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 Siege of Leningrad
독일어 : Leningrader Blockade
러시아어 : Блокада Ленинграда
레닌그라드 공방전 |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소전쟁의 일부 | ||
아사한 시체를 묻는 레닌그라드 시민들 포격을 당하는 레닌그라드 시가지 공습 이후의 레닌그라드 시가지 무너진 건물 잔해를 치우는 시민들 | ||
날짜 | ||
1941년 9월 8일 - 1944년(!) 1월 27일 | ||
장소 | ||
소련, 레닌그라드 | ||
교전국 | 나치 독일 핀란드 이탈리아 왕국 | 소비에트 연방 |
지휘관 | ● 독일군 빌헬름 리터 폰 레프(북부집단군 사령관) 에른스트 부슈(제16군 사령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제56기갑군단장) 에리히 회프너(제4전차집단군 사령관)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제41기갑군단장) 게오르크 폰 퀴힐러(제18군 사령관) ● 핀란드군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하임 | 게오르기 주코프(총사령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레오니트 고보로프(레닌그라드 수비사령관) 마르키안 포포프(북부 전선군 사령관) 이반 페듀닌스키(제2충격군 사령관) 미하일 코진[1] |
결과 | ||
소련의 승리 | ||
영향 | ||
독일 북부집단군의 후퇴 | ||
병력 | 72만 5천 명 | 93만 명 |
피해규모 | 사상자 14만 명 | ● 소련군 - 사망, 포로, 실종 101만 7천 명 - 부상 241만 명 ● 민간인 - 사상자 64만 2천 명 - 피난 40만 명 |
"굶주림으로 숨통을 끊고 지구상에서 흔적을 없애 버려라!"
아돌프 히틀러
"트로이도, 로마도 함락되었다. 하지만 레닌그라드는 함락되지 않았다!"
레닌그라드 포위가 끝나고 소련 시민들과 소련군 사이에서 퍼진 말
1 개요
지구의 기근 중 가장 참혹했던 역사의 한 장면,그것도 인간이 불러온 기근의 참상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1년 9월 8일부터 1944년 1월 27일까지 871일 동안 독소전쟁에서 벌어진 전투로, 레닌그라드라는 한 대도시를 작정하고 굶겨죽이려 한, 독소전의 수많은 인류사 올타임급 혈전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한 처절하기 짝이 없는 소모전이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도 수십 만이 죽어나간 지옥이었는데 그 지옥이 2년 반을 이어졌으니...
이 공방전으로 양쪽 모두 교훈이 있다면, 방어자는 포위당했음에도 끝까지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동맹국과 같이 포위한 공격자는 서로 다른 곳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협력해서 이길 수 있을 때 확실하게 조져이겨 버려야 나중에 탈이 없다는 교훈을 후세의 군인들에게 남겨준 전투이기도 하다.
2 전투 경과
2.1 1941년
1941년 6월 22일부터 시작된 독일 국방군의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허를 찔린 소련군은 막대한 피해를 받았다. 당시 독일군은 세 개 집단군으로 나눠서 소련을 공격했는데, 이 때 북부집단군이 공격한 도시가 바로 레닌그라드였다. 레닌그라드는 소련을 세운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름을 딴 도시였고, 레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뀌기 전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시기부터 러시아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중심지이자 모스크바 이전의 러시아 수도이기도 했다. 게다가 아직 새워진지 20년이 겨우 넘은 소련 정권에게 있어서 1차대전 당시 러시아 혁명이 터지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으로 러시아 공산 정권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레닌 사후 그의 이름이 붙은 이 도시는 수도 모스크바 못지 않은 상징적, 이데올로기적 중요성도 넘치는 곳. 이곳의 함락은 독일이나 소련에게나 매우 큰 의미가 될 터였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는 소련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고,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다음 날 동원령을 선포해 방위군을 조직하고 도시 요새화 작업을 시작했다. 동시에 어린이와 여자를 미리 피난시켰는데, 오히려 이렇게 피난한 사람들보다 진격해 오던 독일군을 피해 레닌그라드로 몰려오던 이들이 훨씬 많았다. 어쨌든 레닌그라드 사령부에서는 기존 소련군과 피난자와 시민들 사이에서 뽑은 의용군을 포함한 병력을 방어선에 배치해 전투에 대비했다.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가 지휘한 북부집단군의 레닌그라드 공격은 7월 중순에 시작되었는데, 그 동안 소련군을 탈탈 털어오던 독일군은 레닌그라드에 상당히 견고하게 구축된 방어선에 좀처럼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빡친 아돌프 히틀러는 7월 27일에 북부집단군 사령부를 시찰하면서 레브에게 12월까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소련군의 방어선도 마냥 굳건히 버틸 수는 없었고, 7월 말에 독일과 동맹을 맺고 겨울전쟁 이래 이를 갈아오던 핀란드군이 합세해 레닌그라드를 공격해 왔다. 8월 말에서 9월 초까지 독일군 포병들은 레닌그라드 시내에 무차별 포격을 가했고, 이 과정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8월 20일에 레닌그라드는 독일군과 핀란드군에 완전 포위되어 지상으로 통하는 모든 탈출 경로가 차단되었다.
