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폭풍 작전

Operation Winter Storm(Unnternehmen Wintergewitter)

독소전쟁중 1942년 12월 12일부터 23일까지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 지휘 하에 벌어진 작전. 스탈린그라드에 펼쳐진 독일 6군에 대한 포위망의 돌파를 목표로 벌어진 혈전이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실패로 끝나고 말면서 동부전선의 향방을 갈라놓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마지막을 알린 작전이라고 할 수 있다.

1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제6군

42년도 하계공세, 즉 청색작전을 시작한 독일군의 주력인 남부집단군은 전역 개시와 함께 A집단군과 B집단군으로 양분되었다. A집단군의 임무는 캅카스로의 진격을 통한 소련의 유전 지대 확보 및 산업 장악에 핵심이 있었고, B집단군의 임무는 소련군의 진입을 차단할 수 있는 병목 지점이자 볼가 강 일대의 수로를 통제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여 캅카스로 진격하는 A집단군의 배후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B집단군의 중심이 된 것이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지휘하는 독일 6군과 헤르만 호트가 지휘하는 4기갑군이었다.

스탈린그라드에 당도한 독일군은 소련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이며 축차투입과 축차소모를 반복했는데, 전황은 11월 말부터 급변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독일군에 비해 약체인 루마니아군에 의해 보호되고 있어 상대적으로 취약하기 짝이 없는 독일 6군의 양익을 대대적으로 포위하기 위한 천왕성 작전을 펼쳤고, 이 공세에 루마니아군이 무너지면서 스탈린그라드에서 혈전을 벌이던 독일 6군과 4기갑군의 일부, 그리고 약간의 루마니아군은 소련군의 두터운 포위망 내에 갇히고 말았다.[1]

6군은 스탈린그라드 일대로 진군하는 독일군 B집단군의 주력을 이루고 있는 정예부대였고, 6군이 붕괴하는 것은 동부전선에서의 균형 자체를 뒤흔들 수도 있는 급박한 사태였다. 이 시점에서 히틀러가 뽑아든 카드는 최고의 전술가이자 명장으로 이름 높은, 프랑스 침공의 기획자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었다.

2 돈 집단군의 편성

히틀러는 초기에 항공보급을 통한 구원을 목표에 두었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군단급 병력이 포위되었던 데미얀스크와 달리 한 개 야전군 규모 병력을 항공으로 보급한다는 것은 거의 망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결국 히틀러는 전선 남서부의 돌파를 통해 포위망을 돌파, 6군을 구출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고 알려져 있다. 허나 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히틀러의 의중과는 차이가 있는 결과물이었다. 히틀러가 원한 것은 궁극적으로 포위망을 돌파하여 스탈린그라드 일대에 갇힌 B집단군의 주력인 6군에게 증원 병력을 파견해 1943년도에 펼쳐질 하계 공세에 있어 스탈린그라드를 공세의 지탱점으로 삼는 것이었다.

하여간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이 임무를 위해 돈 집단군(Army group Don)을 편성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세바스토폴 공방전을 치른 이후 자신이 지휘하던 11군과 함께 레닌그라드 포위전에 종군하던 만슈타인은 급히 남부전선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쓸 수 있는 가용자원은 척박했다. 애초에 거대한 전선을 유지할 능력이 부족한 독일군이었던지라 남은 전력 대부분을 전선 유지에 투입하기에도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나 만슈타인은 일단 있는 자원을 전부 긁어모아 집단군을 편성, 본격적으로 6군 구출 작전에 나섰다.

본래 겨울폭풍 작전을 위해 차출될 예정에 있던 것은 57기갑군단과 홀리트 분견군 산하에 있는 2개 기갑사단과 4개 보병사단, 그리고 몇 개의 공군 야전사단[2]이었다. 본래대로라면 총 4개 기갑사단과 4개 보병사단에다 48기갑군단까지 어떻게든 불러들여 6군 구출에 나설 계획이었겠지만, 치르 강 하류에서 전선의 간극을 방어하던 홀리트 분견군은 소련군의 공세를 맞아 전선을 유지하기도 벅찬 상황이었기에 48기갑군단까지 홀리트 분견군 쪽에 넘겨야 했던 터라 실질적으로 만슈타인이 사용할 수 있는 병력은 57기갑군단 휘하의 2개 기갑사단 정도였다.

여기에 갓 오룔에서 파견되어 온 17기갑사단 정도를 투입할 수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17기갑사단은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사단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1942년 10월 기준으로 17기갑사단이 가용한 전차는 단 30여대 뿐이었고 보유한 트럭 중 1/3은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만슈타인에게는 그나마도 아쉬운 병력이었기에 17기갑사단까지도 긁어모아 포위망 돌파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거기에 독일 제6군의 우익을 맡고 있다 격파당했던 루마니아 4군의 일부 부대, 그리고 집단군의 선봉으로 티거를 보유한 503중전차대대가 포함되었다.

