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디아누스 1세

로마의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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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rdianus I

1 개요

고르디아누스 1세(라틴어: Gordianus I, 159년 ~ 238년 4월 12일)는 군인 황제 시대를 연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다음의 로마 제국의 황제이다. 공동황제는 아들이자 이름도 비슷한 고르디아누스 2세이며, 재위기간은 238년 3월 22일부터 4월 12일까지다.

2 가문

본명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셈프로니아누스 로마누스 아프리카누스(Marcus Antonius Gordianus Sempronianus Romanus). 집안 자체가 일단 명문이다. 그의 가문은 공화정 시대부터 400년 동안 원로원 의석을 가진 집안이었고, 제정시대에 들어서 별로 남지 않은 명문집안이기도 했다. 더해서 외가 역시 원로원 의석을 오랜 기간동안 보유한 명문 귀족가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외가를 통해 트라야누스의 피를 이어받았다.

고르디아누스 1세의 아내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의 아내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증손녀였고,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는 부인과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는데, 이중 딸 안토니아 고르디아나(Antonia Gordiana)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측근이자 히스파니아(오늘날의 스페인) 태생의 발부스를 시조로 하는 로마 명문 원로원 가문 출신의 원로원 의원과 결혼했다[1].

고르디아누스는 막강한 집안 배경 못지 않게 원로원 내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로마 7언덕 중 하나인 카일리우스 언덕(지금의 첼리오)에 위치한 유서깊은 저택[2]은 그의 소유였다. 거기에다 그는 오늘날 보르가타 고르디아니라고 불리는 별장의 소유주였다. 로마 도심에서 5km 떨어진 교외에 위치한 이 별장 저택은 고르디아누스의 재력을 단번에 설명해주던 곳이었다. 비싼 운송료가 드는, 원산지가 다른 최고급 대리석 원기둥 200개[3]가 원형으로 회랑을 이루어 둘러진 저택이었는데, 기둥이 대저택의 안뜰을 한바퀴 휘감은 구조였다.

3 황제 즉위 전까지의 삶

엄청난 부자에 두 명의 황제의 피를 이어받은 원로원 계급의 귀족 가문태생. 거기에다 그는 원로원 의원 중 대표적인 상류층이었다. 이런 까닭에 로마인들이 "명예로운 코스"라고 불리는 엘리트코스는 죄다 지냈다. 회계감사관을 시작으로, 법무관, 집정관을 역임했고 집정관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속주 총독에도 파견되었다. 하지만 그는 3세기 무렵, 로마 원로원 가문태생의 특징을 또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군대 경험이 없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는 군대 경험도 없었고, 전방에서 장교로 근무한 경험도 없었다.

본인 성향 자체가 온건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가졌고, 문학을 좋아하고 그리스 문학에 정통한 교양인이었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는 오현제 시대안토니누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의 태평성대를 다룬 20권의 서사시를 지어 책으로 만들었고, 6만 권의 장서를 소장한 도서관을 지어 이를 로마시민들에게 공립도서관처럼 개방하였다[4]. 또한 문학가, 시인, 예술가 등을 후원하는 것에도 열성적이어서, 그리스 작가인 플라비우스 필로스트라토스는〈소피스트들의 생애〉를 그에게 바치기도 했다.

4 황제

전형적인 로마 최상류층출신이었던, 고령의 고르디아누스는 전직 집정관 신분으로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하는 아프리카 속주총독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아프리카 프로콘술(속주총독)로 일하던 238년초, 아프리카의 부유한 젊은 지주들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게 된다. 동시에 이들은 막시마누스 트라쿠스가 보낸 자들을 죽여 버렸다.

자신이 부임해있던 속주에서 황제로 추대된 고르디아누스 1세가 쓴 편지가 그해 집정관인 율리우스 실라누스의 낭독으로 소집을 받고 회의장에 모인 동료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낭독되었다. 그리고 낭독이 끝나자마자 원로원은 그와 그의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를 공동황제로 추대하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국가의 적(공적)'으로 선포한 뒤, 다음 날 아침에 원로원 통고문으로 제국 각지에 이를 알린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본래 그가 다스리던 속주는 1천 명의 군단병이 경비병 형식으로 주둔하는 곳이었고, 바로 옆에 있는 누미디아 속주 총독은 막시미누스 사람이었다. 그런데 통고문이 알려지자 누미디아 총독 카펠리아누스는 즉시 이들 부자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1천 명을 이끌고 전투를 벌인 고르디아누스 2세는 전사하였고, 아들의 전사 소식을 전해들은 고르디아누스 1세는 79세의 나이에 칼을 빼들어 스스로 자결했다. 이는 한 달 남짓이었다.
  1.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의 아들이 바로 고르디아누스 3세이다.
  2.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지은 폼페이우스 저택. 폼페이우스가 지은 저택인만큼 가격도 비싸고 아름다움과 호사로움은 로마 내에서 아주 유명했다.
  3. 이 기둥은 로마시대 재산의 척도 중 하나였다. 특히 그는 이탈리아산의 하얀 대리석이 아닌 모두 수입산을 가지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흰색+초록색의 그리스산, 붉은색의 이집트산, 노란색의 누미디아산, 흰색과 회색 반점의 소아시아산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4. 당시 책인 파피루스 두루마기는 아주 고가였다. 특히 책은 필사본이었기에 더욱 더 비쌌다.