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지워터 : 불타는 파도

Maintenance script (토론 | 기여)님의 2017년 2월 4일 (토) 11:2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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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그 오브 레전드2015년 여름 이벤트인 빌지워터 : 불타는 파도의 스토리를 집필해둔 항목이다. 이곳으로 들어가면 원본 스토리를 볼 수 있다.

2 1막

두 번째 기회를 주는 도시, 빌지워터.
그러나 여기에서도 어두운 과거의 그림자를 피해갈 수만은 없습니다.

2.1 1막 1장 [1]

학살의 부두
의뢰
오래된 친구

쥐들이 찍찍거리는 소리에 귀가 멍해질 지경이었다. 쥐 떼 소굴 끝에 자리한 학살의 부두는 그 이름처럼 악취가 진동했다.
어둠에 몸을 숨긴 채 썩은 바다뱀 고기의 비린내를 맡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가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거지?
모자를 푹 눌러 쓰고 겹겹의 그림자가 만들어낸 깊은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중무장한 톱니 갈고리단이 활개 치며 돌아다니는 소리가 횃불처럼 어른거렸다.
그들은 잔인하기로 악명 높았다. 정면승부로는 이길 수 없으리라. 더군다나 나는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법을 모른다. 덧붙여 오늘은 싸울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런데 왜 이런 지저분한 동네까지 행차했냐고?
돈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이번 건은 위험한 도박이지만 포기하기에는 보수가 너무 짭짤했다. 게다가 사전 조사를 통해 알맞은 카드 패도 준비해 왔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질질 끌어서는 안 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쥐도 새도 모르게 들어갔다 나올 생각이었다. 일을 마무리하고 돈을 챙겨 동트기 전 이곳을 뜰 것이다. 잘만하면 이 망할 물건이 없어진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겠지. 난 그사이 발로란으로 떠날 수 있을 거다.
저벅저벅, 텅 빈 골목에 발소리가 유령처럼 울려 퍼졌다. 경비를 서던 놈들이 도살장 뒤로 사라졌다. 건물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돌아올 때까지, 주어진 시간은 이 분. 시간은 충분하다.
마침 은빛으로 빛나던 달이 구름에 휩싸였고 선착장은 어둠에 물들어 파랗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부들이 버리고 간 나무 상자가 부두에 널려 있었다. 악취가 좀 나겠지만 오늘 같은 밤 몸을 숨기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중앙 창고의 옥상에 석궁을 든 그림자가 일렁였다. 다른 경비들이다. 그림자는 모였다 흩어지며 이지러졌다. 말소리와 희미하게 깔깔거리는 소리가 안개처럼 깔렸다. 수다를 떠는 꼴을 보아하니 목에 방울을 달고 왔어도 몰랐을 터다.
아마 여기에 올 정도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은 없다고 안심했겠지. 차거운 밤바람이 불어오자 소금기를 빼느라 매달아 둔 거대한 작살이 서로 부딪치며 소름 끼치는 잡음을 냈다. 밀려오는 파도 소리마저도 음산한 곳이었다. 괜히 섬뜩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칠 뻔했다.
축축한 돌길 여기저기 녹슨 쇠사슬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 거대한 기중기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의 힘으로는 들 수 없는 엄청난 크기의 바다 괴물을 도살장으로 옮길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 도살장 쪽에서 구역질 나는 악취가 풍겨왔다. 머리가 띵해질 만큼 지독한 냄새였다. 한번 그 냄새 곁을 지나면 몸속까지 밸 것 같은 그런 냄새. 이거 참, 보수에 옷값도 같이 청구해야 할 판이다.
희미한 불빛이 학살의 부두에 정박하고 있는 여러 척의 배에서 흘러나왔다. 밑밥이 음울하게 수면 위를 떠돌고 있었다. 그때 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범선의 시커먼 돛이 위풍당당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빌지워터 사람이라면 그 배를 모를 수 없다.
입꼬리가 뱀처럼 꿈틀거렸다. 나는 지금 이 섬을 지배하는 자의 창고를 털러 간다. 이건 생사가 달린 도박이다. 긴장감에 온몸의 털이 곧추섰다.
창고는 예상대로 죽음을 앞둔 사형수의 입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출입구마다 자물쇠와 걸쇠가 걸려 있고 경비가 지키고 있다. 침입한다는 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곳이다. 물론 나는 예외지만.
창고 맞은편의 후미진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젠장. 막다른 길이다. 게다가 생각했던 것만큼 어둡지 않아 경비들이 온다면 들켜버릴 게 뻔했다. 잡히기라도 하면……빨리 죽여주기만을 기도하는 수밖에. 하지만 그자에게 끌려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주 오래 고통받다 천천히 죽음에 이르리라.
물론 방법은 있다. 잡히지 않는 것.
그때 묵직한 발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가까워졌다. 경비들이 생각보다 일찍 돌아온 것이다. 도망칠 시간은 길어야 몇 초뿐이다. 다급히 소매에서 카드를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여기까지는 쉽다. 까다로운 건 지금부터다.
카드의 은은한 빛이 마음에 닿아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온 사방을 울릴 듯 두근거렸고 부담감에 어깨가 무거워졌다. 현기증이 나 반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려 애를 썼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 내가 가야만 하는 곳을 온 힘을 다해 떠올렸다.
하…… 어느새 나는 창고 안에 와 있었다. 언제나처럼 속이 메슥거렸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이동할 수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완벽하게.
난 정말 끝내준다니까.
경비 중 한 놈이 골목길을 훑어보다 바닥에서 카드를 발견할지도 모르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잠깐 몸을 풀며 주변을 둘러봤다. 바깥의 등불이 흐릿하게 흘러들어와 실금이 간 벽이 거미줄처럼 보였다. 어둠에 눈이 익기를 기다렸다. 깊은 물에 잠긴 것처럼 사물들의 경계가 뿌옇게 흔들리고 있었다.
창고는 열두 개의 바다에서 약탈한 금은보화로 터질 듯 채워져 있었다. 매끈한 철제 갑옷, 이국적인 신비를 자아내는 예술품, 은은하게 빛나는 비단까지 값비싼 물건이 가득했다. 하지만 내 목적은 이런 시시한 것이 아니다.
최근 도착한 물건이라면 짐이 드나드는 중앙 출입구 근처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종이, 나무, 금속…… 다양한 재질의 상자들을 조심스레 더듬던 손이 자그마한 나무 상자 위에서 멈췄다. 이거다.
곧바로 상자를 열었다.
칠흑 같은 밤하늘 색의 비단 받침에 단검이 놓여 있었다.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아름다운 단검이었다. 손을 내밀어 만지려는 순간.
철컹.
저 익숙한 소리. 그 소리에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내 뒤에 서 있는 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 그레이브즈였다. “오랜만이군.”

2.2 1막 2장[2]

기다림
재회
불장난

얼마나 어둠 속에 서 있었는지 모른다. 나방이 등불로 돌진해 타닥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재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침침한 허공을 쏘아보며 가만히 서 있자니 마음이 소란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분노가 나를 지탱해주었다. 복수하기 전에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자정이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뱀 같은 자식. 물론 카드 마술을 부려 창고 한복판에 나타났다. 딸각. 곧바로 산탄총을 장전했다. 기필코 날려버릴 테다. 이 더러운 배신자를 몇 년이나 찾아 헤맸던가. 이제야 운명의 총구를 겨눌 시간이 온 것이다.
“트위스티드 페이트.” 그를 불러 세웠다. “오랜만이군.”
오늘을 기다리며 속으로 되뇌었던 수많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를 보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 머릿속이 하얘졌다.
반면 이 자식의 텅 빈 두 눈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두려움도, 후회도, 놀란 기색조차도. 단단히 장전된 총이 자신을 겨누고 있는데. 망할 놈.
“도대체 얼마나 그러고 서 있었던 거야?” 싱글싱글 웃는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얼굴을 보자 분노가 치솟았다.
놈을 향해 총구를 들이댔다. 당장 방아쇠를 당긴다면 모든 게 끝장날 터였다.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변명이라도 듣고 싶다. “왜 그런 거지?” 어차피 교묘한 거짓말이나 늘어놓을 게 뻔하다. 그래도 묻고 싶었다.
“총은 치우자. 응? 우리 친구잖아.”
친구? 친구라고? 이놈이 나를 우습게 보지 않고서야. 나는 순간 이 야비한 자식을 내 눈앞에서 영원히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고 트위스티드 페이트를 가만히 지켜봤다.
“이렇게 단정하게 차려입은 건 처음 보는데?”
그 말에 모습을 유리에 비춰봤다. 쥐가오리에게 무자비하게 물어 뜯겨 꼴이 말이 아니었다. 경비의 눈을 피해 바다로 수영해 들어오느라 이리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단정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였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약간의 여유가 생긴 다음부터 말쑥한 차림만 고집해왔다. 곧 엉망진창으로 망가질 테지만. 그전에 대답을 듣고 말겠다.
“그 계집애 같은 얼굴을 벽에 뭉개버리기 전에 왜 내 뒤통수를 쳤던 건지 말해.” 트위스티드 페이트를 상대할 때는 정면으로 세게 나가야 한다. 이 미꾸라지 같은 놈이 언제 교묘하게 빠져나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같이 일할 때는 그 간교함 덕을 봤지만 이젠 아니다.
“사람이 수용소에서 십 년을 썩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아냐고!”
알 리가 없다. 놈은 침묵을 지켰다. 나에게 저지른 잘못을 안다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겠지.
“보통사람이었으면 미쳐버리고 남았어. 네놈에게 복수하겠다는 의지 하나로 버틴 거다.”
그러자 놈이 간사한 혓바닥을 놀렸다. “내 덕분에 버틴 거네. 그럼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냐?” 반달처럼 휘어진 눈가에 실소가 어려 있었다.
툭.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분노에 눈이 먼다는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분명 살살 약을 올려 분별력을 잃게 하고 그 틈을 타 슬쩍 사라지려는 수작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가 침묵을 지키자 놈이 놀란 듯 눈을 크게 치켜떴다. 나는 대답을 들어야만 했다.
“날 얼마에 팔아넘긴 거냐?” 창고 안으로 낮은 목소리가 으르렁거렸다.
시간을 벌어보려는 수작인지 놈은 계속 미소만 짓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 발소리가 가까이서 창고를 울렸다.
“말콤. 얘기하기 싫은 건 아닌데, 다른 적당한 때가 있지 않을까?” .
그 순간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카드가 나풀거리며 춤을 췄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조각조각 찢긴 카드가 허공에서 흩날리며 떨어져 내렸다. 저 망할 손도 날려버릴 수 있었는데.
“정신 나갔어?” 길길이 날뛰며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말했다. 드디어 놈이 평정심을 잃은 것이다.“동네 사람들 다 깨우려고 작정했냐? 창고 주인이 누군지 알기나 해?”
글쎄. 관심 없는데.
다시 총을 조준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카드들이 여기저기서 폭죽처럼 펑펑 터졌다. 나는 카드에 응수하며 쉴 새 없이 총을 쏘았다. 하지만 녀석을 정말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고 싶은 건지, 반만 죽여 놓고 더 따져 묻고 싶은 건지 내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자욱한 총탄 연기와 널브러진 나무 상자 파편 사이로 창고의 문이 덜컥 열렸다.
열 명이 넘는 해적단 무리였다. 그들은 괴성을 지르며 엎질러지듯 쏟아져 들어왔다.
“너 진짜 이럴 거야?”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손에 다시 카드가 들려 있었다.
나는 총을 똑바로 겨눈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끝장을 볼 시간이 왔다.

