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민 타격상

1 개요

대한민국 야구의 원조 레전드 타자라 할 수 있는 이영민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대한야구협회가 1958년에 제정한 상이다.

2 상세

매년 고교야구 주말리그, 대통령배 등 전국고교야구대회, 전국 체전 등에서 15경기 이상 출전하고 60타석 이상을 기록한 타자 중에서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한 선수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주말리그 도입 전에는 9개의 전국고교야구대회[1] 중 5개 대회 이상, 15경기 이상, 60타석 이상 출전한 타자 중에서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한 이에게 수여되었다.

다만, 고교 야구의 특성상 에이스 투수가 4번 타자까지 함께 맡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하고도 정작 프로에는 투수로 진출하는 사례[2] 역시 존재한다.

3 역대 수상자 목록

프로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선수는 굵은 색으로 표시. 이름 뒤는 프로에서 활동했던 연도와 팀.

연도이름당시 소속 학교프로 팀 활동
1958년김동주[3]경남고
1959년백인천경동고도에이-다이헤이요-롯데 오리온즈-긴테쓰-MBC-삼미 (1962~1984)
1960년최관수[4]동산고
1961년조정일성동고
1962년정인성광주 사레지오고
1963년이철화[5]부산고
1964년김영생대구상고
1965년이광환중앙고
1966년박용해대구상고
1967년오영복대전고
1968년김영신[6]대구상고
1969년정장헌선린상고
1970년신중국부산고
1971년정현발경북고삼성-태평양 (1982~1988)
1972년정순명충암고MBC(1982~1985)
1973년김일권[7]군산상고해태-태평양-LG (1982~1991)
1974년박명선인천고
1975년이효헌마산상고
1976년임정면마산상고해태-빙그레 (1982~1988)
1977년이만수대구상고삼성 (1982~1997)
1978년김남수신일고
1979년김이수부산상고삼성 (1984~1986)
1980년김건우선린상고MBC-LG (1986~1993, 1997)
1981년구윤[8]경북고삼성-태평양 (1986~1994)
1982년김성범[9]포철공고
1983년한경수군산상고
1984년주은현광주일고
1985년김경기인천고태평양-현대-SK (1990~2001)
1986년김현철경북고
1987년김훈경남상고
1988년곽상선군산상고
1989년정진식경남고한화-롯데 (1994~2001)
1990년강준기[10]공주고LG (1995~1996)
1991년강혁신일고두산-SK (1999~2007)
1992년노상진배명고한화 (1997~1998)
1993년조현신일고LG-해태-한화 (1995~2002)
1994년김건덕경남상고
1995년박현철광주일고
1996년박진형[11]경동고LG (2001)
1997년신민기[12]경남고
1998년신민기경남고한화 (2003~2009)
1999년백정훈[13]광주일고KIA (2005~2006)
2000년수상 대상자 없음
2001년황성용[14]부산고롯데 (2006~2015)
2002년서정광주일고한화 (2007~2010)
2003년박정태[15]부산고KIA-삼성 (2004~)
2004년최정유신고SK (2005~)
2005년김현수신일고두산 (2006~)-볼티모어 (2016~)
2006년전동수[16]덕수정보고넥센-KT (2008~)
2007년김경한[17]장충고
2008년이창진[18]인천고롯데-KT(2014~)
2009년하주석[19]신일고한화 (2012~)
2010년유재혁제물포고KIA (2011~2015)
2011년박민우휘문고NC (2012~)
2012년김민준북일고넥센 (2013~)
2013년조영우제주고한화-SK(2014~)
2014년송성문장충고넥센 (2015~)
2015년최원준서울고KIA (2016~)

4 이영민 타격상의 저주

고교에서 가장 뛰어난 타격을 보인 이에게 수여하는 상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프로야구 출범 이후에는 뚜렷한 활약을 보인 수상자를 찾아보기 힘들며, 도리어 그 중에는 비운의 스타들이 더 많다.

