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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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연화경(법화경)
妙法蓮華經(法華經)

1 개요

'묘법연화경'을 줄여서 부르는 말로 가장 내용이 긴 불경들 중 하나이다.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중요사상으로 하고 있다. 묘법연화경은 천태종의 근본경전(소의경전)으로 화엄종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불경이다. 우리나라에 유통된 불경 가운데 가장 많이 간행된 것으로 정확히 언제부터 유통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신라 고승들의 주석서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유통되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2 전래

대승불교 경전의 마지막으로 나온 경전 중 하나. 대승불교에서는 높이 평가하는 교파가 많은 경전이지만 학문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1] 경전으로서 평가 받는다.

이 법화경의 위력을 자화자찬하며 서장에 "법화경을 익힐 근기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자는 법화경의 그 위력에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무릎꿇고 알아서 부처의 가르침을 듣지 않고 물러난다. 법화경의 가르침은 과보가 매우 크기 때문에, 준비되지 않은 자가 함부로 읽으면 안 된다" 같은 경고문 마저 적혀 있다.[2]

불경석가모니의 말씀을 담은 경전이라는 의미이지만, 실제로는 불교는 시대가 지나가면서 그 시대에 맞도록 지속적으로 변화되어 왔다. 불교가 종교들 중 가장 복잡한 철학적 배경이 있는 이유도 몇천 년 전에 쓰여졌지만 어느 정도 원형이 보존되는 성경이나 코란을 기준으로 삼는 유일신교와는 달리, 그 시대 사람들의 상식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섞여들어갔기 때문이다.

원문은 네팔에서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졌다고 주장되며, 동아시아로의 본격적인 전래는 5호 16국 시대에 쿠차 출신의 서역승 구마라습이 경전을 한자로 번역하면서부터이다. 이 때문에 그 성격이 가장 독특한 법화경은 위경 문제, 혹은 대승비불설의 끝판왕으로 존재한다. 다른 대승불교 경전이 모두 인정받는다고 해도, 마지막까지 인정받기 어려운 경전이 바로 법화경이기 때문이다. 법화경을 어느 시기에 집어넣건 법화경을 기점으로 이전 경전과 이후 경전은 분리되고, 법화경 이전 시기 경전을 모두 폐기하거나, 혹은 법화경 이후시기 혹은 법화경을 폐기해야 종교로서 일관성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법화경과 연관된 재미있는 일화로는 9세기, 일본 헤이안 시대에 쓰인 일본영이기(日本靈異記)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헤이안 시대, 구마노에 법명을 에이코(永興)라고 하는 선사가 있어 법화경을 낭송하며 마을 사람들을 계도했다. 8세기 말, 쇼토쿠 덴노 때 어떤 수행자가 에이코 선사를 찾아와 1년 넘게 법화경을 독송하며 수행하였다.

어느날 수행자는 에이코 선사에게 따로 수행하겠다 하면서 산으로 들어갔다. 에이코 선사가 수행자에게 사발과 밥을 챙겨주었으나 수행자는 이를 하루만에 돌려보냈다. 2년이 지나 구마노 산중 어느 절벽에서 수행자의 시신이 발견됐다. 수행자는 발에 줄을 묶고 절벽으로 몸을 던져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죽었는데, 그때까지도 혀만은 멀쩡해서 법화경을 낭송하고 있었다고 한다. 본격 호러물

비슷한 이야기가 삼국유사에도 실려 있다. 7세기 초반 백제승려 혜현(惠現)이 그 주인공인데, 혜현은 승려가 된 이래 법화경 외우기를 과업을 삼아 기도하면서 복을 빌었다.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너무 많이 찾아오자 시끄럽다고 원래 있던 수덕사에서 달라산(達拏山)[3]으로 들어가 석굴에 숨어 살았다. 당나라 정관(貞觀: 627∼649) 초년에 58세로 죽자 사람들은 혜현이 살던 석굴에 시신을 안치했는데 호랑이가 유해를 모조리 먹어버리고 다만 혀만을 남겨두었다. 그런데 이 혀가 추위와 더위가 3번을 지나가도(즉 3년이 지나도) 썩기는커녕 오히려 더 붉어지고 부드러워지더니, 차츰 검붉어져 돌처럼 단단해졌다. 사람들은 혜현을 기려 그 혀를 석탑 속에 모셨다고 한다.

3 의의

3.1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

법화경은 석가모니가 기존의 설법을 모두 부정하면서 시작된다. 석가가 30세에 깨달음을 얻은 후 47년간 방편을 설하다가, 이제 죽기 전 3년 동안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을 하고자 한다는 것이 본 취지이다. 물론 대승비불설[4]은 현재 학계의 일반론이므로, 이런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고 볼 수는 없고 단지 종교적인 은유로 보면 된다.