2.3 1막 3장[3]

와일드 카드
경고
현란한 손놀림

고요하던 어둠이 세찬 파도처럼 술렁이기 시작했다. 상황은 빠르게 최악으로 치달았다.
창고 안은 어느새 톱니 갈고리단으로 우글거렸다. 그레이브즈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를 무너뜨리는 것만이 그의 목표였던 것이다.
총탄이 날아올 것 같은 불길함에 사로잡혀 몸을 숙였다. 그 순간 무시무시한 총소리가 들려왔고 내 앞에 있던 상자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정말로 작정하고 왔구나.
맘모스의 상아가 무더기로 쌓인 곳을 공중제비로 가볍게 뛰어넘었다. 그레이브즈를 향해 카드 세 장을 날리고는 카드가 제대로 맞았는지 확인도 하기 전에 상자 뒤로 몸을 숨겼다. 빠져나갈 길을 찾아야 한다. 잠깐은 카드로 발목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몇 초만 주어진다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텐데.
나를 찾아 헤매며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대는 그레이브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친 성미 하며 황소고집은 여전하구만. 이 자식은 도무지 포기를 모른다.
그레이브즈가 으르렁거렸다. “이번엔 내빼지 못할 거다. 절대로.”
아, 저 고집불통.
하지만 그레이브즈, 넌 틀렸어. 난 이번에도 도망칠 거니까. 그가 꼭지가 돌아 달려들면 말이 통하지 않는다.그러니 대화로 풀 생각은 포기해야 한다.
그때 요란한 폭발음이 들렸다. 데마시아산 고급 갑옷에 맞고 튕겨 나간 총알이 사방에 쏟아지듯 꽂히는 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창고를 뒤흔들었다. 간신히 총탄을 피하며 집히는 대로 카드를 날렸다. 앞뒤를 분간할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갈고리단 놈들까지 상대해야 했다. 그레이브즈는 저주가 뒤섞인 협박을 뇌까리며 방아쇠를 당겨댔다. 잊어버릴 뻔했어. 덩치에 비해 참 날쌔다니까.
하지만 더 시급한 문제는 멍청한 자식 덕분에 톱니 갈고리단이 벌떼처럼 몰려든 거다. 우리는 완전히 포위됐고 중앙 출입구도 봉쇄됐다.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해. 그러나 의뢰를 완수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창고를 거의 한 바퀴 돌았는데도 그레이브즈는 성난 황소마냥 씩씩거리며 뒤따라오고 있었다. 창고는 이미 갈고리단 놈들이 점령해버렸지만 다른 놈들이 더 오고 있을 게 뻔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붉은빛을 뿜는 카드를 꺼내 중앙 출입구에 던졌다. 그러자 우지끈 소리를 내며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바닷바람이 휘몰아쳐 들어왔고 문가에서 쥐 떼가 찍찍거리며 황급히 흩어졌다. 갈고리단 놈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기회는 지금뿐이다.
갈고리단 놈 하나가 손도끼를 휘두르며 돌진해왔다. 놈의 무릎을 가볍게 걷어차고 다시 카드를 날려 다른 놈들이 어디 있는지 알아냈다.
놈들의 눈을 피해 부리나케 내달려 단검을 낚아챘다. 이 아수라장을 겪어내느라 갑절로 고생했으니 돈이라도 챙겨야겠다.
코앞에 출입문이 열려있는데도 갈고리단 놈들 때문에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짠내가 섞인 악취가 훅 끼쳐왔다. 숨을 고르며 아직 소란이 미치지 않은 창고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어둑한 상자들 틈으로 몸을 숨기고 놈들의 동태를 살폈다. 창고 안은 난장판이 되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다.
손안의 카드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집중하려 호흡을 가다듬을라치면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그레이브즈가 나타나 훼방을 놓았다. 그의 총, 운명이 요동치며 사방을 헤집을 때마다 갈고리단 놈들이 바람 앞의 낙엽처럼 쓰러져나갔다. 부서진 상자의 잔해, 끙끙 앓으며 바닥에 뒹구는 해적 놈들, 쏟아져 나온 보물까지. 이것 참 덕분에 골치 아파졌다.
내 손안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카드가 들려 있었다. 그레이브즈가 이 카드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증기 기관차마냥 연기를 뿜어대던 운명의 총구가 나를 향했다. 집중할 수 없다. 우선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거냐!” 천둥 같은 고함 소리가 창고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틈을 주지 않고 나를 쫓았다. 대체 언제 저렇게 영리해진 거람.
집중력은 점점 흐트러져갔다. 이대로 가다간 갈고리단 놈들에게 붙잡힐지도 모른다. 많은 놈들이 쓰러졌는데도 숫자는 줄지 않고 오히려 끝없이 불어나고 있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옷은 악취도 모자라 이젠 흠뻑 젖어버렸다. 자비를 모르는 놈들의 두목을 생각하니 타는 듯한 갈증이 일었다.
도무지 꺼림칙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덫에 걸린 게 분명해. 갑자기 말도 안 되게 쉬운 의뢰가 들어와서 가 보니 옛 동료가 기다리고 있다니…… 누군지 몰라도 그레이브즈보다 훨씬 똑똑한 놈이 꾸민 일이 틀림없다.
그렇다. 방심했던 거다. 내 뺨이라도 때리고 싶었지만 이미 나를 둘러싼 어깨들에게 한 대씩만 맞아도 충분할 것 같았다.
일단은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 그때였다. 두 발 연속으로 산탄이 날아왔다. 엎어진 유리잔처럼 몸이 크게 휘청이며 뒤로 넘어갔다. 위험해. 나무 상자에서 백 년은 더 묵은 듯한 먼지가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살이 날아와 썩은 나무판자에 박혔다. 한 뼘만 아래로 꽂혔다면 이마가 박살 났을지도 모른다.
“그만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그레이브즈의 녹슨 칼날같이 쉰 목소리가 들렸다. 불 속에 있는 것처럼 온몸이 뜨거워졌음에도 얼음을 쥔 듯 두 손이 덜덜 떨렸다.
어쩌면 이 자식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아까의 폭발에서 불꽃이 튀어 천장이 무서운 기세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 창고는 얼마 안 가 무너질 터였다. 부두에서 봤던 검은 깃발이 마음속에서 나부끼고 있었다.
나는 부르짖으며 그레이브즈에게 호소했다. “우리 모두 사기당한 거라고!”
“사기 전문가가 보기에는 그런가 보지?” 빈정대는 투였다.
그래도 설득해야만 했다. 창고 안은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연기로 가득 찼다.
“일단은 같이 빠져나가자. 복수는 그다음에 생각해. 제발.”
나는 콜록거리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절박하게 말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레이브즈는 이를 갈았다. “네놈을 믿느니 성을 갈겠다.”
그래. 방법은 이것뿐이다. 분별력을 잃게 만드는 것. 설득하려 하면 할수록 길길이 날뛸 터였다. 그레이브즈는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고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 틈을 탔다. 간신히 몸을 판자 뒤에 숨겼다. 카드에 정신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창고 밖으로 이동한 순간, 심해에서부터 숨을 참고 수면에 다다른 것처럼 숨이 가빠왔다. 용암 같은 분노가 끓어 넘치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카드 한 장만 남겨진 빈자리에 서서 잔뜩 약이 올라 헛된 총질이나 하고 있겠지.
활짝 열린 문을 유유히 빠져나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드 뭉텅이를 집어 던졌다. 손장난이나 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창고는 이미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구름마저 붉게 물들어 하늘이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레이브즈를 남겨두고 온 게 살짝 마음에 걸렸다. 그렇지만 그 정도에 무너질 위인이 아니니 문제없다. 강한 놈이니까…… 게다가 부두에 불이 나면 빌지워터 전체가 발칵 뒤집힐 테니 도망치기엔 그편이 좋겠지.
하지만 어떤 길로 도망치면 좋을지 고민하던 내 등 뒤로 귀를 찢는 듯한 폭발음이 울렸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무너진 창고 벽 사이로 그레이브즈가 뛰어오는 게 보였다.
산탄총을 난사하며 뒤쫓아오는 그의 두 눈은 살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고집 하나는 알아줘야 했다.
다만 그 고집이 나를 오늘 밤 저 세상으로 보내버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2.4 1막 4장[4]