1991년 수상자 강혁은 고교 시절 초고교급 천재 타자로 불렸으나 이중등록과 음주운전, 병역비리 등으로 물의를 일으킨 끝에 쓸쓸히 은퇴해야 했고, 1993년 수상자이자 '제2의 김재현'이라 불리던 조현은 나무배트에 적응하지 못한 데다 스윙의 약점도 극복하지 못하면서 여러 팀을 전전하다가 결국 방출되었으며, 국제 대회에서 훌륭한 활약을 보이며 국내외의 큰 기대를 모으던 김건덕은 고교시절 혹사로 인해 어깨가 망가져서 은퇴해야 했으며,[20] 고교 시절 이영민 타격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던 신민기는 프로에 와서 통산 타율 1할조차 치지 못한 채 병역비리에 연루되었고 복귀 후 거의 활약을 보이지 못한 채 결국 방출되었다.

8,90년대에 이런 일이 반복되자, 항간에는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한 이들은 결국 망가진다는 흉흉한 소문이 퍼졌는데, 이것이 일명 이영민 타격상의 저주이다.[21]

2000년대 들어 2004년 수상자인 최정이 프로에서 매우 준수한 활약을 펼치고, 2005년 수상자인 김현수[22] 프로야구 정상급 타자로 자리 잡으면서 2000년대에 들어와 드디어 '이영민 타격상의 저주'가 풀렸다는 이야기도 나왔으나,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시궁창. 2006년 수상자인 전동수는 프로에 올라와서 단 한 개의 안타도 치지 못한 채 경찰 야구단에 입단했다가 복귀 후 1년만에 방출됐었으며, 2007년 수상자인 김경한과 2008년 수상자인 이창진은 프로 지명조차 받지 못하고 대학에 진학해야 했다.[23] 2013년 수상자 조영우의 경우는, 고등학교 때 4번 타자 겸 에이스를 했는데, 한화에 입단한 뒤 타자로 1군에 올라가려면 2-3년이 걸리고 투수로 1군에 올라가기가 더 쉽다는 말을 듣고 아예 투수로 전향한 뒤. 송진우 2군 투수코치에게 체인지업을 전수받아 14시즌 1군에 콜업된 뒤 몇 경기 선발출장 뒤 2군으로 내려갔다...

2000년대 이후 최정-김현수 이외 살아남은 사람은 박근홍(개명 전 박정태)이 쪽은 투수라 타격상의 의미가..과 박민우, 그리고 2016년 현재 전민수로 개명한 전동수 정도이다. 2003년도 수상자인 박근홍은 투수로 데뷔해 1군에 좌완 원포인트나 추격조 등으로 자주 비치나 확실한 1군멤버는 아니다. 다행히 2015년에 꽤 쏠쏠한 활약을 하며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2011년 수상자인 박민우는 2014시즌 주전 2루 자리를 꿰차더니 신인왕을 탔다. 앞으로 어떨지는 두고 볼 일. 넥센시절 1군에서 안타 하나도 못 친채로 방출되었었던 전동수도 kt에 재입단하여 2016년 현재 1군에서 제법 쏠쏠한 타격실력을 보여주며 붙박이 준주전 외야수로 활약하고 있으니 기대는 해볼만하다.

그럼에도 결국, 최정김현수가 특별했던 것일 뿐, 이영민 타격상의 저주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셈이다.

4.1 프로에서 성공한 사례

  • 백인천 : 2014년 현재 KBO의 유일한, 그리고 마지막 4할 타자. 일본 프로 야구에서도 뛰어 수위타자를 하는 등 활약했다. 롯데 감독 시절은 넘어가자
  • 김일권 : 원조 대도. 3할 타율도 기록해 보았다.
  • 이만수 : KBO를 대표하던 삼성의 대타자. 최초로 타자 트리플 크라운을 기록하고, 홈런-타점 1위를 3년 연속으로 해봤고, 3할도 여러번 쳤다.
  • 김건우 : 투수로서 신인상을 탔지만, 2년차 때 교통사고 이후 후유증으로 일찍 내리막길을 탔다. 이 쪽은 좀 타격상의 저주 사례에 더 꼽히는..
  • 김경기 : 미스터 인천. 태평양-현대에서 중심타선 역할을 잘 해냈다.
  • 최정 : 국대 3루수로 성장해 FA 대박까지 쳤다.
  • 김현수 : 타격 기계, 신고선수의 신화. 2012년 .291의 타율이 풀타임 최악의 타율이다! 이외는 전부 3할 돌파. 16시즌은 메이저리그에서 볼 수도 있다!
  • 박민우 : 2014시즌 신인왕. 같은 시즌 50도루로 2위를 기록했다.

