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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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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를 세운 덴노 | |
왕호 | 고다이고 덴노(後醍醐天皇) |
이름 | 다카하루 (尊治) |
생몰년도 | 1288년 11월 26일 ~ 1339년 9월 19일 (52세) |
출생지 | 일본 교토 |
사망지 | 일본 요시노(지금의 나라 현 요시노군 요시노쵸) 금륜왕사(金輪王寺) |
재위기간 | 1318년 3월 29일 ~ 1339년 9월 18일 (21년) |
즉위식 | 1318년 4월 30일 |
일본 역대 덴노 중 최고의 근성가이. 또는 시대를 잘못 만난 영웅.
2 덴노가 되기까지
91대 고우다 덴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고우다 덴노와 고다이고 덴노의 차이가 5대나 나는데... 88대 고사가 덴노가 아들 고후카쿠사 덴노에게 양위했다가 고후카쿠사 덴노를 몰아내고 둘째 아들 카메야마 덴노에게 덴노 자리를 넘기는데 이런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고후카쿠사 덴노의 후손인 지묘인계통, 카메야마 덴노의 후손인 다이가쿠지계통이 다투었다. 가마쿠라 막부는 싸우지 말고 돌아가면서 덴노를 하라는 중재안을 내놓는다. 양쪽 모두 납득 못했지만 중재안을 받아들여서 고다이고 덴노도 아버지 고우다 덴노 - 후시미 덴노 - 고후시미 덴노 - 고니죠 덴노 - 하나조노 덴노까지 기다려야 했다!(...) 안습. 1318년 드디어 하나조노 덴노의 양위를 받아 덴노에 즉위한다.이 때부터 근성이 생겼나보다. 이때 나이가 31살인데 이 나이를 먹어도 아버지 고우다 덴노의 간섭을 받아야 했고[1] 게다가 다음 덴노 자리는 형의 아들 구니요시 왕자에게 물려주기로 약속 해야만 했다(...) 고다이고 덴노의 후손들은 형의 후손들이 없을때나 고려 해보겠다는 말만 나왔으니 그는 아버지, 가마쿠라 막부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된다.
3 체포와 유배를 당하면서 막부의 타도를 외치다
1321년 드디어 아버지 고우다 덴노의 원정이 끝나고 친정을 했지만 구니요시 왕자는 아들 야스히토 왕자까지 낳을 정도로 장성하니 그에게 빨리 양위하라는 압력이 들어온다. 고다이고 덴노는 부하들과 술 마시며 노는 척하면서 막부 타도 계획을 세우지만 1324년 발각되서 측근인 히노 스케토모가 사도섬으로 유배가게 되고 다지미 쿠니나가가 저항하다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고다이고 덴노는 한번 실패했다고 포기하지 않고근성가이 답게 몬칸, 엔칸등 승려들을 포섭하고 세자빈의 순산기도 하러 간다고 절들을 다니면서 이들에 대한 포섭을 진행한다.
그의 행동은 구니요시 왕자의 다이가쿠지 계열의 지지도 받지 못하고 지묘인 계열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2] 구니요시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버티다가 구니요시 왕자가 먼저 사망하니 이번에는 지묘인 계열의 가즈히토 왕자가 태자로 책봉된다. 1331년 막부 타도 계획이 요시다 사다후사라는 측근의 밀고로 다 들통나니 그는 교토를 탈출하고 거병한다. 그 즉시 폐위되고 태자 가즈히토 왕자가 고곤 덴노로 즉위한다. 히에이산으로 가려다가 실패하고 가사기 산에서 저항하다가 체포된 후 오키섬으로 유배된다.
그의 아들 모리요시 친왕이 무사했고 카와치 지방에는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하리마 지방에는 아카마츠 노리무라가 병력을 이끌고 막부에 저항하고 있었다. 나와 나가토시가 1333년 고다이고 덴노를 오키섬에서 탈출시켜서 다시 호키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킨다. 이것을 진압하라고 파견된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오히려 막부가 덴노를 감시하기 위해 교토에 만든 조직인 로쿠하라탄다이를 공격하고 동북지방에서 병사를 일으킨 닛타 요시사다의 공격으로 가마쿠라 막부는 붕괴한다.