뼈 공예
피의 가르침
전언

거지 소년의 눈이 공포로 흔들렸다. 일등 항해사의 뒤를 따라 선장의 처소로 향하던 중 어두운 복도 끝의 선실에서 흘러나오는 끔찍한 신음 소리가 소년의 발목을 물귀신처럼 붙잡았다.
비좁은 갑판 사이로 울리는, 데드 풀 호의 쥐새끼마저도 숨을 죽이게 만드는 비명. 누군가 겁에 질리기를 바라기라도 한 듯 선체에 메아리치는 그런 비명. 소년은 믿지도 않는 신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불렀다.
일등 항해사는 어지러운 흉터가 거미줄처럼 새겨진 얼굴로 소년을 내려다보며 어깨를 토닥였다. 하지만 안쪽에서 들리는 절규에 소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둘은 선실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괜찮아.” 일등 항해사가 말했다. “선장님은 네 얘기가 듣고 싶으실 거다.”
그리고는 나무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거구의 선원이 날이 넓고 굽은 칼을 등에 차고 있었다. 사내의 얼굴은 문신으로 뒤덮여 있었다. 사내는 일등 항해사와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소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두 눈은 오로지 선실 가운데 등을 돌리고 앉은 형체에 붙박여 있었다.
선장은 키가 큰 중년의 남성이었다. 굵은 목과 다부진 어깨에서 검은 그림자와 같은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말려 올라간 소매 아래 드러난 팔이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소년은 바로 옆 옷걸이에 걸린 삼각 선장모와 새빨간 외투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갱플랭크…… 선장님…….” 경악을 금치 못한 소년의 목소리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일등 항해사가 소년의 등을 툭 쳤다. “선장님 이 아이의 얘기를 들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갱플랭크는 생각에 잠긴 듯 침묵할 뿐이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된 공기가 선실을 감쌌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그런 긴장감이었다.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골똘히 작업대를 들여다봤다. 그러자 거구의 선원이 소년을 앞으로 떠밀었다. 소년은 천 길 낭떠러지를 앞에 둔 것처럼 비틀거리며 가까스로 앞으로 나아갔다. 금방이라도 풀썩 주저앉을 것 같은 가냘픈 두 다리가 바람 속의 나무마냥 떨렸다. 선장의 작업대가 시야에 들자 소년의 숨소리가 가빠졌다. 소년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그 위에는 다양한 크기의 칼과 갈고리가 널려 있었고 몇 개의 양동이 안에서는 더러운 물이 찰랑거렸다.
그리고 사람이 있었다. 햇빛을 보지 못해 시든 풀처럼 축 늘어진 그 남자는 겨우 머리만 움직일 수 있을 뿐이었다. 세차게 흔들리는 얼굴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고 멍한 눈동자에는 절망이 늪처럼 고여 있었다.
소년은 눈을 돌리려 애썼지만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광경이었다. 눈 속에 몸을 묻은 것처럼 손발이, 입술이 덜덜 떨려왔다. 무슨 얘기를 하러 이 지옥 같은 배에 올라탄 건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그때 갱플랭크가 몸을 돌려 소년과 눈을 마주쳤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어둡고 차가운 눈빛이었다. 마치 죽은 자의 눈처럼. 먹이를 발견한 식인 상어의 눈처럼. 손에는 고급 붓이라도 되는 양 작고 날렵한 조각칼을 쥐고 있었다.
“요즘은 뼈 공예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지.” 갱플랭크는 다시 작업대로 시선을 옮겼다. “다들 성미가 급하니. 뼈를 조각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한 법이거든. 신중하게 생각하면서 칼을 놀려야 하니까.”
[5]소년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기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갱플랭크의 손끝에서 칼날이 만들어내는 조각으로부터 공포에 사로잡힌 큰 눈을 뗄 수 없었다. 나선형으로 꼬인 바다 괴물의 촉수와 파도. 그 섬세하고 정교한 문양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래서 더 잔혹했다.
남자가 헐떡이며 빌었다.
“제발……”
갱플랭크는 그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싸구려 위스키를 상처에 부었다. 지저분한 흔적을 씻어내려는 듯했다.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남자는 사지를 부들부들 떨더니 곧 고개를 떨구었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그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하지만 갱플랭크는 못마땅한지 고개를 돌리며 툴툴댔다.
“잘 봐둬라.” 소년에게 하는 말이었다. “충성스런 애들 중에도 주제넘은 짓을 하는 놈이 있게 마련이지. 그럴 땐 버르장머리를 고쳐줘야 한다. 진정한 힘은 사람들이 너를 보는 시선에서 결정되는 거야.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끝장이거든.”
소년은 텅 빈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깨워라.” 갱플랭크가 기절한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른 애들도 놈의 비명소리를 똑똑히 들어야지.”
데드 풀 호의 의사가 작업대 쪽으로 성큼성큼 발길을 옮겼다. 갱플랭크는 소년을 찬찬히 살피며 물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지?”
“……그……그 남자요.” 소년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짜고 있었다. “쥐 떼 소굴 부둣가에…… 그 남자가요…….”
“그래. 그놈이 뭐?”
“갈고리단을 피해 도망가고 있었지만…… 저, 전 봤어요.”
“그래?” 갱플랭크는 시큰둥하게 답하며 작업대를 향해 돌아앉았다.
일등 항해사가 소년을 부추겼다. “계속 말씀드려라.”
막…… 카드를 막…… 던졌어요…… 반짝반짝 빛나는…… 카드였어요.”
그러자 갱플랭크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장대한 기골로 인해 그 모습은 마치 심해의 괴물이 물 위로 솟구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놈을 어디서 봤지?”
권총집의 가죽끈이 냉혹한 손아귀 안에서 종이마냥 찌그러졌다.
“창고요. 판잣집 옆에 있는…… 큰 창고 근처에서 봤어요.”
갱플랭크는 소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외투와 삼각 선장모를 옷걸이에서 낚아챘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고 눈에서는 광기가 이글거렸다. 꺼질 듯 희미한 신음 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있었다. 소년과 일등 항해사는 조심스레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바다뱀 은화 한 닢 쥐여주고 밥이나 먹여 돌려보내.” 갱플랭크는 일등 항해사에게 명령하며 선실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빛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과 같이 거대한 격분이 선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애들 불러라. 본때를 보여줄 시간이다.”

소년 : 개이득![6]미니언들한테서 뜯어서 저런데 쓰는군

3 2막

그레이브즈와 트위스티드 페이트 사이의 뿌리 깊은 원한은
도시 전체를 화염과 연기로 뒤덮을 위기를 촉발시키는데…

3.1 2막 1장[7]

부두 난투극
도살자의 다리
총격전

폐부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기침에 시커먼 연기가 섞여 나왔지만 숨을 고를 틈이 없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멀어지고 있었다. 또다시 십 년 정도 저놈을 쫓아 룬테라를 뒤지느니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는 게 나았다. 어떻게든 오늘은 결판을 내고 말겠다.
젠장. 놈이 를 발견하고는 부두 일꾼들을 밀치고 선착장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또 카드로 장난을 치시겠다? 어림도 없다. 놈이 집중할 수 없도록 계속 추격할 테다. 나는 십 년 동안의 긴 수용소 생활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부두는 파리 떼가 엉겨 붙는 쓰레기 더미처럼 갈고리단 패거리로 우글댔다. 놈들이 길을 봉쇄하려는 찰나,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카드를 던져 폭발을 일으켰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충격에 쓰러져버렸다.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놈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어떻게든 복수할 생각이니까. 트위스티드 페이트 또한 내 집념을 모르지 않기에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며 도망치고 있었다.
그때 부두 노역자들과 트위스티드 페이트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 틈을 타 쉬지 않고 달려 거리를 좁혔다. 놈은 내 쪽을 힐끗 보더니 잽싸게 거대한 고래 등뼈 뒤로 몸을 숨겼다. 둥글고 거대한 뼈는 하얀 칼날로 만들어진 커다란 칼처럼 보였다. 나는 곧바로 산탄총을 쏘았다. 뼛조각이 잘게 으스러져 눈발이 날리듯 허공으로 흩어졌다.
정확하게 내 목을 노린 카드가 날아왔다. 단숨에 한 발 날려 공중에서 조각내 버렸지만 찢어진 카드가 폭발을 일으켜 바닥을 나뒹구는 신세가 되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먼저 몸을 일으켜 달아났다. 나는 놈의 등을 향해 산탄을 마구잡이로 쏘아댔다. 부둣가에 산탄의 요란한 소리가 치를 떠는 짐승의 포효처럼 퍼져나갔다.
미꾸라지 같은 놈.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갔다. 사방에서 쇠사슬과 해적검으로 무장한 갈고리단 놈들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총구를 돌려 놈들을 처치하며 놈들이 채 쓰러지기도 전에 달리기 시작했다. 다시 트위스티드 페이트를 겨누려는 찰나,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이 내 어깨를 스쳤다. 갈고리단 놈들이 더 몰려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총까지 들고. 이보다 더 많은 놈들에게 둘러싸인다면 위험해질 것이다. 이곳에 온 이유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일단은 낡은 어선 뒤에 숨어 대응 사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빈 총신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쇳소리만 울린다. 어선의 선체가 수없이 쏟아지는 총탄 세례에 기우뚱 흔들렸다. 어서 장전해야 한다. 총열에 탄환을 가득 채워 넣고 바닥에 침을 탁 뱉은 후 난장판에 뛰어들었다.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다니며 나무 상자며 돛, 판자를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망가뜨렸다. 총알이 지나가며 귓바퀴를 찢었다. 뺨으로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우는소리 할 시간 따윈 없다. 이를 꽉 깨물고 쉴 새 없이 방아쇠를 당겨댔다. 모두가 운명 앞에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어떤 놈은 턱을 움켜쥔 채 쓰러졌고, 어떤 놈은 바다에 빠져버렸다. 아수라장이 된 골목을 딛고 고개를 돌려 부두를 살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를 쫓아야 한다. 놈은 벌써 학살의 부두 안쪽에 접어들었다. 나도 그를 쫓아 바닷장어를 손질하는 생선 장수 곁을 지났다. 아무렇게나 내버린 장어 내장 때문에 바닥이 질척거렸다. 그런데 그때, 생선 장수가 벌떡 일어나 냅다 갈고리를 내던지는 게 아닌가.
쾅.
갈고리를 날려버렸다.
쾅.
다음은 생선 장수였다.
지금은 누구도 날 방해할 수 없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 칼날고기 시체를 밀치며 계속 달렸다. 발목까지 물이 차올라 발을 내디딜 때마다 철벅거리는 소리가 났다. 생선 피와 갈고리단 놈들의 피가 뒤섞여 짙은 비린내를 풍겼다. 트위스티드 페이트 자식, 기절 일보 직전이겠지. 내가 총을 들고 뒤쫓는 와중에도 치마에 구정물이 튈까 조바심내는 위인이니까.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거의 따라잡은 순간, 놈이 갑자기 속도를 냈다. 폐부를 찌르는 통증이 다시 발목을 붙잡았다.
“거기 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인간이길래 이렇게 책임감 없이 도망치기만 하는 거냐. 옷차림만 신경 쓰지 말고 문제를 직시하라고.
잠시 상념에 잠길 뻔했으나 인기척에 정신을 차렸다. 오른쪽 건물 난간에 갈고리단 두 놈이 있었다. 재빨리 총을 발사해 난간을 무너뜨려 버렸다. 놈들은 고꾸라지며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매캐한 화약 연기와 건물의 잔해에서 흙먼지가 날렸다. 눈앞이 흐렸다. 이럴 때는 소리에 의지하는 수밖에. 나는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계집애 같은 장화 굽이 내는 또각또각 소리에 귀 기울이며 뛰었다. 놈은 학살의 부두 끝에 있는 도살자의 다리를 향해 가고 있다. 섬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다시 달아나게 내버려둔다면 나는 사람도 아니다.
다리의 입구에 다다랐을 때 반쯤 건너가 있던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갑자기 멈춰 섰다. 드디어 포기한 건가? 물론 그럴 리가 없지. 놈이 멈춰선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다리 건너편에 해적단 한 무리가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 역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된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거대한 파도가 넘실거리는 검은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뛰어들 생각인가? 그러나 뛰어들 만한 배짱은 없는 놈이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자포자기한 듯 내게 다가왔다. 언뜻 순진해 보이는 곱상한 두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분노로 물든 어두운 모습이었다.
“말콤. 우리 둘 다 여기서 개죽음당할 수는 없잖아. 일단 같이 탈출부터……”
“또 내빼시려고? 어차피 네놈이 할 줄 아는 건 그것뿐이니까.”
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른 데 정신이 팔린 것이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함성소리가 점점 커졌다.
맙소사. 빌지워터 악당은 죄다 몰려든 것 같았다. 칼이며 총을 하나씩 들고서. 갱플랭크가 불러 모은 것이 틀림없으리라. 이대로 가다가는 꼼짝없이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바다를 집어삼킬 듯 먹구름이 몰려들고, 해적들은 번개처럼 가까워졌다.
하지만 오늘 내게는 죽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3.2 2막 2장[8]

