  3. 이를 두고 삼김정치 청산을 목적으로 독재정권의 후신과 야합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4. 여담으로 제정구 의원의 영결식 때 당시 한나라당 원내총무였던 이부영"제정구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 때문에 억장이 터져 DJ암으로 죽었다."라는 극언을 퍼부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헌데, 그로부터 불과 4년 뒤에 김영춘, 이우재, 안영근, 김부겸 등과 사실상 DJ가 지지하는 정당을 만드는데 참여한 건 참 아이러니. 다만 제정구가 김영삼, 김대중의 보스 정치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며 만약 사망하지 않았더라면 3년 후 노무현다시 만났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5. 가톨릭 신자라면 성당에서 미사 끝나고 부녀회가 파는 것을 본 일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