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혁(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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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와이번스 현역 시절.

파일:Attachment/kh.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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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강 혁(姜 赫)
생년월일1974년 8월 25일
출신지서울특별시
학력서울백운초 - 신일중 - 신일고 - 한양대
포지션1루수
투타좌투좌타
프로입단1993년 OB 베어스 고졸연고지명
소속팀두산 베어스(1999~2000)
SK 와이번스(2001~2007)

1 소개

전직 프로야구 선수이자 현 신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한때 한국프로야구에서 영구제명까지 당한 '비운의 야구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었던 선수였다.

2 선수 시절

신일고 시절부터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하는 등 타격 기술과 타이밍을 타고났다는 천재중의 천재 유망주였다. 1993년 연고지 팀인 OB 베어스 스카우트진이 끈질기게 공을 들인 덕분에, 입단하게 되어있었고 계약, 공개 입단식까지 마친 상태였다.[1]

하지만 OB와 계약하기 전 한양대학교와 먼저 가등록을 마친 상황었고, 결국 OB베어스와 계약 포기의사를 밝힌 후 한양대에서 정식등록을 해버리는 바람에, 이중 계약이 되어 한국야구위원회로부터 영구제명 처분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한양대학교에서 고교 시절의 활약을 이어갔는데, 한양대 시절 야구 팬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유명한 일화가 있다. 강혁이 3학년 때 연세대와의 경기에서 5:2로 뒤지고 있는 2사 만루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섰다. 그러나 상대 투수는 그를 고의사구로 거른다. 당시의 포스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려주는 일화다. 더군다나 당시 투수는 제2의 선동열 소리를 듣던 임선동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타석에는 주자가 없어서 승부했는데 홈런을 때려 냈다. 이런 활약상으로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팀 클린업으로 참가하였다.[2]

1997년 한양대학교 졸업 후 영구제명 처분으로 프로 진출길이 막힌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상무에 입대해 병역 문제부터 해결하던가, 당시 돈으로 선수를 쓸어 모으던 실업 팀 현대 피닉스에 들어가던가 둘 중 하나였다. 아버지의 건강 문제 등으로 가정 형편이 좋지 못했던 강혁은 입대 지원서까지 넣었던 상무를 포기하고 현대 피닉스에 입단하여 2년 간 활동하였다. 피닉스에서도 변함없는 활약을 보여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출, 쟁쟁한 프로 선수들이 있음에도, 국대시절 그대로 김동주와 함께 클린업 트리오로 맹활약하면서 대표팀의 금메달 획득에 크게 기여한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KBO가 영구 제명을 철회하고 프로선수 자격을 복권시키면서 1999년 두산 베어스에 계약금 5억 7천만원의 조건으로 입단하게 된다.

그러나 오랫동안 알미늄배트에 길들여진 스윙으로 타구에 어느정도 힘만 실어도 밀어쳐서 담장을 넘기던 천재였기 때문에, 3년간 아마 생활을 지속한 것이 결정적인 패착으로 작용했는데, 90년대말부터 용병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선수들의 체격과 근력이 좋아지면서, 전체적인 투구 스피드와 구위가 급격하게 향상된 것이다.

이 때문에 알미늄 배트라면 아무리 빠른 공이라도 정확하게 맞춰 장타를 날리거나 라인드라이브 히팅을 하던 강혁이었지만, 나무 배트로 그정도 타구를 날리기 위해서는 체중이동과 테이크백 후 팔로스로우 동작을 전면개조하는 것은 물론 몸에 익은 타이밍을 모두 바꿔야 하는 것이었다.

이미 대학 4년, 아마 3년을 거치면서 20대 중반에 접어든 강혁에게, 나무배트에 맞춰 스윙 매커니즘과 타격 타이밍을 완전히 새로 익히는 것은 역효과가 되었다.

때문에 나무배트를 쓰는 프로에서는 아마 시절의 화려한 명성을 제대로 보여 주지 못했다. 두산에서 뚜렷한 활약을 보이지 못한 채 2000년 12월에 SK 와이번스의 전력보강 선수로 이적했고, 2004년에는 아시안 게임 이전에 병역 면탈을 시도했던 사실이 드러나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받은 병역 특례가 박탈되어 공익근무요원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 소집 해제 후 2007년에 복귀했으나, 10경기 무안타에 그치고 시즌 후 방출당하며 은퇴했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좀 더 신중하게 처신해서 신일고 졸업 후 그대로 OB에 입단했다면 어땠을 까 하는 아쉬움을 주는 선수.

한양대와 동기들을 함께 진학하기로 가등록한 상태에서,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일찍 가장 노릇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파고들어, OB 스카우트진이 끈질기게 설득해 프로입단 계약을 성사시킨 것이었다.