포위망
심연을 벗어나
검푸른 바닷속으로

우리는 갈고리단 놈들에게 완전히 포위됐다. 거미줄에 걸린 벌레 신세가 된 것이다. 빌지워터의 칼잡이란 칼잡이는 다 모인 것 같았다.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빈민가로 통하는 다리 건너편은 미로와 다름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그 앞을 부둣가 동쪽을 지배하는 붉은 모자단이 막아서고 있었다. 붉은 모자단 또한 갈고리단과 같이 갱플랭크의 수하였다. 사실상 빌지워터 전체가 그의 손아귀에 있었으니까.
반대쪽에서 그레이브즈가 거리를 좁혀왔다. 양날의 칼을 맨손으로 쥔 것처럼 예리한 통증이 머릿속을 관통하는 듯했다. 고집만 더럽게 센 놈. 지금 우리가 어떤 상황인지는 신경도 쓰지 않는 거지. 황당하다 못해 놀랍기까지 한 모습이다. 수렁에 빠졌는데도 도무지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게 꼭 과거의 언젠가와 똑같았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진실을 말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하지만 이제 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어차피 내 말은 한마디도 믿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일단 뭐 하나에 꽂히면 물불 안 가리는 성격의 그레이브즈니까.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할 텐데 우리에겐 시간이 없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알 턱이 없는 그는 불같이 화만 낼 뿐이었다.
다리 난간 쪽으로 뒷걸음질 치며 슬그머니 발을 옮겼다. 난간에는 크고 작은 도르래들이 매달려 있었고 그 아래는 바다였다. 깊이조차 가늠할 수 없는 시커먼 바다를 보고 있으려니 머리는 빙빙 돌고 속은 메슥거려왔다. 갈매기들이 날아가며 불길한 울음을 물감처럼 바다 위에 풀어놓았다. 물러서야만 하는 건가?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데드 풀 호는 새까만 돛을 펼치고 수평선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 이내 해적단으로 가득 찬 조각배가 수없이 쏟아져나왔다. 다리 위에서 본 그 모습은 커다란 곤충을 이고 가는 개미떼처럼 보였다. 갱플랭크의 졸개들이 총출동한 것이리라.
톱니 갈고리단을 뚫고 갈 수는 없고, 붉은 모자단을 뚫고 갈 수도 없고, 고집불통 그레이브즈를 뚫을 길은 더더욱 없었다. 이대로 붙잡히고 마는 것일까? 선택해야 했다.
도망칠 길은 하나뿐이었다.
조심스레 난간에 올라섰다. 다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았다. 바닷바람에 외투가 나부끼며 돛이 펄럭이는 듯한 소리를 냈다. 후회가 밀물처럼 몰려왔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물이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빌지워터에는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당장 내려와!” 그레이브즈가 목청을 높이며 외쳤다. 얼핏 절박한 기운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내가 죄를 고백하기도 전에 죽어버린다면 저 자식은 아마 견디지 못하겠지.
있는 힘껏 숨을 들이쉬었다. 시커먼 파도가 내게 손짓하는 듯했다. 눈앞이 아찔해져 왔다. 발끝부터 시작된 떨림이 온몸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때였다. “내려와, 토비아스.”
이름으로 불린 게 얼마 만이더라…… 나는 피가 얼어붙은 것처럼 아무 말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 마음을 벌컥 열어젖힌 듯.
하지만 이내, 나는 바다에 뛰어들었다.

3.3 2막 3장[9]

연기
관찰자
한밤의 서곡

철면피 히드라 선술집은 소란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취객들이 술을 쏟지도, 괜한 시비로 큰 싸움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빌지워터에서는 보기 드문 술집인 셈이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저 멀리 도전의 절벽까지 왁자지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명예도, 돈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가진 사내들이 악단의 어설픈 연주에 신나게 야유를 보내고 있었다.
흥겨운 축제 분위기 속, 선술집 가운데에는 오늘의 주인공이 자리하고 있었다. 특별 조명이라도 비추듯 그녀가 있는 곳은 환하게 빛나고 활기가 넘쳤다.
주인공은 항구 경비대장과 경비대를 위해 건배를 외쳤다. 그녀는 흔치 않은 미모를 뽐내며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붉은빛이 선연한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에게 눈을 떼지 못하던 남자들은 눈을 치켜뜨며 박수를 쳤다. 그 모습은 꼭 잘 조련된 사냥개들이 주인의 손길 아래 재롱을 부리는 것 같았다.
빨간 머리의 주인공 덕에 술잔은 빌 때마다 다시 채워졌다. 모두가 제집처럼 편하게 늘어져 있었다. 얼큰하게 오른 취기 탓보다는 주인공의 나비처럼 화사한 미소에 애간장이 녹았기 때문이다. 웃음의 따뜻한 온기가 굳게 닫혀 있던 입과 마음을 열었다.
그때 선술집의 문이 열리며 수수한 차림의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그는 떠들썩한 술집 안을 조용히 가로질러 주인에게로 다가가 술을 주문했다.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앳되고 싱그러워 보이는 빨간 머리 미녀는 호박 맥주를 갓 따른 잔을 천진하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의자 위에 올라가 마치 무대를 퇴장할 때 배우들이 하듯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친애하는 동료 여러분. 아쉽지만 저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녀를 붙잡는 안타까운 소리가 곳곳에서 아우성치며 터져 나왔다.
“이만하면 충분히 즐겁게 마셨잖아요.” 아이를 어르듯 애교가 넘치는 목소리였다. “오늘 밤은 저도 바쁘고, 여러분도 항구를 지키러 돌아가셔야 하니까요. 벌써 많이 늦었어요.”
빨간 머리 미녀는 망설임 없이 탁자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이내 승리의 여신처럼 눈을 찡긋거리며 미소 짓더니 관객들을 내려다봤다.
“부디 여왕 바다뱀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를!”
말이 끝나자마자 매력적인 눈웃음을 흩뿌리며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빈 잔을 탁자에 쾅 내려놓으며 이렇게 읊조렸다. “큰 죄일수록 여왕 바다뱀의 가호가 더 간절하겠지.”
입술에 묻은 맥주 거품을 소매로 훔쳐내자 선술집의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술자리의 주인공은 허공에 손 키스를 날려 화답했다.
사내들은 벌떡 일어나 여왕 앞의 시종이라도 된 듯 그녀가 지나갈 수 있도록 비켜섰다. 그녀는 물 위를 미끄러지는 배처럼 유유히 걸음을 디뎠다.
항구 경비대장은 문을 열어 빨간 머리 미녀를 배웅했다. 한 번의 눈길이라도 더 받고 싶었다. 그러나 굽힌 허리를 펴기도 전에 그녀는 홀연히 뒤틀린 듯 얽혀있는 좁은 골목으로 사라졌다.
하얀 달이 자유인의 곶 너머 사라지고 지독한 어둠이 겹겹의 커튼처럼 드리웠다. 선술집에서 멀어질수록 점점 더 단호하고 빠른 발걸음이 그 어둠으로 스며들었다. 근심도 걱정도 없는 발랄한 아가씨의 가면을 벗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어둠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얼굴에서는 사랑스러운 표정과 해맑은 미소가 지워진 지 오래였다. 텅 빈 눈은 앞을 향하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담지 않았다. 어지러운 골목길만 숨소리처럼 펼쳐져 있을 뿐. 거기에는 오로지 오늘 밤 벌어질 일을 골몰하는 하나의 그림자만이 탄환처럼 꽂혀있었다.
그때, 선술집에 있던 수수한 차림의 남자가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날렵하고 조용한 움직임은 마치 고양이 같았다.
단번에 빨간 머리 미녀에게 접근한 그는 정확한 보폭을 맞춰 거리를 유지하며 뒤를 따랐다.
“준비는 다 됐어? 레이픈?”
벌써 몇 년째 그녀의 밑에서 일했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인기척에 놀라는 적 없이 먼저 자신을 알아차렸다. 대단한 여자였다.
“네, 선장님.”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았지?”
“네” 자기를 뭐로 보냐는 듯 조금 발끈한 투였지만 레이픈은 곧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항구 경비대도 없고, 배도 텅 빈 거나 다름없습니다.”
“꼬마애는?”
“시킨 대로 잘했습니다.”
“좋아. 사이렌 호에서 만나지.”
레이픈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흐릿한 안갯속으로 물러났다.
빨간 머리 미녀도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한밤의 어둠이 그녀를 반기며 감싸 안았다. 마치 어둠과 하나가 된 듯, 숨 막히는 정적뿐이었다. 깊은 꿈을 꾸는 것처럼 표정이 모두 지워진 얼굴로 그녀는 숨을 골랐다.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이제 남은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3.4 2막 4장[10]