5 이영민 타격상의 맹점

운만으로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니만큼 역대 수상자들이 뛰어난 실력과 자질을 갖춘 선수들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겠으나 그것이 곧 고교 최고의 타자를 뜻은 아니란 지적이 줄곧 이어져 왔으며, 이를 '이영민 타격상의 저주'가 생긴 원인으로 보는 이들도 많다.

이유인즉슨, 야구 대회의 수가 적고 경기 자체도 많은 편이 아니다 보니 신뢰할 만한 통계치를 만들기 힘들며, 더욱이 투수마다 실력 편차가 큰 고교 야구의 특성상 실력이 떨어지는 투수한테 한껏 몰아쳐서 타율을 높이는 유형의 타자도 무척 많다는 것이다.

이는 프로야구 스카우터들이 고교 타율을 무시하는 경향과 같은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실제로도 2000년대부터는 고교 시절 아무리 높은 타율을 유지했다고 해도 주력(走力)이나 파워 같은 부분이 부족하면 아예 지명조차 받지 못하는 사례가 종종 나타나고 있다. 다만, 이럴 경우에는 육성선수로 입단할 것을 권유 받는 일이 많다고 한다. 김현수가 대표적

  1. 청룡기, 황금사자기, 화랑대기, 대통령배, 봉황대기, 대붕기, 무등기, 미추홀기, 전국 체전.
  2. 박근홍으로 개명한 박정태가 대표 사례.
  3. 두산 베어스김동주와는 동명이인.
  4. 후에 군산상고 초대 감독을 맡으며 군산상고를 고교야구 최고의 팀중 하나로 만든다.
  5. 롯데 자이언츠 단장 역임.
  6.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영구결번 선수이자, 전 OB 베어스 포수였던 고 김영신과 동명이인.
  7. 사실 김일권은 타격보다 도루로 더 유명했다.
  8. 아마 때는 유명한 선수였지만 프로에서는 무릎인대 부상으로 기량을 잃어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은퇴.
  9. 당시 2학년.
  10. 동국대 졸업 후 LG에 입단했지만 김동수, 김정민 등 기존 포수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은퇴 후 공주중 감독으로 재직 중 교통사고로 사망.
  11. 그 롯데 박진형과는 다르다.
  12. 당시 2학년.
  13. 당시 2학년. 프로에서는 별 활약 없이 은퇴. 발은 빨랐다고 한다.
  14. 2013시즌 종료 후 황동채로 개명했다.
  15. 롯데 자이언츠박정태와는 별개의 동명이인으로 2012년 박근홍으로 개명했다.
  16. 당시 2학년. 2012년 말 '전민수'로 개명
  17. 당시 2학년.
  18. 당시 2학년.
  19. 당시 1학년.
  20. 실제 보직은 투수였으나 타자로서도 크게 활약했다. 사실 대학 진학 때까지만 해도 그나마 재활이 가능한 수준이었으나(한양대 진학 당시 1년 동안은 마운드에 서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재활 중 국가대표로 뽑히면서 다시 공을 던질 수밖에 없었으며 이때 어깨가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21. 1985년(김경기)부터 2004년(최정) 사이 수상자 중 성공한 선수가 없다. 그나마 투수 박근홍이 나은 경우다.
  22. 다만, 김현수도 결국 프로 지명은 받지 못했다. 자세한 건 김현수 항목을 참조하자.
  23. 김경한은 원광대로 진학했으나 1년만에 야구를 그만두었으며, 건국대로 진학한 이창진은 2014년도 신인드래프트에서 롯데에 2차 6라운드로 지명되어 뒤늦게나마 프로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