하지만 핀란드군은 그 시점에서 더 이상 레닌그라드로 진격하기 보다는 겨울전쟁 때 잃었던 카렐리야 지방의 수복에 집중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독일 육군 사령부의 참모인 알프레드 요들이 핀란드군에게 레닌그라드 공세를 강화할 것을 요청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어쨌든 독일군은 9월 8일에 자신들의 병력만으로 시의 북부에 위치한 라도가 호수에 다다르면서 포위망을 계속 죄어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오시프 스탈린도 자신의 친구라는 이유로 계속 시의 방어를 맡겨놓았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더 놔둘 수 없었고, 방어 실패의 책임을 물어 해임했다. 후임자로는 그 때 막 스탈린과 작전 계획을 놓고 언쟁을 벌이다가 총참모장 직책에서 사임한 게오르기 주코프를 임명해 보냈다. 하지만 주코프는 독일군의 맹렬한 공세 속에서 레닌그라드로 부임하러 가는 동안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고, 그 사이인 9월 12일에는 레닌그라드에서 가장 큰 식료품 상점인 바야뎁스키 상점의 창고가 독일군의 폭격으로 전소되면서 식량 수급에 엄청난 차질을 빚게 되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독일군도 히틀러의 오락가락하는 지휘 방침으로 혼선을 빚고 있었는데, 히틀러는 레브에게 북부집단군에서 전차 부대들을 빼내어 모스크바 공방전에 투입하라고 지시했다. 며칠 후인 9월 19일에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 시 경계를 약 10km 앞둔 지점에서 진격을 멈추었고, 여기서 계속 공격하기 보다는 포위망을 풀지 않은 채 레닌그라드에 억류된 시민들과 군인들이 모두 굶어죽도록 내버려두는 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공공연히 '우리는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 따위는 관심없다'고 떠벌이면서 소련군과 시민들을 조롱했다.
그렇다고 주코프의 노력으로 사기를 회복한 소련군은 그 정도로 약체화되지는 않았다. 11월 10일에 레닌그라드 방어군은 시 북동부에 위치한 티흐빈을 독일군으로부터 탈환하는 첫 반격전을 벌여 성공했고, 독일군은 핀란드군과 합류할 위치를 잃었다. 이 때부터 레닌그라드의 상황이 소련 바깥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영국과 여타 영연방 국가들은 핀란드를 추축국으로 규정하고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2.2 1942년
하지만 그 시점에서 소련군도 마찬가지로 포위망을 제대로 뚫지 못하고 있었다. 군기를 잡아놓았던 주코프는 티흐빈 탈환 직후 모스크바 방어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스탈린에 의해 모스크바 방어 사령관으로 발탁되어 다시 떠났고,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1942년 1월 7일에 제2충격군과 제54군을 동원해 레닌그라드로 통하는 철도 요충지인 류반을 탈환하기 위한 작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공세는 너무 무리한 작전이었고, 결국 제2충격군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고 사령관인 안드레이 블라소프 소장은 독일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2]
파일:Attachment/레닌그라드 공방전/12.jpg |
비슷한 시기에는 시 동남부에 있는 넵스키 퍄타초크(Не́вский пятачо́к)에서도 독일군 포위망을 와해시키기 위해 제48군과 제55군을 동원해 이듬해 5월까지 장기전에 들어갔지만, 독일군과 소련군 양군 사이에 엄청난 사상자만 남기고 끝났다. 하지만 이러한 전투와 더불어 겨울의 추위로 꽁꽁 언 라도가 호수를 통해 레닌그라드에 귀중한 식량을 비롯해 무기와 탄약 등의 보급 물자가 보내졌고, 이는 레닌그라드에 남아있던 사람들의 사기를 북돋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