입수
최고급 장화


다리 아래로 추락하는 순간, 그레이브즈의 포효 소리가 들렸다. 내장이 끓어오르는 듯 분노에 가득 찬 소리. 몸 안의 모든 세포가 안간힘으로 외치는 소리. 하지만 눈앞의 밧줄에 정신을 모았다. 숨이 멎을 것 같은 공포도, 끝없는 심연도 생각할 수 없었다. 눈 속에서 빛이 끊어질 듯 점멸하며 어지러운 무늬를 그렸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모든 게 흐릿해지고 있었다.
간신히 밧줄을 붙잡았을 때는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그러나 이내 손바닥이 쓸려 불에 덴 듯 화끈거려왔다. 참아야만 한다. 올가미 모양으로 묶인 밧줄을 타고 미끄러지며 매듭을 단단히 그러쥐었다. 손바닥의 열상 때문에 몸은 더욱 거세게 흔들렸다.
잠깐 동안 온갖 욕설을 되뇌며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아래를 보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 암시를 걸며.
여기서 물로 떨어진다고 해도 죽을 리는 없었다. 머리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바다로 뛰어드느니 차라리 돌 바닥에 떨어지고 싶었다. 아마 온몸이 으스러지겠지. 그래도 물에 빠지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편할 것이다.
바닥 위로 단단한 철제 밧줄 한 쌍이 공중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하나는 이쪽에서부터 본섬으로, 다른 하나는 본섬에서 이쪽으로 가는 밧줄이다. 빌지워터 사람들은 바다 괴물 고기를 이 밧줄에 매달아 시장으로 날랐다. 밧줄을 움직이는 장치가 굉음을 내며 고막을 찢을 듯 흔들렸다. 사나운 바람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런 불길한 날에 잘 어울리는 바람이었다.
그때였다. 잔뜩 녹슨 집채만 한 양철통이 밧줄을 타고 삐걱거리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얼굴 가득 회심의 미소가 퍼졌다. 하지만 그것도 내용물을 보기 전까지였다. 망할. 썩은 내가 진동하는 생선 내장이라니.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이 장화에 들인 돈이 대체 얼마였더라. 심해에서 잡아 올린 바다용 가죽이다. 거미줄로 짠 비단처럼 부드럽고 강철보다 튼튼하다. 똑같은 장화는 발로란 전체에 네 켤레도 안 되는데……
젠장.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생선 내장이 출렁이는 통에 뛰어들었다. 장인의 손길이 한 땀 한 땀 깃든 장화에 차가운 오물이 스며들었다. 아, 끔찍해. 창고에서부터 이게 무슨 꼴이야. 그래도 모자만은 아직 무사하니까.
그때, 그놈의 재수 옴 붙을 총소리가 울려 퍼지며 밧줄이 뚝 끊어졌다.
타고 있던 양철통은 요란한 마찰음을 내며 밧줄에서 풀려났다. 추락하는 순간은 마치 영원과 찰나가 뒤섞인 듯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나는 충격으로 튕겨 돌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바닥이 흔들리는 느낌과 함께 모든 풍경이 거꾸로 뒤집혔다.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생선 내장과 함께.
몸을 지탱할 힘조차 없었지만 간신히 일어나 도망갈 길을 찾아야 했다. 갱플랭크의 수하들이 탄 조각배가 빠르게 다가왔다. 검은 깃발이 고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금방이라도 잡히고 말 것이었다.
현기증이 일었지만 기다시피 부두에 묶여 있는 작은 통통배를 향해 걸었다. 하지만 절반도 못 가 산탄이 날아왔다. 선체는 모래성처럼 단숨에 두 동강 나버리고 말았다.
잔해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모습을 바라보며 주저앉았다. 팽팽했던 긴장의 끈이 뚝 끊어지며 맥이 탁 풀렸다. 내 몸에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를 참고 겨우 숨을 들이쉬었다. 어느새 다가온 그레이브즈의 노여움 가득한 시선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다리에서는 어떻게 내려온 거람. 뭐, 원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녀석이니까.
“비싼 옷을 다 버려서 어쩌나?” 물에 빠진 생쥐 꼴인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씩 웃으며 하는 말이 겨우 그거라니.
“언제 철들래?”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내가 도와주려고 할 때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레이브즈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바닥에 총을 갈겼다. 파편이 튀었는지 정강이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제발 좀 들어 보……”
“이제 듣는 건 때려치우기로 했어.” 목소리에서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크게 한탕 하기로 해놓고 아무 말도 없이 내뺀 놈 얘기를 들어서 뭐해?”
“아무 말도 없이? 내가 분명……”
다시 총탄이 날아와 돌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나 그따위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놈들의 배도 그만큼 더 빨리 도착할 것이다. 팽팽하게 부푼 돛들이 불쑥 튀어나온 뼈처럼 보였다.
“난 함께 탈출하려고 했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으니까. 그런데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건 너잖아, 이 자식아. 매번 그랬던 것처럼 너는 그때도 무식하게 밀어붙였다고!” 어느새 손안에는 한 장의 카드가 들려 있었다.
그레이브즈가 목소리를 높이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때 내가 너희는 뒤에서 지원만 해달라고 했지? 잘 끝내고 빠져나갈 수 있다고, 평생 놀고먹을 정도로 벌어들일 수 있다고. 근데 도망쳤지. 나만 두고.” 해묵은 증오는 내가 알던 그레이브즈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꿔놓았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 안에서 무언가가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나는 달싹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입안이 바싹 말라 침도 삼킬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그레이브즈의 어깨너머로 작은 빛이 예리하게 반짝였다. 장총인가? 그렇다면 갱플랭크의 부하들이 부두에 도착한 것이리라.
나는 망설임 없이 그쪽을 향해 카드를 날렸다.
동시에 그레이브즈도 방아쇠를 당겼다.
카드는 그레이브즈의 등에 총을 겨눴던 갱플랭크의 부하를 쓰러뜨렸다.
내 뒤에서도 해적 한 놈이 털썩 고꾸라졌다. 한 손에는 날이 선 칼을 들고 있었다. 그레이브즈가 쏘지 않았다면 지금쯤 목은 내 몸에 붙어있지 않았을 거다. 카드를 날리지 않았다면 그레이브즈도 저 세상에 갔을 테고.
습관이란 이렇게 무서운 거다.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갱플랭크의 수하들이 괴성을 지르며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머릿수가 너무 많아 정면으로 붙는다면 이길 수 없을 게 뻔했다.
그렇다고 항복할 그레이브즈가 아니었다. 산탄총을 치켜들어 방아쇠를 당겨댔다. 그러나 탄환이 떨어진 듯 빈 총신 소리만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나는 아직 카드가 남아 있었지만 꺼내지 않았다. 카드 몇 장 던진다고 무슨 소용이겠는가. 반격할 수 있는 거리도 숫자도 아니다.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어 물끄러미 시커먼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갈매기들이 끼룩거리는 소리가 비웃음 소리처럼 귓전을 울렸다.
반면 그레이브즈는 해적 놈들처럼 괴성을 지르며 내달렸다. 옛날부터 저랬어. 그는 총구를 들어 맨 앞에서 뛰어오던 상대의 코를 박살냈다. 하지만 곧 개떼처럼 몰려온 놈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붙잡혔다.
놈들은 피를 뒤집어쓴 채 쓰러진 그레이브즈를 끌고 갔다. 나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놈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일순간 우리를 소란스럽게 비웃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납덩이처럼 차갑게 내려앉았다. 심해에 다다른 돌덩이가 바닥의 모래를 뒤집어쓰면 이런 느낌일까.
안타깝게도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해적 놈들이 바닷길이 열리듯 양쪽으로 갈라섰다. 붉은 외투의 사내가 땅을 울리며 뚜벅뚜벅 걸어왔다.
갱플랭크였다.
가까이서 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다. 연륜이 묻어나는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갈라진 땅처럼 새겨져 있었다.
갱플랭크는 한 손에 을 들고 조각도로 천천히 껍질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신중한 손놀림이었다. 시큼 달큼한 냄새가 공중에 훅 끼쳤다.
“네놈들……” 마침내 정적이 깨지고 야수가 으르렁대는 듯한 목소리가 바람을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뒤흔들었다. “뼈 공예라고, 혹시 들어본 적 있나?”

4 3막

트위스티드 페이트와 그레이브즈는 붙잡혔고, 빌지워터는 엄청난 위기에 빠졌습니다.
지금 바로 빌지워터: 불타는 파도의 핏빛 결말을 확인하세요.

4.1 3막 1장 [11]