4 겐무 신정을 단행했으나
고다이고 덴노는 복위하고 겐무 신정을 단행하는데 우선 고곤 덴노 즉위를 부정하고 막부, 섭정, 관백도 전부 폐지한다. 그리고 지묘인 계의 왕족은 전부 왕위계승권이 박탈하고 조카손자뻘인 구니요시 왕자의 후손도 전부 왕위계승권이 박탈한다. 그리고 친아들 츠네요시 왕자를 태자로 책봉한다. 겐무 신정이 덴노가 직접 정치를 하던 시절로 되돌아가자는 것을 내세운다.[3] 이것 말고도 토지소유권을 전부 새로 인정 받아야 한다는 포고령도 내리는데 토지소유자들이 토지소유권을 인정 받으러 교토로 밀려오고 새로 소유권을 인정 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 간의 소송이 난무하게 된다. 토목공사를 위해서 세금이 늘어나니 농민부터 귀족들까지 전부 불만이 쌓이기 시작한다. 니조강가의 낙서 사건이라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사건 자체는 그냥 정부 시책에 대한 불평일 뿐이지만 겐무 신정을 정면 비판하는 내용이었다.[4]
아들 중에서 막부 타도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모리요시 친왕은 다카우지와 서로의 공을 내세우며 크게 반목했다. 일단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일단 모리요시 친왕을 정이대장군에 임명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려 했다. 그러나 뒤에서 공작을 벌여 모리요시 친왕이 다카우지를 친다는 명목으로 황위를 찬탈하려 한다는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덴노에게 고변했다. 이에 고다이고 덴노는 모리요시 왕자를 다카우지가 있던 가마쿠라로 유배 보내기에 이른다. 왕족, 귀족, 무사, 농민 모든 계층의 어그로를 끌어버린 것이다.
이 와중에 1335년 가마쿠라에 있던 호죠 정권의 잔당들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막부 타도 공신 중 한 명인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그의 칙명도 없이 출병하여 이 반란을 진압[5]했고 그대로 가마쿠라에 눌러앉아 자기 멋대로 수하 무사들에게 은상을 내린다. 그 와중에 가마쿠라 막부에 옹립될까봐 두려워한 나머지 유배되어있던 모리요시 친왕을 그대로 베어 죽이게 된다. 당연히 고다이고 덴노는 다카우지에게 귀환 명령을 내리지만 다카우지는 이를 무시한다.
1335년 음력 11월, 다카우지는 낮짝도 두껍게 닛타 요시사다가 간신이라며 덴노에게 "현기증 난단 말이예요. 요시사다 토벌령 빨리 좀 내려주세요"라고 요청했으나 다카우지에게 쌓일대로 쌓인 게 많았던 고다이고는 이를 씹고 오히려 요시사다에게 다카우지를 토벌하라는 칙령을 내려버린다. 교토에서 요시사다의 토벌군이 내려오고 북쪽에서는 오슈에 파견된 공가(公家)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도 다카우지를 토벌하기 위해 가마쿠라로 남하했다. 야이 반란군 노무 새퀴야. 너 거기 꼼짝 말고 있어! 우리가 지금 군대를 몰고 가서 니놈 머리통을 다 날려버리겠어! 가신들이 이들과 싸웠으나 모두 패배했다.
급해진 다카우지는 타임을 외쳤고 모든 조정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하면서 자신을 사면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당연히 덴노는 이를 씹었고, 결국 다카우지는 덴노 정권에 대항해 궐기를 공식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 해 12월에 요시사다를 하코네, 다케노시타 전투에서 격파하고 이듬해인 1336년 1월에 마침내 교토에 입성했다. 고다이고는 히에이산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구스노키 마사시게,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의 활약으로 교토에서 아시카가 다카우지 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다카우지는 큐슈로 도망가서 다시 병력을 모으고 교토로 출병하자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고다이고 덴노에게 요시사다를 멀리하고 다카우지와 화목하자는 의견을 냈지만 다카우지에게 쌓일대로 쌓인 게 많았던 고다이고는 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구스노키 마시시게와 닛타 요시사다는 아시카가 타다요시가 이끄는 병력들을 상대로 미나토가와 강 전투를 벌이는데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맞붙는데 구스노기 마사시게는 포위되어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자 가신들과 함께 할복하여 사망하고 닛타 요시사다는 교토로 도주한다. 고다이고는 또다시 히에이산으로 도망친다.
