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나라

연나라중국의 옛 국가 명칭이다.

1 춘추전국시대의 국가 : 燕

중국의 역사
中國史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기원전 206 ~ 907년
907년 ~ 1644년1616년 ~ 현재
중국의 역사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
기원전 1600 ~ 기원전 1046상(商)은(殷)
기원전 1046 ~ 기원전 256주(周)서주(西周)
동주(東周)/춘추전국(春秋戰國)춘추(春秋)
전국(戰國)
기원전 221 ~ 기원전 206진(秦)
후초(後楚)
만주의 역사
고대중세근세근현대
연(燕)고조선동호예맥숙신 / 퉁구스
진(秦)
전한흉노
후한선비고구려부여읍루
조위
서진
전연
전진물길
후연
북연두막루
북위(북조)거란실위말갈
동위
북제
북주
수(隋)
중국의 역사
서주춘추전국시대통일 진

춘추전국시대의 국가 중 하나. 시조는 주문왕의 아들이자 주무왕의 아우 공 석(召公 奭)으로 무왕을 도와 을 멸망시키고 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워 오늘날의 하북성 일대를 분봉받은 것이 연나라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수도는 현재의 북경 인근인 계(薊)였으며 분봉 당시의 작위는 후작이었다.[1]

그러나 소공 석 본인은 주공 단처럼 주나라 원로 관직이었던 소공이라 수도 호경(현재 장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멀리 있던 연나라를 직접 통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장자 극(克)을 계(지금의 북경)에 보내 다스리게 했다고 전한다. 영토는 동북으로는 요동과 조선, 서로는 , 남으로는 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다.

서주시대에나 춘추시대에는 별다른 두각을 드러내진 않았다. 다른 나라처럼 뚜렷히 침략받은 흔적이 장공(壯公) 때 말고는 거의 없고 [2]정변도 거의 없었다. 사기, 춘추, 전국책에 공히 딱 한 번 임금이 쫓겨나서 제나라로 망명한 일이 기록된 것 말고는 없을 정도. 일설에는 오랑캐(동이, 대개 동호나 고조선으로 추측)가 있는 지역과 가까워 잦은 침략으로 기록이 불탔거나 길이 막혀 중원으로 전해지지 못했다고도 한다. 혹은 진시황에 의해서 육국(六國)의 역사서를 분서를 하여 남겨지지 않았다고 한다. 덕택에 고조선에 대한 연구도 덩달아 어려워졌긴 하지만 연나라 역사는 역사서에 한두줄 기록만 남았거나 아예 이름만 남은 듣보잡 소국도 아니고 전국칠웅의 반열에 든 강대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기록의 경우 초기에는 지극히 무미건조하다. 소공 때부터 연왕 쾌(噲)[3]까지의 기록은 거의 군주가 즉위하고 사망한 기록 외에는 남아 있는게 별로 없을 정도다. 사기 연소공세가에는 소공 이 후에는 소공의 9대손인 혜후(惠後)의 기록으로 바로 넘어와 아예 중간에 실전된 군주들이 있을 정도다. 그나마 연국사고, 죽서기년, 발견된 금문 등을 통해 이들 실전된 군주들의 이름 정도는 알 수 있게 되었다. 장공 대에는 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히고 공작을 칭할 정도로 강성해졌다.

그 후에도 별일없이 지냈고 전국시대 초에는 다른 나라들을 따라 역왕(易王)이 왕을 칭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연왕 쾌 때에는 대혼란이 일어나 나라가 거의 망할 뻔 했다. 연왕 쾌가 신하인 이름도 비범하기 그지없는 자지(子之)(...)에게 선양하면서 시작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자지의 패거리였던 대부 녹모수(鹿毛壽)가 늙은 연왕 쾌에게 신하에게 선양하는 것은 아름다운 덕을 보이는 것이라면서 자신에게 선양한다고 하면 자신은 사양하여 받지 않을 테니 두 명 모두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길이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를 그럴듯하게 여긴 연왕 쾌가 자지에게 선양하자 그대로 나라를 냉큼 먹어치웠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다.