진실
죽음의 여신

또다시 얼굴에 주먹이 내리꽂혔다. 쾅 소리를 내며 이내 갱플랭크 배의 갑판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머릿속에서 새 떼가 날아오르는 듯한 기분과 함께 통증이 뒤따랐다. 손목에 채워진 무쇠 수갑이 살을 파고들었고 부어오른 손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놈들은 나를 거칠게 끌어다 트위스티드 페이트 옆에 무릎 꿇게 했다. 이 악랄한 놈들이 일으켜 세웠더라도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다시 주저앉을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슬쩍 보니 해적 놈들은 한 건 한 듯 잔뜩 들떠 있었다.
내 얼굴에 주먹을 날렸던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해적 놈이 눈앞에서 얼쩡거렸다.
“이 코흘리개 자식아.” 퉁퉁 부은 입안 때문에 발음이 뭉개졌다. 아릿한 피 맛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었다. “주먹질 하나 제대로 못 하냐?”
순간 다시 한 방 먹고 말았다. 폐부를 찌르는 듯한 고통이 몸을 관통해 갑판에 쓰러졌다. 그러자 놈이 내 팔을 끌어당겨 다시 무릎 꿇게 했다. 입안에 고인 피를 칵 뱉어내자 부러진 이가 딸려 나왔다. 씩 웃어 보였다. 우락부락한 해적 놈은 뚫어질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식하게 힘만 센 놈이었다.
“돌아가신 지 오 년 된 우리 엄마도 너보단 주먹이 셌어.”
놈은 한 대 더 날릴 기세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갱플랭크의 손짓 한 번에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딱 놈의 꼭두각시다웠다.
“그만.”
나는 휘청거리면서도 갱플랭크를 똑바로 쳐다보려 애썼다. 그러자 희미하던 시야가 점차로 밝아왔다. 갱플랭크의 허리춤에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훔치려 했던 단검이 꽂혀 있었다. 아름다운 단검이다. 꼴에 보는 눈은 있나 보군.
“트위스티드 페이드. 솜씨가 좋다는 얘긴 많이 들었다. 난 원래 손재주가 좋은 도둑을 존중해.” 갱플랭크가 트위스티드 페이트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하지만 진짜 솜씨 좋은 도둑이라면 내 물건에 손대면 어떻게 되는지도 알 텐데…” 그러더니 몸을 낮춰 내 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불을 뿜을 듯 뜨거운 동시에 한기가 서린 눈빛이 번뜩였다.
“그리고 그레이브즈…… 네놈이 털끝만큼이라도 분별이 있었다면 내 밑에서 일했겠지. 이미 물 건너간 얘기지만.” 그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갱플랭크는 가뿐히 일어나 우리를 등지고 섰다. 거대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듯 우뚝 솟은 어깨를 보니 현기증이 일었다. 깊고 굵은 목소리가 안개처럼 갑판에 드리웠다.
“난 상식적인 사람이다. 전부 나한테 복종하길 원하는 게 아니야. 그저 적당히 서로 존중하며 살아가자는 건데…… 네놈들에게는 눈 씻고 찾아봐도 존중이란 없더군. 그럼 대가를 치러야겠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그의 얼굴에서 눈썹이 꿈틀거렸다. 맹수가 사냥감을 찾는 것처럼.
갱플랭크의 수하들이 굶주린 사냥개마냥 우리를 에워쌌다. 하지만 떨지 않았다. 놈들이 만족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까. 나는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려 기를 쓰며 고개를 쳐들었다.
“부탁 하나만 하자.” 나는 턱짓으로 트위스티드 페이트를 가리켰다. “저 자식이 죽는 걸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줘.”
갱플랭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좀처럼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원 하나가 냉큼 달려가 배에 달린 종을 쳐댔다. 뇌리를 울리는 강렬한 소리.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소리다. 항구 쪽에서도 화답하듯 곳곳에서 종소리가 울려왔다. 이내 피 냄새를 맡은 쥐가오리 떼처럼 취객, 뱃사람, 장사꾼들…… 온갖 시정잡배들이 구경거리를 찾아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거군. 갱플랭크는 누가 이 섬의 주인인지 모두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온 빌지워터가 다 지켜보고 있으니 잔치를 시작해 볼까!” 그가 호탕하게 외쳤다. “죽음의 여신을 대령해라!”
쿵쾅대는 발소리와 흥분 서린 환호가 갑판을 가득 메웠다. 소란을 뚫고 오래된 대포가 그르렁거리며 이끌려 나왔다. 낡고 녹슨 대포는 초록빛으로 변색되었지만 그럼에도 독특한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를 흘끗 살펴보았다. 놈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다문 채였다. 붙잡히자마자 카드는 모조리 빼앗겼다. 해적 놈들은 심지어 그 바보 같은 중절모마저 가져가 버렸다. 완전히 망가져 버린 차림의 그가 낯설었다. 이런 순간을 모두에게 들켜버리다니 적잖이 속이 상할 거다. 구경꾼 무리 중 웬 양아치 같은 자식이 그 모자를 쓰고 있었다.
긴 세월 동안 트위스티드 페이트를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 구석에 몰려 빼도 박도 못하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탈출할 길이 전혀 없는 지금, 그의 얼굴에서 패배감이 검은 물처럼 넘실거렸다. 고소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감정이 종잡을 수 없이 마음을 뒤흔들었다.
좋아.
“뿌린 대로 거두는 거다. 뱀 같은 놈.”
그러자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돌아보았다. 그는 울분을 억누르듯 얼굴을 찌푸렸다.
“나도 일이 이렇게 돼버린 게 좋진 않았……”
“나를 수용소에서 썩게 내버려뒀잖아!” 간사한 세 치 혀를 더 이상 놀릴 수 없게 말을 끊어버렸다. 놈은 곧바로 되받았다.
“우린 널 빼내려고 별짓을 다 했어! 너 때문에 죽은 애들도 있다고. 알기나 해? 콜트, 월러치, 브릭…… 전부 죽었어! 바로 너같이 멍청한 놈 때문에!”
“그래도 넌 살았잖아.” 나도 쏘아붙였다. “겁먹고 혼자만 도망친 거겠지. 아무리 변명해도 소용없어.”
급소를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놈의 얼굴이 순식간에 거무죽죽해졌다. 더 따지고 들 것도 없었다. 발끈하며 불꽃을 뿜던 눈빛이 잠잠해지고 어깨도 축 늘어졌다. 할 말이 없는 거겠지. 나는 그의 안색을 살폈다. 전부 죽었다고? 정말로?
놈이 아무리 연기를 잘한대도 이런 모습까지 꾸며낼 수는 없을 거다…… 용암처럼 흘러넘치던 분노가 서서히 사그라졌다.
대신 성난 파도처럼 피로가 덮쳐왔다. 나는 오랜 시간 견뎌온 고통과 이번 소동으로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십 년은 더 늙은 기분이었다. 분노만이 벗이 되어준 수용소 시절이 희미한 연기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입을 뗐다. “일이 그렇게 틀어진 건…… 아마 우리 둘 다에게 잘못이 있었던 거겠지.” 그리고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거짓말이 아니야. 우린 진짜 널 구하려고 갖은 애를 썼어. 어차피 넌 믿고 싶은 것만 제멋대로 믿겠지만……”
놈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십 년 동안의 분노를 거스를 시간. 하지만 곧 이미 내가 놈을 믿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망할. 이 자식의 말이 맞다.
나는 늘 멋대로였다. 언제나 그랬다. 그러다 위험에 처할 때면 뒤를 지켜줬던 건 트위스티드 페이트였다. 늘 탈출할 패가 있었으니.
그날 나는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둘 다 죽음 앞에 서게 된 것이다.
그때 해적 놈들이 우리를 대포 앞으로 끌고 갔다. 갱플랭크는 무슨 혈통 있는 사냥개라도 다루듯 대포의 주둥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빛바랜 초록 대포가 바다와 잘 어울렸다. 죽음에 대한 암시처럼 나는 그 장면을 마음 깊이 새겼다.
“죽음의 여신. 쓸모는 다했지만 그간 수많은 놈들을 날려버렸지. 꼭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해주고 싶었어.”
선원들이 묵직한 쇠사슬로 대포를 감고 있었다. 무슨 속셈인지 알 것 같았다.
놈들은 다리에 채워진 쇠고랑에 쇠사슬을 연결했다. 그리고는 우리가 서로 등을 맞대도록 했다. 쇠사슬을 고정하는 자물쇠가 달칵 소리를 내며 단단하게 잠겼다. 해적들은 빈정대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배 가장자리의 탑승구가 열리고 대포가 그 앞에 놓였다. 벌떼처럼 선착장과 부둣가를 메운 구경꾼들이 숨을 죽이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파도 소리가 거세게 귓전을 울렸다. 유난히 높아 보이는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갱플랭크는 위풍당당하게 대포 위에 한 발을 올렸다.
“오늘은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네.”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어깨너머로 중얼거렸다. “결국은 네놈 때문에 죽게 될 것 같더라고.”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삶을 넘어선 사람의 미소였다.
나 또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 만이더라.
우리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배의 난간으로 끌려갔다. 우리의 뒤를 따라 뚝뚝 떨어진 피가 긴 띠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나도 여기까지다. 괜찮은 인생이었다. 누구나 운이 다하는 순간이 오는 법…… 미련은 없다.
그런데 순간 뇌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나는 수갑이 채워진 팔을 뒤틀어 조심스럽게 뒷주머니를 더듬었다. 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창고에서 떨어트린 카드가 만져졌다. 최후의 때가 오면 이 자식 목구멍에 쑤셔 넣으려고 주워뒀던 거였다.
해적 놈들은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몸을 수색해 카드를 빼앗았지만 방심하고 내 몸은 뒤지지 않았다.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옆구리를 툭 쳤다. 등을 맞대고 있어 카드를 몰래 넘겨주는 건 쉬웠다. 그의 손이 주저하듯 맴돌다가 카드를 가져갔다.
그 순간 갱플랭크의 기세등등한 목소리가 들렸다. “약소하긴 하지만 제물은 제물이니까. 여왕 바다뱀에게 내 안부나 전해라.”
놈은 왕이라도 된 양 관중들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더니 발을 들어 대포를 난간 밖으로 힘껏 밀어냈다. 폭죽이 터지듯 난간 위로 하얀 물보라가 솟구쳤다. 마법사의 모자에서 비둘기 떼가 날아오르는 것 같이 대포는 순식간에 시커먼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연결된 쇠사슬이 딸려가며 드르륵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마지막에 와서야 깨달았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언제나 나를 탈출시키려 온갖 수를 썼다. 그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번만큼은 내가 탈출시켜 줄 수 있었다. 이것만은 해줄 수 있다. 다행이다.
“빨리 가.”
그러자 날렵한 손동작이 늘 하던 것처럼 능숙하게 카드를 돌리기 시작했다. 마법의 힘이 모여들자 머리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이래서 이 자식이 카드 쪼가리로 장난칠 때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눈을 감았다. 힘은 점점 커지며 성난 바다 위로 몰아치는 태풍처럼 존재를 빨아들이듯 휘몰아쳤다.
그 순간,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사라졌다.
빈 쇠사슬이 뱀 허물마냥 갑판으로 소란스럽게 떨어졌다. 구경꾼들은 감탄이 뒤섞인 괴성을 내질렀다. 내 발에는 여전히 쇠사슬이 묶여 있었다. 나는 빠져나갈 수 없다. 그렇지만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갱플랭크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평정을 잃은 갱플랭크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바다로 빨려 들어가던 쇠사슬이 발을 잡아당겼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충격으로 온몸의 뼈가 뒤틀려버린 듯 앓는 소리가 나왔다. 순식간에 난간까지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 다음은 차디찬 바닷물이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단단한 손이 몸을 꽉 움켜쥔 것처럼.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이 나를 더 깊이 끌어당겼다.

4.2 3막 2장 [12]

물보라

심연과의 사투
평화

그레이브즈가 쥐여준 카드로 눈 깜짝할 사이 배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해안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거기까지만 가면 구경꾼 무리에 몸을 숨기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아무리 길어도 한 시간이면 이 저주받은 섬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아무도 날 찾지 못하겠지.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은 바다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어서 몸을 숨기려고 바다를 등지고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는걸.
하지만 그때, 성난 황소 같은 얼굴이 씩씩대며 어두운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모습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발버둥 치지만 온몸이 묶여 오도 가도 못하고 가라앉는 절망에 찬 얼굴.
젠장.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두고 갈 수는 없다. 또 혼자 도망칠 수는 없다. 머릿속에 목적지가 단번에 떠올랐다.
마법의 힘이 어깨를 짓누르는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니 나는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
갱플랭크의 거대한 등판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곧 몸을 돌린 놈의 두 눈을 똑똑히 노려봐주겠다.
해적 한 놈이 나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얼음이 돼버렸다. 그 틈을 타 얼굴에 주먹을 갈겼다. 놈은 귀신이라도 본 듯 얼이 빠진 갑판원들 사이로 픽 쓰러졌다. 그제야 정신이 든 해적들이 칼을 뽑아들었다. 갱플랭크 또한 나를 발견하고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장 먼저 내게 달려든 것은 물론 갱플랭크였다. 성큼성큼 달려오는 두 발이 천둥 치듯 요란하게 갑판을 울렸다. 산이 움직이는 것 같군.
하지만 내가 한발 빨랐다. 찰나의 순간 나는 갱플랭크의 칼날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리고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단검을 허리춤에서 낚아챘다. 뒤에서 돛대가 무너져라 고래고래 욕을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이토록 고생하게 만든 아름다운 단검을 슬쩍 훑어봤다. 결국엔 내 손 안에 들어왔다.
나는 단검을 허리띠에 쑤셔 넣으며 갑판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난간 너머로 빨려 들어가던 쇠사슬을 냅다 붙잡았다. 쇠사슬은 맹렬한 기세로 바다로 쏟아져 내려갔다.
사슬에 이끌려 난간을 넘어서는 순간,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눈앞이 캄캄하다는 게 바로 이런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아귀 같은 바다가 입을 쩍 벌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뜰 수도 숨을 쉴 수도 없게 온몸이 뻣뻣이 굳어버렸다. 그저 공포에 떠는 수밖에 없었다. 당장 쇠사슬을 놓아버리라고 본능이 외쳐댔다. 강물을 따라다니는 유랑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수영을 못한다는 꼬리표는 평생 수치스럽게 나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이제 수영을 못해서 죽게 생긴 것이다.
마지막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 순간 총알이 날아와 어깨를 관통했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호흡을 가다듬기도 전에 바닷물이 목구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물살이 뺨을 때렸다. 얼굴이 얼어버릴 듯 화끈거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는 보는 것만으로 질식해버릴 듯한 푸른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악몽은 두려움을 넘어 현실이 되어버렸다.
차오르는 불안감이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잠식했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써도 소용없었다. 총알은 계속해서 수면을 뚫고 무서운 기세로 날아왔다. 물속으로 꽂히는 은빛 탄환의 궤적을 멍하니 바라보며 물에 잠겨 가고 있었다. 이대로 끝나버리는 건가?
나는 끝없는 푸르름 속으로 가라앉았다.
상어와 쥐가오리 떼가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피 냄새를 맡은 것이리라. 놈들은 점점 더 깊이 심해까지 나를 쫓아 내려왔다.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래도 피가 흐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곧 더 많은 포식자들이 몰려올지도 모른다.
모든 게 두려움이 되어 나를 옭아맸다. 나는 느낄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고통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미친 듯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에 귀가 터져버릴 듯했다. 지독한 어둠의 손아귀에 사로잡혀 버렸다. 너무 깊이 들어온 거다. 돌아갈 길은 없다. 나는 뼈저리게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 출발했다면 이미 섬을 빠져나갔을 텐데. 왜 여기까지 왔지? 스스로를 원망하려는 순간 눈 속을 가득 채웠던 성난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맞다.
그레이브즈만은 살릴 수 있을지 몰라.
아래쪽에서 쿵 소리가 나더니 팽팽하던 쇠사슬이 느슨해졌다. 대포가 바닥에 닿은 것이다. 물속으로 흙먼지가 뿌옇게 피어올라 시야가 흐려졌다.
사슬을 더듬어 아래로 내려가자 사람의 형체가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마 그레이브즈겠지.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물장구를 쳐 그에게 다가갔다.
코앞에 다다르자 드디어 얼굴이 보였다. 그레이브즈는 거칠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듯했다. 아직 화낼 정신은 있는 걸 보니 바닷속이 꽤 견딜 만 한가 보군.
의식은 점점 희미해졌다. 더 이상 팔에서는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는 도끼로 내려친 듯 아파져 왔다. 이러다간 그레이브즈를 구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질식할지도 모른다. 서둘러야 한다.
쇠사슬을 놓고 손을 벌벌 떨며 허리띠에서 단검을 찾아 꺼내 들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장님마냥 더듬거렸다. 안간힘을 쓴 끝에 간신히 그레이브즈의 팔에 채워진 수갑을 잡았다. 작은 틈에 단검을 끼워 넣고 수갑을 열어젖히려고 했다. 분명 수없이 해봤던 일이고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손이 너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꾸만 단검의 날이 헛돌며 수갑의 이음새 밖으로 빠져나왔다.
지금쯤이면 폐에 물이 가득 찼을 텐데. 이 자식도 겁에 질려 있겠지. 단단히 잠긴 수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럴 때 이 자식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는 망설임 없이 단검을 확 비틀었다. 섬세한 조작이고 뭐고 무식하게 힘으로 밀어붙였다.
무언가가 꺾이는 느낌이 들었다. 손도 함께 베어버린 것 같다. 놓쳐버린 단검이 심연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저기 가라앉으며 빛나는 건가…… 아깝네. 아름다운 단검이었는데. 긴장이 풀린 듯 몸의 힘이 쭉 빠졌다.
바닷물이 온통 눈부신 붉은빛으로 물들어 일렁이고 있었다. 붉은빛과 주홍빛으로 눈 속이 어지러웠다. 시야가 빨갛게 흔들렸다. 예쁘다…… 죽는 게 이런 거구나. 붉은빛 속에 둘러싸인 채 몸이 노곤해지며 잠이 쏟아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벌어진 입속으로 바닷물이 밀려 들어왔다.
평화로웠다.