집단군이라지만 이름만인 집단군, 실질적으로는 고작 군단 내지는 준 야전군 규모에 불과한 돈 집단군. 그리고 만슈타인은 그 집단군을 이끌고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를 시작했다. 물론 만슈타인은 돈 집단군의 공세만으로 6군을 구출해 내는 것이 가능하리라곤 보지 않았을 뿐더러, 히틀러가 내린 임무, 즉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해내 최종적인 하계 공세의 지탱점을 마련한다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만슈타인은 겨울폭풍이라는 이름의 작전만이 아닌, 천둥이라는 이름의 작전을 별도로 수립했다. 천둥이라는 암호에 맞춘, 6군과 돈 집단군의 양면 공세를 통한 포위망의 돌파를 목표로 삼은 작전이었다.

3 구원 작전의 시작

12월 12일, 마침내 돈 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57기갑군단의 2개 기갑사단은 소련 51군을 성공적으로 기습했고, 첫 날 무려 50킬로미터 가까운 거리를 진격한 부대가 나올 정도였다. 스타브카는 독일군이 이 정도로 빠르게 기습해 오리라고는 미쳐 예상하지 못했고, 그 결과 돈 집단군이 준 충격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칼을 갈아 온 소련군의 포위망은 탄탄했지만 독일군의 기세도 강력했던 것이다. 결국 12월 13일 시점에 57기갑군단의 주력은 악사이 강을 건너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기습을 당한 소련군의 전선은 상당 부분에서 균열이 생겼고, 호트는 이 균열을 향해 기갑부대를 계속 밀어넣으며 전선의 돌파를 시도했다. 6기갑사단과 503중전차대대를 선봉으로 내세운 호트는 4기갑군을 몰아 포위망을 향한 공세를 계속 감행했다. 노출된 우측면은 돈 집단군 산하에 배속된 루마니아 4군의 잔여 부대가 보호했고, 이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소련군에 절대적 열세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대대적인 측면에 대한 공세를 성공적으로 차단하며 시간을 벌어주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에 갇혀 있던 독일 6군은 희망에 불타 외치기 시작했다.

"Der Manstein kommt!(만슈타인이 온다!)"

4 소련군의 대응 : 소(小) 토성 작전

하지만 소련군의 반응은 신속했다. 공세를 확인한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는 포위망의 돌파가 우려되는 상황이라는 것을 즉각 깨달았고, 스탈린에게 병력의 신속한 재배치를 제안했다.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와 스탈린은 초기에는 병력 재배치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5충격군을 지휘하던 예레멘코 등 현장에서도 병력의 재배치를 요구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결국 병력의 재배치에 동의하고 신속하게 증원군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12월 15일, 겨울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한 지 3일만에 병력의 증편이 결정났다. 본래 포위망의 증강에 투입될 예정이던, 로디온 말리놉스키가 지휘하는 2근위군의 투입이 결정되었다. 여기에 기존의 공세 계획이던 토성 작전을 소 토성 작전으로 개편하여 돈 집단군의 구원 시도 자체를 봉쇄하는 동시에 대대적인 반격을 펼친다는 전략이 확정되었다.

12월 16일, 소련 1근위군과 3근위군, 그리고 6군은 돈 집단군과 홀리트 분견군의 좌측면을 보호하고 있던 이탈리아 8군에 대해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했고 18일에는 일부 지점에서나마 이탈리아군이 형성한 전선에 구멍을 내는 데 성공했다. 이탈리아 8군은 약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정예병력이라고 할 수 있는 산악군단을 주축으로 한 병력이었고, 특히 산악군단의 경우 기존 작전 지역 등을 산간지역 일대 등으로 상정한 덕분에 소련의 동절기 기후에도 투혼을 잊지 않고 용맹을 발휘했지만, 심각한 동계 장비 부족 및 늘어질대로 늘어진 보급선 덕분에 턱없이 모자랐던 보급품, 예비대로 투입될 수 있는 병력의 부재 등의 악재가 겹치며 결국 전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악사이 강을 건넌 독일군에 대해서는 4기계화군단과 13전차군단이 반격을 감행해 2근위군이 도착하여 독일군의 공세탄력을 흡수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압도적 수적 열세 속에서 악전고투를 펼친 데다 때마침 악화된 기후 사정까지 겹치면서 4기갑군의 전반적 공세탄력은 심각하게 둔화되었다. 12월 19일에는 독일군의 야전 공항이 있는 타친스카야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가 감행되면서 루프트바페의 활동마저 위축되는 상황에 이르른 판이라[3] 만슈타인은 지속적인 공세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고, 6군에게 신속하게 돌파작전에 조응할 것을 요구했다. 소련군의 대대적인 반격에도 불구하고 6기갑사단이 스탈린그라드로부터 고작 5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도착하면서, 이러한 양면 공세를 통한 돌파 가능성은 결코 희박하지만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 만슈타인의 인식이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이런 상황 인식 자체를 거부하고, 12월 18일 6군의 돌파 작전을 불허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파울루스는 결국 만슈타인의 돌파 요구를 거부하고 스탈린그라드에 잔류했다. 이 잔류에서 하나의 떡밥이 나오는데, 연료와 탄약 및 병력 부족으로 6군의 돌파 역량이 부족했다는 점을 들어[4] 만슈타인이 어차피 구출이 어려워진 6군을 버리고 6군 사령관인 파울루스에게 작전 실패의 책임을 떠넘기려 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해석은 자유지만, 예비대가 사실상 전무한 만슈타인의 입장에서도 스탈린그라드까지 50킬로미터 남겨둔 지점까지 진격한 이상의 공세 역량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파울루스의 의지 부족이 작전 실패의 원인이라는 주장에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긴 하겠다고 말할 순 있다.
다만 1달가량 고립되어 제대로된 보급을 받지 못해 차량은 연료가 없어 움직이지 못하고 말은 전부 도살한데다가 부대전체가 기아상태인데 최고사령관은 절대사수를 명령하고 직속상관은 도보로 적 부대를 돌파해서 눈보라와 50km의 깊은 눈밭을 이동하라고 조언한다면 누구나 고민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생각해야 한다. 6군의 상황을 생각하면 파울루스가 돌파요구를 받아들여서 돌파 시도했어도 6군은 일부만 살아서 탈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당시 스탈린그라드의 기아상태를 짐직할 수 있는 예시는 아래와 같다.