어쨌든 선양이 이루어진 후에 태자 평(平)과 장군 시피(市被)가 다시 반란을 일으켜서 몇 달을 싸우며 나라가 막장으로 흘러갔고 결국 시피는 패하고 죽었다. 이 와중에 강대국인 제나라(濟) 민왕(閔王)의 군대가 쳐들어오면서 자지는 피살당하고자지가 죽었.... 연왕 쾌는 자살했으며 연나라는 제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한나라(韓)에 도망쳐 있던 공자 직(職)[4]이 왕위에 오르면서 상황이 수습되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연나라의 명군 소왕(昭王, BC 312~279)이다. 연나라는 소왕대에 단숨에 전성기로 뛰어오르게 되었는데 소왕은 국가를 부강하게 해줄 인재를 찾기 위해 대부 곽외(郭隗)에게 방법을 물었는고 곽외 왈 '과거 어떤 왕이 천리마를 갖고 싶어서 신하에게 천금을 주며 천리마를 구해오라 하였습니다. 허나 그 신하는 죽은 천리마의 뼈를 천금을 주고 사왔고 화가 난 왕이 이유를 묻자 그 신하가 "천리마 뼈도 천금을 주고 살 정도면 진짜 천리마를 크게 쳐줄것이라는 소문이 돌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신하의 말대로 1년도 되지않아 진짜 천리마가 세마리나 들어왔다 합니다.' 연소왕이 '갑자기 웬 천리마드립임?' 묻자 곽외 왈 '마찬가지로 별 볼일 없는 인물을 후하게 대한다면 천리마 같은 인재가 모여들거 아니겠습니까.' 아직도 감을 못잡은 연소왕 왈 '그 말뼈다귀 같은 인간이 어디 있을까(...)' 라 묻자 곽외 왈 '대왕 눈앞에 있습니다(...)'.

연소왕이 곽외를 중용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벼슬을 노리는 매의 눈 자신의 재능을 어필하고 싶었던 인재들이 연으로 마구마구 몰려들었고[5] 특히 악의(樂毅)를 기용해 제나라를 성 두개[6]를 남겨놓고 모두 함락시켜 사실상 5년여동안 제를 멸망시켰고[7] 진개[8]에게 명하여 고조선을 침범해 이천여리의 영토를 획득했으며 동호 또한 굴복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소왕의 아들인 혜왕(惠王)이 제나라 전단의 이간계로 악의를 내치는 등의 사태로 인해 국력이 점점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이때 성안군(成安君) 공손조(公孫操)가 쿠데타를 일으켜 혜왕을 살해하고, 왕족인 무성왕을 옹립하였다.

이 외에도 혜왕은 괜히 옆나라 (趙)와 티격태격하면서 국력을 좀 많이 소모했다. 사소한 오해로 인해 벌어진 싸움에서 60여만 대군을 소모해버렸고 수년 후 이 원수를 갚겠다고 극신이 20만대군을 이끌고 복수전을 펼쳤지만 방난에게 전멸당했다. 이게 전성기 때의 조나라라면 모를까 장평대전으로 40만의 장정을 잃고 골골거리는 시절의 조나라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후 군사적 방위력이 전무해지다시피 한 전국시대 말기에는 연왕 희(喜)의 태자 단(丹)이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형가를 보냈지만 결국 암살에 실패했고 진나라에 태자 단의 머리를 보내줬지만 진나라의 침략으로 기원전 222년 연왕 희를 마지막으로 나라의 문을 닫게 된다.

이 후 연이라는 이름은 북경 일대 하북성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는데 삼국지장비가 자신을 연인(燕人)戀人이라고 하는 것도 장비의 출신지역이 연나라 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북경에 연경(燕京)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청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사절단을 연행사(燕行使)라고 불렀는데, 연경으로 가는 사신이라는 뜻이다. 명나라때는 천자를 뵈러 간다고 조천사(朝天使)라고 불렀는데, 오랑케 취급하던 만주족인 청나라 황제를 천자로 인정하는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고, 그렇다고 생까고 살자니 주먹이 무서우니 이름이라도 깎아내려 부른 것이다.