5 필사의 탈출 후 남조 수립
덴노군에 타격을 입힌 다카우지는 지묘인 계열의 고곤 덴노의 아들 고묘 덴노를 옹립하고 히에이산으로 쫓겨간 고다이고에게 화의를 요구했다. 고다이고도 이에 응해 3종 신기를 고묘 덴노에게 넘겨주고 가잔원에 유폐됐으며, 이후 다카우지는 무로마치 막부를 창설한다. 또 다시 근성의 탈출을 감행해 "너님에게 준 3종신기는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 힝 속았지!"를 외치며 교토를 탈출하여 요시노에 정주, 정통성은 자신에게 있다며 요시노에 또다른 조정을 수립했다. 일본은 남북조시대가 된 것이다.
아들들을 각지로 파견해서 각지방으로 포섭하려고 시도 해봤지만 전세를 뒤집지 못하고 1339년 병으로 쓰러져 노리요시 왕자에게 양위한 다음 킨린오우사에서 역적토벌과 교토탈환을 유언으로 남기고 사망한다.[6] 그의 사망소식을 들은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다이고의 명복을 비는 덴류지를 건립했다. 생전에나 좀 잘해 보지?
6 평가
일본 역대 덴노 중 최고 근성가이지만 엄청나게 약점이 많았다. 기타바타케 치카후사의 아들로서 일본 북부지방에서 군대를 이끌면서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저항한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마지막 출진 전에 남긴 상소가 있는데 하나하나 고다이고 덴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1. 사람을 빨리 선발하여 큐슈, 도호쿠로 파견하시고 더욱이 산요(山陽), 호쿠리쿠(北陸)에도 사람을 두어 반란에 대비하십시오.이것은 겐무 정권이 교토만을 중시해 무쓰에 아키이에를 파견한 것이 외에는 타지방에게는 무관심했기 때문에 번번이 친정에 대해 반발하고, 교토에서 패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규슈에서 다시금 거병하여 교토가 공격받게 된 것에 대한 비판이다.
2. 여러 지방의 조세를 3년간 면제하고, 검약할 것. 토목을 금하고, 사치를 끊는다면 반란은 저절로 잦아들어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3년간 세를 면한다는 것은 닌토쿠 덴노(仁徳天皇)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토목이란 고다이고 덴노가 계획한 궁궐 조성 계획으로 이로 인해 20분의 1세 등 자주 임시 조세를 부과했기 때문에 민심이 피폐해져 빈번히 반란이 일어난 요인이 된 것에 대한 비판이다.
3. 관작의 수여에는 신중하십시오. 공적이 있더라도 신분이 미천한 자에게는 토지와 관작을 주지마십시오.
산보쿠잇소(三木一草)[7]와 종2위 산기((参議)가 된 아시카가 다카우지, 좌중장(左中将)이 된 닛타 요시사다 등 신분이 낮은 자에게 고위의 관직을 난발한 것과, 관위상당제((官位相当制)를 무시한 인사[8]에 대한 비판이다.
4. 상을 내릴 때는 공평하십시오. 귀족과 승려에게는 고쿠가(国衙) 령·장원(荘園)을 주고, 무사에게는 지토(地頭)직을 주십시오.
상을 내릴 때 매우 공정하지 못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지토직을 사원에 주었거나, 특정 가문의 관직 세습를 타파하고 그들의 지교코쿠(知行國)[9]와 소령을 몰수하여 무사에게 포상한 것에 대한 비판이다.
5. 임시 행행(行幸)[10] 및 연회는 그만두셔야 하옵니다.
정부가 빈번한 행행과 매일 밤마다 연회로 발생하는 막대한 비용 문제에 대한 비판이다.
6. 법령은 업숙히 집행하십시오. 법은 국가를 다스리는 데 기본 방침이므로 조령모개(朝令暮改)[11]한 혼란한 상태는 허락지 마십시오.