4.3 3막 3장 [13]

타오른 것남은 것

결말
꺼지지 않는 증오

미스 포츈은 사이렌 호의 갑판에 서서 항구 쪽을 바라보았다. 불길이 쉴 새 없이 바다 위로 번지고 있었다. 피 냄새와 탄내가 뒤섞여 코끝을 맴돌았다. 침묵하는 그녀의 얼굴이 깊이를 알 수 없이 술렁였다.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낸 파멸의 현장을 지켜보는 그녀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위세 좋던 갱플랭크의 전함은 송두리째 불타 없어졌다. 남은 것은 수면을 떠도는 잿더미와 잔해뿐이다. 배에 타고 있던 해적들은 폭발에 날아가거나 아수라장이 된 바다에 빠져 죽었다. 바다에 뛰어들어 살아남은 해적들 또한 우글거리는 칼날고기 떼에 결국은 잡아먹히고 말았다.
완벽한 승리였다. 둥글게 솟구친 거대한 불길이 밤의 태양처럼 어둠을 밝혔다. 멀리 있는 절벽까지도 대낮처럼 환히 보일 정도였다.
빌지워터 사람들 대부분이 그 장면을 목격했다. 바로 갱플랭크가 불러모은 구경꾼들이었다. 미스 포츈은 갱플랭크가 사람들을 불러모으리라는 걸 미리 꿰뚫고 있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와 그레이브즈가 어떤 꼴을 당하는지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자신의 물건에 손을 댄 자가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일러주고 싶었던 것이다. 갱플랭크에게 있어서 사람은 지배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으니까. 미스 포츈은 그 점을 거꾸로 이용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섬은 함성으로 떠나갈 듯했다. 요란한 종소리가 항구 전체를 뒤흔들었다. 소문은 곧 바닷바람을 타고 해일처럼 퍼져나갈 것이었다.
갱플랭크가 죽었다고.
미스 포츈의 입꼬리가 반원을 그리며 슬며시 올라갔다.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미소였다.
오늘은 그저 마무리에 불과하다. 트위스티드 페이트에게 익명으로 의뢰를 하고 그레이브즈에게 이를 귀띔했던 건 모두 갱플랭크를 잡기 위한 덫이었다. 마침내 십수 년의 세월이 걸려 복수에 다다를 수 있었다.
미스 포츈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옅어졌다. 그녀는 이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갱플랭크가 빨간 두건 아래 얼굴을 감추고 엄마의 총기 제작소로 들이닥쳤던 날부터, 이 순간만을 위해 칼을 갈았다.
미스 포츈은 그날 부모를 잃었다. 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 엄마와 아빠 곁에 우두커니 서 있던 소녀에게도 총알이 날아왔다.
아무리 안전하게 보호받아도, 어떤 위험이나 나쁜 일이 없을 것 같아도 한순간에 모든 게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다. 갱플랭크가 일깨워준 잔혹한 교훈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무자비한 그도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바로 소녀 세라를 확인 사살하지 않은 것. 싸늘하게 식은 가족의 주검 옆에서 밤을 맞아야 했던 그 날부터 매일매일이 지옥이었다. 그러나 지옥보다 더 끔찍한 분노와 증오가 그녀를 지탱해주었다.
지난 십오 년 동안 미스 포츈은 차근차근 복수를 준비해왔다. 먼저 갱플랭크에게서 총기제작소의 어린 소녀가 완전히 잊히기를 기다렸다. 그가 완전히 경계를 늦추고 안락한 삶에 물들기를, 안전하다고 믿고 방심하기를 기다렸다. 그래야만 모든 걸 잃는 비참함을 알게 할 수 있으니까. 갱플랭크가 가르쳐준 교훈을 돌려줄 수 있으니까. 집을 잃는다는 게 어떤 건지. 자신이 속해있던 세상이 단숨에 무너진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그걸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야만 하는 무력함이 어떤 건지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 비로소 복수에 성공했다. 기뻐 날뛰어도 모자랄 텐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그때였다. 레이픈이 뱃전으로 다가와 상념에 잠긴 미스 포츈을 깨웠다.
“놈도 죽었고, 다 끝났습니다.”
“아니.” 미스 포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아니야.”
그녀의 시선은 항구를 떠나 쑥대밭이 된 빌지워터를 훑고 있었다. 갱플랭크를 죽이면 가슴속에 뿌리박힌 증오가 사라질 줄 알았다. 하지만 사라지기는커녕 증오는 고삐 풀린 말처럼 더욱 심하게 날뛰고 있었다. 증오는 미스 포츈에게 힘이 되어주곤 했다. 이제야 처음으로 진정한 힘을 손에 넣은 것처럼 가슴이 뜨겁게 벅차올랐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미스 포츈이 입을 뗐다. “갱플랭크 밑에 있던 놈들을 전부 잡아다 심문하고, 해적단 두목들은 목을 쳐. 갱플랭크의 문장을 달고 있는 술집, 창고, 여인숙, 다 태워버려. 그리고 시체를 찾아와.”
레이픈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흔들렸다. 몰살. 이런 식의 복수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다. 하지만 미스 포츈의 입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미스 포츈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낀 그였다.

4.4 3막 4장 [14]