1.1 역대 군주

  • 강공(康公) 석(奭) -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996년
  • 극(克) - 소 강공의 장남. 극, 지, 무, 헌, 화, 성 여섯 군주는 사기 연소공세가에는 기록이 안 되어 있는 군주로 팽화(彭華)의 연국사고(燕國史稿)와 금문에만 나오며 시호는 전해지지 않는다.
  • 지(旨) - 소 강공의 삼남.
  • 무(舞) - 지의 아들.
  • 헌(憲) - 무의 아들.
  • 화(和) - 헌의 아들.
  • (군주 불명)
  • 성(聖) - 헌의 손자로 추정.
  • (군주 불명)
  • 혜후(惠侯) - 기원전 864년 ~ 기원전 827년. 강공의 9세손. 성의 손자로 추정.
  • 희후(僖侯) 장(莊) - 기원전 826년 ~ 기원전 791년. 혜후의 아들.
  • 경후(頃侯) - 기원전 790년 ~ 기원전 767년. 이후의 아들.
  • 애후(哀侯) - 기원전 766년 ~ 기원전 765년. 경후의 아들.
  • 정후(鄭侯) 정(鄭) - 기원전 764년 ~ 기원전 729년. 애후의 아들.
  • 목후(穆侯) - 기원전 728년 ~ 기원전 711년. 정후의 아들.
  • 선후(宣侯) - 기원전 710년 ~ 기원전 698년. 목후의 아들.
  • 환후(桓侯) -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91년. 선후의 아들.
  • 장공(莊公) - 기원전 690년 ~ 기원전 658년. 환후의 아들.
  • 양공(襄公) - 기원전 657년 ~ 기원전 616년. 장공의 아들.
  • 환공(桓公) - 기원전 617년 ~ 기원전 602년. 양공의 아들.
  • 선공(宣公) - 기원전 601년 ~ 기원전 587년. 환공의 아들.
  • 소공(昭公) - 기원전 586년 ~ 기원전 574년. 선공의 아들.
  • 무공(武公) - 기원전 573년 ~ 기원전 555년. 소공의 동생.
  • 문공(文公) - 기원전 554년 ~ 기원전 549년. 무공의 아들.
  • 의공(懿公) - 기원전 548년 ~ 기원전 545년. 문공의 동생.
  • 혜공(惠公)/간공(簡公) 관(款) - 기원전 544년 ~ 기원전 536년. 의공의 아들.
  • 도공(悼公) - 기원전 535년 ~ 기원전 529년. 혜공의 동생.
  • 공공(共公) - 기원전 528년 ~ 기원전 524년. 도공의 아들.
  • 평공(平公) - 기원전 523년 ~ 기원전 505년. 공공의 동생.
  • 간공(簡公) - 기원전 504년 ~ 기원전 493년. 공공의 아들.
  • 효공(孝公) - 기원전 492년 ~ 기원전 455년. 평공의 아들.
  • 성공(成公) 재(載) - 기원전 454년 ~ 기원전 439년. 효공의 아들.
  • 민공(閔公/湣公) - 기원전 438년 ~ 기원전 415년. 성공의 아들.
  • (후)간공(簡公)/희공(僖公) - 기원전 414년 ~ 기원전 373년. 민공의 아들.
  • (후)환공(桓公) - 기원전 372년 ~ 기원전 362년. 후간공의 아들.
  • (후)문공(文公) - 기원전 361년 ~ 기원전 333년. 후환공의 아들.
  • 역왕(易王) 퇴(脮) - 기원전 332년 ~ 기원전 321년. 후문공의 아들. 기원전 323년 칭왕.
  • 쾌(噲) - 기원전 320년 ~ 기원전 318년. 역왕의 아들로 자지에게 선양함.
  • 자지(子之) - 기원전 317년 ~ 기원전 314년. 연왕 쾌의 신하.
  • 소왕(昭王)/소양왕(昭襄王) 직(職) - 기원전 311년 ~ 기원전 279년. 연왕 쾌의 아들.[9]
  • 혜왕(惠王) 악자(樂資)/융인(戎人)[10] - 기원전 278년 ~ 기원전 271년. 소왕의 아들. 자연사 또는 공손조(公孫操)와 성안군(成安君)에 의해 시해당함.[11]
  • 무성왕(武成王) - 기원전 270년 ~ 기원전 258년. 사기에서는 혜왕과의 관계가 불분명한 군주지만[12] 혜왕의 아들[13]로 추정.
  • 효왕(孝王) - 기원전 257년 ~ 기원전 255년. 무성왕의 아들.
  • 희(喜) - 기원전 254년 ~ 기원전 222년. 효왕의 아들. 태자 단(丹)의 아버지. 진나라(秦)에 의해 멸국됨.