고다이고 덴노가 윤지(綸旨)[12] 절대주의를 채택하면서 모순된 윤지를 제시하거나, 앞선 윤지를 취소하는 등, 조령모개적 행동이 혼란을 초래하여 천황의 권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7. 정치에 유해무익한 자를 내치십시오. 현재 귀족, 궁녀 및 승려 중 중요한 정무에서 사리사욕으로 집행하는 자가 많아 정치에 혼란이 오고 있사옵니다.
고다이고 덴노의 총애를 받는 궁녀 아노 야스코(阿野廉子), 승려 엔칸((円観), 몬칸((文観) 등의 국정 관여를 의식한 비판이다.
<엔기(延喜)·덴랴쿠((天暦)의 치세[13]로 돌아가자〉를 슬로건으로 내건 겐무 신정이었지만, 그 내실은 주자학 색채가 강한 전제군주제로의 회기에 따른 것이다. 율령제 이후 국가체제의 개편을 노려 관위상당제와 관직세습제를 타파해 기존의 귀족 계층의 해체를 꾀한 친정의 개혁은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를 비롯 여러 귀족층의 지지를 받기 어려웠다.
상소문은〈만약 이 의견이 받아 들여지지 않는다면, 나 스스로 고다이고 덴노의 슬하에서 벗어나 산속에 틀어박힐 것이다.〉라고 끝을 맺고 있어, 아키이에의 분통함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전사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 덴노의 측근이었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는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에서 보수적 문신관으로 신정책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 근세에 들어서는 고다이고 덴노를 부덕한 군주로 인식하는 평가가 정착되었는데, 도쿠가와 미스쿠니의 명에 의해 편찬된 《대일본사》에서는 남조를 정통으로 하는 입장에서 고다이고 덴노를 부덕했다고 평가하는 인식을 볼 수 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독사여론》에서 왕조 정치가 쇠퇴하고 무가 정권이 성립되는 과정은 누대에 걸친 덴노가 실덕이 한 원인이었다는 관점에서, 고다이고 덴노를 그 말미에 붙였다.
- 라이 산요의 《일본외사》에서는 고다이고 덴노를 비판하면서도 즉위 직후의 친정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 ↑ 원정=인세이라고 덴노들이 양위하고 출가해놓구도 정치에 간섭하는 경우다.
- ↑ 애초에 막부를 타도하려는게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이 왕위를 독점하려는 목적이니...
- ↑ 사실 중국과 같은 전제정치를 목표로 했다는 말도 있다고 한다.
- ↑ 다만 이 낙서는 귀족 입장에서의 불평만이 주로 써져 있었다고 한다.
- ↑ 막부 개설은 이 뒤의 일이지만 고다이고 덴노는 이 때 다카우지가 칙명도 없이 그냥 출병해 버리자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정이대장군 직함을 내렸다.
- ↑ 군담소설 《태평기》에 따르면 고다이고 덴노는 죽던 순간에 병상에서 한 손에는 칼, 다른 한 손에는 법화경을 들고 "짐이 죽은 후에도 짐은 영혼은 늘 북조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며 자신을 높은 산봉우리에 묻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통상 남쪽으로 향하게 묻는 덴노의 능묘와는 달리 고다이고 덴노의 능묘는 북쪽을 향하고 있다고.
- ↑ 고다이고 덴노의 겐무 신정하에 총애했던 4명의 신하 구스노키 마사시게, 유키 지카미츠((結城親光), 나와 나가토시(名和長年), 지구사 다다아키((千種忠顕)를 가리킨다.
- ↑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자신도 종2위이면서 정,종5위상당에 해당하는 진주후쇼군에 임명되었다.
- ↑ 일종의 사령(私領)과 비슷한 존재로 중앙 정부에 세를 납부하는 것이 아니라 지교(知行) 권리를 가지는 영주에게 세를 납부하는 토지로 중앙 정부의 행정권이 미치지 않는다.
- ↑ 임금이 대궐 밖으로 거동함≒유행
- ↑ 아침에 명령을 내로고 저녁에 바꾼다는 사자성어
- ↑ 왕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
- ↑ 엔기는 다이고 천황의 치세 때 사용된 연호이며 덴랴쿠는 무라카미 천황의 치세 때 사용된 연호이다. 헤이안 시대의 천황의 친정 따른 이상 정치가 실현된 시기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