독일군도 소련군의 반격에 맞서 1942년 4월에 공군을 동원해 소련 해군의 발트 함대를 공격하는 아이스 슈토스(얼음 타격) 작전을 펼쳤지만 오히려 역관광 당했다. 만신창이가 되어 항구에 착저된 상태였음에도, 소련군의 강구트급 전함 마라와 10월 혁명(옥차브리스카야 레볼류치야)[3], 그리고 순양함 오로라[4], 키로프급 순양함 키로프와 자매함 막심 고리키를 비롯한 많은 해군 함정들은 계속해서 12~6인치의 대구경포들을 독일군이 오는 족족 머리 위에 쏟아부었다. 이후 6월부터 9월까지는 독일군 포병들도 다시 시내에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소련군이 라도가 호수를 통해 레닌그라드에 보급 물자를 계속 보내자 8월에는 독일군과 이탈리아군, 핀란드군 연합으로 소함대를 조직해 라도가 호수의 보급선을 공격해왔고, 소련군도 이에 맞서 제8군과 재건된 제2타격군을 동원해 라도가 호수 남부에서 독일군을 공격하는 시냐비노 공세를 시작했다. 거의 2개월 가까이 계속된 이 공세도 역시 실패해 11만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지만, 독일군이 핀란드군과 연합하기 위해 계획하고 있던 노르트리히트(북쪽의 빛) 작전을 무산시키는 전략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포위망은 어느 정도 손상을 입었을 지언정 여전히 견고하게 버티고 있었고, 소련군도 이를 뚫기 위해 계속 공세를 가했지만 큰 성과는 얻지 못한 채 소강 상태가 되었다. 독일군 포병들도 레닌그라드 시의 저항을 무력화하기 위해 파상적인 포격을 계속 가했지만, 시에서는 결코 항복하지 않고 계속 버텼다.
2.3 1943~44년
이렇게 1942년이 지난 뒤, 1943년 1월에 소련군은 또다시 레닌그라드의 포위망을 뚫기 위한 공세를 시작했다. 이스크라(불꽃) 작전으로 이름붙은 이 공세는 성공을 거두었고, 라도가 호 주변의 땅이 소련군 손에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포위망의 일부를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스크라 작전의 성공으로 힘을 얻은 소련군은 그 직후인 2월에 주코프의 지휘로 이보다 더 대규모의 공세인 북극성 작전을 벌였지만, 독일군을 일부 격퇴하는 데 그치고 다시 교착 상태가 되었다.
파일:Attachment/레닌그라드 공방전/win.jpg |
물론 이후에도 계속 독일군의 산발적인 공세가 이어졌지만, 이미 전황은 소련에게 기울어진 상태였다. 소련군도 1944년이 되자 이번에는 기필코 레닌그라드의 포위망을 모두 풀어버리겠다는 기세로 맹공격을 퍼부었고, 물자와 병력 부족에 시달리던 독일군은 결국 1월 말에 레닌그라드로부터 60~100km 떨어진 지점까지 밀려나 시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포위망이 사라지면서 소련군의 승리로 끝났다.
900일간의 봉쇄기간동안 독일군은 공중폭격 107,158발, 포탄 148,478발을 레닌그라드에 쏟아 부었다. 거의 하루에 300발꼴.
3 시민들의 참혹한 생활상
독일군의 포위로 보급이 끊긴 뒤 레닌그라드의 시민들의 삶은 매우 처절해졌는데, 특히 독일군의 폭격으로 식량 저장고가 없어지면서 당장 먹을 식량이 턱없이 부족해졌다. 빵배급량은 하루 125g까지 줄었다.난방 연료인 석탄이나 석유, 가스의 공급도 끊겼고,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해 유서깊은 목조 가구나 건물들을 장작으로 쓰기 위해 부숴야 했다. 당연히 엄청난 수의 아사자와 동사자가 발생했고, 의약품이 부족해지면서 병에 걸려 죽어가는 시민들도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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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실조로 인해 괴혈병이 돌기 시작하자 소나무의 솔잎에서 비타민 성분을 채취해 배급했고, 밀가루의 부족으로 빵을 만들기 위해 호수에서 격침된 수송선에서 인양한 썩은 밀가루와 톱밥, 목화 씨 등 평소에는 절대 먹을 수 없는 것까지 재료로 사용했다.