90년대 초 같은 서울구단 LG가 매번 팀의 내실을 다실 대형유망주 스카우트에서 성공하며 전력을 강화해간 것과 달리, 번번이 유망주 스카우트에 실패를 겪고 있던 터라, 이번에는 연고학교 출신의 초대형 타자 강혁만은 반드시 잡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때문에 강혁의 계약 소식은 팬들과 프런트는 말할것도 없고, 다른 구단에서도 이번만은 제대로 OB가 대박 터뜨렸다는 찬탄이 터지던 상황이었는데...

그러나 강혁은 동기들과 그들의 부모에 의한 호소와 회유에 마음을 돌려 OB에 입단의사를 취소하고, 한양대는 그대로 등록을 진행해버리게 되었다.

이미 계약서를 작성한 OB 입장에선 최하위권을 맴도는 팀 상황에 강혁같은 초대형 타자유망주를 놓칠 수 없는게 당연했으므로, 끝까지 강혁의 마음을 돌릴 수 없어지자, 결국 괘씸죄가 더해져 이중계약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강경하게 징계하도록 탄원한 것이다.

당시 특급선수가 대학에 입학할 경우, 함께 동기들을 다수 데려갈 수 있었는데[3],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동기들의 부모가 식사, 용품, 야구부 회비등 강혁의 뒷치닥거리를 함께 해줬고, 대학에 들어갈때도 지원금 명목으로 돈을 거둬 특급선수에게 계약금조로 지급하던 어두운 관례가 있어, 동기들 부모의 거센 항의와 호소에 꿈을 접은 것.

강혁도 자신만 바라보고 함께 운동하던 동기들이, 대학 입학이 불발되고 공중에 뜨는 것에 심적으로 큰 부담을 느꼈고, 동기들의 부모들이 형편이 어려운 강혁에게 아들처럼 지원을 잘해준 은혜가 있어, 결국 프로입단을 포기하고 친구들과 의리를 택한 것이었다.

결국 현재의 김현수가 보여주던 모습을 이미 18~19세에 보일 정도로, 오는 공을 변화구나 직구나 같은 스윙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타격 천재는, 나무배트와 투수들의 급격한 구위 상승이 벌어지던 시대가 다가옴에도, 7년 넘게 알미늄 배트에 맞춘 스윙에 굳어져 버려 안타까운 시간을 허비한 셈이 되었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의미 없지만, 함께 국가대표에서 3, 4번 클린업을 치던 한살 아래 또다른 천재 김동주가, 고대 졸업 후 바로 입단하여 첫해 나무배트 적응으로 시즌 초반 부진 후 적응 시간을 가지고 나선, 프로야구 최고의 우타자로 활약하게 된 걸 보면 더욱 안타깝다.

알미늄 배트를 사용한 98년 아시안게임에서 3,4번 강혁과 김동주의 클린업은 그야말로 일본과 대만의 투수진을 초토화 시켰는데, 결대로 부드럽게 라인드라이성 장타를 코스를 바꿔가며 날려대는 강혁, 바톤을 이어 밀어쳐서 장외홈런을 때리는 김동주를 상대한 일본, 대만 투수들이
고개를 흔들면서 기가 질린 표정을 지었던 장면은, 그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타격 천재들이었는지 보여주는 사례였다.

507 대첩의 주역이기도 하다. 9회초 주자 2,3루에서 볼넷으로 출루해 득점을 올렸으며 9회말 주자 1사 2루에서 김재현의 안타성 라인드라이브 타구를 다이빙 캐치하여 병살 처리, 연장전까지 끌고 갔고 10초 2사 1, 2루에서 결승 타점을 기록했다.

3 지도자 시절

은퇴 이후 자신이 공익근무요원으로 일했던 인천 남구청과의 인연으로 리틀 야구단 지도자를 맡게 되었다.

2013년 10월 SK 와이번스의 2군 타격코치로 임명되었다.

2015년 6월에 팀 타격 부진으로 김무관 타격코치가 2군으로 내려가고 타격 보조코치 정경배가 메인 타격코치가 되자, 1군 타격보조 코치로 올라왔고 시즌 종료 후 모교 신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했다.
  1. 윤동균 당시 OB 감독이 자신의 현역 시절 등번호 10번을 내어줄 정도로 기대를 받고 있었다.
  2. 당시 올림픽 야구는 프로 선수의 출전이 허용되지 않았다.
  3. 특급선수는 당연하고 사실 그 학교에서만 잘 나가는 선수이면서 지역에서 좀 알려진 정도로 프로 지명 최하위권급에 들기만 해도 위와 같이 대학팀에서 동기들을 받아주는 경우가 흔했다. 물론 이런 경우는 뒤로 소문이 나거나 대학 갈걸로 프로구단과 얘기가 다 되어서 프로에서 지명을 안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