2 공손연이 선포했던 국가

중국의 역사
中國史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기원전 206 ~ 907년
907년 ~ 1644년1616년 ~ 현재
중국의 역사 기원전 206 ~ 907년
기원전 206 ~ 220한(漢)
초한전쟁(楚漢戰爭)
전한(前漢)
신(新)
현한(玄漢)
후한(後漢)
220 ~ 265삼국(三國)위(魏)촉한(蜀漢)오(吳)
265 ~ 436진(晉)서진(西晉)
동진(東晉)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439 ~ 589남북조(南北朝)송(宋)북위(北魏)
제(齊)
양(梁)
한(漢)
후량(後梁)
서위(西魏)동위(東魏)
진(陳)북주(北周)북제(北齊)
581 ~ 619수(隋)
618 ~ 907당(唐)
무주(武周)
삼국시대 위나라요동 지역 군벌인 공손연이 위에 반기를 들고 선포했던 국가 이름이다. 공손연(公孫燕)이라고도 한다.공손연이 세운 공손연 공손연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을 격퇴한 뒤 237년에 스스로 연왕(燕王)을 칭하고 연호를 소한(素漢)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다음 해 사마의가 이끄는 위나라 관군에 패퇴해서 장남 공손수와 함께 붙잡혀 참수당해서 연나라는 금방 소멸되었다.


3 오호십육국시대의 국가들

오호십육국 때의 국가들 중에 '연'이라는 국호를 가진 나라가 다섯 있었다. 그래서 전연, 후연, 서연, 남연, 북연으로 구별한다. 즉, 후대엔 저리 구별하지만 당시 저 나라들 국호는 모두 연, 또는 높여서 대연(大燕)이었다. 남연을 제외한 전연, 후연, 서연, 북연이 따로 개설되어 있다.

3.1 남연(南燕)

남연은 398년 선비족인 모용덕(慕容徳)이 건국한 국가로 국호는 연이다. 다른 연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남연으로 부른다. 410년 동진 유유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대수묘호시호성명연호재위기간능호
1대세종(世宗)헌무황제(獻武皇帝)모용덕(慕容德)건평(建平) 400 ~ 405398 ~ 405동양릉(東陽陵)
2대--모용초(慕容超)태상(太上) 405 ~ 410405 ~ 410-


4 대연(大燕)

안사의 난 당시 안록산이 756년 1월 낙양에서 스스로를 대연황제라 칭하며 즉위했다. 때문에 통감이나 기타 기록 중에는 안록산군 휘하 장수들을 '연의 ~~' 하는 식으로 꼬리표를 달아놓기도 한다. 아무래도 본거지가 과거 연나라가 있었던 범양이라서 그런 듯.