이외에도 가죽으로 만들어진 가방이나 신발을 푹 끓여서 젤리로 만들어 먹기도 했고, 쥐나 곤충을 잡아 먹거나 들판에서 캐낸 풀이나 나무에서 벗겨낸 나무껍질로 연명하기도 했다. 도로를 제외한 공터들에 빼곡히 심어서 재배한 양배추를 맹물에 끓여서 썩은 빨래 냄새가 진동하는 것을 억지로 먹기도 했다. 소련의 공식 기록에서는 부정되고 있지만, 죽은 사람의 시체에서 채취한 인육을 먹는 식인 행위까지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소련군은 이 식인 행위를 단속하고 범인들을 처벌하는 임무 또한 수행해야 했다. 1942년 2월에만 600명이 식인 행위로 체포되었다. 이 단속임무를 수행했던 이가 바로 테렌티 스티코프 장군으로, 후에 북한에서 소련군정 사령관을 지냈다.
이렇게 삶이 가장 원시적인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레닌그라드의 시민들은 강인했다. 레닌그라드 봉쇄에서 살아남은 시인 올가 베르그골츠는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그야말로 거칠 것 없는 자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썼다. 죽음이 도처에 널려 있었기에 그런 자유를 자극했고, 그 자유는 자연 발생적인 융통성, 삶의 강렬함, 섬뜩한 극기 정신을 불러일으켰다.
믿기지 않게도, 레닌그라드의 노동자들은 이렇게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모스크바 방어에 사용할 곡사포와 박격포 1,000문을 만들어 냈고, 이 무기들은 독일군 진지선을 넘어 레닌그라드 밖으로 공수되었다. 소련군도 레닌그라드를 지키기 위해 라도가 호수가 어는 시기를 이용해 차량을 동원하고 호수 위에 임시 협궤 철도를 가설하는 등의 수단으로 레닌그라드에 물자를 공급했고, 레닌그라드에 난방을 위한 가스를 공급하는 파이프라인을 복구하는데 성공했다. 또 이 기간 동안 탈출을 원하는 시민들의 외부 지역 소개 작업도 이루어졌고, 1942년 봄에는 시민들의 건강과 영양 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과학자들 역시 분투했다. 소련 최대의 농업 작물 종자와 표본을 보존하고 있던 파블롭스크 실험국에서는 소련 농업의 미래를 위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종자와 표본을 지켜야겠다는 일념으로 과학자들은 피난을 거부하고 자리를 지켰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종자들에 차마 손대지 못하고 굶어죽거나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독일군의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파블롭스크 실험국을 지켜낸 이들의 희생으로 소련 농업은 전후 가까스로 회생할 수 있었고, 소련 붕괴 후에도 실험국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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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용군. |
어떠한 불리한 상황에서도 항복하지 않은 시민들 덕에 레닌그라드는 영웅도시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그 대가를 시민들과 군인들의 엄청난 희생으로 치러야 했다. 소련 측은 포위 기간 동안 총 64만 9천여명의 레닌그라드 시민들이 추위, 굶주림, 질병, 독일군의 폭격이나 포격으로 사망하거나 의용군으로 동원되어 전사했다고 발표했지만, 역사학자들은 이 수치는 지나치게 낮고, 실제 사망자는 100만 명 혹은 그 이상에 달한다고 보고 있다. 인적 피해 뿐 아니라 물적 피해도 막심해서, 많은 문화 유산들이 독일군의 공격으로 파괴되거나 주민들이 겨울을 나기 위한 땔감으로 쓰면서 소실되었다. 그러나 독일군이 포위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자신들을 지켜낸 레닌그라드의 이야기는 소련 국민들과 다른 연합국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당시 제대로 된 매장은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종이로 된 신분증도 다 낡아 없어져 신원 확인이 불가능해지자 사망자들을 몇 백명 씩 공동 묘지에 매장했다. 현재에도 50만 명의 이름 모를 사망자가 묻힌 삐스까료프 공동묘지가 남아있다. 박노자의 할아버지도 공방전 도중에 사망하여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한다.
묘비에 낫과 망치가 새겨져 있는 곳과 별이 새겨져 있는 곳이 있는데, 전자는 민간인들의 묘지이고 후자는 군인들의 묘지이다. |
레닌그라드에 있던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주요 소장품들은 다행히 레닌그라드가 완전히 포위되기 직전에 간신히 시베리아의 예카테린부르크로 대피시킬 수 있었다.