차이츨러 장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굶고있는 병사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식사량을 그들수준으로 줄였다. 알베르트 슈페어에 따르면, 그는 몸무게가 2주도 안 되어 22파운드가 줄었다.[5]

2주만에 체중이 10kg이 줄어들 식사량으로 1달이상 생활한 사람에게 50km이동이 아니라 50km전선 돌파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으니 이렇게 보면 설사 만슈타인이 돌파를 완료해서 6군에 합류했더라도 과연 6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걸어나올 능력이 있었는지 자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5 폭풍, 사그라들다 : 만슈타인의 퇴각

12월 19일 최종적으로 6군이 돈 집단군과의 연결 작전에 임하지 않으면서(혹은 못하면서) 구출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고, 독일군 기갑부대의 측면을 놀라운 투혼으로 방어해 낸 루마니아 4군도 거의 붕괴 상태에 이르면서 만슈타인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12월 23일 만슈타인은 돈 집단군에게 최종적인 후퇴 및 치르 강 남단에의 집결을 지시했고, 최종적으로 12월 24일을 기준으로 돈 집단군 산하 병력들은 겨울폭풍 작전 기간 동안 돌파한 100킬로미터 가까운 거리를 그대로 돌아가 출발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만슈타인의 구원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스타브카는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에 갇힌 독일군에 다시 전념할 수 있게 되었고, 42년도 동계 공세안을 가다듬을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악사이 강을 건너 퇴각하는 독일 4기갑군을 소련 51군이 추격했고, 3일 동안 펼쳐진 공세는 독일 47기갑군단을 엄호하던 루마니아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렸고, 독일군은 서남쪽으로 거듭 퇴각해야 했다. 48기갑군단의 경우 그럭저럭 치르 강 일대에서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이탈리아 8군의 방어선이 부분적으로 무너지면서 로스토프 일대의 돌출부를 방어하기 위해 급히 물러서야 했다. 결국 소련군은 독일 4기갑군을 악사이 강 너머까지 밀어냈고, 치르 강 일대의 독일군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6 의의

최종적으로 소련군은 결국 독일군의 야전급 단위부대이자 남부전선의 중핵을 차지하고 있던 6군을 소멸시키며 남부전선에서의 균형추를 소련군 쪽으로 크게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겨울폭풍 작전에 나선 돈 집단군의 분전을 통해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벌어질 전력의 공백은 잠시나마 늦춰질 수 있었고, 이 늦춰진 공백의 틈을 타 코카서스 일대로 진격하던 A집단군이 철수하는 데 성공하면서 남부전선 전체가 무너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1. 여기에 크로아티아군 1개 연대 규모가 함께 갇혔다.
  2. 헤르만 괴링이 공군 인력의 차출을 피하기 위해 공군 산하 병력들로 편성한 지상 사단.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과는 달리 형편없는 장비와 낮은 훈련 수준으로 인해 실질적인 전력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3. 단지 기세 문제만도 아닌게, 이 공세 와중에 독일군은 가용했던 수송기 전력의 10% 가까이를 상실해야 했다.
  4. 파울루스는 연료가 부족해 30킬로미터 이상 진격하기 어렵다며 돈 집단군이 거리를 최대한 좁힌 시점에 돌파하겠다는 의사를 보이기도 했다.
  5.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 2012년, 470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