석가는 기존의 성문, 연각, 보살에 머물러 있는 제자들에게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한다. (이에 대해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십계의 생명에 대한 설명이 필요) 이에 반발하는 제자들이 스스로 자리를 뜨면서 석가는 설법을 시작한다.

3.2 여자와 동물도 부처가 될 수 있다

법화경에서는 용왕의 딸이 현세의 공덕으로 미래세에 부처가 되리라 석가에게 수기를 받는다. 용왕은 이며, 사람이 아닌 금수이다. 게다가 아들도 아닌 딸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여자도 부처가 된다는 것. 이전 경전에서 여자가 부처가 되거나 깨달음을 얻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과 비교하면, 법화경이 얼마나 혁신적인 경전인지 알 수 있다.

3.3 계급 부정

법화경의 교리를 따르면 부처가 되는 일은 간단하다.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부처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누군가를 구제하는 승려나, 아랫사람을 지도하는 지배층이 일반 대중을 지도한다는 것은 법화경에 따르면 모순이다. 법화경에 따르면 석가모니부처의 한 사람일 뿐이다. 다만 법신불이 참 나이고 자신이라는 망상이 없으므로 절을 받고 공양을 받는 것일 뿐이다. 법화경의 안목으로 보면 영원불멸의 참 부처가 진짜 부처다.

3.4 현세 긍정의 종교

법화경에는 사후의 중생을 돌본다고 하는 관세음보살이나 미래의 부처라고 하는 미륵 등 수많은 보살, 부처들이 찬조출연한다. 그런데 정작 이 경의 메인 이벤트는 지용의 보살들이 석가의 부름을 받아 스스로 부처가 되어 중생을 구하겠고 선언하는 것이다. 죽은 뒤나 알 수 없는 미래만 강조하는, 아니면 해탈을 중시해 현실을 포기한 다른 불경들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3.5 보살 신앙에 관하여

관세음보살 등의 여러 보살들이 부처의 밑에 존재하여 왔다. 보살이 생겨난 원인은 부처가 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기존의 불경의 내용에 기인한 바가 크다. 부처-보살-연각-성문-천-인 이라는 불교의 체제는 현실에서 왕-귀족-무사-문인-상인-일반인이라는 프레임을 자의반 타의반 지탱해 왔다. (왕권 강화를 위해 불교를 들여온 게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또한 보살은 불교에서 다신교 신들이 해왔던 우상의 역할도 겸한다. '부처=석가=현세의 존재'에게 사후의 일을 맡길 수 없는 것. 관세음보살이 서방정토에 있다는 신앙은 사후 세계에 대한 불안감을 덜고, 희망없는 현실을 도피하고픈 민중들의 바람에 힘 입은 바가 크다.

그런데 법화경에서는 각 개인이 부처이고, 보살, 제석천, 사대천왕은 법화경을 믿는 부처들을 보호하기로 먼 과거세에 선언했다. 물론 방편으로서 보살 신앙에 대해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그런데 사실 법화경은 보살 신앙을 무척 강조하는 경전이 맞다. 법화경의 몇장은 아예 석가세존이 직접 보살의 공덕과 보살들의 공덕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방편이라고는 하지만 그냥 대놓고 무시해도 된다는 소리가 아니다.

4 주요 내용

법화경의 하이라이트는 석가모니가 다보불을 만나는 구절이다. 이 때 석가는 설법에 참여한 모든 제자들을 하늘 위에 띄우고 자신도 가부좌를 튼 채 하늘 높이 오른다. 마침내 화려하게 수놓인 탑이 다른 세상에서 날아오고, 다보불이 그 안에서 튀어 나온다. 다보불이 이 설법회에 온 이유는 석가가 하는 말이 진실임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나서 석가는 제자들에게 선언하기를 지금의 세계를 구하는 것이 당신들이 아님을 말한다. 당연히 벙찐 제자들을 무시하고, 석가는 하늘에서 다보불을 부른 것처럼, 땅에서 지용의 보살이라 일컬어지는 일단의 무리들을 부른다. 그 수는 역시 무한에 가깝고, 이들의 대표인 상행보살은 석가 앞에서 말세에 중생들을 구제하며 부처가 되리라 선언한다.