레닌그라드가 고향이었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일곱 번째 교향곡을 이 공방전 초기에 독일군에 의해 도시가 포위된 상태에서 작곡하기 시작했고,[5] 이후 포위망이 일시적으로 뚫렸을 때 쿠이비셰프로 피난한 뒤에 완성시켰다. 이 곡은 그 상징성 때문에 아직 공방전이 진행되고 있던 레닌그라드 시내에서 온갖 연주자들을 마구 긁어모아 임시로 급조한 관현악단이 동원되어 연주하기도 했고, 쇼스타코비치 자신의 승인은 없지만 지금도 '레닌그라드' 라는 제목으로 불리고 있다.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임신 중이었던 산모가 출산한 아이들은 살이 찌기 쉬운 체질이 많았다고 한다. 산모가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보니, 태아는 바깥 세계를 먹을 것이 부족한 세상으로 인식하고 먹은 것을 비축해두는 체질로 적응했다는 것. 굶으면서 다이어트를 하면 살이 찌기 쉬운 체질이 되는 현상과 비슷하다. 이러한 현상은 공방전 초기보다는 후반에 태어난 아이들일수록 더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또한, 태아 시기의 영양분 부족으로 내장 장기가 덜 발달한 영향으로 이들은 같은 시기에 다른 지역에서 태어난 아이들보다 질병의 위험이 높으며, 아직 생존해 있는 사람들이 많아 수명에 대한 최종 통계는 나오지 않았으나 예상되는 수명도 비교적 짧다.
3.1 생명의 길
그래도 언제나 태양은 뜬다!
'생명의 길' 기념비 中
위에도 언급되었지만 라도가 호수(Ла́дожское о́зеро, 줄여서 Ла́дога)는 독일군과 핀란드군에게 완전 포위된 레닌그라드를 다른 지역과 연결해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라도가 호수 얼음 위에 가설되었던 통로는 Дорога жизни(Doroga zhizni)라 불렸으며 문자 그대로 레닌그라드의 생명선 역할을 하였고, 이를 통해 1600만 톤의 물자가 공급되었으며, 137만 여 명의 시민이 대피할 수 있었다. 레닌그라드 전선을 지키기 위해 병력과 군수품이 보충될 수 있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라도가 호수의 수송로를 통한 이 거대하고 처절했던 작전에서 운전사들은 짧게는 35km, 길게는 무려 135km에 이르는 거리를 수송해야 했는데, 소련군 운전병을 비롯한 많은 시민들이 자원해 레닌그라드에 남은 사람들을 위해 물자를 수송했다. 독일군과 핀란드군이 라도가 호수변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고 있어서 한정된 항구 밖에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 이 때 사용되었던 오씬노비츠(Осиновец)라는 항구에는 레닌그라드 공방전을 기리는 Дорога жизни를 이름으로 하는 박물관이 있다.
하지만 이 생명의 길은 역시 너무도 많은 생명을 대가로 치러야 했다.
영어 영상 |
위 영상에 나오듯이 물자를 트럭에 최대한 조금씩 싣고 얼어붙은 호수 위를 기어가다시피 느릿느릿 가고, 오면서는 피난민을 태운채로 그 짓을 왕복으로 수행해야 했는데, 이를 감지한 독일 공군과 포병은 얼음판에다 화력을 쏟아부었고 이에 얼음이 깨져 호수 밑으로 가라앉는 차량이 부지기수였다. 결국 야전병원, 베이스캠프 하나도 부담스러운 호수 위에 소련군의 방어선과 대공진지가 펼쳐지는등 얼음판의 부담을 늘렸다. 게다가 얼음이 두껍게 얼었다고 해도 잘못해서 얇은 곳을 밟으면...