붉은 하늘

먹이사슬
화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 종종 상상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개처럼 사슬에 묶인 채 바닷속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다행히도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단검을 놓치기 직전 수갑의 고리를 끊어냈다.
나는 산소를 찾아 몸부림치며 온몸을 옭아매고 있던 쇠사슬을 떨쳐냈다. 쇠사슬은 뱀의 이빨처럼 살갗을 파고들어 단단히 박혀있었다. 돌아보니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미동도 없었다. 멍청한 놈. 그의 목에 팔을 단단히 감아 붙들고서 수면을 향해 있는 힘껏 발장구를 쳤다. 묵직한 통증이 전신을 휘감고 우리를 물밑으로 끌어당겼다. 버텨야 한다. 어떻게든 물 위로 올라가기만 하면 그 다음은 방법이 있을 거다.
그 순간, 갑자기 사방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바다가 해를 집어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곧이어 물보라가 일었다. 물속에서 몸이 한 바퀴 뒤집혔다. 부서진 강철의 파편이 해류에 떠밀려 우리 곁을 스쳐 갔다. 뒤이어 대포 하나가 가라앉았다. 누군가 물속으로 빌지워터를 옮겨놓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총알, 돛, 사슬, 온갖 항해를 위한 집기들이 물속으로 쏟아졌다. 새까맣게 불탄 조타기와 시체들이 그 뒤를 이었다. 너무 많이 망가져 알아볼 수 없는 얼굴들이 해를 가리는 구름처럼 붉은 물밑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심연은 검은 아가리를 벌려 최후의 얼굴을 삼켰다.
폐가 터질 것만 같았고 다리는 풀려왔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속도를 높였다. 빨리 물밖에 다다라야 한다. 나도 모르게 들이킨 바닷물을 뱉어내려 애쓰며 손발을 휘저었다. 묵직한 손이 내 머리를 찍어 누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내 물 위로 올라오기까지 꼭 백 년은 지난 느낌이었다. 비린 소금물을 토해내며 거칠 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가슴이 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매캐한 연기에 목구멍은 타들어 가는 것 같고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말 그대로 불바다였다. 이 정도로 큰 불은 처음 본다. 온 세상이 화염에 휩싸인 것만 같았다.
“젠장……” 나는 잔해들을 피해 헤엄치며 소리 내 웅얼거렸다.
갱플랭크의 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시커먼 연기를 뿜어대는 잔해만이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 불이 붙어 있는 나무판자들이 치익 소리를 내며 수면 아래로 무너졌다. 그때 화염에 휩싸인 돛이 우리를 정면으로 덮치며 쓰러졌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영영 바닷속으로 사라질 뻔했다. 돛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물을 때리며 수면 아래로 성난 짐승처럼 곤두박질쳤다.
아직 숨이 붙어 있던 사람들은 불을 피해 바다로 뛰어내렸다. 겁에 질린 새된 비명이 하나둘씩 꺼져갔다. 종말이 온다면 이런 모습일까? 잿더미가 떠다니는 붉은 바다가 사납게 출렁이고 있었다. 검붉은 수면이 달빛 아래서 환하게 빛났다. 낮과 밤이 동시에 한 자리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문득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어깨를 흔들어 보았다. 정신을 잃은 몸뚱이를 물에 띄우고 있느라 아주 죽을 맛이었다. 무겁게 늘어진 팔다리가 내 몸까지 짓누르고 있었다. 갈비뼈가 반은 부러져 뻐근하게 아려왔다. 그때 우리 옆으로 새까맣게 탄 선체가 떠밀려왔다. 그나마 다른 잔해들에 비해 단단해 보였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를 붙잡고 기어 올라갔다. 이걸 타고 항해를 할 수는 없겠지만 당장 숨 돌릴 시간은 벌어줄 것이었다.
그제야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코 밑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마구 두들겼다. 이러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콜록거렸다. 그는 바닷물을 한 대야는 족히 토해내고는 축 늘어진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기침만 해대는 놈에게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멍청한 자식아! 기껏 보내줬더니 왜 돌아왔어!”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한참을 멍하니 있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네 방식대로 해보려고 그랬지.”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웅얼거렸다. “고집불통 인간은 어떤 기분인가 한 번 알아보려고.” 그러더니 또 소금물을 게워냈다. “윽…… 죽을 거 같아.”
칼날고기 떼뿐 아니라 더 끔찍하고 포악한 물고기들까지 우리 주변으로 몰려와 선체를 맴돌고 있었다. 고기밥이 될 수는 없기에 재빨리 물에서 발을 빼냈다.
그때 온몸에 부상을 입은 해적 놈 하나가 우리가 탄 선체를 붙잡고 매달렸다. 곧바로 얼굴을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바닷속에서 순식간에 두꺼운 촉수가 튀어나와 놈의 목을 휘감고 사라졌다. 먹이를 물었으니 잠깐 동안은 조용할 것이다. 수면 위로 보글보글 기포가 피어올랐다. 무언가 갈리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고기떼가 식사를 마치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나는 선체에서 나무판자 하나를 뜯어 노를 젓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나 물 위를 떠돌았는지 모르겠다. 팔은 아파져 왔고 감각도 없었지만 노 젓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선체 아래서 붉게 충혈된 눈동자들이 눈을 깜박이는 것 같았다. 나는 어느새 트위스티드 페이트를 좇아 빌지워터까지 이르게 되었던 긴 인내의 시간을 머릿속으로 되새기고 있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노 저을 힘도 없는지 눈을 감고 헐떡이더니 잠들어버렸다. 피곤이 몰려왔지만 눈을 부릅떴다. 쉬지 않고 끊어질 정도로 세차게 팔을 놀렸다. 그러다 대학살의 현장으로부터 꽤 멀어졌다는 느낌이 들 때쯤 기절하듯 드러누워 버렸다.
버려진 탄피가 된 듯 텅 빈 기분이 들었다. 빌지워터 만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거대한 혓바닥을 타고 목구멍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수많은 시체들. 살아남은 놈은 찾아볼 수 없었다.
도대체 난 어떻게 아직도 숨이 붙어 있는 거지. 나야말로 룬테라에서 제일 재수 좋은 놈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우리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걸까? 이처럼 덧없고 이처럼 질긴 목숨이라니. 차라리 운이 없다고 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지.
그러다 무언가 눈에 익은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쩌다 여기까지 떠내려온 건지, 놈들이 빼앗아간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중절모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모자를 건져 트위스티드 페이트에게 던져주었다. 그는 외출 전 거울 앞에 서서 매무새를 다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머리에 모자를 썼다. 많이 더럽혀졌지만 아직 제법 근사했다.
“이제 네 총만 찾으면 되겠는걸.”
“저기로 다시 기어들어가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하냐?” 손가락으로 바다를 가리키며 말했다. 악취와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이내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공포에 사로잡힌 눈빛이었다. 나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시간이 없어. 누가 벌인 짓인지 몰라도 빌지워터는 이미 난장판이고 상황은 더 안 좋아질 거야.”
그러자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물었다. “근데 총 없이 어떻게 살 건데?”
“글쎄…… 필트오버에 유명한 총기 장인이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필트오버라……” 그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 거기로 돈이 모인다고 하더라.”
턱까지 괴고 한참 고민하던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랑 또 같이 다녀도 좋을지 모르겠네. 예전보다도 멍청해진 것 같단 말이야……”
“나도 마찬가지거든? 이름이 ‘꼬인 운명’인 놈과 같이 다니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 대체 어떤 정신 나간 놈이 그따위 이름을 짓는대?”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폭소했다. “그래도 본명보단 낫지. 안 그래?”
“그건 그렇지.”
나도 씩 웃어 보였다. 좋았던 옛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를 갈았다.
“다시 나만 두고 내빼면 그땐 무조건 네놈 머리를 날려 버릴 거야. 뭐라고 해도 소용없어.”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입가에서도 미소가 가셨다. 붉은 바다를 떠도는 불탄 선체 위 두 사람.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우리는 곧 동시에 싱긋 웃어버렸다. 너무나 익숙한 웃음이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예의 빈정대는 말투로 받아쳤다.
“그러시든가.”

5 에필로그

트위스티드 페이트와 그레이브즈는 탈출했지만, 빌지워터는 혼란에 빠져듭니다.
절망한 자들과 죽어가는 자들의 비명소리가 거리에 가득합니다.
“갱플랭크가 죽었다.” 이 한 마디 말이 퍼져나가자 전쟁이 시작되었죠.
불길 속에서 수수께끼의 인물이 돌아오며 이야기는 막을 내립니다.

5.1 에필로그 본문

혼돈의 도가니

몰락한 자
존재의 이유

텅 빈 골목들 위로 대낮의 햇빛이 칼처럼 꽂혔다. 갈매기 울음소리만 남겨진 유령도시 같았다. 빌지워터는 무법천지로 변했다. 거리에는 죽어가는 자들과 절망에 사로잡힌 자들의 비명 소리가 끝없이 메아리쳤다. 빈민가 곳곳이 불탔고 도시 전체에 재가 날려 눈처럼 쌓였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지배자가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졌다. 갱플랭크가 죽었다는 말 한마디에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낮에는 숨어 지내던 사람들이 밤이면 서로를 무찌르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악취가 들끓는 거리로 쥐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모두가 오랜 세월 동안 쌓아둔 사소한 불만과 더 이상 억누를 필요가 없어진 야욕을 드러내며 서로에게 덤벼들기 일쑤였다.
부두에서는 고래잡이배의 선원들이 평소 눈엣가시로 여겼던 어부 하나를 작살로 해치운 뒤 굵은 낚싯줄에 매달아 전시했다. 바닷바람에 말리려고 널어놓은 쥐가오리처럼.
빌지워터가 세워질 때부터 존재했던 유서 깊은 고지대의 관문도 무너져 폐허가 되었다. 해적단 두목들이 하나둘 사라지자 겁을 먹고 두문불출하던 한 해적단 두목은 잠에 빠져 있던 중 습격을 당했다. 또 하나의 해적단이 두목을 잃은 것이다. 그 겁에 질린 숨소리는 누구의 귀에도 닿지 못한 채 마치 바람 앞의 촛불처럼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한편 선착장에서는 붉은 모자단 하나가 소매를 찢어 피범벅이 된 머리를 동여맸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추격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바람이 으르렁거리며 을씨년스러운 선착장을 뒹굴고 있었다. 톱니 갈고리단이 붉은 모자단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 어서 돌아가 모두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그는 은신처가 있는 골목의 모퉁이를 돌자마자 동료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빨리 무기를 들고 나와. 놈들이 우리를 배신했어!” 그러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본 순간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의자며 탁자, 술병 조각들이 문 앞에 어수선하게 쏟아져 있었고 군데군데 피가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멀쩡한 물건도 멀쩡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붉은 모자단의 은신처였던 곳이 이제는 갈고리단에게 접수된 것이다. 놈들이 손에 든 칼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무리 중에는 아직 어린 티도 벗지 못한 깡마른 소년이 섞여 있었다. 소년은 곰보 자국이 선명한 얼굴을 찡그리듯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나지막하게 읊조린 욕설이 그 붉은 모자단의 마지막이었다.
차갑게 늘어진 몸 위로 갈고리단 놈들의 비웃음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같은 시각, 빌지워터 만 건너편의 후미진 골목에서 한 의사가 비밀리에 수술을 집도 중이었다. 빛이라고는 고작 몇 개의 촛불이 전부인 어두컴컴한 방이었다. 그는 수술비뿐만 아니라 비밀보장에 대한 대가로 수많은 금화를 받았다.
만신창이가 된 환자의 팔에서 상처를 건드리지 않고 촛불에 의지해 피딱지를 제거하는 것만 해도 한나절은 걸렸다. 빌지워터에서 산전수전을 겪어냈고 웬만한 끔찍한 부상은 다 보았다고 자부하던 그도 이처럼 심각한 상처는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놀란 눈을 토끼처럼 동그랗게 뜨고 눈썹을 찌푸리며 상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작은 체구의 가느다란 어깨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의사는 소견을 말하려다 말고 몸서리쳤다. 후폭풍이 두려웠던 것이다. 마지못해 입을 떼는 새하얀 얼굴에서 주근깨가 씰룩거려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처량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죄, 죄송합니다만…… 파…… 팔은 도저히 살릴 수가……”
“살릴 수가?”
“어…… 어렵겠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남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다리를 질질 끌며 다가왔다. 그의 압도적인 체구에 의사는 몸을 움츠렸다. 거대한 손이 기다렸다는 듯 채찍처럼 날아와 의사의 목을 움켜쥐었다. 서서히 허공으로 들어 올려진 의사의 발이 힘없이 허공에서 흔들렸고 등은 벽에 부딪쳤다.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잠깐 동안 의사를 바라봤다. 그러다 갑자기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방의 뒤편으로 걸어갔다. 생각에 잠긴 듯 어두운 뒷모습에 시름이 어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의사는 공포에 휩싸여 목을 부여잡고 격하게 기침을 해댈 뿐이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희미한 불빛 사이를 지나쳤다. 구석에 있던 낡은 서랍장에 다다르더니 가장 위 칸부터 아래 칸까지 차례차례 뒤지기 시작했다. 뒤적거리는 달그락 소리가 멎은 것은 잠시 후였다.
“모든 것에는 존재의 이유가 있기 마련이지.” 망가진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며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는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의사의 발치에 던졌다. 철컹, 쇠가 부딪는 서늘한 소리가 휑한 방을 울렸다. 수술에 쓰는 강철 톱이었다.
“잘라내.” 남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할 일 .”

6 그 외

후속격으로 '그림자 그리고 운명'이라는 단편 소설이 나왔다. 항목 참조.
  1. 화자는 트위스티드 페이트다.
  2. 화자는 그레이브즈다.
  3. 화자는 트위스티드 페이트다.
  4. 화자를 추측할 수 없는데, 아마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에 가깝다
  5. 한글판에서 삭제된 부분이 있다. 그의 다리에 갈기갈기 찢긴 상처가 있고, 피부와 살이 그의 대퇴골에서 발라져 있었지만, 어쨌든 그 남자는 아직 살아있었다.(Somehow, the man was still alive, despite the ragged wound in his leg, the skin and flesh peeled back from his thighbone.)
  6. 갱플랭크가 워낙 펑펑 써대는지라(...) 눈치채기 힘들지만, 바다뱀 은화 한 닢이면 웬만한 가게 문짝 하나 정도는 무리없이 고칠 정도의 상당한 금액이다.
  7. 화자는 그레이브즈다.
  8. 화자는 트위스티드 페이트다.
  9. 3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10. 화자는 트위스티드 페이트다. 상황에서도 옷을 먼저 생각하는 트페는 역시 쿨가이다.
  11. 화자는 그레이브즈다.
  12. 화자는 트위스티드 페이트다.
  13. 3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14. 화자는 그레이브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