5 오대십국시대의 유연(劉燕)

중국의 역사
中國史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기원전 206 ~ 907년
907년 ~ 1644년1616년 ~ 현재
중국의 역사 907년 ~ 1644년
907 ~ 1279오대십국(五代十國)카라 키탄/대거란, 대요(大契丹, 大遼)
당항(黨項)
송(宋)
,대리국(大理國),
북송(北宋)백고대하/서하(西夏)
남송(南宋)안춘 구룬/대금(大金)
1270 ~ 1368다이 온 예케 몽골 울루스/대원(大元)
1368 ~ 1644대명(大明)
,남명(南明), ,대순(大順), ,대서(大西), ,명정(明鄭),

연(燕), 911~913 : 걸연(桀燕)이라고도 하며, 십국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본래 당의 노룡절도사에서 시작된 세력으로, 911년 유수광이 후량으로부터 자립하여 스스로를 연왕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913년 뒷날 후당을 세우게 된 이존욱의 공격으로 멸망당하였다.

5.1 건국과 멸망

일전에 이존욱은 유언으로 하북의 유인공 부자를 처리해줄 것을 원했다. 유인공의 아들 유수광은 아버지를 가두고 스스로 절도사가 되어 형을 잡아다 죽였으며, 온갖 해악과 악행을 멈추지를 않았다. 이런 인물들이 항상 그렇듯 욕심은 터무니없이 커서 느닷없이 크기만 했다.

911년 8워 13일, 유수광은 국호를 대연이라고 칭했다. 또한 연호를 응천이라고 바꾸었고, 수하들을 어사대부니, 좌상이니 하고 삼으니 연의 사람들은 놀라워하고 "이게 뭔일이여" 하는 식으로 당황하였다.

이존욱은 이 말을 듣고 그렇게 웃긴 일이 없다는듯 한참을 크게 웃더니 말했다.

"저들이 햇수로 점치는 것을 기다렸다가, 내 마땅히 그 점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볼 것이다."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정복하고 나라의 운명이 몇년이나 갈지를 점친 것을 빗댄 말로, 과연 얼마나 저 황제 노릇이 갈지 지켜보겠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이존욱의 수하 장승업도 한술 더떠 아예 사신을 파견해 치하하자는 의견을 내었는데, 적을 교만케 하자는 것이었다. 이존욱은 이를 받아들였다.

황제가 된 유수광은 2만의 군사를 이끌고 용성을 공격했다. 의무 절도사인 왕처직은 이존욱에 구원을 요청했고, 이존욱은 수하의 명장 주덕위에게 3만의 군사를 주어 왕처직을 도와주게 했다. 주덕위는 왕처직을 구원함은 물론, 연나라 땅인 탁주를 포위하여 항복시키는 공을 세웠다.

그러자 겁을 먹은 유수광은 영토내의 모든 장정들을 소집해 얼굴에 글자를 새겨 병사로 삼는가 하면, 후량에도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주전충은 스스로 50만의 대군이라 일컬으며 이존욱을 물리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때 후량은 국지전에서 계속해서 패배하고 있었고, 주전충은 극도로 민감해져 사람을 마구 죽여 부하들은 공포에 떨었다. 주전충은 6군을 통솔하며 이존욱을 물리치려고 했는데, 밤중에 땔나무를 하던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돌아와서 소리쳤다.

"진왕이 온다! 대규모로 도착하였다."

그 말을 들은 주전충은 모골이 송연해져 군영을 불태우고 밤중에 도망가다 길까지 잃게 되었고, 도중에 밭갈이하던 농부들이 괭이와 몽둥이를 들고 쫒아오자 도망가는 통에 군수물자와 병기를 전부 잃어버리기까지 하였다. 뒤늦게 알고보니 이존욱의 부대는 본대가 아닌 선봉대에 불과했는데 그걸 보고 겁에 질려 도망쳤던 것이고, 이 사실을 깨달은 주전충은 너무나 부끄러워 건강이 악화되고 말았다.

한편 그때 이존욱은 다른 방면으로는 주덕위와 이사원을 파견해 유수광을 지근지근 밞아주고 있었다. 믿고 있던 후량이 개털리자 유수광은 발악으로 거란을 끌어들이려 한연휘를 파견하지만, 야율아보기는 한연위를 오히려 자기 부하로 만들어버렸다.