이 구절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 먼저 하늘과 땅 사이의 공중에서 허공회 의식을 한다는 것은 크나큰 환희, 해탈, 깨달음 등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에 다보불이 하늘에 왔지만 단지 석가의 말을 증명하는 구색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은 땅에서 올라온 지용의 보살들이다. 그리고 그 수가 무한이라고 함은 일반 대중들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환희의 순간이 끝나고, 다보불이 돌아가고, 지용의 보살들이 선언한 바를 지키기 위해 떠난 후에 석가와 제자들은 다시 땅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법화경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참고로 불국사에서 석가탑다보탑이 마주하고 있는 것은 이 법화경에서 석가와 다보불의 만남을 형상화 한 것이다. 석가탑에는 실제로 석가의 사리가 있다고 한다.

5 전래와 발전

당나라의 천태대사가 법화경을 본격적으로 집대성하여, 천태종이라는 종파가 생겼다. 이후 이 천태종고려, 일본에 정착한다. 역시 대승불교 종파 중 가장 마지막으로 전래되었다.

하지만 법화경이 담고 있는 무지막지한 혁신성이, 천태종에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여전히 당대 권력층에 아부하는 연성화된 상태로 남아 있었고, 본래 취지와는 달리 일반 대중들과 떨어져 있었고, 지나치게 다른 경들과 타협적이었다. 아마도 법화경은 모든 불경들 중 가장 자뻑이 심한 경일 것이다. 법화경의 입장에서는 그 어떠한 경도 전혀 화합이나 타협의 대상이 될 수가 없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천태종의 메인이 관세음보살 신앙이었다. 당연히 법화경에서 관세음보살은 방편의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몽골, 무사 정권 등 전쟁과 내란의 시대였던 시기에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법화경이 경계하는 다른 경들과의 공존도 호국불교 등의 여타 이유로 허용되어, 법화경적인 관점에서는 불교(민중)가 잡신에게 공양하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일본에서 이러한 천태종의 안이함에 대한 반발로 니치렌(1222~1282)이 극단적인 민중불교를 설파한 것은 법화경의 내용을 비추어 필연이라 할 만하다. 남묘호렌케쿄를 외우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초간단 해법을 그는 내놓았다. 이를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나무묘법연화경으로 귀의한다는 나무를 붙여 '미묘한 법인 연화경에 귀의한다'라는 뜻이다.

상당부분 진언종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밀교진언처럼 권력층만 아는 것이 아닌 모든 대중에 설파하여 불계에 이르도록 한다는 것. 니치렌의 극단적인 주장[5]은 당시 지배 계급의 엄청난 탄압을 받았고, 그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당시만 해도 부처는커녕 보살도 되기 힘들다는 진언종, 밀교가 일본에 성행했고, 이들의 사찰은 권력에 빌붙어 서민들의 피를 빨아 먹는 진원지였다. 니치렌은 이들을 보고 비판했다. 이러한 철학이 무사 계급이 마음대로 서민들에게 칼을 휘두르는 시대에 툭 튀어 나왔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여길 사안이 아니다.

사실 니치렌 종이 초기에 어그로를 끌었던 것은 니치렌 본인의 문제도 크다. 니치렌종이 초기 크게 흥한 이유 중 하나는 몽골의 일본침공을 니치렌이 예언했다는 것이 있는데, 이것도 골 때린다. 1260년 니치렌은 '릿쇼안코쿠론(立正安國論)'을 작성해서, 당시의 모든 불교 종파들은 모조리 사교이고, 당시 일본 사정이 안 좋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를 벗어나려면 일본 정부는 오직 자신의 교리만을 국교로 삼고 다른 종파를 모조리 없애야 하고, 이를 거부하면 외세가 침공하는 등 환란을 겪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종파의 대립을 떠나서 니치렌이 가마쿠라 막부에 의해서 유배까지 가게 된 것은 이처럼 사회를 혼란하게 만들 정도의 참언을 퍼뜨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는데, 이 때 일이 묘하게 되려니 몽골의 일본침공이 이 시기에 이루어진다. 니치렌은 자신의 예언[6]이 이루어졌다면서 더더욱 득의양양하게 릿쇼안고쿠론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빨리 다른 종파 없애고, 자신의 교리를 국교로 삼지 않으면 일본이 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분노한 가마쿠라 막부에 의해서 니치렌은 유배에 이은 사형선고까지 내려졌으나, 이후 감형된다. 이 과정에서도 망나니가 처형하려고 했으나 칼이 목에 닿지 않았다더라, 카미카제가 분 것은 니치렌이 기도를 해서 그렇다더라 라는 식의 이야기가 니치렌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돌았다. 하지만 이후 사정을 고려하면 니치렌에 동조한 정부 내 실력자들이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극단적이었던 니치렌이 창설한 일련종의 사상은 이후에도 수많은 사건사고를 불러온다. 니치렌이 사망 한 후, 니치렌의 제자들은 직제자인 '닛코'를 제외하고 스승이었던 니치렌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모조리 천태종의 신자로 갈아타는 등 대단한 혼란에 빠지게 된다. 당연한 이야기다. 말법[7]시대의 부처라고 떠받들어진 사람이 죽었으니 이후 니치렌 종은 가마쿠라파(鎌倉派)와 후지파(富士派)로 나뉘는데, 메이지 유신 즈음해서 통합되었다가 다시 6조각으로 갈라진다.

