哥舒翰
(? ~ 757)
당 제국 상서좌복야 | |||||
전임 안록산 | ← | 가서한 756년 | → | 후임 위견소 |
1 개요
튀르기쉬(서돌궐의 별부) 가서부 사람이다. 당나라의 번장으로 대토번전선 선봉에 섰다. 또한 농우, 하서의 군사를 지휘하기도 했다. 755년, 하북에서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나라는 가서한이 안록산의 서진을 동관에서 막도록 했다. 그러나, 양국충의 삽질로 좌절되었고, 낙양으로 압송되어 옥에 갇혀 있다가 757년, 전황이 불리해진 연나라 수뇌부가 낙양에서 업으로 퇴각하는 도중 살해되었다.
2 생애
본래 가서한의 집안은 안서에서 대대로 살았다. 아버지 도원은 안서도호장군 적수군사를 역임했는데, 아버지처럼 용맹하여 장수의 길을 걸었다. 집안이 부유해 딱히 가난과 시름하지는 않았다. 40세 때 그는 장안으로 내려가 당시 하서절도사 왕충사의 휘하 무장으로 들어가 실력을 쌓았고,
왕충사의 아장으로써 토번과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해 대두군부사에 임명되었다.
747년, 왕충사가 재상 이림보의 모함을 받아 하옥되자 그를 대신하여 가서한이 농우절도사에 계임하여 지속적인 토번의 침공에 대응하며 기습하기도 했다. 일례로, 토번의 교계지인 석보성(石堡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등 용장으로써 진가를 발휘했다. 이후, 전횡을 일삼던 양국충의 눈에 들어와 안록산의 권력에 맞서는데 동조했다. 양국충은 주문을 올려 가서한을 하서절도사를 겸임시키고, 작위를 내려 서평군왕에 삼았다.
술과 여색을 즐기다가 풍질에 앓아 군영에서의 생활을 그만두고 장안에서 쉬는 도중 안록산의 난이 발발하자 태자 이형의 병마부원수에 임명되었다. 낙양에서의 방어 작전에 실패한 봉상청이 고선지와 함께 방어선을 섬서에서 동관(潼關)으로 이전시키다가 변령성의 모함을 받아 참수되자 가서한이 전권을 위임받았다. 가서한은 동관에서 안록산의 군을 막고자 했으나 양국충이 당현종에게 독촉해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싸우라고 명하자 가서한을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이끌고 나아갔으나 대패하고 포로로 잡혀 낙양으로 압송되었다. 757년, 안경서(安慶緖)가 업으로 후퇴하면서 포로로 잡아놓았던 당의 장수 30여 명을 살해했는데 가서한 역시 그들과 함께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