길 잘못 들었다가는 이 꼴이 났다. 이런 얼음물에 빠지면 얼어죽는데 90초면 충분하다. 이 영상은 2014년 방송된 4부작 미니시리즈 <라도가(Ла́дога)>의 한 장면. |
트럭 운전사들은 이런 역경 속에도 시민들을 살리고 레닌그라드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얼어붙은 호수를 주야를 가리지 않고 오갔다. 이들의 분투 또한 레닌그라드 공방전의 상징이 되었으며, 이는 레닌그라드 공방전을 묘사한 군가 '라도가 호수에 대한 노래' 에서도 잘 나타나있다.남성 베이스 솔로 버전 듣기 군가라고는 하지만 거의 레닌그라드의 민중가요 비슷한 대접을 받기도 한다. 모스크바 방위군 행진곡의 레닌그라드 버전이라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아래 동영상에서도 퍼레이드가 끝나고 연주되며, 후렴구에 Дорога жизни가 반복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레닌그라드 해방 70주년 기념 퍼레이드
3.2 타냐 사비체바의 일기
타냐 사비체바(본명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사비체바. Татьяна Николаевна Савичева, 1930.1.23~1944.7.1)는 레닌그라드에서 제빵사 니콜라이(1936년 사망)와 재봉사 마리야의 다섯 아이들[6] 중 막내딸이자 가수가 꿈이었던 열한 살 소녀였다. 하지만 독일군의 포위가 시작되자 이 소녀는 평생 꿈을 이룰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독일군의 공습 이후 작은 언니 니나가 돌아오지 않자 그녀의 어머니는 타냐에게 니나의 수첩을 주었고 타냐는 거기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타냐는 그 전에도 두꺼운 공책에 일기를 쓰고 있었지만, 나무도 석탄도 극히 부족한 상황에서 땔감 대용으로 써버렸기 때문에 저 수첩이 유일하게 남은 일기장이 되었다.
다음은 일기의 일부이다.
1941년 12월 28일 아침 12시 30분에 언니 제냐가 죽었다1942년 1월 25일 낮 3시에 할머니가 죽었다
1942년 3월 17일 아침 5시 오빠 레카가 죽었다
1942년 4월 13일 밤 2시 삼촌 바샤가 죽었다
1942년 5월 10일 낮 4시 삼촌 레샤가 죽었다
1942년 5월 13일 7시 30분에 엄마가...
사비체바 사람들이 죽었다.
모두 죽었다.
타냐 혼자 남았다…[7]
타냐는 1942년 8월에 139명의 아이들과 함께 소련군의 레닌그라드 시민 소개 작전을 통해 니즈니노브고로드의 크라스니 보르라는 마을로 옮겨졌지만, 포위 기간 동안의 영양실조로 면역력이 악화된 상태에서 장결핵으로 투병하다가 전쟁 후반기인 1944년에 세상을 떠났다. 공습으로 사망한 줄 알았던 큰언니 니나는 무사히 살아남았고, 역시 레닌그라드 밖으로 탈출해 목숨을 건진 미하일과 함께 레닌그라드가 해방된 뒤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타냐의 일기를 발견했다. 그녀는 이 일기를 세상에 알리며 활동했고 2013년 94세로 세상을 떠날때까지 타나의 일기를 알리고 더불어 레닌그라드 공방전 희생자 추모단체를 이끌며 활동했다.
타냐의 일기는 곧 레닌그라드 공방전으로 희생된 시민들의 상징이 되었고, 타냐가 묻힌 니즈니노브고로드의 샤트키 공동묘지, 생명의 길, 피스카료프 공동묘지와 사비체바 가족의 자택에는 타냐를 추모하는 기념비가 만들어졌다.여러 모로 러시아판 안네의 일기이다. 타냐의 일기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당시 증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 레오니트 고보로프 이전 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 ↑ 블라소프는 이후 독일로 압송되어 포로 생활을 했다. 포로 생활 중 친독파로 전향해 반공 성향의 자유 러시아 군단을 이끌었고 결국 전쟁 후반기에 소련군에게 잡혀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블라소프 본인은 자신의 전향이유를 "제대로 준비 안된 병사들을 무리하게 작전에 밀어넣고 희생시키는 체제에 회의를 느꼈다."라고 설명한적 있었다.
- ↑ 그야말로 불굴의 전함들. 구조상 이정도로 두들겨맞으면 버틸 수가 없는 함선들인데도 함수가 날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침략자들에게 인민의 불벼락을 선사했다.
- ↑ 러시아 혁명을 지원하고 겨울궁전을 포격한 것으로 유명한 순양함. 이 공적들을 인정받아 현재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박물관함으로 정박해 있다.
- ↑ 당시 레닌그라드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의용소방대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 ↑ 예브게냐(1909년 생. 애칭 제냐), 레오니드(1917년 생. 애칭 레카), 니나(1918년 생), 미하일(1921년 생. 애칭 미샤)과 타티야나.
- ↑ 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리처드 오버리 저, 류한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