이중에서 현재까지 전하는 대표적인 종파가 일련정종과 일련종이다. 사실 일본 불교의 경우는 극도로 종파적 성향이 강해서 개신교감리교장로교보다 그 차이가 더 벌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것이 개파조사에 대한 신성화이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한 사람을 신성화해서 부처를 대체한 수준으로 나아가다 보니[8], 그 신도들의 경우도 극단적인 인물들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특히 이들이 주체할 수 없이 활동하는 것이 2차대전 직전 분열을 시작한 시기의 일본이었는데, 이 시기에는 극단적이고 광신적인 인물들이 차고 넘쳤고, 이들은 그걸 행동으로 옮겼다. 특히 만주사변과 그를 통해서 탄생한 만주국의 뒤에는 오족협화니 하는 신토계열의 덧붙여진 이념보다는 니치렌종의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데, 왜냐하면 그 배경에 니치렌종의 극단적 영향 아래에 있던 극우파 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시와라 간지이고, 5.15 사건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혈맹단 사건[9]을 일으킨 니치렌종 승려 이노우에 닛쇼가 있으며, 이 두사람으로 대표되는 급진적 법화혁명론자들의 뒤에는 일련종의 계파였던 국주회를 만든 다나카 지카쿠가 존재했다.

그럼 우익 극단주의만 있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니치렌종 극단주의자이면서 좌익적 성향을 가진 인물도 있었다. 바로 기타 잇키이다. 이 사람은 황도파 군인들의 쿠데타 사건2.26 사건의 사상적 배경으로 지목되는 인물이다. 2차대전이 터지기 직전, 일본이 군국주의의 끝으로 달리게 되는 2번의 쿠데타 사건의 뒤에 니치렌 종의 흔적이 보이는 것은 아주 골치 아픈 이야기이다.

한편 일련종의 다른 분파인 창가학회쪽은 반대로 군국주의에 저항하다가 설립자 마키구치 쓰네사부로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 등으로 투옥되어 사망하였다.

6 현재

널리 알려진 천태종과 일본의 일련정종, 일련종 그리고 일련정종의 막장 부패행각에 항거하다가 파문당한 SGI(국제창가학회)가 존재한다. 일련정종 총본산인 다이세키지는 시즈오카인데 그냥 일련종 총본산인 쿠온지(久遠寺)는 인접한 야마나시에 있다.[10]

7 관련 항목

  1. 내용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가장 골치 아픈 위경 문제에 걸려 있다. 법화경을 인정하면 이전 경전을 모두 무시해야 하는데, 이런 것을 주장하는 것은 일련종 계열 정도이고, 법화경을 대승불교의 시작 정도로 올리자니 이번에는 대승과 소승불교유대교그리스도교 수준으로 벌어져버리고, 대승경전들은 소승불교를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모조리 위경이 된다.
  2. 불교의 가르침이 신분과 근기의 높낮이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이를 위한 것임을 강조하던 이전 경전들을 생각해 보면, 법화경의 가르침은 굉장히 이질적임을 알 수 있다.
  3. 지금의 월출산으로 비정.
  4. 대승불교 경전은 석가모니가 실제로 한 말이 아니라는 주장.
  5. 단적으로 니치렌의 대표적 4대 주장이 염불 외우면 무간지옥 간다, 선수행을 하는 사람은 하늘의 마귀다, 진언 외우면 나라가 망한다, 계율은 나라를 도적질하는 것이다였다.
  6. 외세의 침공=몽골의 공격
  7. 말법은 초기 경전에서는 보이지 않는 주장으로, '깔리유가' 등 힌두교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8. 이런 성향이 가장 강한 것이 창가학회를 배출한 일련정종이다. 사실 일련정종이 어렵지 않은 것이 니치렌을 말법시대의 부처로 보고 신성화한다면, 내부 지도자 역시 현대의 니치렌으로 대입해서 역시 말법시대의 부처로 동치시켜 버릴 수 있다.
  9. 이 사건의 모토가 한 사람당 한명 죽이기 였다.
  10. 다만 쿠온지는 후지산이 아닌 미노부산(身延山)이라는 곳에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