유수광은 이제 모든 희망을 잃고 사신을 주덕위에게 파견하여 화친을 구걸했는데, 사신의 목소리가 매우 애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주덕위는 냉랭하게 말하였다.

"대연 황제(유수광)은 어찌 암컷같이 납작 엎드리는가? 나는 명령을 받아서 죄인을 토벌하려 왔을 뿐이고 동맹을 맺는 일은 내 소관이 아니다."

유수광은 정말 공포에 질려 몇번을 사신을 파견해 애원하였고 주덕위는 못이기는 척 이존욱에게 이 말을 전하였다. 이존욱은 그 말을 듣고 스스로 유주로 떠났고, 홀로 성 아래에 도착해 여유있게 유수광에게 말했다.

"나는 본래 공과 더불어 당조를 부활시키고자 하였으나, 공은 저 주전충이 한 짓을 따라하였소(황제를 참칭한 것). 장부의 성패란 본래 모름지기 향하는 대로 될뿐이니 공은 어찌하겠소이까?"

"나는 도마위에 올려진 생선일뿐이오. 오직 왕께서 판단해주시구려."

그러더니 유수광은 도망가버렸고, 이존욱은 유주에 입성하여 갇혀있었던 유인공을 잡았다.

유수광은 멀리 도망치다가 발에 동상이 걸리고 길을 잃어 자신의 부인에게 밥을 구걸하게 하다가 잡혀서 이존욱의 앞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이존욱은 연회를 즐기고 있던 중에 유수광을 보자 비웃었다.

"어찌 주인께서 손님을 피하여 먼 곳에 갔던 것이오?"


그 후 애원하는 유수광을 단칼해 처형해 버렸다.
  1. 그런데 잠시 중간에 백작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2. 연나라 장공 때 북쪽의 융적이 쳐들어와서 크게 박살나서 나라가 망할 뻔 했다. 다행히 이때 춘추시대 첫 번째 패자 제나라 환공의 도움으로(전차를 지원해줌) 융적을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았다. 이처럼 연나라는 가까운 제나라에게 끝없이 견제를 받았다. 후술하겠지만 제나라군에게 나라가 점령된 적도 있었다.
  3. 왕이었으나, 시호를 받지 못한 경우다.
  4. 태자 평의 이복동생으로 연왕 쾌의 서자이다. 사기 연소공세가에는 태자 평으로 나오는데 사기 조세가에 '공자 직이 연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죽서기년에 '자지가 공자 평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결정적으로 옛 연나라 유물에 연왕의 이름을 직으로 새겨놓은 유물이 발굴되었다.
  5. 여기서 유래된 사자성어가 매사마골, 선시어외
  6. 즉묵성, 거성 두 개이다. 즉묵성은 나중에 제나라의 전단이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곳이고 거성은 제민왕이 피난 중이던 곳이다.
  7. 다만 소왕의 어리석은 아들 혜왕이 제나라 전단의 계책에 걸려 거의 눈앞에서 멸망시킬 기회를 놓쳤다.
  8. 형가와 진시황을 암살하려뎐 진무양은 그의 손자다.
  9. 이복형으로는 자지에게 피살당한 태자 평이 있었다.
  10. 금문에서는 융인으로 나온다.
  11. 사기 연소공세가에서는 혜왕이 죽었다라고 자연사한 걸로 나오지만 조(趙)세가에서는 연나라 장수 성안군과 재상 공손조(방계 왕족으로 추정)가 그들의 왕을 시해했다고 나온다. 성안군과 공손조가 동일인이라는 설도 있다. 조세가가 맞다면 시기상 그 때 시해당한 왕이 혜왕인데 이들이 왜 혜왕을 죽였는지는 알 수 없다.
  12. 사기에서는 아예 혜왕과 무성왕의 관계가 전혀 언급되지 않고 혜왕이 사망하자 무성왕이 뒤를 이었다고만 나온다.
  13. 동진(東晉) 역사학가 서광(徐廣)의 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